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tle of Berlin (영어)
Die Schlacht um Berlin (독일어)
Берлин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ъная операция (러시아어)
베를린 전투 | ||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폐허가 된 독일 국회의사당 | ||
날짜 | ||
1945년 4월 16일 ~ 1945년 5월 2일 | ||
장소 | ||
제3제국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 ||
교전국 | 소련군 소비에트 연방 | 독일군 나치 독일 |
지휘관 |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바실리 추이코프 |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쿠르트 폰 티펠스키르히 페르디난트 쇠르너 헬무트 바이틀링 헬무트 라이만 에리히 베렌펭거[1] |
결과 | ||
소련의 승리 | ||
영향 | ||
나치 독일의 항복 유럽 전선의 종결 연합국 4개국의 독일 분할 점령 | ||
병력 | 약 250만 명[2] - 탱크 + 전투 차량 6,250대 - 항공기 7,500기 - 야포 41,600문 | 766,750명 - 기갑 전투 차량 1,519대 - 항공기 2,224기 - 야포 9,303문 - 히틀러 유겐트, 경찰 등 기타 전투 병력 85,000명 |
피해규모 | 총 사상자 361,367명 - 전사 및 실종 81,116명[3] - 부상 280,251명 - 탱크 1,997대 손실 - 야포 2,108문 손실 - 항공기 917기 격추 | - 92,000 ~ 100,000 명 전사 - 부상 220,000 명 - 포로 480,000 명 - 민간인 22,000 명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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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일 독일 국회의사당[4]에 적기(赤旗)를 게양하는 붉은 군대 장병들해당 위키피디아 항목[5][6][7]
두 번째 사진에 있는 전차는 IS-2m 2대, T-34/85, ISU-152, Stalinetz S-65 트랙터와 Heavy 203-mm howitzer B-4.
목차
TV 맥스 - 베를린 공방전과 나치 독일 항복 |
1 개요
증오가 아주 깊어졌다. 전쟁을 끝내고 싶어졌다. 우리를 죽이려 한 저들을 전멸시키자. 저들을 없애자. 1명도 빠짐없이!- 소련군 '요제프 프라우포프'
절망적이다. 모두들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다.- '막스 펨젤' 대장, 베를린 수비 방어선을 시찰한 후
그리고 나는 외치고 싶었다.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의 땅 속에 누워 있는 이들. 우리가 거쳐온 땅에서 영원히 잠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동무들, 우리가 해냈소!"- 바실리 그로스만 (소련 종군기자), "전쟁의 해들(Годы войны, Years of the war)" 중.
소련군이 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는 1시간이 걸릴 것이다. 허술한 방어선의 꼬락서니를 본 소련군이 55분 동안 웃으며 뒹굴다가 5분 안에 깨끗이 거덜내 버릴 것이니까...
파시스트의 소굴, 앞으로 50km - 소련군 전차의 낙서
모든 병사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현재의 참호에서 최후를 맞으라.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게르만 민족도 사라진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던 1945년 5월 소련군이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킨 전투이다. 제3제국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 함락이 임박하자 자살했고, 히틀러에 의해 후임 대통령에[9] 임명된 해군 원수 칼 되니츠 제독을 수반으로 하는 플렌스부르크의 독일 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 이로서 1939년에 시작된 유럽 전선의 전쟁은 끝이 났으며, 일본 제국과 함께 전 세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나치 독일은 멸망하였다.
2 배경
1944년 여름에 펼쳐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의 결과로 동부전선 독일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이 완전히 붕괴했고, 이에 따라 독일군은 벨로루시에서 철퇴하여 비스와 강을 경계로 소련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벌어진 소련군의 남부 공세 때문에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도 물러났고, 이때 독소전쟁 초기부터 독일군의 동맹국이었던 루마니아와 핀란드는 소련과 강화를 맺고 소련군 측으로 돌아서서 독일군을 공격하였다(라플란드 전쟁). 이러한 동부전선의 붕괴와 함께 설상가상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순식간에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접근했다.
소련군은 1944년 가을을 끝으로 공세를 중지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는 모스크바 전투 이후의 반격 작전과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강박감에 의해 공세종말점을 억지로 넘어가면서까지 진격을 고수하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군에 역습당해 참패하고 탈환한 영토를 다시 빼앗긴 전훈에 따른 것이었다. 문제는 히틀러가 이것을 가지고 전세를 오판한 것이다. 이 때문에 "동부에서는 우리 독일군이 소련군을 패퇴시켰음. 그러니까 서부에서만 영미군을 패퇴시키면 독일은 다시 리즈시절임!"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급 문제로 진격이 둔화된 서부의 영미 연합군에 공세작전을 계획했다. 이는 독일 최후의 공세였다.
이것은 상당히 도박적인 작전이었는데 당시 기갑 웨이브로 무자비한 파상 공세를 펴던 소련군에 맞서고 있던 동부전선의 정예 기갑 부대를 빼내어 투입했기 때문에, 당시 동부전선의 총책임자였던 총참모장 하인츠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항의했다. 심지어 아르덴 대공세가 실시되기 전에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마저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슈페어는 군인이 아닌 일반인이라 군사적인 일은 잘 몰랐지만 일반인도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동부전선은 대단히 중요했는데 이에 반해 히틀러의 전략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 중요한 동부전선의 방어를 포기하고 서부전선에 올인한 셈이며, 이게 성공했다면 아마도 제3제국의 수명이 조금은 더 연장될 수 있었겠지만,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제공권도 없었고 보급을 노획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략을 가지고 움직인 독일군은 참패했고, 공세가 실패한 서부전선뿐만 아니라 이미 붕괴된 동부전선에 더욱 더 거대한 전력 공백을 초래했다.
한편 독일군의 서부 공세에 당황한 서방 연합국은 압력을 덜기 위해 소련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는 한편 전쟁 종결의 거대한 상징이 될 베를린 공략을 소련에 넘겨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서방 연합군의 피해도 적진 않았지만 소련과 붉은 군대의 어마어마한 피해에 비하면 보잘 것없는 수준이었고 서방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전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더 이상의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에 따라 베를린 공략은 소련군의 몫이 되었다. 독일 서부를 순조롭게 진격하던 서방 연합군은 베를린에서 약간 떨어진 엘베 강 인근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이것이 유럽 전선에서 서방 연합군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이후 젤로 고지 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항목을 참고.
3 베를린의 최후
▲ 베를린의 국민돌격대와 국민돌격대의 수장 파울 요제프 괴벨스.
병력 대부분이 소년과 중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즈음엔 독일 전역에서 젊은 남성들이 거의 전부 동원된 상태라 징병 연령이 15~60세라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3개월 간의 대규모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4월, 스탈린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등 전선군 사령관들을 모스크바로 소집해 베를린 공략에 대해 논의했다. 모든 사령관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베를린 공략을 맡고 싶어했지만, 스탈린은 특정 사령관에게 베를린 공략을 맡긴다고 하지 않고 그냥 "베를린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전선군이 베를린 공략을 맡을 것이다."라고만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전선군 사령관들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신들의 사령부로 돌아가 부하들을 갈굼 닦달하며 이 경쟁에 이길 생각만 했다.
베를린 주위에 포진한 소련군은 3개 전선군으로 구성되었고 병력은 약 250만 명, 전차 6,250대, 전투기 7,500대, 각종 화포 40,000문 등 거대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수비대는 70만 명의 병력과 1,519대의 AFV[10], 2,000여 대의 전투기, 9,000문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3:1 ~ 4:1의 전력 차이가 나고 있었고, 그나마 저 독일군 병력 수치도 전부 멀쩡한 병력은 아니고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 병자, 지상전투에 숙달이 덜 된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에서 차출한 병력, 그보다도 못한 전투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소련군에 숫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에서도 확실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방 연합군이 담당한 서부전선에서도 연합군이 베를린 방면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렸다가 동부전선으로 복귀시키는 힘든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 베를린 전투에서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들. 사진 속 포로 대다수가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 장병들이다. 1,000여명의 해군을 포함해 꽤 많은 수의 해공군 인원들이 방어 전투에 육전대로 투입되었다.
3.1 젤로[11] 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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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젤로 고지를 돌파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의 T-34/85 중형전차.
사령부에 돌아온 원수들은 서둘러 공세를 준비하였고, 4월 16일 북에서 남으로 제2벨라루스(로코솝스키), 제1벨라루스(주코프), 제1우크라이나(코네프) 전선군들은 일제히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 작전들을 통틀어 오데르-나이세 작전이라고 한다.
북쪽의 로코소프스키 군은 오데르 강을 건너 25일 제틴을 탈취하고, 베를린의 동북쪽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의 코네프 군은 독일의 쇠르너 군을 쉽게 돌파하고 4월 25일 동진하던 미군과 엘베 강 연안의 레크비츠(Leckwitz)에서 조우했다.[12][13] 이로서 독일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로코솝스키 군도 영국군과 엘베강 연안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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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를 건너는 미군을 소련군이 도와주는 이 사진은 당연하겠지만 선전용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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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베 강에서의 미군과 소련군. 서로 헬멧과 모자를 바꿔 썼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 웃던 상황은 5년 후...
문제는 전선 중앙에 있던 주코프의 제1벨라루스군이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점 작전에서 패주한 후 젤로 고지로 후퇴하여 포진하고 있던 독일의 비스툴라 부대였다. 이 부대는 독소전쟁 초반부터 수비의 달인이라고 알려져 있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3월 말에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지휘하고 있었으며, 병력 수는 소련군이 거의 10:1로 압도적이었으나 지형 면에서는 소련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쉬웠던 고지에 위치한 독일군이 훨씬 유리하였다.
하인리치는 공병 부대를 투입해 오데르 강의 연안의 저수지를 역류시켜 진격로를 습지로 만들어 놓았고, 이 뒤로 참호와 벙커, 대전차호로 이루어진 세 겹의 방어선을 만들어 놓고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조성된 인공적인 습지뿐만 아니라 봄철의 해빙까지 겹쳐 도로가 진창이 되는 바람에 소련군의 진격은 한층 어려워졌다. 하지만 주코프는 누구보다 베를린을 먼저 공략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고,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한 진격으로 이를 돌파하려고 하였다.
4월 16일에 소련군은 카츄샤 다연장로켓을 시작으로 10,000문이 넘는 각종 화포로 맹포격을 한 뒤 젤로 고지로 쳐들어갔지만, 습지 때문에 진격이 지체되었다.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심하게 느려지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전화를 걸어서 "동무, 왜 이리 느림? 코네프 동무가 대신 베를린 가도 됨?"이라고 닦달했다. 주코프는 이 말을 들고 더욱 조급해져서[14]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예비 병력까지 투입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를 하거나 조금만 기다렸다가 먼저 적진을 돌파한 다른 전선군의 도움을 받았으면 쉽게 공략할 수 있었던 곳에서 결국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이 때문에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사망자가 1만 여 명에 불과했던 반면, 소련군은 적어도 3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15] 병력 차이가 10:1인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이렇게 적군보다 더 큰 피해를 낸 것은 명백한 지휘 부실이며, 주코프의 흑역사로 알려져 있다. 그냥 하인리치가 센 게 아닐까
그러나 병력이 워낙 열세인 데다가 보급과 증원도 거의 없었던 독일군은 더 이상 소련군을 저지하지 못했고, 소련군은 3일 간의 맹공과 큰 희생 끝에 결국 이곳을 가까스로 돌파하여 주코프가 베를린 공략의 주공을 맡게 되었다.
3.2 포위되는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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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근교에서 소련군에게 항복하는 독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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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시내에 설치된 대공포. 이 대공포대들의 조작원들은 대부분 히틀러 유겐트의 청소년들이나 소련군 포로 등의 인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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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시내에서 중심지를 향해 포격을 하는 소련군.
4월 21일 젤로 고지를 돌파한 주코프 지휘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 휘하 포병은 드디어 베를린을 무차별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 포격에 사용된 포탄 숫자는 서방 연합군의 폭격기가 대전기 내내 베를린에 투하한 폭탄보다도 더 많았다. 제1벨라루스 전선군이 동쪽에서 베를린으로 전진하는 동안 코네프 지휘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베를린의 남방을 우회하여 서진하였다. 주코프 군의 북쪽에서는 로코솝스키 원수의 제2벨로루시 전선군이 베를린 북쪽을 우회하여 베를린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독일 중앙 집단군을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쇠르너는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바우첸에서 다시 선빵을 날려 코네프 군을 저지하려 했다. 쇠르너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히틀러는 이것을 보고 여기서 더욱 더 대담한 계획의 명령을 내려서 주코프 군까지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미 그럴 만한 역량이 없었고, 그런 무모한 작전을 벌이다가는 소련군에게 포위 섬멸당할 것이 명백했다. 이런 병크를 보다못한 하인리치는 히틀러의 부관들에게 직언을 하여 이를 막았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오데르 강변에 있던 부셰의 9군은 후퇴를 요청했지만 전선을 유지하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결국 고립된다. 여기에 체코 방면의 쇠르너가 말빨로만 히틀러를 안심시키고 측면에서 소련군을 한방 먹인다고 허풍을 친 것도 히틀러의 오판을 도왔다. 한편 엘베강서 미군과 대치 중이던 벵크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이고 무장친위대 장군인 펠릭스 슈타이너 대장에게 새로운 부대를 창설해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것을 명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병력과 물자 모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명무실한 허세에 불과했고, 히틀러는 제대로 보고도 받지 않은 채 이 부대가 이미 편제를 완료했다고 판단하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슈타이너에게는 그 때까지도 한 줌밖에 안 되던 병력 밖에 없었고, 사방팔방으로 밀려드는 소련군에 맞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호헨리헨에 짱박혀 있던 하인리히 힘러는[16] 항복 협상을 위해 자신의 무장친위대 병력 15,000~20,000명을 몰래 빼돌려 놨고 자신과 친한 슈타이너에게 히틀러와 사령부 명령을 쌩까라고 지시했다.
4월 23일에 열린 작전 회의에서 슈타이너가 공격하지 않았던 걸 알고 욕을 퍼부으면서 직접 헤르만 페겔라인[17]을 파견한다. 참모진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슈타이너의 부대가 아직 제대로 편제도 되지 않았고 공격도 당연히 실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24일에도 슈타이너가 공격에 나서지 않자 히틀러는 "나는 전쟁에서 졌다!"이제 알았어?고 소리쳤고, 탈출하느니 차라리 자살할 것이라 말했다.[18]
▲ "베를린은 독일에 남아있을 것이다"를 표어를 비웃듯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지나가는 소련군의 ISU-122 자주포.
이 와중에도 소련군의 각 전선군들은 베를린 포위 작전을 계속하였고, 4월 23일에 히틀러는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을 최후의 베를린 수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4월 24일 주코프 군과 코네프 군이 베를린 남쪽에서 만나게 되자 이제 베를린은 소련군에 의해 몇 겹으로 포위되었고, 이제 히틀러는 베를린을 탈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어차피 탈출해봤자 갈 데도 없었지만 게다가 소련군의 포위를 저지해 보려던 쇠르너의 선빵은 소련군의 역습을 받아 박살났고, 이로써 베를린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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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처파우스트로 무장한 국민돌격대원들.
독일군은 사용 가능한 모든 장비를 다 동원했지만 제대로 된게 있을 턱이 없었고 급히 모은 국민돌격대에게 지급해 줄 소총조차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들에겐 그나마 수량이 좀 많았던 판처파우스트만이 지급되었다. 판처파우스트를 지급받은 인원들은 사진처럼 구덩이나 건물에 숨어있다 접근한 소련군에게 기습적으로 발사하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이 때문에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군 전차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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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형에 처해진 시체.
한편 이쯤 되니 상층부는 물론이고 최하위 말단 병사까지 눈앞에 다가온 나치 독일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상부는 병사들 사이에 퍼진 패배의식을 막는답시고 민간인과 군인을 가릴 것 없이 패배주의자라며 그냥 거리에 목을 매다는 교수형을 남발했다. 전자인 민간인은 독일 드라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 등장하는 주인공 일행인 그레타가 술집에서 병사들에게 한마디 했다가 바로 수용소로 끌려가는[19] 것으로 묘사되었고 후자인 군인은 퓨리(영화)와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에서 묘사되어 나온다. 다운폴에선 아예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도, 다 끝나갈 때조차도 민간인을 처형하는 그라이프 코만도(Greifkommando)가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3.3 나치 독일의 최후 - 하켄크로이츠가 추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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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독일군 시신. 소련에서 촬영, 합성한 선전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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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노마크에 끼어 죽어있는 독일 민간인. 영화 다운폴에서도 재현되어 나왔을 정도로 베를린 전투의 중요한 사진으로 취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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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 독일의 상징인 독수리를 밟고 올라선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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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시내에서 엔진을 제거하고 땅에 차체를 파묻고 고정 포대로 운용되던 5호 전차 판터. 전쟁 종료 후 재건 과정에서 당연히 뽑혀 치워졌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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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시내로 진입하는 소련군의 T-34/76 중(中)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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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시내에서 교전 중인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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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건너를 주시하는 소련군.
이쯤 되면 사실상 항복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독일군은 계속 저항했다. 항복을 택하기엔 나치가 전쟁 내내 동유럽에서 자행한 범죄와 잔학 행위가 너무 심했다. 소련에게 항복해서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던 독일군으로서는 조금이라도 오래 버텨서 더 많은 국민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서부의 영미 연합군 점령 지역으로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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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가 된 독일 국민돌격대.
한편 히틀러는 패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자 측근들의 탈출 요청도 거부하고[22] 자신은 베를린에서 죽을 것이라며 완강하게 버텼다. 또한 좀 더 많은 병력과 주민들을 보존하기 위해 후퇴해야 한다는 측근들이나 현장에 나간 지휘관들의 말을 무시하고, 모든 독일인들에게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에 항명하는 지휘관들은 모두 해임되었다. 연이은 패배에 히틀러는 후퇴의 후자만 나와도 병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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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에 사격하는 소련군의 SU-76 경자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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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의 소련군. 교전이 끝나고 정리된 구역이라 분위기가 한산하다. 앞의 시체는 옆에 떨어진 FG42 소총과 헬멧의 형태를 통해 독일군 공수부대원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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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IS-2 중전차.
한편 소련군은 베를린에 본격적으로 진입해 소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최후까지 처절하게 저항하며 싸웠지만, 소련군의 물량 공세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련군은 마치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처럼 건물 하나하나를 청소하면서[23] 느리긴 했지만 계속 진격하기 시작했고, 독일군은 점점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티어가르텐 중앙으로 몰리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히틀러는 4월 29일 비서에게 총통 직책을 다시 둘로 쪼개 칼 되니츠에게 대통령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총리 직위를, 페르디난트 쇠르너를 육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유서를 작성하게 했다.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겨 달라고 했다가 찍혀서 이미 신임을 잃고 있었고, 하인리히 힘러도 총통 몰래 스웨덴의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 협상을 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마찬가지로 승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어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4월 30일 그녀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 자살 직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시체는 유언에 따라 측근들에 의해 화장되었다.
총통 벙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소련군은 계속 중심을 향해 진격하였고 4월 30일에 나치 독일의 심장인, 베를린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도달하였다. 총통 벙커가 있는 총통 관저도 제국의사당에서 가까운 곳 지하에 있었다. 제국의사당 구역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무장친위대의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였다. 이들은 몇 안되는 티거 2, 3호 돌격포, 4호 전차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벌였다. 제국의사당 내부는 이 사단의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육박해 오는 엄청난 수의 소련군에 맞서 무려 12시간 동안이나 제국의사당을 방어했다.[24]
▲ 종전 직후 촬영된 동물원 대공포탑. 사진으로만 봐도 무식하게 튼튼하게 생겼다.
사실 일개 건물에 불과한 제국의사당이 이렇게 의외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의사당 내부와 주변의 병력들이 필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티어가르텐을 사이에 두고 불과 2km 떨어진 베를린 동물원 자리의 일명 '동물원 대공포탑(Zoo flak tower)'의 화력 지원도 컸다. 이 대공포탑은 독일군 최강의 대공포였던 12,8cm FlaK 2연장 4정(총 8문)과 많은 중·소구경 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시의 대구경 대공포가 다 그랬듯이 12,8cm FlaK 또한 여차하면 대지 사격이 가능했는데,[25] 어떤 소련군 전차든 종류나 각도를 막론하고 2~3km 내에서 한방에 고철로 만들 수 있었다. 방어력 또한 강화 철근 콘크리트로 벽/천장 두께만 2.4m/1.5m로 무식하게 튼튼하게 만들어진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라, 소련군이 실전에서 사용한 가장 강력한 야포인 그 유명한 203mm B-4 곡사포로도 흠집조차 낼 수가 없었다.
베를린이 거의 다 점령된 상태에서도 소련군은 이 요새의 사각을 피해 다녀야 했는데, 제국의사당은 그 사각에 고스란히 들어올 뿐더러 사이에 있는 티어가르텐(공원)이 이 따위 상태라(왼쪽 위 작게 보이는 건물이 제국의사당이고, 대공포탑은 사진엔 안 나왔지만 오른쪽 아래에 있었다) 은·엄폐가 될 리가 없었으므로, 대공포탑이 건재한 이상 제국의사당을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끝내 파괴는 못하고 4월 30일에 소련군이 사절을 보내 항복시켰으며, 대공포탑이 항복하자마자 제국의사당이 함락되었다.[26] 실제로 저런 콘크리트 요새는 현대의 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하여 지진폭탄이나 신형전함의 함포사격, 열차포 정도를 동원해야 부술 수 있지 당시 사용하던 야포나 자주포로는 쉽사리 파괴하는게 불가능했다.
어쨌든 제국의사당 내부의 독일군이 전멸함으로서 의사당은 함락되었다. 이들이 전멸한 직후 소련군은 결국 나치 독일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가 5월 1일의 오전, 한밤중이었다. 소련군은 국기를 게양할 당시에도 독일군의 방해를 상당히 받았다. 물론 깃발만 꽂는다고 그 순간부터 전투가 땡 하고 끝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국의사당과 그 주변에 있었던 독일군과 소련군은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을 했다. 특히 국기 게양 직후 제국의사당 반대편에 있던 크롤 오페라하우스의 독일군이 티거 2를 이끌고 반격까지 시도할 정도로 교전이 치열했다. 제국의사당 주변 독일군의 소탕은 국기를 게양한 날의 낮이 되어서야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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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사당에 소련 깃발을 꽂는 소련군 장병들.
제국의사당 구역을 지키던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는 제국의사당을 방어하던 부대가 전멸하고 나머지도 격렬한 시가전으로 전부 소모되고 몇 안되는 잔존 부대만 최후의 티거 2 2량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27] 여기까지 남아있던 대다수의 장병들은 사살되거나 소련군에게 붙잡혔고 소수의 스칸디나비아 의용군들만이 살아서 엘베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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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복한 독일군 장성급 포로들. 제일 왼쪽 인물이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이다.
제국의사당이 소련군에게 점령된 직후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이 소련군에 항복하였다. 이로서 공식적으로 베를린 전투가 끝났다. 헬무트 바이틀링은 소련군의 요청에 따라 시내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독일군에게 항복을 명령하는 방송을 하였다. 폐허가 된 베를린 시내 곳곳에 방송차량이 다니며 바이틀링의 항복 명령을 전달했다. 이 명령을 듣고 항복한 병사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항복하지 않고 서부로 탈출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전투를 계속했다. 베를린 시내의 잔존 독일군의 완전 소탕은 첫 항복 조인식이 열리던 5월 8일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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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사당 점령을 축하하는 제1벨라루스 전선 제3충격군 제79군단 제150이드리츠카야 소총병사단 병력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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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종료 후 찍힌 독일 제국의사당(라이히스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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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종료 후 찍힌 라이히스탁 내부. 벽마다 소련군이 해 놓은 그래피티낙서로 빼곡히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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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군의 리즈시절. 베를린 국회의사당(라이히스탁) 함락 장면의 기록화. 실제로 이 건물이 소련군 수중에 떨어진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어쨌든 제국의사당 함락은 독소전에서 소련의 완전한 승리를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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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의 벙커를 점령한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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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전투 직후에 촬영된 총통 벙커 내부.
히틀러가 죽은 직후인 5월 1일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이 제150 소총병사단[29] 병력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면서 사실상 베를린은 소련군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제국의사당이 넘어가기 직전에 독일 국방군 육군참모총장이었던 한스 크렙스 장군이 소련에게 협상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바실리 추이코프 대장의 사령부로 찾아갔지만, 추이코프는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고 독일의 무조건 항복만이 유효하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협상 결렬 후 추이코프는 크렙스에게 들었던 히틀러의 사망 소식을 스탈린에게 전했다. 괴벨스는 공군 중사로 전선에 나갔다가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양아들 하랄트 크반트를 제외한 자기 자식들을 모두 독살한 뒤 아내와 함께 동반 자살했고, 협상이 실패한 뒤 돌아온 크렙스와 그의 사관학교 동기인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대장도 마찬가지로 자살을 택했다.[30] 나머지 잔존 병력과 인사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소련군에게 사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베를린 전투가 종료된 직후 수많은 피난민과 잔존한 9군 병력들이 베를린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서방 연합군의 점령지로 향한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였다. 엘베 강에 도달한 이들은 손에 잡히는 것 아무거나를 동원해 도강을 시작했다. 베를린에서 살아남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소수의 기갑 차량은 전부 이들의 후미 엄호를 맡았다. 이 방어전은 5량의 티거 2를 주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엘베 강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붉은 해일이 되어 밀려오는 소련군을 막았다. 이들은 몰려오는 소련군을 상대하며 자신들의 목숨을 수많은 피난민의 목숨과 맞바꾸었다.
3.4 유럽 전선의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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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 베를린에서 붉은 깃발을 걸고 있는 소련군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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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이 항복했다는 신문을 보고 있는 프랑스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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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사당 앞에 있던 반파된 동상에 붉은 깃발을 거는 소련군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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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사당 앞에서의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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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소련 해군 장병들을 촬영중인 미 육군. 그리고 5년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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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군의 감시 하에 이동 중인 독일군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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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7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빌헬름 카이텔 OKW 사령관.
▲ 독일의 2번째 항복이 이루어진 방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박물관에 있는 전시물.
▲ 독일 병사들에게 전쟁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 적힌 쪽지.
소련군은 공식적으로 베를린을 점령했지만, 아직도 골목 등 일부 지역에서 패잔병들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외곽 지역에선 한 명이라도 더 서방 연합군 점령지로 보내기 위해 저항하는 독일군 잔여 부대와 소련군의 전투가 지속되었다. 이후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5월 8일에는 서방 연합군에, 9일에는 소련군을 포함한 전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유럽의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후에도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은 5월 8일을, 소련과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러시아의 5월 9일 전승 기념 행사에 미국, 서유럽 정, 관계 인사들도 초청받아 참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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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종료 후 히틀러 벙커 근처의 부서진 의자에 앉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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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모여 있는 소련군과 I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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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타는 제국의사당 앞에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 독일군.
이 전투에서 소련군 병사 8만 여 명이 작전 기간 동안 전사했다. 그리고 이들 중 30,000여 명이 베를린 시가전에서 운명을 달리했으며, 그 외 28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중에서도 시가전인 만큼 기갑 전력의 피해가 특히 커서 전투 기간 동안 약 2,000대(...)[31]에 달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32] 한편 베를린에서는 소련군이 전투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물론 민간인의 피해도 심각해 45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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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난을 가다가 소련군에게 접수된 독일 민간인들.
이렇게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복했으나 동부전선에 남아있던 독일군들은 그냥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서부전선에 있던 독일군은 대체로 베를린 전투의 전후로 며칠 안 있어 전부 항복했지만 우크라이나 방면군을 비롯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항복 후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가기 싫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5월 11일까지 계속 전투를 벌였다. 이외에도 독일군이 점령한 채 고립돼서 남은 지역인 미수복 지구의 독일군이 한동안 더 버텼다. 심지어 덴마크 보른홀름 섬에 주둔한 독일군은 항복 후 4개월이 넘게 지나서야 항복을 했다. 물론 이들의 저항은 독일 본토가 모두 점령당한 이상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 교전 당시 소소한 에피소드 하나. 베를린 시내에서 교전이 벌어질 당시, 난데없이 코끼리와 얼룩말 등의 동물들이 시내를 뛰어다니는 일이 있었다. 교전 과정에서 베를린 티어가르덴 구역에 있는 동물원 우리가 부서져 우리 안에 있던 동물들이 뛰쳐 나온 것. 이대영은 이를 소재로 한 디오라마를 제작하기도 했다. 다만 전투 전에 동물들을 살처분하여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는 게 정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논란이 되었다.
4 여담
4.1 소련군의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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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인의 자전거를 빼앗는 소련군.[33]
우린 점령 지역에서 가끔 마주친 여자들은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잡아다가 강간하였다. 부대원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윤간하였다. 폴란드 여자는 집으로 돌려 보내 주었지만 독일 여자는 폭행하고 학대했다. 마지막에는 총으로 쏘아 죽였다.-어느 소련 병사의 증언
당신은 당연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었겠지요? 당신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가를 알겠죠? 그렇다면, 스탈린그라드에서 베오그라드까지 전우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주검을 넘어서 쑥대밭이 된 자기 나라 땅 수천 킬로미터를 지나며 싸워 온 남자를 상상해 보았습니까? 그런 남자가 어떻게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참상 뒤에 그가 여자하고 재미를 보는 것이 뭐 그리 심한 일인가요? 당신은 붉은 군대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붉은 군대는 이상적이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붉은 군대가 독일과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오시프 스탈린,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밀로반 질라스가 소련군의 유고슬라비아 여성 강간에 대해 항의할 때 한 말.[34]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한 뒤,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 병사에 의해 수많은 약탈과 강간이 자행되었다. 그나마 처음 들어온 점령군 부대들은 군기가 엄한 편이라 별로 문제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뒤따라 잔존 병력을 소탕하며 들어온 후발대가 특히 사고를 많이 쳤다고 한다.[35]
소련군의 전쟁 범죄는 독일군이 점령지에서 저지른 참혹한 학살극을 직접 보고 들으며 진격해 온 병사들의 보복성 학살과 보복성 집단 강간도 일어났다. 독일 측 추정치로는 최대 2백만 명이 강간을 당했다.[36] 또한 2차 대전 당시[37] 독일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10% 가까이가 아버지가 소련군이다라는 설이 있다.[38] 소련군 사령부는 처음에는 대체로 눈감아 주었지만, 병사들의 비행이 지나치다고 판단되자 NKVD 소속 부대를 동원해서 단속에 나섰으며 덕분에 빠른 속도로 휘하 병사들의 비행을 멈출 수 있었다.
전후 1950년대에 소련과 동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위해 방문하였으나 오히려 피해자들이 그 정도만 해 준 것에 되려 감사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실제 이 얘기 자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냉전 말에 소련과 동독 정부가 당시 피해자들 중 일부에게 어느 정도의 배상을 한 적이 있고 전후 소련 내에서 배상을 못해도 사죄는 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일부 있긴 했다. 소련과 동독이 전후 배상하려 했다는 것을 두고 '이는 동독과 소련 측의 주장이라 가려 들을 필요가 있다'고 악담하는 경우도 있으나 전후 동독과 소련이 배상하려고 했다고 주장한 것은 소련도, 동독 당국도 아닌 일본 재야계에서 나온 주장이었다.[39]
유명한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인 소설 <수용소 군도>에 나오는 굴라그 감방 동기 두 명은 바로 이렇게 잡혀 온 강간범이다. 소련군 사령부나 NKVD가 주둔군 병사들의 비행을 스탈린에 불경을 범한 정치범(= 솔제니친)과 동등한 중범죄로 다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1949년에 항구적인 부대 주둔지가 마련되어 부대장의 허가없는 외박이 금지될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또한 꼭 강간이 아니더라도 영화 '베를린의 여인'에서 나오듯이 점령군에게 몸을 바쳐 배급이나 안전을 확보하려는 독일 여성들도 꽤 있었다.
물론 2차 대전 당시에도 민간인 학살은 전쟁법과 전쟁 관습법에 의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연합군에게 대의가 있다고 해서 그들의 전쟁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만 전쟁의 원인이 독일에 있으며 연합군은 어찌되었든 이러한 범죄를 통제(하려고)했던 반면에 독일 국방군은 그런게 없을 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벌인 전쟁 범죄의 심각성이 일본군과 동급으로 심각했으니 독일측에서도 문제삼기 어려운 부분이다.
네오 나치 같은 부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자국이 당한 피해를 강조함으로서 피해자로 자처하는 적반하장격인 짓은 하지 않는다. 아래의 대중문화 부분에서도 나와 있지만, 독일 영화인 '베를린의 여인'에서 나온 독일군이 소련에서 한 일의 10%만 소련군이 해도 독일인은 다 죽는다 라는 대사는 나치 독일이 소련 인민에게 저지른 악행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말해준다.[40]
한마디로 말해서 소련군의 만행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으며, 또한 이는 결코 독일 측을 옹호할 여지가 되지 못한다.[41] 그리고 소련뿐만 아니라 다른 서방 연합국도 규모는 작지만 강간이나 약탈을 저지르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42], 소련군만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연합국의 독일 점령 지구 모든 곳에서 소련군보다는 규모가 적지만 상당한 강간이나 약탈 사건이 일어났다.
이렇게 소련군의 흑역사가 있기는 했지만, 소련 당국은 독일인들의 민심을 얻으려고 여러가지로 노력했다. 특히 민간인에 대한 식량 보급에 힘썼는데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하자마자 점진적으로 식량을 배급하기 시작했으며 1947년에 본격적으로 식량을 배급했다.
여담으로 소련군의 약탈에 재미있는 일화들이 상당한데 그 중 일부는 냉전시 영미측의 프로파간다로 과장된 것도 있다. 이 중 하나는 병사들이 독일에 진입하고 나서 민가의 수도꼭지를 죄다 빼 갔는데 이를 본 장교들이 왜 그걸 빼 가냐 물었더니 병사들이 "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리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 수도꼭지만 있으면 물이 콸콸 나오는 거라고 알았던 것이다(...).[43] 이 외에도 무조건 큰 게 좋은 줄 알고 자기가 찬 손목시계를 괘종시계로 바꿔갔다거나 하는 일화들이 존재한다.[44]
4.2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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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사당 앞의 제150소총병사단 병력들.[45]
맨 왼쪽의 병사분은 업햄을 닮았다
베를린 공략을 직접 맡은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용명을 떨친 소련군 제62군이 개편된 제8근위군(1943.4.16 부로 개편)이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맹장 바실리 추이코프 대장(후에 원수로 승진)은 그 이후에도 이 부대를 맡아 2년간 계속 지휘했고, 이 부대는 결국 베를린 공략 부대라는, 소련군에서 가장 명예로운 역할을 맡았다. 이 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익힌 시가전 전술에 매우 능했으며, 그때 익힌 노하우를 적극 이용했다. 수류탄, 박격포, 기관총, 화염방사기를 갖춘 10여 명의 분대가 분대장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판단하에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건물에 돌입하여 적을 소탕하는 작전이었다. 이 부대는 종전 직후 그대로 베를린에 눌러 앉았고, 독일 통일과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군으로서 남아 있다가 군사 협정 후 철수할 때까지 계속 주둔하였다. 특히 여기서 베를린 국회의사당을 직접 점령한 제150소총병사단은 그 위업이 특별시되어 지금도 승리의 날 퍼레이드 때 가장 처음으로 행진하는 의장대가 이 부대의 깃발을 들고 행진한다.[46] 그야말로 소련군 전설의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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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베를린에 세워졌던 소련군 전사자 추모 동상. 사진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T-34/76 1대와 152mm ML-201문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독일 통일 당시 헬무트 콜 수상은 소련에게 이 동상을 절대로 철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러시아와의 관계가 나빠진 현재는 이 동상의 의의를 소련을 배려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치 범죄에 대한 반성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이 강하다.
4.3 모든 것을 쥐어짜다
수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독일의 최후의 발악이 크게 드러나는 전투이기도 하다. 일단 유명한 국민돌격대가 징발되어 상당수 투입된 것이 이 전투이며 남아있는 모든 기갑장비가 1선급이건 2선급이건 이미 퇴역한 병기건 모두 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처음 나왔을 때부터 끝까지 소방수로 활약했던 티거와 티거 2는 당연히 사용되었고 심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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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대전 사진이 아닙니다! 1차 대전기의 유물이던 영국제 MK 전차도 독일군이 사용했다. 1차 대전 당시 독일이 노획해 전시해 두던 물건이었다. 또한 A7V도 쓰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인지 아닌지 불명.
▲위와 같이 1호 전차의 포탑을 들어내고 그위에 75mm PaK 40 대전차포를 올려서 급조한 구축전차도 소량이 사용되었다. 정확히 말해두는데 47mm 포를 단 판저예거가 아니라 75mm 포를 올린 놈이 맞다! 사진은 격파된 차량으로 보인다.
6호 전차 티거 선정때 헨셸 차량에 밀려 탈락한 포르셰의 VK 45.01(P)가 베를린 교외에서 격파되었다. 이 차량은 종래의 8.8cm KwK 36 56구경장이 아닌 8.8cm KwK 43 71구경장이 장착되어 있었다. 소련군이 관심이 없던 탓인지(...) 이 차량은 사진으로는 남아있지 않고 기록에만 남아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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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티거와 티거 2[48]가 마지막까지 남아서 전투를 치르다가 결국 기기 고장으로 자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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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츠다머 플라츠에 버려진 티거 2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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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탑을 뒤로 돌린 베를린 최후의 티거 1인 323호 티거의 사진. 완전한 초기형은 아닌, 대전 말에 남는 부품을 전부 유용해 만든 하이브리드 티거, 일명 잡종 티거다.[49] 뒤의 배경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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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에 베를린에 남아 있던 판터. 위 사진에 토치카로 쓰인 판터와 달리 치메리트 코팅조차 되어있지 않은 초기형이다. 훈련용을 꺼내 온 것으로 추정.
최후의 엘레판트 구축전차 2량이 베를린 교외에서 격파되었다.
시제품이었던 VK 20.01 1대도 실전 투입되었다. 사진이 하나 남아있으며 이후 격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시제품이던 경 트랙터도 20mm 기관포를 달고 보병 지원용 전차로 투입되었으며 이후 T-34에게 격파되었다.
무장친위대가 노획한 T-34/76과 T-34/85, KV-1도 투입. 이중 KV-1은 이동 도중 교량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결국 버려졌다.
▲ 베를린으로 이동 중이던 KV-1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교량. 철십자 마크로 보아 독일군이 노획해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43t의 무게를 생각하지않고 그냥 건너려고 한 걸 보면 독일군도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 위 사진은 베를린 전투가 끝난 후 소련군이 격파된 독일군 전차들을 모아 둔 사진인데, 잘 보면 판터들 사이에 르노 FT-17 전차가 보인다.
기갑병기의 상황이 이같이 처절한 상태에서 보병화기 또한 상황이 좋지 않았다. MG08, MG30, VG 1-5, MP18, Gew98, Gew88, Gew71, MP3008 같은 대전 후기에 급조된 무기들은 물론 1차 세계대전의 무기부터 화승총(...)까지 사용되었고 그 중엔 루이스 경기관총이나 MAS-36같은 프랑스 침공 때 상당수 노획한 무기도 지급했으며 이탈리아군의 카르카노를 독일의 7.92mm 마우저탄이 들어가게 개조한 것 등 온갖 것이 마구잡이로 지급되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소련군이 극소수의 EMP44를 들고 나온 국민돌격대와 교전한 일화도 있었는데 생김새가 당연히 이상한 까닭에 소련군은 그냥 무시했으므로 멀쩡히 남은 총기가 거의 없다.
장비 외에 인력도 쥐어짰는데 소련이 독소전쟁 초반에 그랬던 것처럼 베를린의 민간인들이 방어선 구축에 동원되었다. 노면 전차로 방어벽을 만들고 호를 구축했다. 물론 인력난은 심각해서 베를린에 설치된 대공포 조작 요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외국인, 심지어 소련군 포로조차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대전 말 베를린에선 다음과 같은 블랙 유머가 나돌았다. "신사(늙은이), 숙녀(여자들), 어린이(히틀러 유겐트), 동무(소련군 포로) 여러분!"
4.4 지하철의 비극
▲ 베를린 지하철에 진입하는 소련군.
▲ 지하철 입구에서 전복되어 있는 소련군 T-34/85. 이거 때문에 비극이라고 하는 거 아니다
▲ 베를린 지하철 내부의 모습.
영화 다운폴에서도 나오다시피 이때 베를린 지하철은 민간인과 독일군의 방공호 내지는 간이 야전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4월 28일 경 독일군 지휘부가 소련군의 지하 침투를 막는답시고 지하철의 터널을 폭파해 지하수를 유입시켜 라이히스탁 근처의 모든 지하철 구간을 침수시켜 버렸다. 이때 안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민간인들과 부상병들도 익사하고 말았다. 다만 터널을 폭파하기 전 독일군 수뇌부에서도 이들을 미리 대피시키려고 했지만 이들을 대피시키려고 지하철로 가던 병사가 유탄에 맞아 사망했고 결국 그런 참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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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항복한 독일군들. 밑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루프트바페 소속 공수부대인 팔쉬름예거도 베를린 전투에 동원되었다.
반대로 소련군의 경우 별다른 큰 피해는 없었으나 독일군 소탕을 위해 지하철로 잠입한 별동대 1개 소대가 이들과 함께 익사했다.[50]
5 그 이후
▲ 2차 대전 종전 후 베를린에 진주한 영국 육군 전차 승무원들. 땅에 고정된 판터의 포신에 타고 있다. 잘 보면 위에 거기다
▲ 1945년 7월 무렵의 베를린 시가지.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고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한 이후 베를린엔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이 각각 구역을 분할해 주둔하였다. 영국과 미국이야 서부전선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국가들이니 당연하였지만 프랑스 침공 때 6주만에 너무나도 쉽게 털리고 항복한 프랑스는 어쨌든 승전국인 자신들에게도 구역을 할당해 달라며 큰소리를 쳤지만 누구도 이 한심한 요구에 응해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결국 프랑스 연대보증 섰던영국이 자신들의 할당 구역의 일부를 나누어 주며 분쟁을 끝냈다.
전쟁이 끝나고 전범국이 된 데다 무조건 항복으로 그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던 독일인들은 전후를 힘겹게 살아가야 했는데 특히 엄청난 양의 폭격과 포격을 받고 시가전 와중에 대파된 베를린의 독일인들은 재건 과정에서 힘겹게 살아가야 했다. 이때의 독일 민간인들의 생활상이 독일 영화인 독일 영년에 잘 나와 있다.
그리고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베를린은 승전국들의 구역은 자연스레 서부 연합군의 서베를린, 소련군의 동베를린으로 나누어졌고 이후 미군과 소련군의 전차가 대치하는 베를린 위기 등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대전기 내내 미군과 영국군의 폭격에 맞고 특히 베를린 전투 때 소련군에게 무지막지하게 얻어맞고[51] 도시가 반파되고 수도에 적국의 깃발이 휘날리는 경험을 한 베를린은 전후 독일인들의 기억에 깊게 남아 반전 의식의 한 축이 되고 있다. 수도가 전투 끝에 직접 점령된 베를린 전투는 소련의 의도대로, 그리고 누구나가 예상했던 대로 커다란 상징이 되었다.
6 대중문화
- 독일 영화 다운폴(Der Untergang, 2004)은 베를린 전투 중의 독일 내부 사정을 잘 묘사하였다. 배우 브루노 간츠의 명연기를 통해 보이는, 파멸을 앞둔 히틀러의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은 당시 한 익명의 여성이 쓴 일기를 원작으로 한다. 소련군의 강간과 살기 위한 매춘 등이 묘사된 원작은 출간되자마자 독일과 여성에 대한 모독이라며 공격 받았고, 더는 출판되지 않았다. 작가의 사후에야 다시 재평가 받았다.
- 베를린 1945(게르만의 기사에 수록)-유명 전쟁 만화가인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 베를린 전투를 매우 자세하게 묘사했다. 핀란드 의용사단인 '노르트란트' 소속 무장친위대 대위 하르츠가 주인공으로 나온다.[52] 베를린 전투 막바지에 부하들은 탈출시키고, 국회의사당 옥상에 소련기를 세우려는 소련군들에게 달려들어 같이 떨어지며 자폭한다.
- 1981년작 TV영화 'Le Bunker' 또한 마지막을 앞둔 히틀러를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히틀러 역을 맡아 열연한다.
-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Падение Берлина, 1949)은 총 두 편으로 된 영화로서 베를린 전투뿐만 아니라 2차 대전 전반을 다루고 있다. 물론 마지막은 베를린 함락으로 끝난다. 스탈린이 함락된 베를린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뛰어나오는 저글링들 앞에신처럼 강림하는 마지막이 꽤 인상적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들어 스탈린이 베를린에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건 영화다. 실제로 스탈린은 포츠담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오긴 했다. 단,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로 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나온 영화라 소련군 장비나 복장 고증은 꽤 충실하다. 여기서 괴링은 비단옷을 입고 보물로 집을 도배하고 다니는 등의 모습으로 나오지만 이 무렵엔 이미 괴링은 보물들을 대부분 팔아 치우거나 또는 파괴했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이미 피난민들의 대열에 합류하여 베를린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 이 영화는 스탈린의 우상화가 극에 달했을 때 제작된지라 스탈린이 거의 신처럼 묘사되는 선전 영화나 마찬가지였고, 스탈린을 다룬 영화의 단골 감독이었던 미하일 치아우렐리가 감독을 맡았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OST(...) 작곡을 맡는 등 소련 최고 스탭들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야 제작 거부하면 굴라그로 갈 테니까여담이지만 출연 배우들이 실제 인물들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1편, 2편 히틀러 역을 맡은 배우 블라디미르 사벨례에프(Vladimir Savelyev )는 그 광기나 억양을 러시아어로 재현하는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서는 마지막 미션으로 나온다. 라이히스탁을 점령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지만 소련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게임 플롯상 영광에 찬 국기 게양 같은 건 없고 오히려 베를린 전투의 클라이막스가 되어야 할 국기 게양을 매우 허무한 일로 묘사하고 있어 플레이어에게 감동을 전혀 주지 못한다는 게 문제.[53] 라이히스탁은 중립 건물 블록이 여럿 합쳐진 거대한 건물로 묘사되며, 그 앞에 펼쳐진 참호의 밭을 무시무시한 손실을 각오하고 뚫어야 한다. 특이 사항이라면 라이히스탁 주변의 적을 정리하고 안심할 무렵 갑자기 티거가 2대 튀어나오는데, 미션 흐름상 대전차 전력을 그때까지 딱히 마련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확 쓸릴 가능성이 높다.
-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는 콜 오브 듀티1과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에서 베를린 전투가 묘사된다. 둘 다 소련군 마지막 미션이 제국 의사당 공격을 다루고 있다. 다만 콜옵1에서는 아쉽게도 주인공이 다른 병사가 의사당 건물에 붉은 깃발을 게양하는 걸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 월드 앳 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첫번째 미션을 제외한 모든 소련군 미션이 베를린 전투를 다루고 있다. 젤로 고지 전투부터 시작하여 베를린 시가전, 그리고 제국 의사당에서의 최후의 전투가 묘사된다. 그리고 이쪽은 주인공인 디미트리 페트렌코가 직접 의사당 옥상에 소련기를 꽂는다!
1하고 적절히 섞었으면 명장면일 텐데
- 유명 전투를 소재로 즐겨삼는 락밴드 새버턴의 노래 Attero Dominatus은 이 베를린 전투를 소재로 삼고있다. 1절에는 주코프가, 2절에선 스탈린이 손해가 얼마나 나든 상관말고 베를린을 차지해라!라고 말하는 가사가 나온다. 그 만큼 베를린은 소련에게 중요한 곳이였다.
- ↑ 바르바로사 작전 등에 참가했으며, 입대 9년차인 29살에 소장이 되는 등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전투 마지막 날인 5월 2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 ↑ 폴란드군 155,900 ~ 200,000명 포함.
- ↑ 폴란드군 2,800명 포함
- ↑ Reichstag, 라이히스탁, 러시아어로는 레이흐스타흐(Рейхстаг)
- ↑ 700px 이 사진에서 오른쪽 아래 장교의 오른 손목이 좀 이상한데, 원래 시계가 하나 더 있던 것을 사진가가 높으신 분들에게 험한 소리를 듣고 나서 인민의 에어브러쉬로 지웠다. 점령군 군인이 시계를 2개 차고 있다는 건 '약탈'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약탈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일화가 더 있는데, 실은 이오지마 전투의 성조기처럼 적기를 2번째로 걸고 있는 사진이며 # 처음 게양했을 때는 전투가 치열하던 한밤중이어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고 처음 게양된 국기는 제대로 된 국기가 아니라 빨간 식탁보 3개를 이어붙여 급조한 깃발이었다. 전투가 종료되고 며칠 뒤 찍힌 사진은 연출된 사진이라 제대로 된 깃발을 걸고 있고 아래 보이는 거리도 소탕이 다 된 시점이라 한산해 보인다. 이 사진을 찍은 사진가 예브게니 할데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도 취재했다. 그는 유대인인데, 나치 전범들을 위한 소련의 특별한 배려일 수도 있다.
- ↑ 참고로 위에 있는 병사는 그루지야 출신 밀리톤 칸타리야고 아래에 있는 장교는 러시아 출신인 미하일 예고로프다. 2사람 모두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밀리톤 칸타리야는 이후 압하지야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회의 의원을 지내다가 소련 붕괴 이후 그루지야-압하지야 분쟁 중 고향에서 쫓겨나 트빌리시로, 다시 모스크바로 이주하던 중 1993년 12월 27일 사망했다. 미하일 예고로프는 유제품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다가 1975년 6월 20일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 ↑ 우상단에 서 있는 두 인물은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이다.
- ↑ 독소전쟁의 상황을 보면 1944년부터 독일군이 초반의 기세를 잃고 패퇴하게 된 데는 대부분 이 인간이 있었다. 물론 1943년에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로 이미 전세는 소련에게 기울어진 상황이었으나 아직까지는 상당한 전력을 갖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했을 때 기동 방어를 금지하고 무조건 위치 사수를 명령해 포위-섬멸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저런 지시가 없었어도 기동력의 차이로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을것이다. 그리고 이미 끝난 상황이기는 했어도 안 그래도 모자란 병력을 공세를 한다며 서부전선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이 야심찬 공세는 기름이 없어 대실패했고 패전을 몇 달 앞당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버릇을 못고쳤다.
- ↑ 총통이 아니다. 히틀러의 총통직은 나치 집권 직후 통과된 수권법으로 대통령과 총리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히틀러는 원래 총리였다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해 총통이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으론 칼 되니츠가, 총리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임명되었으나 괴벨스는 히틀러가 자살한 직후 부인과 하랄트 크반트를 제외한 어린 자녀 6명과 같이 자살했다.
- ↑ Armoured fighting vehicle, 전차+구축전차+돌격포+장갑차 등 장갑을 두른 모든 차량, 전차를 포함하는 개념. 독일군은 1945년 3월 발라톤 호수의 전투에서 상당수의 남은 전차+구축전차+돌격포를 상실했기 때문에, 이 1519대의 AFV 상당수는 장갑차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습.
- ↑ 많은 자료들에서 젤로프라고 쓰고 있지만, Seelow에서 w는 o의 장음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음되지 않는다.
- ↑ 많은 역사서에 토르가우(Torgau)로 오기되어 있다.
- ↑ 승전 30주년이 된 1975년에 진행된 역사적인 미/소 합작 우주 미션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서도 양측 우주비행사 알렉세이 레오노프와 토머스 스태퍼드는 이 엘베 강 상공에서 처음 악수를 할 예정이었으나 간발의 차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상공에서 만났다.
- ↑ 당시 스탈린이 주코프 군과 코네프 군의 전투 지경선을 없애 버리기까지 해서 경쟁을 더욱 부추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주코프는 이 때문에 여유 없이 굉장히 급한 상황이었다.
- ↑ 많이 잡으면 7만 명까지 나왔다고 한다.
- ↑ 베를린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베를린에서 탈출했다.
- ↑ 총통 사령부에서 힘러의 연락장교이자 부관인 무장친위대 중장이었다. 힘러가 혼자 무단으로 스웨덴에 항복 협상을 하던 게 만천하에 드러나자 베를린에 남아있던 페겔라인은 히틀러에 의해 재판 과정도 없이 총살되었다. 이 사람은 에바 브라운의 매부였고 에바는 그를 살려달라고 히틀러에게 눈물을 흘리며 빌었지만 히틀러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 ↑ 영화 '몰락'에도 나오는 그 장면(...)의 실제 상황.
- ↑ 이때는 베를린 전투 때처럼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끌려갔다.
- ↑ 파일:Berlin64.jpg 철거 당시의 사진.
- ↑ 잘 보면 포방패가 그냥 굴곡져 있는 초기형 D형 포탑이다. 그야말로 손에 있는 대로 다 넣었기 때문에 초기형 부품도 보이는 것이다. 어차피 고정 포대로 사용할 거긴 했지만 초기형 후기형 따질 때가 아닐 정도로 전황이 급박했다.
- ↑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등등이 모두 그에게 탈출을 권유했으나 거부했고 심지어 베를린 전투가 시작됐을 때 총통 관저 바로 앞에 비행기를 몰고 온 한나 라이치의 간절한 요청도 거부했다. 이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탈출 권유를 했다.
- ↑ 이 때문에 4월 21일에 베를린에 진입하고 30일에 제국의사당을 함락하기까지 1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 ↑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에선 제국의사당 내부에 SS 의장대가 방어를 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게임과 마찬가지로 제국의사당은 이때 돔이 붕괴된다.
- ↑ 단 12,8cm FlaK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하나의 포로 대공/대전차 모두를 담당했던 88mm 대공포와는 달리 12,8cm는 대공포(12,8cm FlaK)와 대전차포(12,8 cm PaK 44)가 별개의 물건이었다. 12,8cm FlaK은 그대로 대전차포로 실전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크고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다. 88mm 대공포의 FlaK36과 FlaK44의 관계와 유사하다. 물론 일단 이 대공포탑과 같은 곳에 설치된 상태에서는 대지 사격에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처음부터 대지 사격도 감안해서 상하각도를 -3도까지 만들었기도 하고.
- ↑ 참고로 이 대공포탑은 자체 발전 시설과 급수 시설이 있었으며, 전쟁 중에는 엄청난 수용 능력과 방어력을 바탕으로 다용도로 쓰였다. 2층에는 박물관의 유물이나 미술품(네페르티티 흉상, 페르가몬의 제우스 신상 등)을 보관했고, 3층은 야전병원으로 쓰여 한스 울리히 루델이 다리 절단을 치료받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만 명이 넘는 피난민과 패잔병들의 대피소로도 쓰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8년 영국군이 폭파시켰는데, 원래 1947년에 폭파시킬 계획으로 언론사 기자들도 다 모아 놓고 다이너마이트 25톤을 모아 터뜨렸지만, 멀쩡했다! 이를 지켜본 한 영국 기자는 "역시 Made in Germany
더러운 독일놈들"라는 기사를 썼다고 한다. 결국 이듬해인 1948년, 4개월에 걸쳐 내부 구조를 일일이 다 약화시킨 뒤 다이너마이트 35톤을 세심하게 배치하여 폭파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해당 위치는 현재 원래대로 베를린 동물원으로 복구되었다. 참고 - ↑ 이 티거 2 2량의 전차장이 각각 티거 2 항목에도 나와있는 게오르그 디어스 준위와 카를 쾨르너 원사이다.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들은 성공적인 분투를 하였으나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들의 티거 2에 자폭으로 최후를 주었다.
- ↑ 종전 이후 2차대전 승전을 기념하는 승리의 날 군사 퍼레이드에는 항상 이 부대 이름이 새겨진 소련 국기가 등장했다.
- ↑ 제3 충격군 소속 부대.
- ↑ 영화 다운폴에서 이 둘이 자살한 직후 이들의 시체에 수건을 덮어주는 로후스 미슈의 모습이 나온다.
- ↑ 정확히는 오데르-나이세 공세부터 베를린 시가지 소탕 작전 완결까지의 총 전차 손실이 1,997대, 항공기 손실이 997대이다.
- ↑ 일견 이해가 안될 수도 있는데 독일군이 아무리 상태가 안 좋았어도 독일군은 독일군이었고 전투의 형태가 소모가 극심하다는 시가전인 데다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이니만큼 절대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독일군은 방어자의 입장에서 되는 대로 온갖 준비를 하고 전투를 한 반면 소련군은 공격자 입장이었고 완전한 소탕을 위해 건물마다 진입하면서 소탕전을 펼쳤기 때문에 소련군의 인명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 ↑ 참고로 해당 사진이 냉전 당시 미국이 소련을 폄하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으나 실제로 약탈하는 거 맞다. 출저 - Battle of Berlin. 애초에 전혀 원수지간이 아닌 유고나 조선에 입성할 당시에도 약탈을 자행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약탈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 ↑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351쪽
- ↑ 원래 독일 국방군이나 북한군 같은 개막장들이 아니면, 대민 범죄는 대부분 주둔군이나 후발대 같은 2선 부대에서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들도 후발대에서 일어났다. 사족으로 IS가 저지르는 전쟁 범죄도 선발대도 저지르기는 하지만, 후발대가 비교 불가할 정도로 심하다고 한다.
- ↑ 이중에는 강간당하고 임신한 뒤 병원에서 출산하고 아기와 퇴원했는데 병원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로 소련군에게 강간당했다는 증언도 여러 군데서 나온다. 흠좀무.
- ↑ 혹은 베를린 전투
- ↑ 여담으로 종전 1년 후 베를린 지역 출산율이 큰폭으로 올랐는데 이 중 미혼모 비율이 꽤 되는데 시기상으로 본다면 소련군이 베를린 점령 초기에 저지른 강간으로 임신된 아이들이 출산할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 ↑ 일본 재야계가 왜 저런 일화를 언급했냐면, 당시 일본 정부가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대규모로 성노예를 운용한 것을 부정하며 피해자들을 종군 위안부로 매도했기 때문이다. 아마 해당 일화는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를 까기 위해 만들어진 걸로 보인다.
- ↑ 당장 독소전쟁 통계를 보면 동부전선에선 민간인이 하루 평균 14,000명이나 죽어나갔으며 이들의 시체가 쌓여 지층을 이루게 된 곳도 있다.
- ↑ 독일군이 저지른 강간은 연합군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군과 비교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독일측 보고서에 의하면 1942년 한해에만 75만 ~ 100만명의 신생아가 강간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게아다 이건 다른 나라도 아닌 가해자측인 독일측 보고서라는 점에서 밝혀지지 않는 건수는 얼마나 많은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 ↑ 냉전 시절 소련군의 강간 사건을 크게 선전한 미군측의 범행도 소련에 비해는 적지만 상당히 많았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를 다룬 독일 슈피겔지 영문 기사
- ↑ 하지만 이건 신빙성이 희박한 게 당시 소련의 주요 도시에는 상수도가 건설 중이었으며, 하다못해 신병 훈련소에서도 수도꼭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화가 나온 유일한 근거는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인데, 이 책은 영미권에서 냉전 시대에 학자가 아닌 언론인에 의해 쓰여졌기 떄문에 프로파간다적인 이야기를 검증없이 받아들인 면이 많다.
- ↑ 괘종시계를 손목시계와 바꾸었다는 일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건 손목시계가 괘종시계보다 비싸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고 소비재 공급이 부족한 사회인 소련에서 괘종시계 구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잔뜩 약탈해둔 손목시계랑 교환한 것을 전쟁에서 패했어도 러시아를 여전히 야만인 취급했던 독일인들 눈에 바보로 비친 것일 수 있다. 손목시계가 괘종시계보다 비싸다는 사실은 러시아에서도 극오지 원주민 출신 정도만 아니면 다 아는 사실이었고 그런 극오지에서 끌려온 징집병도 다른 병사들과 함께 수 년간 유럽을 가로지르며 그런 사실 정도는 충분히 터득했을 것이다.
- ↑ 해당 사진에 바로 앞에 있는 사람 오른쪽에 있는 아저씨는 스탈린그라드부터(!) 살아남아 왔다는 추측들이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관련 사진에 저 아저씨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고 한다.
디미트리 페트렌코만나뵙고 싶은 그 분 - ↑ 정식 부대명칭은 붉은 군대 제1백러시아 전선군 제3충격군 제79군단 제150이드리츠카야 소총병사단이다.
- ↑ 물론 사진이 없고 러시아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라 신빙성에 의문이 많다.
- ↑ 베를린에 마지막까지 남은 티거 2는 단 두 량이었는데 무장친위대의 게오르그 디어스 준위와 카를 쾨르너 원사의 차량이다. 이 두 차량은 베를린 전투에 참가했고 두 차량 다 자폭으로 최후를 맞았다.
- ↑ 잘 보면 포탑에는 초기형 큐폴라가 달려있지만 차체는 후기형이다.
- ↑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 소련군 베를린 미션 중에서도 위 사건을 묘사한 장면이 나와 주인공과 레즈노프가 익사할 뻔한다(...).
- ↑ 상술했듯이 베를린 전투 때 소련군이 베를린에 발사한 포탄이 2차 대전 내내 미군과 영국군이 베를린을 폭격한 폭탄 양보다 더 많았다.
- ↑ 장갑척탄병의 주인공 프란츠의 친구. 프란츠는 베를린 1945에서도 잠깐 등장한다.
- ↑ 나치가 집권한 뒤로 쓰이지도 않던 건물이라는 식으로 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