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택지적

砂宅智積

(? ~ 654년 11월?)

1 일생

사택지적. 사택이 성이고 지적이 이름이다.

백제 의자왕때의 대신으로 『사택지적비』에 따르면 나지성(奈祗城) 출신이다. 이 곳은 부여읍 서쪽 30리의 부여군 은산면(恩山面) 내지리(內地里)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출신인지 정계에서 물러난 후에 머무른 곳인지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백제 16관등중 최고 직책인 대좌평(大佐平)에 오른 인물이다. 물론 백제 역사에서 빠질수 없듯이 이런 높은 직책은 대성8족 출신들이 차지하는데 사택지적도 사씨(혹은 사택씨)가문의 일원이다.

2009년 복원을 위해 해체하고있던 미륵사지 석탑 심초석에서 발견된 금동사리봉안기에 나온 발원자인 백제 무왕선화공주 왕후도 성이 사택으로 당시 좌평인 사택(이 봉안기에서는 사탁沙乇으로 표기됨)적덕의 딸이다. 아울러 사(沙)혹은 사(砂)는 백제기록에서 동일하게 사용되는 단어라서 사택(沙宅)과 사택(砂宅) 그리고 미륵사의 사탁(沙乇)은 모두 같은 단어다.

사택지적이란 인물은 국내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일본서기》와 『사택지적비』에만 등장하는 인물.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일본서기》고교쿠기 원년 기록이다.

2월 정해 초하루 (중략) 백제 조문사의 종자(從者) 등이 “지난해 11월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곤윤(崑崙)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와 누이동생 4명,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그리고 이름높은 사람 40여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가을 7월 무인 초하루. 을해 백제 사신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 등에게 조당(朝堂)에서 연회를 베풀었다.【어떤 기록에는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智積)과 그의 아들 달솔(達率)[1],은솔(恩率) 군선(軍善)이라 하였다】. 이에 건장한 장정에게 명하여 교기(翹岐) 앞에서 씨름을 하게 했다. 지적(智積) 등은 연회가 끝난 후 물러나와 교기(翹岐)의 문전(門前)에 절하였다.
ㅡ 《일본서기》 고교쿠기 원년

 
황당하게도 2월에 백제 조문사에서 "지난해(641년) 11월에 지적이 죽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해 642년 7월에 죽었다던 지적이 또 등장한다(...) 다행히 『사택지적비』가 남아있어 전자의 기록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확인 되었지만 《일본서기》는 독성 있는 복어처럼 모든 기록을 함부로 수용할 수 없다는 멘트가 딱 맞는 장면.

이후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사택지적비』에 따르면 의자왕 14년이던 654년에 정계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의자왕의 정치적인 목표때문으로 보인다. 642년 내좌평 기미(岐味)등 고명지인(高明之人)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한 정변등으로 보아 의자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귀족들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이때문에 반강제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데, 사택지적비에 언급된 나지성(奈祗城)이 출신지인지 아니면 정계에서 물러난후 여생을 보낸 곳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위의 이상한 기록을 일본서기 편찬자들의 실수로 보며 사택지적이 죽은 기록이 사실은 고교쿠 덴노 원년이 아닌, 사이메이 덴노 원년인 655년의 기록으로 보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의자왕 항목의 친위 쿠데타 부분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 기록이 맞다면 사택지적은 654년 11월에 사망한 것이다.

2 사택지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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砂宅智積碑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갑인년정월구일내기성사택지적)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강신일지역왕개체월지난환천금)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이건진당착옥이립보탑외외자용)
吐神光以送雲莪莪悲간含聖明以 (토신광이송운아아비간함성명이)

갑인년(의자왕 14년(654년)으로 추정) 정월 9일 내기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珍堂)을 짓고 옥을 파내어 보배로운 탑(寶塔)을 세우니, 그 높디높은(巍巍) 한 자애로운 모습은
신령스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그 우뚝 솟은(莪莪)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여기까지가 비석에 남아있는 부분이라 더이상의 내용은 알수가 없다. 출처 :『역주 한국고대금석문』(1992年))
 
글자체는 구양순체로 새겨져있으며 문장은 육조시대의 사륙병려체를 따랐다. 사택지적비에는 "금을 캐어 진귀한 집을 짓고 옷을 파내어 보배로운 탑을 세웠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사택지적이 벼슬에서 물러난후 불교에 귀의 하려고 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또한 도교의 허무주의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라는 문구에 들어나는데 이를 통해 백제 후기에 도교도 곳곳에 전파 되었음을 알수가 있다. 다른 유물로는 부여에서 발굴된 산경전(山景塼)에는 도교를 상징하는 삼신산(三神山)이 그려져 있었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 101호였으며 2014년 10월 20일에 보물 제1845호로 지정되었다.

2.1 발견 과정

원래는 일제강점기때, 일본부여신궁을 건설하려던 과정에서 도로에 깔기 위한 석재들을 모았는데 해방 이후 그 자재들을 처리하지 않고 한쪽에 쌓아 두었다. 이후 1948년 부여읍 관북리 도로변 석재들 사이에서 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2.2 형태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형태는 높이 102cm, 폭 38cm, 두께 29cm인데 비석 전체가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의 문화재 가치는 상당히 높다. 현재까지 발견된 비석들중 백제의 금문석으로서는 유일한 비석이기 때문이다.

비의 우측상단부에는 직경 20cm의 원안에 봉황을 새겨 넣었으며 여기에 붉은 칠을 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비석에는 한변에 7cm인 칸들을 그려 나눴고 그 칸안에 글자들은 새겨 넣었다. 1행은 총 14자로 앞부분에 해당되는 4행까지모두 56자가 남아있다.

  1. 원문에는 직책만 있고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