역대 독일 총리 | |||||||
14대 | ← | 15대 | → | 16대 | |||
요제프 비르트 | ← | 빌헬름 쿠노 | →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풀네임 | Wilhelm Carl Josef Cuno (빌헬름 카를 요제프 쿠노) |
출신 정당 | 무소속 |
생몰년 | 1876년 7월 2일 ~ 1933년 1월 3일 |
재임기간 | 1922년 11월 22일 ~ 1923년 8월 12일 |
1 개요
독일의 기업가이자,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총리를 지냈다.
2 생애
1876년 오늘날의 튀링겐 지방에서 출생하여 법학을 전공한 이후, 라이히스탁 법무위원회(Regierungsrat)에서 근무한다. 1차대전 시기에는 독일군 내에서 식량 및 자원을 보급하는 업무를 맡다가 1917년에는 독일 내 굴지의 해운회사인 함부르크-미국 해운회사(HAPAG)의 경영진으로 자리를 옮긴다. 종전 후에는 HAPAG의 회장으로 승진[1]했으며, 군에 대한 식량 보급을 담당하던 시기에 보여준 능력을 정계에서 인정받아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공식적이지만 실세를 지닌 외교관으로 활동한다. 정계에서는 계속해서 그를 외교부 혹은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시킬 것을 원했지만 이러한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하다가, 1922년 요제프 비르트 내각이 붕괴된 이후에야 내각을 구성해달라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총리직에 오른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부르주아 출신인만큼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보수쪽이어서 그에게 총리직을 맡긴 사민당 출신의 에베르트 대통령과는 성향이 정반대였다는 점이다. 자신과 성향이 완전히 대척됨에도 에베르트 대통령이 그를 총리로 지명한 데에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기업인 출신인만큼 어려움에 빠진 독일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며[2], 다른 하나는 '파리 강화 회담 당시 비공식 독일 대표로 참여할 만큼 외교적인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기에 배상금 문제를 독일에게 유리하게 협상할 수 있을 것이다.'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감은 곧 실망으로 바뀌고 만다. 쿠노는 연합국에게 배상금 납부기한을 연장시킬 것을 요청해서, 끔찍한 인플레이션을 겪고있던 독일 마르크 화의 가치를 안정시켜보려고 했지만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철저한 비협조 속에 그대로 무산된다. 여기에 당시 프랑스 수상이었던 레몽 푸앵카레가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독일의 루르 지방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문제는 훨씬 심각해졌다. 독일 전역이 프랑스에 대한 반감과, 무력하게 자국 영토가 점령당하는 것을 바라만 본 쿠노 내각에 대한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던 것. 쿠노 내각은 이에 루르 지역 주민들에게 총파업을 명령하며 소극적 저항을 했지만, 프랑스가 자국의 노동자를 동원해서 이 지역의 공장을 가동시켰던데다가, 총파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의 생계를 정부가 보조해야줘야했기에 마르크 화를 마구마구 찍어내서 안그래도 심했던 인플레이션이 더 가중되는 악순환만 이어졌을 뿐이다. 결국 1923년 8월 사민당이 주도하여 내각불신임안이 결의됐고, 264일만에 쿠노 내각은 붕괴되고 만다.
총리직 사임 이후 HAPAG로 돌아간 쿠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히틀러 수상직 임명에 반대하다가 1933년 1월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