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姓八族
목차
1 개요
백제에서 가장 강력했던 권력을 가지고 있던 8개의 성씨가문을 나타내는 말. 사실 대성팔족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수서(隨書)》 백제전에 기록된 "나라 안에 큰 성씨로서 8개 집안이 있으니...(國中大姓有八族...)"라는 기록에서 비롯된 말이다.
2 설명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국내사서(史書)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중국 사서들에서만 나타난다. 다만 각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현재까지 학계에서 가장 신뢰하는 기록은 《통전(通典)》의 기록이다. 이유는 《삼국사기》와의 교차검증에 의해서인데, 삼국사기등의 국내기록에는 정씨(貞氏), 묘씨(苗氏), 수씨(首氏)는 아예 보이지 않고, 진씨(眞氏)와 백씨(苩氏)가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기록에서는 모두 성씨가 1개인 단성으로 기록해놨지만 실제론 사택(沙宅,沙吒)씨나 목협(木劦)씨 등 복성이 많았다.
3 성씨
- 《수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
-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정씨(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백씨(苩氏)
- 《북사(北史)》의 기록
-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묘씨(苗氏)[1]
- 《통전》의 기록. 국내학계에서는 이쪽의 기록을 신뢰한다.
-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2]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백씨(苩氏)
- 《한원(翰苑)》의 기록
-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목씨(木氏), 수씨(首氏)[3]
4 귀족 세력
이들 귀족은 일반적으로 백제 성왕의 사비천도 이후에 완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성 초기에 강력한 귀족성씨였던 우씨(優氏)[4] 등이 제외되어 있으며, 사비천도 이후 그 근방에서 강력한 세를 가지던 사택씨와 연씨가 추가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주장에 설득력을 얻게 해준다.
가장 먼저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세력으로 발전한 성씨는 해씨와 진씨였다. 이 두 성씨는 부여계 성씨로써 백제 건국무렵부터 두각을 보인것으로 보이며 4세기 무렵부터는 왕실의 외척으로 자리잡았다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근구수왕때 내신좌평에 임명된 진고도(眞高道)인데, 왕으로부터 정사를 위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이었다.
이후 5세기 무렵 부터 목씨와 협씨가 한성 남쪽을 기반으로 성장, 정계에 진출한다. 이 두성씨는 목협씨에서 갈라졌는데 정확히 언제부터 갈라져 나온건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목협만치(木劦滿致)가 《일본서기》에서 목만치(木滿致)로 등장해 5세기 무렵부터 갈라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으나 목협매순(木劦昧淳), 목협마나(木劦麻那) 같은 6세기 인물들의 인명도 실려있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다. 또 목씨혹은 목협씨는 기록수가 제법 있으나, 협씨는 기록상으로 등장한 인물이 없기때문에 중국측의 착각이라고 볼수도 있다. 참고로 백제가 멸망한후 일본으로 건너간 일부 목협씨가 일본의 고대 호족 중 하나인 키(紀)씨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문주왕 대에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급격히 성장한 성씨는 바로 웅진과 사비 혹은 근처인 금강유역에 지지기반을 둔 사씨와 연씨 그리고 백씨이다. 특히 사씨는 성왕의 사비 천도이후 왕비를 배출하는 백제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다.[5]
백씨는 웅진을 거점으로 성장한 성씨였고 동성왕때 그 세가 가장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동성왕을 암살했던 왕의 경호실장, 백가가 바로 백씨의 일족이다.
5 관련 인물
5.1 국씨(國氏)
- 국수다(國雖多), 국지모(國知牟), 국변성(國辨成)
5.2 목씨(木氏)
- 목간나(木干那), 목라근자, 목례금돈(木刕今敦), 목례마나, 목례문차[6], 목만치, 목소귀자, 목윤귀(木尹貴), 목협만치(木劦滿致)
- 목간나는 동성왕시기에 활약한 장군으로 해례곤, 사법명과 함께 백제에 침범한 북위군과 맞서싸워 크게 이겼다. 이후 북위군의 배를 빼앗은 공로로 광위장군면중후(廣威將軍面中侯)에 제수되었다.
- 목례금돈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552년 5월에 성왕의 명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해 우리랑 가야 쳐들어오려고함 그러니 원군이 필요함"이라며 구원병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이한 사항은 다음해 1월에 돌아오는데 출발할때 덕솔(德率)의 관직에서 한단계 격하된 한솔(扞率)로 바뀌어 등장한다.
- 목례마나, 목윤귀, 목례미순은 금관국이 신라에 흡수가 되자 백제 성왕이 모집한 군신회의에서 등장하는 이름이다.
- 목협만치는 개로왕 재위시기 고구려가 침공해오자 신라로 구원군을 요청하러간 태자 문주와 함께 간 인물이다.
5.3 백씨(苩氏)
5.4 사씨(沙氏, 砂氏)
- 사걸, 사법명, 사약사, 사오, 사타상여(沙咤相如), 사택기루(沙宅己婁), 사택지적(砂宅智積), 사택적덕(沙宅積德)
- 사법명은 동성왕시기에 해례곤, 목간나와 함께 백제에 침범한 북위군과 맞서싸워 크게 이겨 정로장군 매라왕(征虜將軍 邁羅王)에 제수된다.
- 사타상여는 흑치상지, 지수신등과 더불어 부여풍을 왕위에 세우고 백제부흥운동을 시도했던 인물이다.
- 사택기루는 531년 안라회의에서 모습을 들어냈고 이후 543년 금관국의 부흥을 위한 대책회의에서 상좌평의 직책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 사택지적은 백제 의자왕 대의 인물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좌평 지적(智積)과 동일인물로 보여진다. 무왕-의자왕 왕위교체기에 파직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의자왕 항목 참조.
- 사택적덕은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 이름이 확인된 인물로 백제 무왕의 장인이다.
5.5 연씨(燕氏)
- 연돌(燕突), 연모(燕謨), 연문진(燕文進), 연신(燕信), 연회(燕會)
- 연돌은 동성왕 재위 12년에 달솔로 임명한후 497년에 병관좌평직을 수여한 인물이다.
- 연모는 성왕대의 인물로 좌평직에 이르렀다. 429년에 백제가 고구려 안장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북쪽의 혈성(穴城)을 빼앗기자 왕의 명을 받고 3만의 병력을 동원해 오곡지원(五谷之原)에서 남하하는 고구려군을 막으려다 2천여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7]
- 연문진은 무왕 8년에 수나라에 사절로 파견된 관리이다.
- 연신은 해구와 함께 삼근왕2년에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직책은 은솔이었으며, 해구가 잡혀 죽임을 당하자 고구려로 도망갔다. 참고로 연씨가문중에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 연회는 백제 성왕대의 장군으로, 540년에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했으나 고구려 정예부대 5천 명의 반격을 받고 퇴각했다.
5.6 진씨(眞氏)
- 진가(眞可), 진가모(眞嘉謀), 진고도(眞高道), 진과(眞果), 진남(眞男), 진노(進奴), 진로(眞老), 진무(眞武), 진의(眞義), 진정(眞淨), 진충(眞忠), 진회(眞會)
- 진가는 고이왕때의 대신으로 261년에 내두좌평에 임명되었다.
- 진가모는 진사왕 3년이던 387년 1월에 달솔에 임명되었고 390년 9월엔 고구려를 공격,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포획한 공으로 병관자평에 올랐다.
- 진고도는 근구수왕때의 외척으로 근구수왕 2년인 376년에 내신좌평에 임명되면서 왕으로 부터 정사를 위임 받았다.
- 진과는 초고왕대의 인물로 초고왕 49년이던 214년 9월에 군사 1천을 이끌고 말갈족 석문성을 습격해 뺏았다는 기록이 있다.
- 진남은 삼근왕2년에 해구와 연신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의 명을 받들어 2천의 군사로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기지 못한 인물이다.
- 진노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일본에 파견된 백제의 악사중 한명이었다. 554년에 삼근(三斤), 기마차(己麻次), 진타(進陀)와 함께 나라(奈良) 궁중에 파견 되어 그전에 머물던 백제악사들과 교대했다고 한다.
- 진무는 백제 아신왕 2년이던 393년 1월에 좌장에 임명되어 군사를 통솔했고 관미성을 탈환하려 햇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399년에 병관좌평으로 승진했었으며 강력한 병권을 가진 인물로 보여진다.
- 진의는 비류왕 30년에 내신좌평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한때 비류왕과 소원한 관계였던 진씨가문이 다시 정계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 진정은 근초고왕 2년이던 347년에 조정좌평에 올랐는데 근초고왕 비의 친척출신이었다. 성품이 어질지 못하고 사납고 까다로우며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에게 존경받지 못했다고 한다.
- 진충은 고이왕2년이던 240년에 좌장에 임명되어 내외병마사를 맡은 인물로 246년 8월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한 틈을 타 낙랑의 변경을 급습했으나 후환이 두려워 돌려주었다고 하며 247년 3월에 우보의 직책까지 올라갔다.
- 진회는 다루왕 10년이던 37년 10월에 우보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 진씨 가문의 인물중 기록상 보이는 첫번째 인물이다.
5.7 협씨(劦氏)
협씨성을 가진 인물은 현재까지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없다. 목협씨가 목씨와 협씨로 나뉘었다는 학설에 의해 추측되는 성씨다.
5.8 해씨(解氏)
- 해구(解仇), 해구(解丘), 해구(解仇), 해례곤(解禮昆), 해루(解婁), 해수, 해충(解忠)
- 해례곤은 동성왕시기에 사법명, 목간나와 함께 백제에 침범한 북위군과 맞서싸워 크게 이겼다. 495년에 무위장군불중후(武威將軍弗中侯)에 제수되었다.
- 해루(BCE 55 ~ CE 34)는 온조왕 41년이던 23년에 나이가 70이 넘었음에도 지식이 많고 기력을 잃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보에 임명되어 죽을때 까지 재직했다. 참고로 해씨출신으로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인물.
6 관련 항목
- ↑ 백씨(苩氏)의 오기로 보는 설도 있다.
- ↑ 통전 원문에는 '내(内)'로 읽는다는 주석이 붙어 있다.
- ↑ 묘씨와 마찬가지로 백씨(苩氏)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 ↑ 천관우는 우씨를 비류를 시조로 하는 비류계 왕족으로 추정했다.
- ↑ 미륵사지에서 발결된 금제사리봉안기의 주인공이 바로 사택가문 출신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다. 또한 의자왕 시절 대좌평이었던 사택지적(沙宅智積)은 백제 최고의 관직인 대좌평에 오르기도 했다. 최고의 관직과 왕비를 배출한 귀족이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또는 목협문차
- ↑ 여담으로 516년에 《일본서기》에 백제의 사신단에 등장하는 장군 작막고(灼莫古)와 동일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