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폰 힌덴부르크

역대 독일 대통령
1대2대제 3제국
프리드리히 에베르트파울 폰 힌덴부르크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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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Paul Ludwig von Beneckendorf und von Hindenburg(파울 루트비히 폰 베네켄도르프 운트 폰 힌덴부르크)
출신 정당무소속
생몰년1847년 10월 2일 - 1934년 8월 2일(만 86세 10개월)
재임기간1925년 5월 12일 ~ 1934년 8월 2일 (만 9년 2개월 21일)

1 개요

독일의 군인, 정치인. 60대에 퇴역할 때까지 두드러진 전공은 없는 인물이었지만 대전쟁에 현역으로 복귀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발돋움 했고, 이 인기를 이용해 전쟁 후 성립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2대, 3대 대통령을 지내면서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는 실책을 범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집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육군참모총장[1](1916~1919),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대통령(1925~1934)를 지냈다. 히틀러와의 인연 때문에 나치 독일 라이히스마르크(당시 독일 통화)의 동전에도 얼굴이 새겨져있던 인물이었다.

2 1차세계대전까지의 생애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보통 20세기의 인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 근본은 19세기의 인물이다. 1847년 포젠(오늘날 폴란드 포즈나니)에서 태어나, 젊을 적인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과 1870년보불전쟁에 참전하였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있었던 빌헬름 1세독일 제2제국 황제 즉위식에도 참여했다. 둔한 곰 같은 외모와 달리 신경질적이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눈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군사분야를 제외한 다른 분야(정치 포함)엔 지적인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이후 연로한 나이로 퇴역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시아군이 동부전선에 밀려들자 66세의 나이로 현역에 복귀, 절대적인 열세였던 탄넨베르크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육군원수로 진급,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개명(改名)한 도시도 있었을 정도[2].

탄넨베르크 전투의 가장 큰 공헌자들은 호프만 중령이 낸 기획안을 참모장이던 루덴도르프가 자신의 작전안을 버리고 과감하게 채용한 것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가 아예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었다. 작전중 렌넨캄프의 이동에 대해 보고받고 루덴도르프가 공포에 질려 작전변경을 고려하고 있을 때, 렌넨캄프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여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해 불안감을 덜어주고 중심을 잡아주는 일은 했다. 이에 대해 바바라 터크먼은 힌덴부르크가 바위처럼 장중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루덴도르프의 불안감을 덜어주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또 자기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장군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루덴도르프가 작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도록 자리를 비켜준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전부터 명성이 높았던 힌덴부르크는 이 두 장교보다 더욱 범 국가적으로 알려졌고, 영웅이 필요했던 전시에 국가 영웅으로 추대되고 이후 1916년엔 독일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서 종전까지 재임했다. 이때도 참모차장이던 루덴도르프가 실질적으로 전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다양한 활동이 있었다. 1916년 8월 29일 힌덴부르크가 새로운 참모총장, 루덴도르프가 참모차장이 되어 반독재 체제를 출범할 때, 그는 전시 사회주의에 기초한 힌덴부르크 프로그램을 선언하였다. 이를 통해서 독일 전체의 경제적 산업 전반을 향상 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독일의 전쟁 조직화가 절정에 달했다. 힌덴베르크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은 것은 탄넨베르크 전투와 같은 전투적인 측면도 있지만 참모총장으로서 독일을 위해 노력했다고 보였기에, 전후 대통령에 당선될 인기를 끌었다.

결국 독일은 혁명이 일어나 전쟁에 졌고, 배후중상설이란 도시전설 덕에 위신은 그대로 유지한 채 사임한다. 그러나 실제로 민간정부에게 전쟁 포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은 힌덴부르크와 그의 부하 루덴도르프였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 거부 움직임에도 연합국의 군사적 제재를 감당할수 없다고 통보한 것도 힌덴부르크였다. 실제로 그는 군인으로의 자존심 때문에 부관 그뢰너 장군에게 대신 통보하게 한다.

3 전후 대통령 당선

전후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1925년 4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임기 7년)이 되었다. 결과는 박빙이었다. 2차 투표 결과 힌덴부르크(무소속) 48.3% vs 빌헬름 마르크스(카톨릭 중앙당) 45.3%. 후보가 세명이라서 과반 득표는 없이 당선 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전 대통령(임기를 못 마치고 사망)은 바이마르 제헌의회에서 선출된 만큼, 이 선거는 바이마르 공화국 최초의 대선이었다. 1차 투표에서 우파 독일 인민당과 국가인민당의 지지를 받은 카를 자레스 부총리(1차 38.8% 득표)가 2차 투표에서 힌덴부르크를 지지하며 사퇴했다. 그러니까 1차 후보와 2차 후보가 바뀔 수 있었다는 소리다. 여기에 바이에른 인민당의 3.7%가 덧붙여졌다. 이렇게 되자 왕당파를 맞서기 위해 29%를 득표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오토 브라운과 5.8%를 득표한 독일 민주당이 중도 가톨릭 중앙당의 전 총리 빌헬름 마르크스(14.5%)에게 표를 몰아주기로 한 것. 여기까지만 치면 우파 42% 대 좌파 + 중도 47.2%로 힌덴부르크가 밀리게 되는데, 힌덴부르크의 인기가 좋아 사민당, 중앙당에서도 표가 꽤 빠져나갔다. 또한 공산당의 에른스트 텔만이 계속 독자후보로 남으며 7%의 득표를 받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엔 몰랐겠지만 이 선거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의 능력은 형편 없었다. 근본적으로 그는 "융커" 출신인데다가[3] 제정 시절 장군으로서 민주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정치력, 리더십이 결여되었다. 이는 1929년 이후 정치적 혼란기에 악재로 작용하며 잦은 총선과 소수 여당의 존립이라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이어졌다. 애초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도 처음엔 거절했다가 선거로 뽑는 군주(대통령)의 자리를 황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황제의 충신 힌덴부르크가 유지해줘야 한다는 설득 때문이었다. 해수욕장 파라솔 의자를 맡는 것도 아니고 이뭐병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초기 5년에는 고령과 귀찮음으로 인한 뒷방노인 역할을 충실히 시행했고 소수 측근에 의지하는 경향이 짙었다. 측근이래봐야 예전 군 시절 부하, 아들 오스카르 폰 힌덴부르크, 비서실장 마이스너[4]정도가 전부였다.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은 의회체제라 평시에는 대통령이 할일은 국가 수반으로서 의전 셔틀이나 형식적 군통수권이 거의 전부였다.

3.1 '황제 대통령'

그러나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까지 덩달아 심각하게 맛이 가면서 사회민주당(SPD) 연립내각이 무너졌고, 힌덴부르크는 뒷방 늙은이에서 벗어났다. 당시 총리 헤르만 뮐러는 어떻게 해서든 내각을 유지하려고 대통령에게 대통령 내각[5] 총리 임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뮐러는 육군원수 출신 대통령한테 군비 삭감을 주장해서 단단히 찍혀있었다. 결국 힌덴부르크는 좌파 사민당 총리의 요구는 쿨하게 쌩까고 대신 중도우파 가톨릭 중앙당 하인리히 브뤼닝을 임명.

이때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한다. 이는 사실 바이마르 헌법 탓이다. 평소 의회가 제대로 작동할땐 대통령이 나서서 설칠만한 근거가 없지만 의회 내에서 고만고만한 의석수로 분산되고 노선 차이로 좀처럼 연립이 구성안되게 되면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이 가동되는 제도 때문이었다. 헌법상 대통령 권한으로는

  • 군 통수권
  • 53조 - 제국 총리 임명권, 내각 장관 임명권 (내각구성원은 총리가 추천하나 임명권은 대통령이 가진다)
  • 25조 - 제국 의회 해산권 (단, 60일이내 재선거를 해야 한다)
  • 48조 - 대통령 긴급 명령권 (의회 동의 없이 긴급명령으로 의회제정 법안을 대신하여 통치)
단, 의회는 60일내 과반수 의결로 대통령 명령을 무효화 할 수 있다.
  • 48조 2항 - 국가 비상시 대통령 포고령 (헌법상 시민권을 제한 가능)

이러한 권한을 바탕으로 의회제 국가에서 내각이 구성되지 않을 경우 무제한의 권력 행사가 가능했다. 말 그대로 선거로 뽑는 (어느 정도 권력이 제한 된) 카이저였던 것이다. (실제로 힌덴베르크는 1930년부터는 총리 임명권과 긴급명령권으로 통치하다가, 1932년의 두번의 의회해산을 거쳤으며, 1933년 히틀러의 총리를 용인하면서 수권법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고했다.)

1930년 9월 총선에서 공화국 체제를 뒤엎는다고 공공연히 선동하는 나치당과 공산당이 원내 2,3당으로 부상했다. 브뤼닝이 속한 중앙당은 원내 4당에 불과했고, 나머지 중도성향 정당들도 실업구제와 경제정책을 두고 병림픽을 벌였기 때문에 내각에서 내놓은 법안은 번번히 부결당하고 긴급명령 통치가 이어졌다. 그나마 원내 1당이던 사민당은 브뤼닝 내각이 무너지면 더 보수적인 내각이 들어설까봐 내각불신임만 면한 내각이 2년간 유지된다.

4 재선 성공

이 와중에 1932년 봄, 7년 임기의 대통령 선거가 다시 열렸다. 3월에 열린 1차 투표에서는 힌덴부르크가 49.6%로 과반득표에 실패했고, 나치당의 히틀러 30.1%, 공산당 에른스트 텔만은 13.2%로 선전을 거두었다. 4월 초 2차 투표에서 53%로 득표로 당선됐으나, 36.8%를 득표한 히틀러는 사실상 독일의 넘버 투 (실질적으로는 넘버 원) 정치인이 되었다. 이는 괴벨스의 아이디어였다.

여기서 중요한건 인기가 바닥을 치긴 했지만 원내 1당인 사회민주당에서 후보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민당은 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자의 집권을 막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군주제 지지자이며 황제의 충신임을 자처하고 1차대전때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80 먹은 육군원수에게 공화국 지지 세력의 표를 몰아주었던 것. 한편 힌덴부르크는 원래 은퇴하고 싶어서 불출마를 검토했지만 주위에 등쌀에 밀려 출마한데다가 선거운동도 귀찮아서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난 중도 좌파의 연립 후보가 아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브뤼닝 내각은 시대착오적인 긴축 정책으로 경제침체가 심화되고 인기를 잃으면서 '기아(飢餓)내각' '기아 총리' 불릴 정도로 인기가 떨어졌고, 좌파 사민당과 연계되는 모습을 보여 대통령의 신임도 잃었다. 결국 브뤼닝은 1932년 경질 당하고, 힌덴부르크는 국방부 내 '정치군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추천으로 중앙당의 프란츠 폰 파펜을 대통령 내각의 총리로 임명한다.

5 공화국의 몰락

5.1 파펜 총리

총리직에 임명된 프란츠 폰 파펜은 그때까지 듣보잡으로 무식하고 하찮은 인물로, 애초에 총리가 되기 전에도 "뭐 이딴 모자르는걸 총리로 추천하냐"는 물음에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 그는 머리가 필요 없어! 모자니깐! '이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파펜을 저평가(?)한 것이 슐라이허의 실수로 드러나는데, 파펜은 힌덴부르크에게 아부떨고 비위맞추는데 어느 누구보다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것이었다. 파펜은 자기가 속한 당이던 가톨릭 중앙당에 알리지도 않고 총리를 수락했기 때문에 국방부의 슐라이허와 죽이 맞아 전임 브뤼닝을 중상모략했다고 의심받았고, 결국 현직 총리일때 자기가 속한 당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파펜은 힌덴부르크에 적극 기댔으며, 원내 제2당이었던 나치당에 손을 벌려볼 생각을 한다. 히틀러는 여기서 유감없이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는데 두 가지 조건(돌격대 활동금지 해제, 의회해산 조기총선)을 내걸고 협조하겠다고 응답한다.

파펜은 힌덴부르크의 동의를 받아서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 들인다. 우선 공산당 정치 깡패 '붉은 전사 동맹'과 나치당 '돌격대(SA)'의 유혈 충돌을 구실로 대통령 비상대권을 발동해 프로이센 정부는 치안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 구실로 주정부를 해산하고 중앙정부 직속으로 두는 병크를 터트렸다.[6] 프로이센 주정부는 사회민주당 주도의 연정이 정권을 잡았던, 한창 막장 테크 타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최후의 보루였는데, 이것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율 (제국의회 608석중 230석 차지)로 원내 제1당에 등극하고 공산당까지 약진하면서 공화국 중도파는 완전 몰락한다. 나치당 공산당을 합치면 원내 과반수가 가뿐히 넘었다.[7](공산당 89석, 유일한 공화국 수호세력인 사민당 133석).

나치당의 약진에 히틀러는 민주주의 다수결 원칙 몰라?라고 하면서 총리직을 요구했고, 파펜은 부총리를 제안하면서 달래보려하지만 히틀러가 거절한다. 뒷방 노인이던 힌덴부르크는 오랜만에 등장하여 히틀러와 면담을 통해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했다.

힌덴부르크 역시 히틀러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에게 총리직을 줄 생각 역시 없었다. 거기다가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에게 도전한 것에 대한 반감까지 있었다.[8] 힌덴부르크는 총리직을 요구하는 히틀러에게 사흘 안에 어디 의회 과반수를 구성해봐라 라고 어디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비꼬았다. 물론 나치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할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9]

하지만 파펜 내각 역시 버틸 수가 없었다. 경제위기에 프로이센 주정부 폐쇄와 친재벌정책으로 인한 좌파(공산당)의 반발, 여기에 더해 히틀러의 복수(?)까지 합쳐지면서 개원하자마자 내각불신임 안에 직면했던 것. 한편 힌덴부르크는 개원하자마자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을 발동, 재선거도 안하고 대통령 내각으로 파펜 내각을 유지하려 했다. (사실 헌법 위반이다. 헌법에 대한 맹세드립으로 황제를 못 모셔(?)오는 힌덴부르크가 얼마나 파펜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제국의회 의장 괴링이 선수를 쳐 내각불신임안을 상정하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파펜 내각은 512명 찬성 42명 반대로 쫓겨나는 불신임을 당하게 된다. 이에 재선거가 실시되고 득표율과 의석이 좀 줄긴했지만 또 나치당이 원내 1당을 차지한다.[10]

힌덴부르크는 사임하고 나가는 파펜을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리고[11] 자신의 사진이 담긴 액자에 평소엔 귀찮아서 쓰지도 않는 친필편지를 써서 배웅해줬다고 한다. 어쨌든 새로운 총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총리 임명시 또 내각 불신임을 막을 수 없는 결과가 나오자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와 다시 협상을 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총리로 임명해달라는 주장을 반복했고, 그것도 대통령 비상대권을 쓸 수 있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로 자신을 만들어주기를 요구했다. 힌덴부르크와 참모들의 반응은 이뭐병... 결국 다시 결렬된다. 이에 대통령은 히틀러에게 공개적으로 보낸 편지에서 의회내각과 대통령 내각의 차이를 분명히 한 뒤,

독일 국민에게 몇 번이나 자신의 배타성을 강조한 당의 지도자이며, 대통령 개인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치 경제적 조치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사람에게 대통령의 권한을 주겠다고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 당신이 이끄는 대통령 내각이 결국은 독일 국민들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증폭시킬 뿐인 일당 독재가 되고 말 것 이라는 우려를 하지 않을수 없다.

대통령은 자신이 한 맹세나 양심에 비추어 이 생각을 도저히 바꿀 수 없다.

이런 개념찬 글을 남긴다. 당연히 민주진영에서 반응은 제2의 탄넨베르크 전투라는 둥, 민주주의 공화제의 수호자(?) 군주제 황제빠 보수꼴통이라며 욕할땐 언제고 힌덴부르느님 무한찬양이었다. 문제는 두 달 후 결과는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5.2 슐라이허, 그리고 공화국의 멸망

힌덴부르크는 일단총리로 정치군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임명했다.[12][13] 슐라이허는 나치에 대해선 이전 브뤼닝 총리와는 달리 돌격대 금지령에 반대했고, 나치를 재무장에 필요한 인적자원[14]으로 긍정적으로 보던 양반이었다!

의회는 개원했지만, 슐라이허도 나치당 협조 없이는 내각 불신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슐라이어는 히틀러를 설득하다가 안되니 나치당 2인자였던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구워 삶아볼까 했는데, 발각되어서 슈트라서만 날라간다.[15]

이 와중에 파펜은 자신이 짤린 배후에 슐라이허가 있다고 생각하고[16] 히틀러와 접촉을 했는데, 슐라이허는 자기가 뒷공작을 해놓고도 파펜이 순진하게 자기 대신 히틀러를 새로운 내각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는줄 알았다.(...)

슐라이허의 그 짧은 임기중에도 동부 융커들이 몰려와서 힌덴부르크한테 총리가 농업 보조금 깎아서 못살겠다고 고자질 크리에 의회에선 대통령 측근들 농업보조금 스캔들이 터졌고[17] 힌덴부르크의 마음은 점점 히틀러에 기울었다. 이미 히틀러에 넘어간 대통령 비서실장 마이스너와 아들 오스카르까지 설득하는데다가[18] 빌헬름 2세 장자 빌헬름 황태자까지 이런 인재를 왜 안쓰냐라고 히틀러를 옹호했다. 군부에서 쿠데타 헛소문에 힌덴부르크가 격노[19]까지 하자 이미 대세는 결정났다.

힌덴베르크는 1월 26일까지 슐라이허 라인의 육군사령관 폰 함머슈타인-에크보르트 장군에게는 "여러분은 내가 보헤미안 상병을 총리로 임명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라고 낚시질을 했지만 이미 슐라이허를 짜르는 것은 1월 중순부터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다만 파펜을 총리로 하려고 하는데 파펜이 자꾸 사양했고, 아들과 마이스너가 계속해서 설득하던 중이었을 뿐이다. 결국엔 1933년 1월 28일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의 권고에 의해 사임한다. 사퇴 전날 이렇게 통보했다.

"자네도 군인이니 상관의 권고가 무슨 뜻인지 알겠지? 자네가 사퇴하길 권고하네!"

이때 마지막으로 사임원을 제출하러 갔을때 힌덴베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무덤에 한 발을 디디고 있다. 후에 천국에 가서도 이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러자 슐라이허는 "각하, 저는 각하께서 이런 배신을 저지르시고 나서 과연 천국에 가시게 될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사실 믿었던 군부도 슐라이허 편만은 아니었다. 히틀러가 집권하긴 바라는 나치빠 군인들도 그당시엔 상당했다고. 슐라이허의 후임 국방부 장관[20]이었던 블롬베르크는 1월초에 힌덴부르크의 만남에서 슐라이허 내각이 나치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는 것 때문에 군부가 불만이라고 터놓을 정도였다. 히틀러도 국방부 내 많이 침투한 나치들을 통해서 슐라이허가 어떻게 움직이는걸 빤히 알고 있었다.

물론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도 이 인간이 너무 위험하다 생각했는지 비상대권을 주지 않는 의회내각 총리로 임명하려고 했다. 히틀러와 파펜도 원내 과반수를 위해 연립정권을 수립하려 노력하는 척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힌덴베르크는 나중엔 원내 연립내각 구성에서 연정에 참여하기로 한 가톨릭 중앙당이 무리한 요구로 결국 참여하지 않았다고 보고해도[21] 의회해산에 질리고 귀찮아서 였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고. 죽을날이 머지 않아서 그렇다 어차피 1/3은 확보한 이상 내각 해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3월 선거로 나치와 후겐베르크(국가국민당), 파펜 연립내각은 과반수를 확보하고 수권법을 통과 시킨다. 이쯤이 되면 이미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에 만족하고 있었고 파펜까지 버려지는 상황이 된다.(...)

6 말년

여든 일곱살의 노인 대통령의 마지막 8개월은 그야말로 히틀러의 팬생활이었다.(...) 1월 30일 총리취임 기념식에서 돌격대의 행진을 보면서 흐뭇해(?) 했다고 한다. 돌격대가 풍악을 울리는 소리에 지팡이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흥얼거렸고 평소 군복 코스프레 주정뱅이 난봉꾼 집단으로 평가했던 돌격대의 행진을 보면서 우리가 러시아에서 포로를 저렇게 많이 잡았었나?하고 조크를 했다고...[22]

히틀러가 취임하고 한달 뒤 1933년 2월에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히틀러가 공산당 퇴치용이라며 비상대권을 요구하자 대통령 권한을 발동, 기본권 제한에 동의했다. 이어진 관권 선거를 용인하고 수권법 이후 독재도 반가워 했다. 애초에 노쇠한 힌덴베르크는 바로 전 해인 1932년 벌어진 선거에 지쳐있었다. 3월 대통령 1차 투표, 한달 뒤 2차 투표, 5월 프로이센주 총선, 의회 해산 후 7월 전국 총선, 또 의회 해산후 11월 총선으로 복잡한 정국 속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더 이상 선거를 치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뻐했던 것.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기존 정치인들과 달리 화끈하게 말많은 다른 좌파 사민당과 공산당, 시끄러운 우파 자유주의자까지 일망 타진하고 재무장을 추진한다는 점도 육군원수 대통령 마음에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국은 안정되었고, 무엇보다 자기 소유의 동프로이센 노이데크[23] 농장을 자주 갈 수 있던 것에 만족했다고. 다만 이따금 히틀러와 나치가 유대인 1차대전 참전용사까지 박해하는 것은 태클을 걸었다.


<원수와 상병의 악수> 사진을 보며 알겠지만 196cm의 초장신이었다. (히틀러는 173cm)

괴벨스가 기획한 1933년 3월 21일 '포츠담의 날'[24] 사진이다. 독일 국민들에겐 구시대와 신세대가 타협하고 화합해서 14년 동안의 혼란을 끝내고 새 시대로 나가는 희망을 상징하는 사진이었다. 사진과 우표로 인쇄되어 널리 퍼지고 나치 정권의 홍보용으로 많이 쓰였다.

이후 히틀러 총리와 함께 정국을 운영을 흐뭇하게 방관했다. 6월 30일 돌격대를 숙청한 장검의 밤 사건때 슐라이허 장군까지 참살됐는데도 "단호한 행동과 용감한 개인적 개입으로 반역의 씨를 미연에 제거하고 독일 국민을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구한다"고 감사를 표하며 '대역죄'를 진압한 것을 축복했다.(...)

6.1 죽음

1934년 8월 2일에 동프로이센의 노이데크에 있는 자택에서 죽었다. 죽기 하루 전 전에 자기 집을 방문한 히틀러를 보고는 비몽사몽간에 빌헬름 2세가 온 줄 알고 황제 폐하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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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직후의 힌덴부르크. 출처

본래 힌덴부르크는 독일 군주제를 복귀시키고 싶어했고 자기의 국가원수 자리를 프로이센 왕족이 잇기를 바랬으나, 대통령 취임 시 바이마르 헌법을 지키겠다고 선서했기 때문에 실제 그것을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말년 노망설이 있는데 카더라와 달리 1934년 노환으로 죽을 때까지 제정신을 유지했다고 한다. 최소한 히틀러한테 정권을 넘길때 까진 정신 건강은 멀쩡했다.[26]

유언장은 죽기 4달전인 4월 부터 작성하여 독일 국민에게 한 통, 수상 히틀러에게 한 통을 썼는데 히틀러가 파기했다. 모든 증언을 신뢰하긴 어렵지만 유일한 증인인 파펜의 증언으론,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치는 것에 반대하며 입헌군주제를 채용하길 바랐다고 한다. 또 히틀러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치정권에 대해서 업적의 일부분을 인정하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 이후 잘 알려진 대로 히틀러는 유언을 빙자해 대통령직을 겸직, 총통이 되었다,

아들 오스카르 폰 힌덴부르크는 앞서 히틀러를 보헤미아 상병이라고 부르며 꺼림칙해하던 아버지를 설득해서 총리가 되게 하는 데 관여했다. 부친이 사망한 이후 총통 겸직 국민투표에 대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독일인들이 찬성 투표 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빠돌이로 변해서는 아니고 원래 아버지만도 못한 능력을 가진 주제에 대통령 아들로 많은걸 누렸던지라 뒤가 허전하던 차에, 히틀러가 협조할 경우 여러 혜택을 준다고 속닥속닥한 것을 믿어서 이기도 했다.) 물론 국민투표가 끝나고나선 무시당했고, 나치정권 하에서도 동프로이센 포로수용소 소장에 그치며 존재감은 없었다. 이후 은퇴하여 장원에서 은퇴생활이나 즐기다가 소련군이 침공하자 피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출석해야했다.

힌덴베르크는 자신의 농장인 노이데크에 묻히길 원했던 자신의 의사와 달리 정치적 선전을 위해 탄넨베르크 전적지 기념관에 묻혔다가, 2차대전 말기 소련에 의해 파헤쳐질걸 우려한 나치가 유골을 파내는 수난을 겪었다.

7 평가

성품 자체는 온화하고 너그러웠으며, 심지어 일부 도서에서도 그의 긍정적인 마인드나 온화함을 본받자는 이야기가 덕담처럼 나오기도 한다(!).

현대 독일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강할 수 밖에 없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는데 끝까지 반대한 인물이지만 결과적으론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편을 들어줬으니 큰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현재 그의 무덤에는 변변한 조명 시설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애초에 1925년에 대통령에 출마 할때는 팔순에 접어든 노인이었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때도 은퇴 상태에서 예비군에서 복귀한 66세 노인이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사람을 공화국 대통령으로 뽑은 것 자체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행이었다. 그럼 어쩌나 인물이 없는데 결국 말년 삽질로 90 가까운 인생업적을 다말아 먹었다고 평가받는다. 따지고보면 그냥 업적도 거품 그나마 일찍 죽어서 아무 것도 몰랐다는게 개인적으로는 다행일 것이다.

히틀러, 악의 탄생이란 영화에서 명배우 피터 오툴이 힌덴부르크 역을 맡았다.
  1. 제국시절 육군 최고사령관은 황제이다.
  2. 상부 슐레지엔에 있는 자브제(Zabrze). 1915년 빌헬름 2세의 칙명으로 Hindenburg in Oberschlesien(약칭 Hindenburg O.S.)으로 바뀌었다. 1945년 이후에는 폴란드의 영토로 넘어가 다시 자브제로 불린다.
  3. 프로이센 장교단 주류란 뜻이다. 힌덴부르크가 본래 융커의 어원처럼 지주가 된 건 군에서 은퇴하고 나서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재임중 추종자들이 선물로 농장을 사준 뒤였다.
  4. 사회민주당 출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 시절부터 비서실장이었다. 나치등장 후 듣보잡이 되버렸지만 히틀러 총리 임명에 큰 역할을 한다.
  5. 의회에서 내각 선출이 안될 경우 헌법상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임명한 내각.
  6. 독일은 제2제국 또는 그 이전부터의 전통을 중시해서 지방자치(현재도 연방국가)이고 경찰권은 중앙정부 내무부가 아닌 지방정부에 속한다. 또한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프로이센 주는 18개 주 가운데 1주에 불과했지만 실상은 수도 베를린을 포함해 북독일 대부분과 독일 전체 인구, 면적의 60%를 차지했다. 물론 애초에 이런 거대한 지방정부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없는건 아니었지만.
  7. 나치당과 공산당은 공화국 체제를 끝장낸다는데는 목표가 일단 같았기 때문에 정권을 잡기전 어떤 내각이 들어서건 내각불신임을 할 태세 였다. 나치당은 1당으로 합법적으로 정권 획득이 가능해졌으니 총리직 내놓으라는 속셈이었고, 공산당은 내각붕괴시 몇달간 계속해서 정치적인 공백이 이어지면 가뜩이나 대공황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체제전복이 용이하다고 판단했다.
  8. 1925년 투표보다 여유 있게 이기긴 했지만 '보헤미안 상병'(히틀러를 지칭. 대충 듣보잡 양아치 정도의 뜻) 주제에 감히 주제넘게 맞먹으려 든 탓도 있고 무엇보다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당 선전에서 힌덴부르크를 유대인의 하수인이라며 인신공격을 심하게 한게 큰 원인이었다.
  9. 히틀러의 요구는 '전부 아니면 전무'였고 괴벨스의 표현대로 연정으로 바이마르 체제에 타협하는 더러운 협잡질은 거부했다. 당장 나치당 내부에서 연정으로라도 권력을 잡자던 그레고어 슈트라서도 숙청되었다.
  10. 584석중 나치당 196 공산당 100석으로 또 공화국 반대세력이 과반을 넘겼다.
  11. 후에 파펜이 회상록에서 '맹세코 힌덴부르크의 눈물을 봤다'고 주장했다.
  12. 슐라이허는 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총리란 이미지로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민주투사(?) 비운의 주인공(?)이란 왜곡된 이미지가 있는데 애초에 파펜을 추천해서 원격 조종하려고 했고 그 이전에도 민간인들이 감히 범접 못하는 군부에서 정치 뒷공작이나 하던 정치군인 똥별 출신이다.
  13. 국방부 정무국이라는 부서가 있는데 한국에선 마땅히 매치되는 부서가 없다.(굳이 찾자면 군사정권시절 보안사(기무사의 전신)인데 당시 법으로도 군내 사찰만 가능하지 당시 독일처럼 대놓고 정치에 관여한다고 다닌건 아니다.) 국방부에서 아예 대놓고 정치부서를 만들어서 군수 재벌들과 접촉하고 무기나 외국의 원재료를 사오는걸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며 정부에서 군에 간섭하는 정치인들을 사찰하거나 보이콧하는 막장부서다. 물론 뒷조사나 공작은 필수.
  14. 다른 우익 무장집단과 달리 돌격대의 연령대가 낮았기 때문에 군비제한이 걸린 바이마르 공화국에선 예비군으로 활용하고 나중에 군비제한이 풀릴경우 급속히 군대를 확장할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15.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히틀러 허락없이 정권참여 협상을 하다가 총통께 굴복하고 당직 사퇴후 자숙 하는 의미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다... 그러다 1934년 장검의 밤 때 살해된다. 슐라이허도 부부가 같이 살해당함.
  16. 슐라이허가 파펜 경질을 건의했던건 사실이다. 힌덴부르크에게 의회 불신임안 통과된 파펜을 고집해서 총리에 놔둘 경우 40만의 돌격대와 역시 수십만 병력을 자랑(?)하는 공산당 깡패 붉은전사 동맹의 폭동을 (고작 10만명의 국방군으로) 제압할수 없다고 보고했던 것.
  17. 의회는 개원 전인데 청문회는 열렸다. 힌덴부르크는 정치 사찰과 뒷공작에 능한 슐라이허 총리가 이런 것도 못막는건지 아니면 대통령을 압박하려고 일부러 '안'막는건지 의심했다.
  18. 오스카르는 슐라이허와 원래 친한 편이 었는데 슐라이허가 총리가 되고나서 고개가 뻣뻣해 진데다가 "헌법에도 없는 대통령 아들 주제에 너무 나서는거 아니냐" 라는 '충고'에 격분해서 슐라이허와 원수가 된다.
  19. 슐라이허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부하가 은근히 권유하자. "그는 원수고 나는 장군이야. 복종하라고 배웠네"라고 답함.
  20. 슐라이허는 총리 국방부장관 프로이센 경찰청장을 겸임했다. 도조 히데키가 본받은 듯
  21. 애초에 가톨릭 중앙당이 참여한다는 자체가 파펜의 훼이크였다.
  22. 노망나서 시공을 1914년 탄넨베르크로 착각했다는 이야기는 와전된 것이다.
  23. 현재는 폴란드 오그로제녜츠 마을이다.
  24. 독일 군국주의의 상징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은 상수시 궁전이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 있다. 상수시 궁전 내부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해가 있는 가르니송 교회에서 행사가 열렸다
  25. 영문 위키디피아에선 이 설을 썼다.
  26. 헨리 애슈비 터너 2세 예일대 역사학 교수 <히틀러의 30일>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