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 ||
국기 | 국장 | |
1870년 ~ 1940년 | ||
표어 |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형제애) | |
국가 | 라 마르세예즈 | |
위치 | 오늘날의 프랑스와 알제리[1] 및 전세계 일부 식민지 | |
수도 | 파리 | |
정치체제 | 내각책임제 | |
국가원수 | 대통령 | |
언어 | 프랑스어 | |
종교 | 가톨릭 | |
주요사건 | 1870년 건국 1940년 멸망 | |
통화 | 프랑 | |
성립 이전 | 프랑스 제2제국 | |
멸망 이후 | 비시 프랑스 자유 프랑스 |
1 개요
1871년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된 이후 아돌프 티에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세워진 프랑스의 정치 체제.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정확히 70년 동안 유지됐고, 이는 지금까지도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장수한 정치 체제이다.
2 정치
2.1 구성
공화국 초기에는 왕당파들이 정권을 잡아서 왕정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우세했고 실제로 초대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가 왕당파에 의해 추방되기도 했지만, 왕당파가 부르봉 왕가와 루이 필리프 1세의 오를레앙 왕가 사이에서 누구를 임금으로 추대해야 할 지를 놓고 내분을 빚은 덕분에 공화정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2] 1880년대에 들어서면 공화정이 완벽히 자리를 잡으면서 왕당파들이 소멸하고, 공화주의자들이 정국을 장악하게 된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는 내각제 중심의 대통령제를 정치체제로 삼았다. 명목상으로는 대통령이 국가의 원수였지만, 프랑스 제2공화국 시절의 반성을 토대로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에 머물렀고, 실권은 내각과 의회의 손안에 있었다. 대통령은 상원과 하원의 동시 표결을 거쳐서 선출되었고, 관리의 임명권과 면직권 역시 대통령이 아니라 내각이 지니고 있었다.
2.2 정교 분리
제3공화정 내내 정부와 가톨릭 교회 측은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가톨릭 측은 앙시앵 레짐 이후로도 왕당파 및 우파 세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공화정에 크나큰 위협이었다. 출신 성분으로 따져도 가톨릭 사제들은 명문 귀족 출신이 다수였고 정부 측은 프티 부르주아, 즉 중산층 출신이 다수였기에 둘 사이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3]
특히나 이 시기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은 초등 교육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사제들이 아이들에게 반동적인 이념을 교육시킬까봐 매우 우려했다. 이에 1882년 정부는 학교 내의 모든 종교 교육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킨다.[4] 경제적으로도 압박을 가하기 시작해서 가톨릭 사제 출신의 선생들의 월급은 대폭 깎였고(...) 가톨릭 재단, 특히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이들 학교 측에게 많은 공과금을 납부하게 해서 이렇게 받은 돈으로 공립학교를 설치했다. 이 법 이후로도 정부의 가톨릭 견제는 더욱 심해졌고, 20세기에 들어서면 가톨릭의 거센 반발에도 1884년 이혼이 합법화되는 한편, 군종 신부들이 군에서 추방된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3세가 중재를 해보려고 나름 노력을 했지만, 19세기 말에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에서 가톨릭 측이 보여준 극우적이면서도 편향된 모습은 진보적 정치인들로 하여금 더더욱 가톨릭을 정계에서 뿌리뽑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해주었을 뿐이었고, 1904년 총리를 지낸 에밀 루베가 정교분리법을 발의하고 가톨릭 교육 단체를 강제로 통폐합시켜버리면서 가톨릭 세력을 치명타를 입고 정치력을 상실하게 된다.[5]
후손인 오늘날의 프랑스 정부 역시도, 오늘날의 민주 국가 중 가장 극단적인 정교분리 원칙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헌법 제 1조에서 프랑스를 비종교적, 민주적, 사회적, 불가분적 공화국으로 규정하였고, 공적인 장에서 일체의 종교적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때문에 공립 학교에서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히잡을 착용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을 정도이다. 오늘날 터지고 있는 부르키니 문제를 쉽게 이슬라모포비아로만 간주하기 어려운 것도 프랑스가 강경한 정교분리 원칙을 추구하기 때문이다.[6]
3 외교
3.1 유럽 내 외교정책
보불전쟁에서 참패한 이후 프랑스의 외교목표는 오로지 독일에게 복수(Revanche)하고 잃어버린 고토 알자스-로렌을 되찾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까지는 외교의 천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건재했던 탓에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하지만 빌헬름 2세에 의해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이후 유럽 외교의 지형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빌헬름 2세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안전보장 조약을 연장하지 않고 파기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다. 또한 빌헬름 2세가 군함 건조 경쟁을 벌이면서 독일-영국 사이의 관계도 악화일로를 치닫자 당시 프랑스의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영국과도 전격적으로 동맹관계를 체결한다.[7]
일부 독빠들은 1차대전에서 프랑스가 전혀 한일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위의 동맹관계 때문에 프랑스가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2차대전과 혼동한 것으로, 프랑스는 1차대전 승전국중에서 최대지분국이다. 애당초 프랑스가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된 원인도, 프랑스가 먼저 독일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하면서 러시아와 동맹국인 프랑스에 동시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의동맹 때문에 구원을 받은게 아니라 오히려 전쟁에 휘말려 든 셈이다. 자주 정권이 교체되어 일관성이 없는 국방정책을 펴던 정치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부는 보불전쟁의 수모를 앙갚음하고 군국주의적인 독일 제국의 팽창주의를 우려해서 방위체제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 의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전선을 유지하면서 막강한 독일군을 정지시켰고, 결국 승전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3.2 제국주의
보불전쟁에서 비참한 패배와 더불어 19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민족주의가 더해지면서 프랑스 역시 활발한 식민지 구축에 나서게 된다. 이미 제3공화국 시기 이전에 차지했던 알제리와 베트남을 발판으로 하여 북/중 아프리카 일대와 인도차이나에서 거대한 프랑스의 식민 기지가 건설된다. 이러한 식민지 건설에는 특히나 가톨릭 선교사들의 공헌이 눈부셨다[8] 이럴땐 또 짝짝꿍이 잘 맞는군 이렇게 획득한 식민지는 프랑스의 경제 체제에서 원료 공급과 상품 소비와 같은 하부 구조를 담당하면서 프랑스의 경제를 지탱해준다. 특히나 대공황 시기에 프랑스는 이들 식민지와 일종의 경제적 블락을 설치하여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볼 수 있었다.
4 역사
4.1 주요 사건
- 1871년 파리 코뮌
- 1889년 불랑제 위기
- 1886년~1887년 육군 장관이었던 불랑제 장군이 열광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아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9] 그의 인기를 두려워 했던 내각은 그를 육군 장관에서 해임시킨다. 이후 그의 주의에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극단적 공화주의자 등이 몰려들었고 특이한 정치적 연합이 형성된다. (가령 극단적 공화주의자이자 1884년 이혼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던 Naquet이란 국회의원도 여기에 참여하여 ' Dissolution, révision, constituante' 이란 슬로건을 내놓는다.) 육군 장관에서 해임된 이후 블랑제는 총선에 출마하여 여러곳에서 당선 되었고[10] 1889년 1월, 실제로 쿠데타 계획을 세웠지만 정부 측이 먼저 손을 써서 불랑제의 측근을 체포한다..[11]
- 1892년 파나마 운하 스캔들
- 1880년대 후반에 민간업체를 이용하여 프랑스 정부는 파나마 운하를 시공하였는데, 말라리아 유행, 당시 기술로는 힘들었던 건축, 자금 부족등이 겹쳐셔 건설이 중도에 중단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민간업체가 내각과 의회에 엄청나게 뇌물을 뿌렸던 것. 덕분에 정국은 뒤집어졌고 반 공화주의자들은 공화정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씹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 민간업체가 유대계 자본에 의해 설립된 유령회사다!'라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반유대주의가 거세진다. 그리고 이렇게 팽배해진 반유대주의는 몇 년 뒤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폭발하게 된다.
4.2 연표
연도 | 대통령 | 주요 사건 | |
1870 ~ 1873 | 아돌프 티에르 | 보불전쟁 패전으로 집권. 파리 코뮌 진압. | |
1873 ~ 1879 | 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12] | 1873년 대통령 임기가 7년으로 확정 1875년 권력기구 구성에 관한 법률 재정. | |
1879 ~ 1887 | 쥘 그레비 | 파나마 운하 스캔들. | |
1887 ~ 1894 | 사디 카르노 | 국방장관 조르주 불랑제(Georges Boulanger)의 제거. | |
1894 ~ 1895 | 장 카지미르 페리에 | 드레퓌스 사건. | |
1895 ~ 1899 | 펠릭스 포르 | 레옹 "부르주아" 내각. | |
1899 ~ 1906 | 에밀 루베 | 정교 분리 | |
1906 ~ 1913 | 아르망 팔리에르 | ||
1913 ~ 1920 | 레몽 푸앵카레[13] | 제1차 세계대전 | |
1920 | 폴 데샤넬[14] | ||
1920 ~ 1924 | 알렉상드르 밀레랑 | "국민 블록(Bloc Nationale)" 출신. 사회주의자 출신의 권위주의 우파. | |
1924 ~ 1931 | 가스통 두메르그 | 인민 전선(좌파)의 집권.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 바이마르 공화국 국제연맹 가입허용. (1925~1930)[15] | |
1931 ~ 1932 | 폴 두메 | 인민 전선. | |
1932 ~ 1940 | 알베르 르브룅 | 인민 전선. 국무총리의 신설(두메르그#)[16] 마지노 선, 뮌헨 조약. |
- ↑ 알제리는 특이하게도 유럽에 속하지도 않는데 프랑스 본토로 취급되었다.
- ↑ 여담이지만, 공화정으로 국가의 정치 체제를 규정한 헌법이 불과 한 표 차이로 의회에서 통과됐다. 당시 얼마나 왕당파의 세력이 강했는지를 알 수 있는 한 단면.
- ↑ 여담이지만 위그노와 유대교는 이 다툼에서 열심히 정부의 편을 들어줬다.
적의 적은 동지 - ↑ 다만 모든 종교 교육을 금지시킨 것은 아니고 목요일은 종교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
- ↑ 그렇지만 반대로 국가가 가톨릭 교회에 간섭, 특히나 주교를 누구로 임명할 지를 놓고 정부와 교회가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중단됐다.
쌤쌤 - ↑ 한국의 경우, 프랑스의 방식이 아닌 미국/독일 방식의 정교분리를 채택하고 있다. 미국과 독일에서의 정교분리는 '국가가 특정 교단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이며, 그렇기에 독일에서는 종교 정당인 기민련 등이 활동할 수 있으며 정치인이 종교적인 동기를 가지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물론 선택은 여론의 몫이지만.
- ↑ 오랜 경쟁 심리와 더불어 파쇼다 사건으로 독일 만큼이나 영국도 싫어했던 프랑스 여론은 델카세의 외교노선에 반발이 거셌지만 영국에 대한 원한보다는 독일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서 결국은 이를 수용한다.
- ↑ 다만 이는 프랑스 만이 아니라 모든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흔히 쓰는 방법이었다. 선교사를 보내 문화적으로 침투하는 한편, 이에 반발해서 선교사에게 위해가 가해지면 이를 빌미로 군대파견(...)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그런 침략과 정복에 동의한 건 아니었고, 일부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고국의 탄압에 반발을 해서 고국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 ↑ 1887년 Schnaebelé 사건 이후 독일에게 공공연히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다녔고 병사들의 병영생활 개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 당시 프랑스에선 한사람이 여러곳의 선거구에 동시에 출마할 수 있었다.
- ↑ 불랑제 본인은 벨기에로 망명해서 그 곳에서 자살한다.
- ↑ 왕당파로 합법적인 왕정복고를 추진했지만 왕위 계승자인 보르도 공작 (앙리 5세)가 입헌군주정이고 공화정이고 가리지 않고 증오하는 인물인지라...
- ↑ 20세기 초의 저명한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와는 사촌지간이었다.
- ↑ 여담으로 이 사람의 증손녀가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썸머 역을 맡아 유명해진 프랑스계 미국인 배우인 조이 데이셔넬이다.
- ↑ 1926년 노벨 평화상 수상.
- ↑ 1936년 거국일치 내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