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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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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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4일 거행된 희생자 추모식.

6.25 전쟁 당시 북한군 남침 초기 서울로 진주한 시점에서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으로 난입하여 벌인 학살극.

북한군이 얼마나 악랄한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

2 사건의 진행 과정

2.1 배경

개전 직후 서부전선 일대의 교전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된 대한민국 국군 부상병 다수는 서울대병원을 포함한 서울시내의 여러 병원에 분산 후송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중 상당수가 심한 부상을 입은 중상자였다.

그러나 개전 3일만에 북한군이 서울까지 밀고 내려오자, 서울에 남아있던 대다수 민간인들은 아비규환에 빠져 피난길에 올랐으나[1] 환자가 있는 병원 근무자들이나 경비병들은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급하게 서울을 빼앗기는 상황이라 체계적인 후송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병원을 빠져나갈 수 없었던 부상병들과 경비병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의료진, 그리고 일반 환자들과 가족의 병수발을 위해 남아있던 민간인들이 다수 서울대 병원에 남아있었다.

2.2 시작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이 서울대병원까지 들이닥쳤다. 당시 병원 내부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환자들로 만원이었으며, 병원 경비를 위해 남아있던 국군 보병 1개 소대와 움직일수 있는 전상병 80여명이 소대장의 지휘하에 뒷산에서 응전하였으나 모두 전사하였다.[2]

저항하는 국군을 전멸시킨 북한군은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병력을 산개시켜 병원을 둘러쌌다. 이제 병동 안에는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부상병들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비무장의 의료진과 민간인 환자들, 그리고 환자 가족들만이 남아있었다.

2.3 진행

병원을 점령한 직후 한 북한군 중좌가 "원수놈들의 앞잡이들이 여기 누워있다!"며 선동을 시작했고, 이내 한국군 부상자를 몰살시키기 위한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병동을 순회하며 침대와 바닥에 누운 환자들에게 총을 갈기고 총을 맞고도 죽지 않은 이들은 총검으로 확인사살하였으나, 이게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는지 나중에는 환자들을 침대 밖으로 끌어내어 병실 구석으로 몰아넣고 한꺼번에 총을 쏴 죽였다. 학살의 소음이 울리자 다른 병동에 남아있던 환자들은 급히 대피 시도를 했지만 죄다 북한군 보초들에게 걸려 참혹한 꼴을 당했고, 일부는 살해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권총을 가지고 있던 장교들은 병실에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사살되거나 자살하기도 했으며, 흥분한 북한군은 심지어 위문차 남아있던 환자의 가족들까지도 살해했다.

이 학살의 명분은 일단은 한국군 응징이었으나 사실 군인이나 일반인이나 환자복을 입은 채로는 별로 구분이 가지 않아서 일반인들도 다수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나 명단은 당시 상황이 상황인지라 남아있지 않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국군 부상병이 있는 곳이 아닌 정신병동까지 들이닥쳐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도 죽였다는 것.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환자로 위장한 국군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긴 하다.

세 시간 동안 부상병을 찾아내어 죽이고 나서도 아직 놓친 부상병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병원 안을 샅샅이 뒤져 부상병들을 찾아낸 다음 밖으로 끌어내어 한꺼번에 총을 쏘아 죽이고 생존자를 총검으로 확인사살했다. 이때도 일반 환자나 가족 등 민간인이 다수 살해당했다. 이렇게 죽이고 나서도 병원 내에 남아 있는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악착같이 잡아내서는 보일러실로 끌어가 10의 석탄 더미에 생매장하였다.

2.4 마무리

학살을 당한 시체들은 한여름인데도 병원 마당에 쌓인 채로 20일 동안 방치되어 병원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한다. 자기들도 더 이상 못 견디게 된 북한군이 시체들을 병원 앞 큰길인 창경궁 앞 길에다가 시체를 쌓은 뒤 기름을 붓고 화장하였다.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들은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으나 우리측의 기록에는 부상병 100여명으로 되어 있고 서울대병원에서 세운 추모비에는 1000여명으로 되어있다. 편차가 너무 커서 의아할 수 있지만, 900명을 민간인이라고 생각하면 들어맞는다.

2.5 이후

환자들이 죽은 뒤 병원은 북한군 부상병들의 후송 기지로 쓰였고,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된 뒤에야 끔찍한 참상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게다가 밀려나기 직전에 또 한차례 학살을 벌인 정황이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두 번째는 당연히 국군 부상병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고, 북한군에 대한 협조를 거부한 자나 반공인사 등이 그 대상이었다. 숫자는 백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근무하던 의사, 간호사, 군의관, 의무병 상당수가 납북되었고, 저항하던 일부는 본보기로 공개처형되었다.

2.6 다른 병원에서는?

돈의문(서대문)의 적십자병원에서도 한국군 부상병이 대량 수용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서울대병원처럼 곧바로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여기는 한국군 경비병도 없어서 인민군이 느긋하게 병원을 점령한 다음 "동무들은 죄가 없다. 치료가 끝나면 다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장교가 나서서 안심을 시키고 남아있던 한국군 군의관에게 계속 부상병들을 돌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장 그날 오후에 북한군 부상병에게 침대를 비워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여기 그대로 있으면 학살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직감한 일부 장병이 탈출을 시도, 성공했다.[3] 이 시점에 이미 군의관은 구금되어 있었으며, 이 병사들이 탈출한 이후에 병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없다. 남아있던 부상병들은 전원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곳 이외에도 서울 시내 여러 병원들과 환자를 수용하고 있던 교회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살이 벌어졌다는 증언이 있으나, 정확한 희생자들의 명단과 숫자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후에 전주시에서도 이와 비슷한 학살극이 있었다.

3 전쟁범죄

이 사건은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명백한 전쟁범죄다.
1949년 8월12일 제네바 회의에서 채택된 1949년 제네바 협약에서는 '전지(戰地)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제12조에 "군대의 구성원과 기타의 자로서 부상자 또는 병자인 자는 모든 경우에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들은 성별, 인종, 국적, 종교, 정견(政見) 또는 기타의 유사한 기준에 근거를 둔 차별없이 인도적으로 대우 또는 간호되어야 한다. 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그들의 신체에 대한 폭행은 엄중히 금지한다. 특히 그들은 살해되고 몰살되거나 고문 또는 생물학적 실험을 받도록 되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상적인 전쟁이었다면, 북한군은 포로로 잡은 부상병들을 보호하고 치료가 계속 진행되도록 보장했어야 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저항 불능의 환자들을 유린한 정황만으로도 잔혹하지만, 북한군은 이에 대해서 전혀 반성하지 않고 현재도 군인들에게 제네바 협약 같은 것은 전혀 가르치지 않고 있다. 또한 북한군은 이 사건 이후로도 붙잡은 포로를 학살하거나 자기네 병사로 강제로 편입시키는 짓을 일상적으로 저질렀다. 미귀환 국군포로가 수만 명에 달하는 것도 이른바 해방전사라고 하여 자기들 멋대로 북한군에 편입시켜 놓고 이들은 이제 포로가 아니라고 주장한 탓이 크다.

또한 이런 행위는 본격적인 전쟁 이전, 38선에서의 잦은 충돌 때도 이미 수시로 일어났었다. 북한은 포로로 잡은 대한민국의 경찰이나 군인을 귀순자로 포장하여 선전에 활용하기도 했지만 그대로 처형하거나 사지를 토막내어 내장을 나무에 걸어놓는 식의 잔혹행위를 수시로 저질렀다. 개전한지 3일만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때문에 전쟁이 인간을 바꿔놓는 광포성의 사례로 인식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그놈들은 원래 그런 놈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잔혹행위를 북한군이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었던 데는 의정부 축선을 통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주력이 소련군 출신이 주축이 된 3사단, 4사단, 105전차여단이었던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의도적으로 서울 점령이라는 공을 몰아주기 위하여 이들을 서울 공격의 주공으로 삼았다. 3사단의 경우 병사는 북한에서 징집한 신병들이었으나 장교는 대부분 소련군 경력자였으며 4사단은 1개 연대가 중공군 출신 연대(18연대)였으나 장교는 소련군 출신자가 많았다. 105여단의 경우 소련에서 전차병 교육을 받고 돌아온 이들이 핵심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소련계 부대라고 봐야 한다.

당시 소련군은 현세의 지옥이라고 하던 독소전쟁을 거치면서 약탈, 강간, 대량학살, 포로학대, 고문 등의 전쟁범죄에 대해서 상당히 무감각하였으며 지휘관이나 사령부에서도 지휘체계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일선 병사들의 일탈 행동에 대해서도 별반관심이 없었다. 나치독일군이 전쟁 기간 내내 약탈, 강간, 방화, 민간인 대량학살, 포로집단처형 등의 전쟁범죄를 저지르자, 적개심에 가득찬 소련군 병사들이 반격에 나서면서 똑같은 행동으로 응수했기 때문이다. [4]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련군 전체가 전쟁범죄에 대해서 상당히 둔감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련군에서 복무했던 경험자들과 소련군에서 교육받은 장교들이 주축이 된 소련계 부대들이 남침의 선봉에 서면서 이런 학살극이 일어난 것이다.

반면에 같은 공산권이라도 중국 인민지원군은 포로와 민간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중공군이 삼대기율 팔항주의로 대표되는 엄격한 군기로 민간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민심을 얻어서 결국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공군은 국민당군 포로들도 상당히 우대하였고[5], 대외적으로 엄정한 군기와 포로에 대한 신사적인 대우를 널리 선전하였다. 이런 조치들이 국민당군의 집단 탈영과 항복을 불러와서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6] 이런 분위기가 국공내전에 바로 이어서 터진 한국전쟁 시기까지 유지된 것이다. 중공군의 규율과 군기는 미군과 한국군 장성들이 높게 평가하기도 할정도.

4 범인은 누구인가?

서울 점령의 선두에 선 세 부대 중에서 직접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을 벌인 부대가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국방부 블로그에 올라오는 "울프독의 War History" 포스팅에 따르면 학살의 범인은 105전차여단[7]으로 추정되는데,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해당 필자가 당시의 정황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추측한 것이다. 개연성은 충분히 있으니 관련된 포스팅을 각 위키러가 읽고 타당성을 추측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1부, 2부, 3부, 4부, 5부로 이루어져 있다.

긴 글 읽기 피곤한 위키러를 위해 위 연작 포스팅의 논지를 요약하자면 105 전차여단은 소련계가 주축인데다 여단장 류경수부터가 김일성 직속 항일빨치산 출신의 무지하고 잔인한 인간이라 거리낌없이 국군 부상병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부대 구성원의 성향이 이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아래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한다.

3사단의 경우는 실제 미군 포로를 학살한 사례가 있는 만큼 소련군의 영향으로 점령 직후에 학살을 벌였을 수 있으나, 그 사건은 사단 차원이 아니고 일선 지휘관이 임의로 저지른 짓이었다. 3사단장 이영호는 그래도 미군 포로를 학살한 사건이 공론화된 후 포로 학살 금지 명령을 내릴 정도로 기본적인 군인의 소양은 있었다. 류경수랑 같은 항일빨치산 출신이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105여단은 낙동강까지 내려가면서도 수시로 포로 학살을 저질렀는데, 그런데도 류경수는 포로 학살을 금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4사단 같은 경우 다수의 소련계 장교가 있다고 해도 사단장 이권무 소장부터가 중공군 출신으로 포로에 대한 우대가 습관화된 사람이었다. 4사단처럼 중공군 출신이 주력이 된 부대가 서울대병원을 접수했다면 적어도 그 부대가 병원을 관리하는 동안은 어떤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종합해 보면 만약 105여단 이외의 다른 부대가 서울대병원을 점령했다면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5 부정론

1. 6.25 때 학살된 민간인의 대부분은 국군과 미군이 죽였고, 북한군은 지주자본가 계급만 탄압했지 일반 민간인들에게는 피해도 끼치지 않고 잘 해줬다. 이런 사건은 일어난 적이 없다. 이 학살사건은 반공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조작사건에 불과하다.

2. 사건 자체는 있었으나, 국군 부상병들이 순순히 투항했으면 아무 일 없었을 것을 공연히 저항하여 북한군에게 피해를 입혀 상대를 자극했기 때문에 당한 사고였다.

이딴 주장을 하는 미친사람들도 있기는 있다. 참고나 할 것.

6 미디어에서의 등장

6.1 만화

1981년에 계림출판사에서 간행한 반공윤리학습극화
  1. 그러나 일찍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북한군을 격퇴하고 있다는 정부의 발표를 믿고 있다가 뒤늦게 피난을 시도한 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고없는 한강 인도교 폭파로 한강을 건널 수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2. 국방부 블로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전투를 지휘한 소대장은 남씨 성의 소위, 선임하사는 민씨 성을 가진 중사라고 한다.
  3. 국방부에서 출간한 구판 한국전쟁사에 이때 탈출한 병사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병원 간호사 중 일부가 '우리가 죽는다'면서 탈출을 제지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4. 베를린 전투로 나치독일이 패망한 시점부터 최대 200만명의 독일여성들이 소련군인에 강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충격적인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5. 원하는 자들은 공산당군에 편입시켜주고 나머지는 여비를 줘서 석방시켰다. 어차피 공산당군은 게릴라전이 기본전술이라 대규모 포로수용소를 유지할만한 능력도 장소도 없긴 했지만. 이때는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서 군에 입대하던 시기라서 이런 우대책은 국민당군의 포로의 상당수가 공산당군에 가담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6. 압도적인 병력과 물자를 가진 국민당군이 속절없이 무너진 것은 공산당군의 이런 선전과 정치공작에 휘말려서 상당수 부대들이 제대로 싸움도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다.
  7. 이 부대는 한국전쟁 정전 이후 당시 여단장 류경수의 이름을 따서 '류경수 제105땅크사단'으로 확대개편하였다. 서울에 가장 먼저 진입했다 해서 북한군내에서 신형전차와 각종 최신물자를 가장 먼저 보급받는 등 우대받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