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역대 독일 총리
8대9대바이마르 공화국 / 10대
막시밀리안 폰 바덴프리드리히 에베르트필리프 샤이데만
역대 독일 대통령
제2제국1대2대
정부 출범프리드리히 에베르트파울 폰 힌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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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Friedrich Ebert(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출신 정당사민당
생몰년1871년 2월 4일 ~ 1925년 2월 28일 (만 54세 24일)
재임기간1919년 2월 11일 ~ 1925년 2월 28일 (만 6년 17일)

1 개요

독일의 정치인. 1913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수가 되고 아주 잠시동안 독일 제국 총리를 지낸 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2 생애

2.1 어린시절~독일 11월 혁명

1871년 하이델베르크의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그는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게 된다. 그는 독일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을 높여서 혁명을 안 일으키게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1913년 독일 사민당의 당수가 된 그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영향을 강화시키고 정부의 전쟁충당금 지출에 우호적인 태세를 보였고, 이 과정에서 독일 사민당의 일부가 나가떨어졌다. 그 뒤 세계 1차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자 독일 11월 혁명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제국의 마지막 총리가 된 그가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그들과 협약을 맺으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선다.[1]

2.2 대통령 재임

수립 직후부터 계속 혼란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연합국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독일에 요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민주화가 되었지만 국민의 여론은 공화국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배상금을 찍어내면서 금보유량이 바닥나면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렌텐마르크 참조. 여기저기서 몰아세우는 상황이 되자 사회민주당은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계속된 혼란이 이어졌다. 그것은 어느 정권도 2년 이상 집권하지 못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래도 초기 리더십은 아주 최악만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쿠데타를 막아내고 흑적황 연정을 85%의 지지로 출범시켰으며, 화폐개혁으로 전후 벌어진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잠재웠다(1923년). 또 같은 해 프랑스가 석탄 인도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으로 루르지역을 점거하자 총파업으로 맞서는 등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베르트는 흑-적-황 연정의 큰 공신이기도 하지만 정작 1920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표를 대거 잃었고, 이후에는 보수적 외교정책을 지지하면서 자기 당인 사회민주당을 디스하는 바람에(...) 흑-적-황 연정을 붕괴시키기까지 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삽질 덕에 사회민주당은 여당으로 오랫동안 복귀하지 못했고 물론 덕분에 경제는 좋아졌지만 독일 정치의 불안정성은 결국 나치의 출범에 기여했다.

2.3 사망

확실히 인플레이션은 화폐개혁을 통해 진정되었으며 배상금문제는 미국의 배상금감축 제안에 의해 어느 정도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많은 우파 독일인들은 그에 대한 중상모략을 계속했고 결국 1924년 12월 막데부르크 배심재판의 판사들에 의해 그에게 반역죄를 선고했고, 재판이 진행되던 도중에 에베르트는 몸 관리를 소홀히 하여 결국 1925년 2월 28일 사망하였다. 이후 대통령직은 1차대전 중 독일의 전쟁영웅이자 전국민적 영웅이자 히틀러나치당 집권의 1등공신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2차 결선투표를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후는 알다시피...
  1. 여담이지만 에베르트 본인도 두 아들을 1차 대전에서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