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민지원군
中国人民志愿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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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6.25 전쟁 참전 포스터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승리만세"
抗美援朝,保家卫国 (항미원조, 보가위국)
역사 최대의 민병대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해방군의 공식명칭이다. 한국에서는 한중수교 이전까지는 주로 중국공산당의 군대라는 이름의 중공군으로 표현되어 왔고, 현재는 중국 정규군은 중국군 또는 인민해방군 이름으로 부르지만, 한국전쟁기에 개입한 중국군에 한정하여 중공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 배경
1946년부터 본격화 되었던 국공내전은 처음에 국민당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으나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군을 포위 섬멸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는 국민당의 실정 및 전략적 실책 때문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전역에서 국민당군을 분산시키면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던 인민해방군은 공세로 돌아서서 1949년 1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3개월만에 국민당군 170여개 사단을 분쇄하면서 장강(양즈강)이북지역을 모두 점령하였다. 인민해방군은 4월에는 장강을 도하하였고 4월 23일에는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어 6월에는 상하이, 10월에는 광저우, 11월에는 청두를 점령하면서 윈난성 등 서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대륙 전역을 손에 넣었다. 대륙에서 대부분의 거점을 잃은 국민당 정부는 1949년 12월 7일 본거지를 대만으로 옮겼다.
이후 인민해방군은 1950년 5월1일에는 하이난 성를 함락시켰는데, 1950년 10월에는 국민당이 쫓겨간 타이완에 대한 작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한이 6월 25일 남침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이 몰락할 때까지도 동북아시아에 무관심했던 미국은 갑자기 이지역에 대한 군사개입을 강화했다. 그리하여 미 해군 제7함대가 대만해협에 포진하면서, 압도적인 미국의 해군력 때문에 중공의 대만작전은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북한문제를 주시하고 있던 중공 지도부는 미국의 의도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UN군의 군사개입이 결정되자 각각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은 내전이므로 외부세력이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며, 국제연합이나 미국 그 누구도 여기 개입하지 말라"는 담화나 성명을 내었다.
2 중국 지도부의 격론
유엔군이 전쟁전의 국경선이던 38선을 넘게 되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미공군이 북한을 폭격하면서 북중국경의 영공을 자주 침범하면서, 연변지역을 오폭하기도 했다. 이는 미군이 북한 정권 뿐만 아니라 중공 정권을 겨냥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김일성은 전황이 밀리기 시작한 9월부터 다급히 중국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일단 중국측은 건국한지 1년도 안된 정권이라 현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에 개입을 주저했고, 유엔군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는 다시 성명을 내어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무방하나,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이는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는 최후 통첩성 성명을 내었지만, 맥아더는 들은체 않고 38선을 넘었다. 출병에 앞선 최종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순망치한이라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본토에서 싸우느니 조선에서 싸우는게 낫다"며 주전론을 내세웠고, 저우언라이는 "유엔군이 북중국경에서 멈출지도 모르니 일단 개입은 자제하고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린뱌오는 "우리가 미국을 이기기는 힘들다. "는 비관론을 각각 제시했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펑더화이는 "조선의 지형을 고려해서 신중히 작전을 세운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마오쩌둥을 지지했고, 주더가 여기 찬성함으로서 10월 8일 한반도 출병이 결정되었다.
여기에는 또한 으리도 작용했는데, 국공내전에서 중공이 수세에 몰렸을 1946~8년 당시 북한측은 중공 고위인사의 가족들과 부상병들을 수용해 주었고, 특히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군에 쫓기던 인민해방군이 북한지역을 통과하여 무사통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국공내전이 1948년 가을의 만주전역에서 전환점이 되었으니, 중공측은 북한측이 유엔군에 두들겨 맞고 패망하는 것을 불구경 할 수도 없었다. [2] [3]
하지만 중국정부가 유엔군에 직접 맞선다는 모양새가 되면 유엔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중국정부의 노력이 수포가 될 수 있으므로, 참전군인은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조선인민들을 가엾이 여겨 스스로 지원한" 자원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중국 정규군인 인민해방군과는 별도의 조직인 것처럼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출병했다. '지원군'이라는 이름 자체가 뜻 지 지에 원할 원 자로, 북한을 지원하는 군대라는 뜻이 아닌 인민들이 스스로 자원한 군대라는 뜻의 이름이었다.
인민지원군은 한반도에 인접한 만주지역에 주둔한 제4야전군이 주력이 되었다. 제4야전군의 원래 사령관은 린뱌오지만, 린뱌오가 출병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적극 주전론을 펼친 펑더화이가 대신 사령관에 임명되어 출병했다. (펑더화이는 제1야전군(또는 서북인민해방군) 사령관이었다.) [4]
10월 19일 평양은 유엔군에 수복되었지만, 이미 그 전날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군은 속속 압록강을 넘어 북한땅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3 무장 및 부대편제
인민지원군 병사들은 인민해방군 병사와 거의 동일한 군복을 착용했다. 당시 중국군에는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장교와 사병의 제복은 구분이 없었다. 다만 지휘관은 칼라에 자신의 직책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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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지원군 병사들의 군복의 가슴에 붙이는 부대마크/
인민지원군의 부대 단위는 소련군에서 이어져오는 공산권의 교리대로 서방의 같은 단위보다 적은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단은 9,500명이 정원이었으며, 연대는 3,,000명, 대대는 850명의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5]
이들의 무장은 대부분 국공전쟁 말기의 무장과 동일했으며, 초반에는 일본군-만주군이 항복함으로서 압수한 일제 무기, 국민당군이 이전에 원조받았던 미제무기나 미제를 카피한 것들을 혼용하고 있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소련이나 체코에서 수입하거나 이것을 중국에서 카피한 공산제 무기가 우세하게 되었다
4 소련의 소극적 개입
마오쩌둥은 개입이 불가피해지자, 저우언라이를 소련에 보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소련은 당시 전후복구로 정신이 없었는데다가, 김일성의 불장난을 도우려다가 미국과 핵전쟁이나 세계대전을 벌이는 것은 극력 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6] 직접 개입 대신 북한-중국이 유엔군에 비해 현저히 열세한 공군만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당시 막 개발되었던 MiG-15를 중국측에 제공하고, 소련 공군이 중국군으로 위장하여 참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소련의 개입 사실을 감추기 위해 소련군 공군은 평양 이북에서만 참전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7]이후,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엔군으로부터 평양을 탈환하고 그 남쪽에서 작전을 하게 되지만, 전혀 소련의 공중지원을 받지 못하고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문에 중공군은 압도적인 유엔군의 제공권에 수많은 인명손실을 냈고, 소련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미군도 소련공군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확전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에 그냥 덮어두었다. 소련의 개입은 결국 냉전이 해소된 199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밝혀졌다.
5 주요 전투
5.1 북진하는 유엔군에 대한 전초전 (1950.10.25~ 11.5)
미군의 정보부대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감청과 공중정찰을 통해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 챘으나,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중국군? 걔네 일본군보다 약함. 개입하기만 하면 희대의 대학살 당할것임"[8]이라고 큰소리를 치며 별대른 대비 없이 계속 압록강을 향한 진격을 계속했다.
10월 18일에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 부대는 그 일주일 이후인 10월 25일부터 공세로 나왔다.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이 병력은 27만에 이르렀으며, 사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북진하는 유엔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수는 아니었다. [9][10] 중공군은 깊은 산악지역에 매복해 있다가 야간에 유엔군을 기습하는 전법을 썼다. 치고 빠지는 전형적인 게릴라 전술로, 일제 공세후, 적에대한 섬멸을 시도하지 않고 다시 산악으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이를 중공군의 전술적 취약성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했고, 맥아더는 중공군의 기습을 물리쳤다고 생각하고 더욱 대담한 공세 작전을 펼친다.
한편 일종의 시험전으로 유엔군의 전력을 경험한 펑더화이는 휘하부대에게 미군의 약점과 강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군은 매우 강력한 화력과 물량의 강점을 지니고 있지만, 도보 행군을 싫어하며, 야간전투에 약하고, 과도하게 공중지원공군에 의존한다." 이런 평가는 후에 실행되는 중공군의 대공세의 작전계획에 기본 숙지사항이 되었다.
5.2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중공군 (1950.11.25~12.24)
중공군은 1차 작전을 마친후 일단 산악지역에 매복하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아직까지도 중공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며, 압록강까지 단숨에 쳐올라갈 대공세를 기획했고, "일이 빨리 풀리면, 우리 아그들 일부는 크리스마스까지 집에 돌아올 수 있음.." 마켓가든? [11] 이라고 워싱턴에 호언장담을 했다. 미군의 각 부대에는 일본 도쿄 긴자의 쇼핑 전단지까지 배포될 정도였다. 이 대공세의 이름은 이런 호언장담에서 이름을 따서 크리스마스 귀향 공세(Home-by-Christmas Offensive)라고 이름이 붙었다.
11월 24일, 서부전선의 청천강 유역에서는 월튼 워커 중장이 지휘하는 유엔군 (미8군과 한국군, 터키군 포함)이 25만 병력으로 청천강 유역에서 공세를 시작했으나, 약23만명의 병력을 가진 중공군은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을 대상으로 집중공세를 펴서 전선에 유엔군의 돌파구를 뚫었고, 미8군은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후퇴하여야만 했다. 이 후퇴는 결국 서울을 내주는 1.4후퇴까지 이어지며, 미군 역사 상 가장 긴 거리를 후퇴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동부전선의 장진호 전투에서는 송스룬이 지휘하는 6개사단, 총병력 15만의 중공군이 미10군단이 주축인 10여만명의 유엔군을 포위했다. 송스룬군은 3,000여명의 병력을 가진 선견대[12] 를 분쇄하고, 약1만명의 병력을 가진 미해병1사단을 완전히 포위 섬멸하려 했으나, 미해병1사단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 큰 피해를 입히며 지연작전을 실시, 동해안의 흥남방면으로 탈출한후, 그곳에서 선편으로 피난민들과 함께 남쪽으로 철수했다.
이때 전선에서 활약한 중공군은 대부분 경보병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화력이래야 박격포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하여 포병이나 공중지원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자동차의 기동이 어려운[13] 산악지형에서 보병의 기동력을 십분 활용한 포위전술에 매우 능한 모습을 보였다. 가장 즐겨 사용한 전법은 V자 전법으로 적이 V자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깊숙히 들어왔을 때 보병의 재빠른 기동으로 양 다리를 닫아버려 포위망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매복과 위장을 철저히 실시하여, 유엔군은 공중정찰로도 이렇게 포진한 중공군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간에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야간에 숨어있던 이들이 뛰쳐나와 공세로 나오며 포위되기 일쑤였다. 일단 이들은 포위된 적은 대병력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섬멸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들의 공세를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인해전술이라고 폄하하곤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인해전술이 아니라 엄연한 포위전술이며, 포위된 적을 섬멸하기 위해 적보다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전술교리상 무식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중공군은 이 대공세로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를 좌절시키고 세계최강의 미군을 후퇴시키는 대륙의 위엄을 내보였으나, 미군의 강력한 화력앞에서 희생을 감수하는 대담한 작전을 폈기 때문에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전투손실 뿐만 아니라 영하 30~40도로 내려가는 북한의 산악지역에서 하루에 수십킬로미터를 도보로 행군시키는 초인간적인 작전을 펴면서 생긴 동상, 질병 등의 비전투손실도 극심하여 공세가 끝난 후에는 전병력의 40%가 작전불능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전후 회고록을 보면, 이 당시 중공군의 보급사정은 매우 열악하여, 중공군 사병의 식량은 그저 감자 몇덩이, 실탄도 몇발 휴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포로를 후송할 준비도 안 되어있었는지, 몇몇 중공군 부대는 잡은 유엔군 포로들을 무장해제후 현지에서 바로 석방할 정도였다. [14]
중공군과 인민군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반격을 취한지 겨우 열흘만인 12월 6일 평양을 탈환하고 더욱 남진하여, 12월말에는 38선을 지나던 개성까지 이르렀다. 이로서 북진통일의 가능성이 높던 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였다.
여기에 12월 23일 워커 중장이 의정부 부근에서 사고로 사망했고, 후임자로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8군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5.3 중공군의 대공세 및 서울재점령 (1950.12.31 ~ 1951.1.8)
마오쩌둥은 의외로 전황이 잘풀리자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적을 과소평가하고 간이 커져 아예 한반도 전체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민지원군에 38선을 넘어 진격하는 명령을 내렸다.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명분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은 것을 도발행위로 간주한 것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38선 넘어로 진격한 것은 빼도박도 못하는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38선이 지나는 개성에서 일단 정지했던 중공군은 12월31일부터 대공세를 펴서 38선을 넘어왔다. 유엔군은 급격한 후퇴로 부대 정비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취약했고, 중공군의 포위를 피해 서울을 내주고 일단 후퇴했다. 결국 1월 4일, 중공군과 인민군은 3개월만에 서울에 재입성했다.(1.4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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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4일 중앙청을 점령한 후 기뻐하는 중국군 부대.
중공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대담하게 공세종말점을 넘어 서울 이남으로 진격했으나, 재편성을 마친 미8군과 10군단은 반격으로 나왔고, 중공군은 특히 미국의 압도적인 제공권하에서 공중지원 없이 싸웠기 때문에 미군의 화력에 큰피해를 봤다.
결국 중공군은 진격을 멈추고 수세에 나섰지만, 각잡고 나온 미군의 공중화력은 너무나 막강해서 매복이 어려운 평지로 나온 중공군 부대들은 비전투시에도 큰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5.4 유엔군의 서울 재수복 (1951.1.30~4.21)
1월 23일, 서부전선의 미8군은 공세로 나왔고(선더볼트 작전), 한강 이남의 중공군을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동부전선에서도 미10군단이 라운드업 작전을 실시하고 공세로 나왔다. 2월 11일, 동부전선의 중공군은 역공을 펼쳤고, (횡성 전투), 역시 중공군은 비교적 약체인 한국군에만 공세를 집중하여 한국군 8사단이 완전 궤멸되는 참사를 빚었다. 이때문에 라운드업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15] 하지만 이렇게 물밀듯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공세는 역시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에 의해 많은 전력이 사그라들었고, 2월 15일 지평리 전투에서 미2사단과, 프랑스 대대가 분투하여 간신히 막아냈다.
전년 11월부터 계속된 전투와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 때문에 중공군의 전력은 공세를 취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미8군은 이렇게 약체화된 중공군에 대한 공세를 펴서 결국 3월 중공군을 서울에서 다시 몰아내고 재수복하였다. 주인이 몇번째 바뀌었냐... 유엔군은 계속된 춘계공세를 펼쳐 결국 4월경에는 38선을 다시 넘었다. 이 시점까지의 전선상태를 "캔자스 라인"이라고 한다.
맥아더는 졸렬한 지휘를 펼쳤을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을 핵폭격하자는 제안을 하는 등, 여러가지로 조속한 정전을 원하는 행정부와 충돌했기 때문에, 4월 11일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그 후임은 중공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리지웨이가 임명되었다.
5.5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1951.4.22~6.10)
한편 유엔군의 반격에 의해서 다시 38도선 이북까지 물러섰던 중공군은 다시 한번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대공세를 실시했다. 이것은 3개 야전군 약 7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유엔군을 포착 섬멸하고 서울을 다시 탈취한다는 야심만만한 작전이었다. 중공군은 1951년 4월, 임진강 전투와 가평 전투에서 역시 한국군을 공세의 대상으로 삼아 전선을 돌파하려고 했으나, 패배로 저지되어 정지했다. 전선돌파가 지지부진하자 일단 정지하여 전열을 정비한 중공군은 5월 15일 공세로 나왔으나 5일후 다시 정치되었다.
5.6 지리한 공방전 (1951.6.10~ 1953.7.27)
6월 10일부터 휴전협상이 판문점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휴전협상이 열리는 주변지역을 제외한 전선에서는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휴전협정의 주문제는 포로의 처우문제인데, 유엔군이 포획한 반공포로는 큰 문제를 야기하였다. 북한군의 경우는 이념에 상관없이 강제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된 사람이 있고, 중공군의 경우는 국민당군 소속으로 있다가 국민당군이 항복하면서 자의에 반하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공산군에 편입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공산측으로 소환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엔은 포로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자고 했지만, 공산측은 지상낙원이라 쓰고 생지옥이라 읽는 공산측에 송환거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무조건 전원 송환을 요구했다. 여기에 한국측이 유엔군과의 협의 없이 반공포로를 임의로 석방하여 큰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런 반공포로들은 결국 중립국인 인도에 남겼다가 인도가 자유의사에 따라 처리하는 걸로 마무리 되었다. 물론 이런 반공포로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이나 중화민국행을 택했고, 인도는 이들을 각각 자유의사에 따라 보냈다.
중공군과 유엔군은 휴전협성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고지전을 벌였고, 휴전협정이 조인될 무렵인 1953년 7월 10일경, 중공군측은 21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금성돌출부(당시 강원도 금성군, 현재는 북한 강원도의 김화군) 에 포진한 한국군(4개사단, 약 9만명)에 대한 대공세(금성 전투)를 펼쳐, 승리를 거두고 이곳을 공산측 영토로 확정하였다. 여담이지만 중공군측은 이전투에서 국군의 최정예였던 수도사단을 패퇴시켰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문화대혁명시기에 이 전투를 다룬 "기습백호단(奇袭白虎团)" 이라는 현대경극과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백호단은 수도사단의 백호연대의 부대마크가 백호인것에서 유래.
휴전협정 직전의 북한 주둔 중국군 총 병력은 40~60만으로, 당시 20만에 불과했던 북한군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하여 공산측의 주전선을 책임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엔군 총 병력 90만 중 한국군의 병력이 60만으로 다수였음을 보면 한국전쟁 후반기의 전투는 대부분 한국군과 중국군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5.7 철군 (1958)
1958년 9월, 철군하는 중국군을 환송하는 김일성. 왼쪽은 당시 인민지원군 사령관 양융(楊勇) 상장[16]
중국 인민지원군은 휴전협상이 마무리되자 1955년까지 80%의 병력을 철수시켰으나 약 25만의 병력은 북한지역에 남겨두었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중국측은 주한미군이 남한에 주둔함을 들어 북한 지역에 장기주둔을 희망했고, 이를 위한 영구 기지도 건설하고 있었으나 김일성이 강력히 주장해서 1958년말까지 모두 철수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북-중간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북한의 안보환경도 매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김일성이 무리하면서까지 중국군을 철수시킨 이유는 정권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책임을 뒤집어 씌워 박헌영파, 연안파 등의 반대파를 축청하고 있던 김일성은 북한주둔 중국군을 정권연장의 위험으로 보았다.
이후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내세우며, 중국이나 소련등의 외국의 입김을 배제하려 했고, 중국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북한의 국력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군비를 확충하게 된다. 결국 이것때문에 무리가 와서 1970년대부터 북한은 장기침체의 길을 걷게 되고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된다.
6 공군
1951년 3월부터 정규 공군의 일부도 중국 인민지원군 공군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사령관은 류전(刘震) [17], 후임은 사령관 대리인 녜펑즈(聂凤智) [18].
워낙 미국공군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중국공군은 한반도 북부에서만 방어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38선 이남의 중국 지상군의 활동은 거의 지원하지 못했지만, 북한측의 인프라와 중국군의 보급로를 폭격하는 미군 폭격기는 중국공군의 활약때문에 뜻하지 않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6.1 제1기 (1950.12~1951.9)
1951년 9월까지는 창립한지 1년도 안된 중국공군의 역량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실전경험을 쌓는데 주력했고, 주로 미국공군이 폭격을 감행하는 보급로와 교통로를 방어하면서 폭격기 요격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중국군 파일럿들이 너무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중국파일럿이 모는 MiG-9나 MiG-15와 같은 제트기들이 2차대전 베테랑들이 널려있던 미국-영국 공군의 프로펠러기들에게도 격추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6.2 제2기 (1951.9~1952.6)
미공군은 휴전협상이 시작된 1951년 8월부터 공산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철도보급로의 요점을 집중포격하는 스트랭글 작전 (Operation Strangle)을 실시했다.
중국공군은 미국의 폭격기부대에 대해 별다른 전술 없이 대량으로 출격하여 이를 요격하려고 했으나, 이것이 효율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4기로 이뤄진 편대가 서로 다른 거리와 고도로 한곳에 접근하여 합동 요격하는" [19] "일역다층사사제(一域多层四四制)" 전술을 개발해 실시했다. 쉽게 말해서 한편대인 4대가 1조를 이뤄 폭격기 한대에 접근해 요격하는 전술이다.
어쨌든 이들의 활동때문에 미국의 B-29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이 때문에 B-29는 주간폭격을 취소하고 야간폭격에만 전념했다. 공산군은 중국공군[20]의 활약으로 신의주-평양의 철도보급로를 어느정도 확보할 수 있었고 특히 철도요충지에 방공망을 대규모로 확충하여, 공산측은 보급을 지속할 수 있었다. 미국의 스트랭글 작전은 미국 자신도 실패 #로 평가했고, 곧 이런 요충지 타격이 아니라 일본에서 효과를 보았던 전면적인 전략 폭격이 실시되었다.
6.3 제3기 (1952.7~ 종전)
미공군은 교통로를 집중 폭격하는 스트랭글 작전이 실패한 이후, 그나마 남아 있는 산업기반을 분쇄하기 위해 북한 전역을 대규모로 전략폭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의 여러 수력발전과 농업관개망 시설이 집중 공략대상이었다. 평양시내는 석기시대가 되었고, 일본이 지어놓은 북한 북부의 산업시설은 잿더미가 되었으나, 북한은 원래부터 고도화된 산업국가가 아니어서 이렇다할 군수공업이 없었던데다가,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중국에 대한 월경폭격은 워싱턴에서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과는 달리 전황에는 별효과를 주지 못했다.
이에 맞서 중국 공군도 대규모로 투입되기 시작하였고, 경험이 쌓이면서 작전능력도 향상되어 야간요격 작전이나 방공망 운용 같은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큰 성장을 보였다.
6.4 총평
중국 공군 공식 역사서에서도 "창립 초기의 중국공군은 열세였으나, 전투중에 급속히 성장하였다"며 한국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소중한 실전경험을 쌓았다고 총평하고 있다. 몇년후 벌어진 진먼 포격전에서 대만군의 사이드와인더에 우수수 격추된 흑역사가 있긴 하다. 어쨌든 창설 1년도 안되어 대규모로 작전을 경험한 것은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명백하다.
3년간의 전투 끝에 여러명의 에이스가 나왔고 미군측은 그중 7명을 공인하고 있다. 그중 최고는 자오바오퉁(赵宝桐). 미군기 9대를 격추하였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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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바오퉁과 그의 MiG-15기. 9대의 킬마크가 선명하다.
한국전쟁후 서방측 평가로는 공산측과 유엔측의 전투기 교환비는 1:10정도로 알려졌으나, 구소련측 자료가 공개된 최근에는 1:2~3 정도라고 정정되고 있다.
7 인물
7.1 역대 사령관
펑더화이는 전쟁이 끝날대까지 사령관직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펑더화이가 귀국한 1952년 4월부터는 사령관 대리인 천겅과 덩화가 각각 지휘했다. 초기 제정러시아군 출신들이 지휘부를 이루었던 소련군과는 달리 중국군의 지휘부는 홍군시절부터 골수 공산당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역대 사령관은 모두 정치장교와 겸직이었다.
- 펑더화이 (1950.10~1952.4)
(1955년 당시계급 원수)[22] (1898~1974)
- 펑더화이는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을 저지하는 군공을 세웠으나, 미국의 압도적 공중우세로 인한 보급 차질로 불필요한 인명피해가 생기는 중공군의 열악한 현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쟁중에도 수차례 베이징을 방문하여 "우리 군대의 보급사정이 너무 나쁘다. 좀더 보급에 신경써달라"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와 싸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비나 화력보다는 병사 개개인의 사상의 각성을 중시한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한국전쟁 직후 임명된 국방부장 시절 미군과 같이 첨단무기와 프로페셔널한 전문군인을 갖춘 인민해방군을 양성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마오쩌둥의 의심을 샀고 결국 려산회의에서 대약진운동실패를 두고 마오쩌둥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실각한다. 한국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았던 1952년 머리에 종양이 생겨 중국으로 귀국했지만,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의 직함은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전협정에는 중국측 대표로 서명하게 되었다.
- 천겅 陈赓 (1952.4~1952.6)
(1955년 당시계급 대장) [23] (1903~1961)
- 펑더화이가 귀국하자 사령관 대리로 중공군을 지휘했다.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해군력에 대항하기 위해, 땅굴전술을 고안하고, 해안방어를 중시했다. 공병학교장에 임명되어 귀국.
- 덩화 邓华 (1952.6~종전)
(1955년 당시계급 상장) [24] (1910~1980)
여기서 문화대혁명 전에 운좋게 사망한 천겅을 제외하면, 펑더화이와 덩화는 모두 문화대혁명때 엄청난 박해를 당했다. 펑더화이는 홍위병에게 여러차례 두들겨맞았고, 덩화도 군에서 쫓겨나 뉴펑(牛棚)[26]에 갇혀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1976년에야 풀려난다. 뿐만 아니라 펑더화이와 같이 참전했다는 이유로 다수의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문혁때 감옥에 가거나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연대장급으로 참전한 조선족 조남기 상장도 마찬가지 신세였다가 후에 풀려났다. 그야말로 목숨걸고 초강대국 미군과 싸운후에 돌아온 것은 [27] 가차없는 토사구팽.
7.2 기타 인물
- 마오안잉 - 마오쩌둥의 맏아들. 소련에 유학중 독소전쟁시에 소련군에 입대해 참전한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의 연락 및 통역장교로 참전했고, 펑더화이와 같이 행동을 했으나 미공군의 폭격에 1950년 11월 한국전쟁 초기에 전사하였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
- 리영태 - 중장. 조선족. MiG-15기 파일럿으로 미군기 4대를 격추하고 후에 중국 공군 부사령관 재임.
- 왕훙원(王洪文) - 4인방의 한명으로 지원군을 모집하자 졸병으로 자원입대. 1년간 참전하고 부대순환으로 귀환.
- 츠하오톈(迟浩田) - 상장. 중국 前국방부장. 재임 1993~2003
8 군가
중국인민지원군 군가
中国人民志愿军 军歌
중국 군가중에서도 꽤 유명한 노래로, 중국에서는 명곡으로 꼽힌다. 짧은 민요조로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특징.
작사: 마푸야오(麻扶摇)
작곡: 저우웨이즈(周巍峙)
雄赳赳 气昂昂 垮过鸭绿江
힘차고 씩씩하게 압록강을 건너자
保和平 卫祖国 就是保家乡
평화를 지키고 조국을 지키는 것이 바로 고향을 지키는것.
中国好儿女 齐心团结紧
중국의 선남선녀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하여
抗美援朝 打败美国野心狼
항미원조에 나서 미국승냥이를 때려잡자.
9 평가
냉전시기 한국에서는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은 무기도 별볼일 없고 작전도 없이, 그저 병력수만 믿고 밀어붙이는 무식한 이미지로 널리 선전되었다. 6.25때 개입한 중국군을 표현하는데는 인해전술이라는 단 한마디로 이야기될 수 있다. 이는 남북 통일을 이루기 직전 개입해 이를 수포로 돌린 중공군에 대한 악감정 및 유엔군과 국군의 전술적 실책을 감추기 위한 면이 짙다. 이런 고정 관념때문에 군기도 엉망이고, 작전능력도 개차판인 당나라 군대라는 선입견이 2000년대 초반까지는 강했다. 흑히 한국전쟁 중후반을 다룬 전쟁물에서는 소수의 국군이 인해전술을 펴는 중공군을 격퇴한다는 클리셰가 많았는데, 냉전기에 이런 영화들을 보고 자라난 세대들은 자연스레 "중국군=약체 당나라군"이라는 인식이 퍼져있었다.
하지만 매튜 리지웨이는 물론이고, 채명신, 백선엽 등, 한국군 장성들의 회고록에서도 중공군의 군기나 사기에 대해서 매우 호평했고, 한국전쟁기에 관심을 갖는 밀덕후들이 많아짐에 따라 적어도 한국전쟁을 전문으로하는 밀덕 사이에서는 한국전 당시의 중공군에 대한 냉전적 저평가는 거의 사라진 상태. 하지만 밀덕 집단은 대체로 중까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밀덕들은 냉전시기의 왜곡된 관념에 젖어있는게 사실이다. 당장 나무위키의 인해전술 항목만 봐도 중국군이 국민당군 출신 투항병을 형벌부대로 삼아 운용했다는 등 버젓한 사실왜곡을 일삼고있는 밀덕 위키러가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국공내전 말기에 국민당군이 연대-사단급의 부대단위로 투항한 것은 홍군이 국민당군 투항병들을 후대하여 홍군에 편입시켰고, 이를 원치 않고 투항병이 귀향을 원하면 바로 여비까지 주어 석방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은 무기가 아니라 병사 개개인의 희생정신과 자발성을 가장 중시했는데[28] 이런 상태에서 사기가 있을리 없는 국민당군 투항병을 형벌부대로 운용하여 최전선에서 총알받이로 썼다는 것은 냉전시대의 흑색선전에 불과하다.
중국군은 큰 인명손실을 보긴 했지만, 완충지대를 확보하려던 한반도 출병의 목표를 달성했고, 유엔군과의 3년간의 대결을 통해서 2차대전 일본군 수준도 안되었던 통신-보급-화력 등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거기에 막강한 미군과 일진일퇴를 하면서 보여준 선전으로 중국측이 그토록 염원했던 국가의 위상은 한껏 드높였기 때문에 중국입장에서는 한국전쟁 참전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완승은 아니지만, 5~6년전 중일전쟁 때만 해도 미군, 소련군에게 밀려 패배하였던 일본군에게 패배하였던데다가 [29] 아편전쟁 이래 100여년간 서양세력에게 짓밟히기만 했던 중국이라 한국전쟁의 무승부는 충분히 국가의 자존심을 세운셈. 그 후로도 베트남 전쟁에 지원을 하며 서양세력을 골탕먹이지만, 그 공산국가 간 분열이나 마찰로 인해 베트남을 공격했다가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철수했다.[30] 이것이 바로 중월전쟁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측은 아직도 한국전 개입(항미원조)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하지만 예전에 북한의 손을 들어줘 북침설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정부에서 검열하는 바이두 백과에서도 북한이 먼저 침공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신 북한이 먼저 공격한 건 맞는데 어쨌건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 시점에는 미국이 침략자가 되었으니까 지원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31] 이 문서 처음에도 나오지만, 이것이 중국이 개입한 명분이기도 하고.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에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마오쩌둥과 대장정에 국가의 정통성을 두고 있는 현 중국체제에서 마오쩌둥이 직접 결정한 파병에 대해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러시아의 경우 소련 붕괴후 북한에 대한 지원에 대해 사과했다고 하지만, 그건 소련이 무너지면서 아무런 정치적, 외교적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2010년대 들어 소원해지고, 북한의 여러 막장행각이 중국에도 알려지면서, 중국의 웹사이트에서는 "지원군 전사들이 지하에서 통곡할 지경"이라는 식으로 북한체제를 도왔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김씨왕조와 별도로 북한의 가치 자체는 인정하는 편이다. 이중에는 2차 한국전쟁이 터지면 참전하자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이유는 북한주민들과 조중우호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라나.
게다가 이 전쟁에서 전사한 중국군이 매우 많았다. 거기에 많은 중국인들은 항미원조 전쟁에서 중국군은 미국과 싸웠을 뿐, 한국과 싸웠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 한국군, 영국군, 호주군, 터키군 등과도 싸우긴 했지만 주로 싸우게 되는 상대가 미군이었다. 한국 전쟁에서 중국군 투입 이전에는 '조선전쟁' 이라고 불리고, 그러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하면서 중국군 투입, 이때부터 '항미원조 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10 여담
- 김일성과 펑더화이는 매우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서울을 점령했던 중공군이 UN군의 거센 공세와 보급 차질때문에 펑더화이는 서울에서 철수하려고 했는데, 이를 안 김일성이 펑더화이의 사령부까지 찾아와 주먹싸움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
물에 빠진 놈 건져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고 지랄이렇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펑더화이는 김일성보다 13살 위이다.마찬가지로 UN사와 이승만정부도 사이가 매우 안좋긴 했다.
- 중공군은 보급 차질 문제 외에도 의료 지원도 열악하여 많은 병력을 질병으로 잃었다. 특히 유행성 출혈열이 중공군 내에서 돌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공산진영에서는 유엔군이 세균전을 실시했다고 주장했다.[32] 그러나 한국군도 이런 질병으로 잃은 병력이 상당했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무산. 게다가 유행성 출혈열은 원래 한국의 풍토병이다.
- 미국에서도 이 전쟁은 잊혀진 전쟁이지만, 중국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기습백호단"을 제외하면 미디어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는 국공내전이나 중일전쟁을 다룬 영화가 엄청나게 쏟아진 것과는 매우 대조적. 결과적으로 미국-중국 모두에서도 6.25는 잊혀진 전쟁이 된 것이다. 1990년대 후반 한국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교량(较量)"이 최근에 나온 거의 유일한 중국측 6.25물이다. 집결호에서 6.25전쟁을 조금 다뤘다.
- 중국측 전몰자들은 1951년 중국 선양에 있는 "항미원조열사능원"에 안장되었다. 중국측은 남한지역에서 작전시 전사자 유해를 수용하지 못하고 철수한 경우가 많았는데, 한국측은 일단 이들을 가매장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파주 적군묘지로 옮겼고, 한중관계가 좋아진 2000년대에는 간단한 묘비까지 세워 관리해 주었다. 이렇게 가매장되었던 중국전몰자 유해는 박근혜 정부 들어서 중국측에 인도하고 있다. 중국측은 성대한 추도행사를 열고 이들을 항미원조열사능에 안장하고 있다.
- 이와는 별도로 북한 신의주 맞은편의 중국 단동에는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纪念馆)이 세워져서 중국군의 여러 물자 및, 중국측이 노획한 한국군 및 유엔군의 장비를 볼 수 있다.
- 중국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통한 조선족들이 지원군에 상당히 포함되었다고 한다. 연변의 조선족 노인들중에는 중국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 여러 전투들에 관한 한국측 발표자료와 중국측 발표자료의 전과나 사상자 수가 차이가 많은 것이 눈에 띠며, 두세배는 보통이다. 뿐만 아니라 한중 양국의 전사를 보면 자군의 명백한 패배를 두고도 "비록 물러섰지만,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다시 반격에 나서 상당부분 회복했다"는 식의 정신승리적인 기술도 많이 눈에 띤다. [33] 사실 이런 문제는 모든 전쟁에서 나타나는 점이므로, 딱히 한국과 중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승자측은 전과를 부풀리고, 패자측은 피해를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진상을 알려면, 양측의 주장을 교차검증을 해봐야 하고, 전투 전후의 상황도 잘 살펴봐야 한다. 그나마 미군측 전사가 가장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적어도 미군은 자군의 피해는 그다지 축소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공산측의 전과로 뒤집어 보면 대충 그림이 나온다.
- 중공군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당시 한반도에 파견된 중공군은 개인화기/분대 공용화기는 충실하였고, 오랜 기간 국공내전으로 단련된 정예부대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면 의문이 남는것이, 중공군 3개 대대 병력이 당시 국군 1개 소대 35명을 뚫지 못하고 좌절된 베티고지 전투나, 심지어 2개 사단을 19명이 물리친 캐나다인 리오 메이져의 전과는 설명이 안된다. 금성전투의 예를 들면 중공군은 12개 사단을 동원하여 국군 5개사단이 지키는 금성을 공략하였으나, 금성천 북안의 원진지까지만 진출하는데 그쳤는데, 이것을 과연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무장이 충실한 군대의 전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장이 부실하였거나, 병사의 훈련이나 실전경험이 부족했거나, 사기가 낮아 싸우려들지 않았거나, 지휘가 졸렬했거나 혹은 보급의 한계점에 도달했거나 등등 여러 이유가 있어야 상기의 전과가 성립될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평가의 부작용으로 중공군의 역량을 너무 과도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34]
- ↑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 공식모토이며,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한동안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썼다. 현재는 관계가 돈독해진 대한민국을 의식해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표현은 중국정부에서 자제하는 편. 중국의 공식매체에서 표현은 대체로 조선전쟁이라고 쓰고 있다.
- ↑ 거기에 북한 지도부에는 무정, 김두봉 등, 옌안시절 중공지도부와 동지였던 조선인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 ↑ 또한 만약 북한이 중국령이자 조선족 밀집지역인 연변 지역에 망명정부라도 세운다면, 소련이 이 지역을 북한에 할양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고 한다.
- ↑ 제4야전군은 거의 린뱌오의 사병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1960~70년대까지의 한국전쟁사들은 하나같이 린뱌오를 중공군의 초기공세 지휘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린뱌오는 한국전 개입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기간 내내 병을 핑계로 베이징에 틀어박혀 있었다. 린뱌오는 1955년 원수 계급 수여식에도 건강때문에 불참했기 때문에 이는 꾀병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 ↑ 이때문에 미군은 중공군개입 초기에 상당히 병력규모를 과대평가하기도 했다.
- ↑ 냉전 초기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지시라는 설이 대세였으나, 흐루쇼프 회고록과 냉전붕괴 이후 문서를 보면 김일성 및 박헌영이 계혹 모스크바에 와서 소극적인 스탈린에게 한국전 허가를 요청한 사실이 밝혀졌다.
- ↑ 이렇게 미그기가 출몰하는 평양이북을 미그앨리라고 하며, 북한지역을 석기시대로 만들다가 뜻하지 않은 강적을 만난 B-29가 큰 피해를 입었다.
- ↑ 원문의 표현으로는 "there would be the greatest slaughter"
- ↑ 이 당시 북진하는 유엔군 총병력은 약20만으로 알려져 있다.
- ↑ 참고로 개전 초기 실제 전투에 참가한 중공군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대략 15만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공세 초기에는 중공군이 전략적으로는 전력이 열세였지만, 집중운용을 통해서 전술상 우위를 확보했었다. 그 덕분에 유엔군인 중공군 개입 이후에 엄청 밀렸다. 여담이지만, 중공군은 전쟁 내내 단 한번도 전략상으로 유엔군을 압도하는 전력을 확보하지 못했었다. 중공군 개입 초기를 제외하면, 중공군은 늘 유엔군에 비교우위의 전력만 확보했었다.
- ↑ 원문 Well, if they go fast enough, maybe some of them can be home by Christmas.
- ↑ 원래는 맥린 부대(Task Force MacLean)라고 이름이 붙었는데 부대장 맥린 대령이 부상후 포로가 되자(곧 전사) 후임인 페이스 중령이 지휘권을 인수했고, 이름을 페이스 부대라고 했다.
- ↑ 펑더화이는 미군은 기동을 차량에 의존하기 때문에 도보행군을 싫어하기 때문에 산악지역의 작전은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 예상은 거의 맞아떨어졌다.
- ↑ 북한 인민군 같은 경우는 후송이 어려워졌을 때 포로를 처형한 경우가 여럿 있었지만, 인민해방군의 경우는 1920년대 초창기부터 마오쩌둥의 군율로 포로학대는 엄금이었다. 자세한 것은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보라.
- ↑ 리지웨이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 전투를 들어 한국군을 혹평했고, 맥아더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국군을 어느정도 띄워준 것과는 대조적이다. 참고로 펑더화이는 리지웨이와 마찬가지로 한국군 수준을 "국민당군" 정도로 평가했다고 한다.
- ↑ 이 당시 중국군은 계급이 부활되었고, 소련군 군복을 모방한 55식 군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 ↑ 1955년 계급은 상장
- ↑ 1955년 중장계급을 달았다.
- ↑ 四机编队、多批多路、多层配置、集中一域、协同作战
- ↑ 중국공군 뿐만 아니라 소련공군의 2차대전 참전 베테랑 파일럿들이 중국공군 혹은 북한공군 도장의 미그기를 몰고 다수 참전했기 때문에, 순수히 중국공군의 공적은 아니다.
- ↑ 자오바오퉁(1928~1983) 1945년에 입대했고, 1949년에 창설멤버로 인민해방군 공군에 참가. 파일럿 교육을 받았다. 조종 교육을 받은지 1년만에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미군기 9대를 격추했으니 대단한 재능인 셈. 베이징 군구 공군부참모장으로 퇴역했다. 전쟁영웅인데다가 매우 미남이었기 때문에, 여자관계가 복잡, 조강지처를 버리고 여인과 동거하기도 하는 난봉꾼 기질도 있었다고. 이런 여자관계 때문에 문혁기간에 엄청나게 비판받았고, 군평판도 안좋았는지 한국전 최고 에이스치고는 출세하지 못했다. 중국공군 2위의 에이스(7대)인 왕하이(王海)는 공군 최고계급인 상장까지 올라 공군사령관을 역임한 반면, 이양반은 기껏 군구공군의 부참모장에 그친데다가 군계급 부활 이전 퇴직한후 사망해서 장성계급을 못달았다. 하지만, 전기인 "공중전의 왕(空战之王)" 때문에 중국에서는 사카이 사부로와 같은 유명인사다.
- ↑ 한국전쟁 참전 당시 중국군은 직책만 있고 계급은 없었다.
- ↑ 이 계급은 한국의 대장보다 높은 계급으로 간주한다. 상급대장에 해당.
- ↑ 한국군의 대장에 상당
- ↑ 1952.10월 중국군이 유엔군의 추계공세을 막아낸 전투. 중국측에서는 크게 선전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국군이 대승을 거둔 백마고지 전투와는 달리, 상감령 전투는 참전한 국군의 흑역사이기 때문인지 잘 알려져있지 않다.
- ↑ 원래는 외양간이라는 뜻이지만, 문혁시기에는 홍위병이 만든 사설감옥을 말한다.
- ↑ 제공권 없이 싸우던 중공군은 장성급도 매우 큰 피해를 입어서, 군장(군단장)급이 세명, 사단장급에서 7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비교적 후방에 위치했던 사령부에서 근무했던 마오쩌둥의 아들인 마오안잉조차도 전사했을 정도이니..
- ↑ 소위 인민전쟁 전략으로 삼대기율 팔항주의와 함게 인민해방군의 군기를 엄정하게 해서,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 인민들의 민심을 얻는데는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병사의 정신력만을 중요시하고, 무기체계와 현대전술을 홀대하는 부작용을 노출하였다. 이런 풍조는 중월전쟁의 졸전으로 나타났다.
- ↑ 1944년이면 일본측은 패색이 짙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전선에서는 중국군을 묵사발로 만들면서 활개치고 있었다. 물론 농업국가에 불과한데도 압도적인 물량과 잠재력, 끈기를 보여준 중국군을 꺾지 못해 결국 일본은 중국에게 항복했지만, 중국 입장에선 명쾌한 승전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 ↑ 단, 베트남군은 2차 대전 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키며 쫓아내고 독립한데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에게 패배를 안겨주기까지 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 ↑ "1950年6月25日,朝鲜人民军开始进攻韩国(人民军主力为四野三个师),朝鲜战争爆发"
- ↑ 이 문제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화에서 다루기도 했다. 그러나 근거가 상당히 부족한 음모론에 가깝다는게 대부분의 평가.
- ↑ 가령 상감령 전투는 분명히 유엔군 공세의 실패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측 자료로 작성된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전략적 승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백마고지 전투는 중국 바이두 백과에서는 한국측의 승전주장과 함께 중국측의 무승부 주장도 함께 기술하고 있다. #
- ↑ 모든 전쟁이 후대에 이런 평가-재평가-재재평가의 과정을 거쳐서 다수가 동의하는 객관적인 설명이 정착된다. 더구나 한국전쟁은 연인원 수백만이 동원된 엄청난 규모에 비해서 오랫동안 잊혀진 전쟁으로 거의 연구되지 않은 분야이다. 전쟁의 당사자인 남북한은 수십년간 정신승리식 선전만 해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