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문서 서울대학교
1 개요
서울대학교의 학생회에 대한 문서이다. 한국의 4년제 종합대학들은 학생회/학생조합(Student's Union)를 총학생회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단과대학별 학생회의 연합체로서 성격을 나타낸다.
한국 대학의 특성상 본래적 의미의 학생조합(자조단체)으로서의 기능보다는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정치투쟁 기능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이 항목의 역사서술에서는 필히 운동권과의 관계를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2 연혁
사회지도층 혹은 나라말아먹은 년놈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라서 자괴감에 빠진 재학생들에게 기운을 주는 운동권 선배들의 명약이 있는 바, '열사가 제일 많은 학교'라고 말해주면 삶의 의지가 불타오른다고 한다. 실제로 군사정권 시기 학교 도서관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신림사거리에서 몸에 불을 붙여서,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하다가, 강제징집 당했다가 의문사로, 위장취업한 공장에서 산업재해등 많은 이들이 민주화의 제단에 바쳐졌다.
굳이 목숨을 바친 열사가 아니더라도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서울대 학생들의 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한인섭 교수의 칼럼에 따르면 419혁명 이후 87년 민주화까지 약 30여 년 간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제명된 서울대 학생이 730명, 무기정학이 681명, 유기정학이 496명이었다고 하며 이것은 다른 대학들의 징계 전체를 합한 숫자와 거의 맞먹는다고 한다. 이것은 학생운동을 하다가 학교 측의 징계를 받은 학생들만의 수이며 학교를 떠나 노동운동 등에 투신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더욱 많다. 이러한 서울대 학우들의 민주화에의 기여를 기리며 2009년, 정문 근처의 419 기념탑부터 시작하여 캠퍼스 내의 추모비 등 민주화 기념물들을 순회하는 '민주화의 길'을 조성한 바 있다.
열사를 많이 배출한 만큼, 한때는 전국 운동권의 각종 정파의 90프로(대략 15개?)는 모여있을 만큼 학생운동이 강했다. (대개의 다른 대학의 경우 1개 혹은 2-3개의 정파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그러나 이것도 2000년대 중반까지의 이야기. 현재 대부분의 단과대에서 단일 선본이 나오는 것이 고작이며, 총학과 단과대를 막론하고 운동권 학생회는 찾기 힘들다.
물론 이것은 서울대만의 현상이 아니다. 운동권의 몰락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91년 소련 붕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시작했다면(역사 발전에 대한 믿음 붕괴+자본주의 세계 극복의 노력), 21세기는 1991년 소련붕괴(사회혁명 전망의 실종+세계 규모의 정치적 우경화)로 시작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96년 연세대 사태는 대학 내 운동권의 도덕적 헤게모니가 파산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97년 IMF 외환위기는 대한민국 경제의 장기불황과 대학의 취업학원화의 기점이 되었다. 대략 이러한 흐름에 따라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던 대학생 사회가 개인화, 보수화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1992년에 전대협 6기 의장(태재준[1])을 배출한 이후로 한총련의 NL 노선과 달리 PD 성향이 강했기에, 한총련과는 따로 노는 경향이 있었다.[2]
학생운동이 강했던 만큼 총학생회 역시 학교 역사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군사정권시절에는 총학생회가 없었으나, 민주화과정에서 학도호국단이 총학생회로 바뀌었다. 학도 호국단 이전의 총학생회때무터 세기 때문에 2011년은 53대 총학생회이다.
김영삼 정권때부터는 이전에 잡혀가는 것을 우려해 지하조직처럼 운영되던 학생운동조직들이 '지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조직 이름이나 선거구호를 명시적으로 내 걸고 학생회 선거에 나왔다. (80년대에는 학생회 선거에 나오지 않고도 따로 지하조직으로 운영을 해서도 데모도 많이 하였으나, 민주화가 되면서 공개공간에서 적극활동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 것이다) 당시 공개정치조직을 건설한 것은 대장정, 젊은 벗, 21세기 진보학생연합, 노진추 청학위, 학생연대(전학협으로 이어짐) 등등이 있었는데 대체로 다 PD 계열이었다. NL 계열에서는 애국청년선봉대를 제외하고는 계속 지하조직처럼 운영했다.
93년부터 ~ 2000년까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정통 PD를 자처하는 전국학생연대회의(현 전국학생행진으로 계승) 계열과, 운동권내에서 온건파로 분류된 21세기 진보학생연합(2004년 해소되었음)이 번갈아 가며 수권을 하는 구조였다.
최초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출범한 것이 93년인데, 93년도에는 '21세기 선거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NL계열의 '생대련'과 PD 계열의 '진학련'이 양대주축을 이루고, 언더에서 수면으로 올라온 다른 학생운동조직들이 결합해서 학생회에 당선되었고[3], 94년에 연이어 당선되었다. 95년에는 대장정이 당선되며 이후 계속 매년 번갈아 당선되었는데, 정말 신기할 정도로 8년 동안 이 법칙이 깨지지 않고 두 계열이 번갈아가면서 수권을 한다.
이 법칙이 깨진건 2000년. 1999년 11월에 벌어진 2000년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 계열의 '광란의 10월' 선본이 당선됨으로서[4] 서울대 최초로 비운동권[5] 총학생회가 당선되게 된다. 결선 투표까지 가는 접전이었지만, 아무튼 지금과는 달리 당시 정서에서 비운동권 총학생회의 당선은 내외적으로 상당히 충격이었다.[6] 다른 대학보다 반권총학생회의 등장이 몇년 늦은 편인데,[7] 온건한 성향의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운동권들의 경직성을 완화시킨 덕분이라는 의견, 서울대가 연대 등 타 대학에 비해 학생운동이 길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가능하다.
광란의 10월 다음해 벌어진 2001년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수권한다. 이 위키에서 서술한 장학금 선정기준에 성적만이 아닌 경제적 사정이 포함되게 된 것도 이때 총학에서 문제를 제기한 덕분.
2002년 총학선거(2001년에 선거를 치룸) 전국학생연대회의 계열의 이갈리아 선본이 당선. 이 해는 굉장히 다사다난 했는데, 당시 총장 이기준의 비리와[8] 대학 개편에 반대해 총학생회가 본부 점거를 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당시 총학생회장이 제명당했으며, 총학생회 집행국들도 줄줄히 징계를 받게 된다. 끈질긴 투쟁 끝에 결국 이기준은 사퇴. 당시 내려진 징계는 2년 후에야 모두 풀리게 된다.
2003년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기존 비운동권과는 다소 다른, 운동적 성향이 포함된 비권인 '학교로' 선본이 수권을 하게 된다. 당시 상당히 신선함을 불러일으켰고, 학생들로부터도 비교적 괜찮은 평을 받았다. 파병반대 동맹휴헙도 하는 등, 할거 다 했지만 총학생회장단이 기존의 학생운동조직에 속하지 않았기에, 이 계열을 '비조직 운동권'으로 보자는 주장도 있었다.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학생회론으로 내세운 '네트워크 학생회론'을 실제로 구현한 것이 이 '학교로' 총학생회였고[9], 운동권과 비운동권 학생대중들에게 모두 무난한 평가를 받은 학생회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해 11월 벌어진 2004년 총학생회선거에서 서울대 사상 최초로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되게 된다. (95년 전두환노태우 처벌 동맹휴업이 성사되고 미친듯한 데모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가 감옥에 갔는데, 정작 그해 가을에 서울대 역사상 최초로 총학생회 선거가 연장투표로 가게 된 것, 프랑스의 68운동 직후 총선에서 보수당에게 정권이 넘어간 것과도 유사한 아이러니함이라 하겠다)
다음해 벌어진 2004년 3월 선거에서 다시 '학교로'선본이 당선.[10] 서울대 총학생회 사상 두번째로 (최초는 93-94년의 21세기 진보학생연합) 동종 계열이 2년 연속 수권을 하게 된다. 2004년 11월에 벌어진 2005년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다시 전국학생연대회의 계열의 'Q' 선본이 당선. 서울대 최초의 여성 총학생회장 당선으로 주목을 끌었다. 2005년 당시에도 본부점거가 있기는 했는데 총학생회 주도는 아니었다...지만 총학생회장이 직접 교육투쟁을 위해 비상총회를 선언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는데 주도가 아니었다라고 간단하게 서술하기는 곤란할듯. 각주참고.[11]
2005년 11월에 벌어진 2006년 선거는 전국학생연대회의 계열의 'PLAY'선본과 독특한 이력을 자랑하는 정후보를 내세운 비운동권 선본인 'suprise' 선본이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으나 투표율 미달로 무산. 다음 해 3월로 선거가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2006년 3월 선거에서 PLAY 선본이 불참한 가운데 'suprise'선본이 높은 지지율로 당선이 된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총학생회장의 경력 위조 문제가 불거지면서 논란이 일었고 서울대 최초로 총학생회장이 탄핵을 당한다.[12] 이 때를 기점으로 1~2년 간은 운동권 세력 과 비운동권 세력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된다.
2006년 11월 선거는 투표율 미달로 다시 무산. 이어 벌어진 2007년 3월 선거에서는 전국학생행진 (구 전국학생연대회의) 계열의 'Spotlight' 선본이 당선된다. 그해 11월 벌어진 2008년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비운동권 계열의 '실천가능'이 당선된다. 그리고 2008년 11월에 벌어진 2009년 총학생회 선거에서 다시 같은 계열의 '실천가능'이 당선 됨으로써 2번째로 동종계열 연속 수권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 2009년 11월에 벌어진 2010년 총학생회 선거와 다시 이어진 2010년 3월 총학생회 선거는 누가 더 잘못했는가의 유무를 떠나 상당히 흑역사다. 2009년 11월 선관위를 의심한 모 선본에서 도청을 시도 하고 도청 된 내용과 여타 의심되는 증거물들의 발견으로 인해 투표함 개봉논란이 일어난다. 결국 개봉 논란으로 인해 투표율 50%를 넘겼지만 무효로 판정.[13] 기존 선관위가 전원 사퇴하고 새롭게 구성된 선관위를 통해다시 재투표에 돌입했고 재투표에서 투표율 미달로 총학선거가 무산된다. 사건이 벌어진지 1년여가 지난 2011년에도 이 때 사건은 꾸준글로 올라온다. 그 만큼 매우 충격적인 사건.
이후 벌어진 2010년 3월 선거에서는 역시 50%를 넘긴줄...알았다가 선관위 미스로 아닌것이 밝혀지고 추가로 후보 휴학 문제등이 불거지면서[14] 역시 무산된다. 서울대 사상 최초로 총학생회가 1년 동안 없는 상황이 발생. 1년동안 총학생회는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로 운영되게 된다.
2010년 11월 선거에서는 선거가 성사. 전국학생행진 계열의 'Action Again' 선본이 당선되었다.[15] 당선 직후 국회에서 서울대법인화법이 날치기로 통과됨에 따라 총학생회에서는 6년 만에 총회를 통해 행정관을 점거하게 된다. 28일 간에 걸친 본부점거는 '대국회투쟁에 집중한다'라는 명목으로 자진해산되었으나 결국 12년 1월 1일부로 서울대학교는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된다.
2011년 11월 선거는 최종투표율 48.7%로 또 다시 무산 되었다. 따라서 54대 총학생회의 건립은 2012년 3월로 넘어갔다. 이때도 단독 출마라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Ready, Action!이 당선되었다. 법인화 원년을 맞아 전년도에 이어 총회 투쟁을 준비하였으나 정족수(재학생 10분의 1)에 미달되어 무산되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날아온 서울대 폐지 떡밥에 총학생회는 '학생과 의논하지 않고 진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원론적인 입장의 의견서 한 장 외에 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16], 덕분에 잔뜩 열받은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서 2012년 11월 선거는 27%라는 사상 초유의 투표율로 연장투표도 하지 못하고 선거가 무산, 총학생회 구성은 2013년 3월로 미뤄졌다.
이때까지는 각 단과의 학생회가 연석회의를 꾸려가야 하지만... 문제는 사회대, 농생대, 인문대, 법대[17], 자유전공학부, 공대 등 대다수 단과대에서 선거가 무산되었다는 것. 사회대, 인문대 등 학생회가 강성하던 단과대조차도 담배녀 파동 등에 직격당해[18] 선거가 무산되었다. 덤으로 이때 관행적이던 이동투표소[19]에 대한 이의제기가 자보로 이루어져 이동투표소 역시 없어지며 표 긁어 모으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2013년 3월 선거 역시도 단일후보 출마. 이전 선거의 투표율이 워낙 처참했던지라 이번 선거도 투표율이 50%를 넘을 수 있을지 불확실했으나, 연장투표 끝에 투표율이 50%를 넘겼고 서포터즈가 당선되었다. 4년만의 비권 총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방학의 국정원 대선개입 관련 활동, 2학기의 시흥캠퍼스 투쟁 등을 기획하였다.
2013년 11월 선거는 최초로 전자투표제도를 도입하였다. 시행이 학생회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발표되었고 단과대 학생회 선거도 아닌 총학생회 선거에서 섣불리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 것[20]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이번 선거에서는 선본이 두 곳 나왔는데 연장투표 끝에 결국 30%가 조금 넘는 수준의 투표율을 보여주며 무산되었다. 같은 시기에 진행했던 시흥캠퍼스 총력투쟁을 위한 총투표 역시도 30%가 조금 넘는 수준의 투표율로 무산되었다.
2014년 3월 선거는 두 선본이 나왔는데 두 선본의 정후보들의 학번이 각각 03과 05로 상당히 고학번이라는 점이 화제가 되었다.[21] 저번 선거의 전자투표제도가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어 이번에는 전자투표와 기존 종이투표를 병행하였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는 최초로 단과대 회장들이 선관위원이 되는 중앙선관위 제도를 운영하였는데 연장투표 전에도 투표율이 45%를 넘겨 무난히 선거 성사가 예상되었으며, 연장투표 후 투표율이 50%가 넘어 디테일 선본이 당선되었다. 전통적인 운동권과 비권의 경계에 있는 민달팽이 유니온 계열로 분류되며 방학기간 세월호 관련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9월에 총학생회와 관련해 또 다른 큰 사건이 터졌다. 총학생회장이 학사경고가 누적되어 학교로부터 제명당한 것. 더군다나 대의원회의에서 이 사실을 숨기고 총학생회장이 "휴학생" 신분으로 참석한지 이틀만에 언론보도로 처음 알려졌기 때문에 학생들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총학생회장은 9월 28일 제21차 총학생회운영위원회가 되서야 총학생회장직에서 사퇴했음을 밝혔다. 직후 총학생회운영위원회에서 부총학생회장 사퇴 권고안이 가결되었다. 결국 부총학생회장은 사퇴하였다.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 둘 다 사퇴하면 집행부도 자동 해산인터라 단과대 학생회장 연석회의가 구성되었다.
한편 2015년 11월 선거를 앞두고 비권 디테일 선본의 총학생회장 후보[22]가 공동정책간담회에서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밝히며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였다. 2015년 11월 선거는 18년만에 본투표 기간 안에 성사되었고, 디테일 선본이 당선되어 대한민국에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성소수자가 대학 총학생회 회장에 당선된 최초의 사례[23] 되었다.
서울대 총학생회 역사의 특징으로는 무엇보다도 NL 약세가 두드러진다. 한총련 출범 (1992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NL 성향의 총학생회가 당선되지 못하였다. 이는 서울대 아니고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다.
단과대 학생회의 경우, 한국의 여타 학생회와 마찬가지로 2000년대 이래 전반적인 침체기를 겪고 있다. 현재는 단대 집행부에서 사실상 세습(?)되는 구조로 희생정신이 투철한 비운동권 활동가들이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상황.
- 아래는 1994년 이후 현재까지의 수권 기록.
1994 : 21세기 선거연합 강병원 당선
1995 : 21세기 진보학생연합
1996 : '좌파, 주류질서의 전복자' - 좌파연합 (대장정+ 알파)
1997 : 발런티어 - 21세기
1998 : 솔리달리떼 - 좌파연합
1999 : 80은 20보다 크다 - 21세기
2000 : 광란(반권)
2001 : 발칙한 상상- 21세기
2002 : 에갈리아(운동권/연대회의)
2003 : 학교로(비권)
2004 : 학교로(비권) (3월선거)
2005 : Q(운동권/연대회의)
2006 : Suprise(반권) (3월선거)- 황라열 회장 역사상 최초로 탄핵당함
2007 : Spotlight(운동권/학생행진) (3월선거)
2008 : 실천가능(비권/생협 학생위원회)
2009 : 실천가능(비권)
2010 : 선거무산
2011 : Action!Again(운동권/학생행진)
2012 : Ready Action(운동권/사노위) (3월선거)
2013 : 서포터즈(비권/축하사) (3월선거)
2014 : 디테일(비권/동아리연합회) (3월선거)-총학생회장단의 사퇴
2015 : 디테일(비권) (3월선거)
2016 : 디테일(비권)
3 기타
3.1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90년대 초반 서울대 노래패였던 '메아리'에서 작사 작곡했다.[24] 자교 전용 총학생회가를 가진 몇 안 되는 학교중에 하나가 서울대다. 가사가 폭풍간지를 내뿜기 때문에 타 대학 운동권 학생들의 부러움을 산다.
이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여전히 총학생회 주관 행사에서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곡 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통일' '민족'이라는 단어가 단 한 단어도 들어가 있지 않다. 전통적으로 PD가 NL보다 강세였던 서울대 학생회의 성향을 그대로 말해주는듯.
한동안 비권이 총학생회를 잡고 있던 시절 '민중해방의 불꽃'이라는 모토와 함께 총학생회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2011년 6월 현재, 학생들이 점거한 본부 건물에서 다시금 '민중해방의 불꽃'이란 아지로 시작하는 총학생회가가 울려퍼지고 있다.[25]
1절
(민중!해방의 불꽃! 서!울!대!)
어두운 굴종과 침묵의 나약한 지성 거부하고
민주주의 뜨거운 진실 온몸으로 노래하라
우리가 쟁취할 역사 참 민주의 세상
보라 민중의 벗 관악 민중해방의 불꽃이여
저기 반역의 사슬을 끊고 솟구치는 우리의 투쟁
가자 너 관악이여 사랑과 투쟁의 신새벽으로
아아 피로지킨 학생회 깃발아래
2절
민중의 아들딸들아 열사의 한 뜻 가슴에 안고
노동해방 벅찬 그 길로 한발 두발 전진이다
우리가 건설한 세상 참 노동의 세상
보라 민중의 벗 관악 이만 불꽃의 전사들아
착취의 세월 되갈아 엎고 솟구치는 우리의 투쟁
가자 너 관악이여 사랑과 투쟁의 신새벽으로
아아 피로지킨 학생회 깃발아래
이것말고도 '자주관악가'라는 NL한정 총학생회가가 있다. 운동권 사이에 널리 퍼진 가사와 곡조[26]를 바꾼 것으로 보이며, 90년대 중반에 21세기 NL그룹이 망한 이후로 듣기 힘들어졌다.한양대 학보사에도 가사만 조금 다른 버전이 전해진다.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들은 민중의 아들딸.
조국의 자주와 통일 우리의 사명.
자주관악 기치를 높이 올려라,
- ↑ 해당 인물은 미국 유학중 한미양국 정부가 본인을 독살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서울역에서 몇년째 1인시위 중이다. 다만 모든것이 본인이 주장하는 정황일 뿐 증거가 없어서...
- ↑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80년대 후반에는 서울대에서도 NL 노선이 강세였다. NL 노선이 처음 주도권을 잡은 대학이 서울대였을 정도. 그런데 서울대 NL 노선의 주류는 비주사파 경향이 강해 전국적인 NL 노선의 정파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길을 걸었다. 결국 이 주류 집단은 1993년에 뒤에 서술되는 '생대련'을 결성하고 이후 21세기 진보학생연합에 참여하면서 NL 노선을 사실상 포기했고, 이에 따라 서울대 내의 NL 정파 자체가 상당히 약화되었다.
- ↑ 93년 11월 당선자 강병원, 2016년 20대 총선에서 은평을 당선. 이재오를 은퇴시킴
- ↑ 총학생회장은 허민 현 고양 원더스 구단주
- ↑ 용어상 애매하긴 한데 서울대 내에서 자주 구분되는 비운동권-반운동권 구도로 본다면 반운동권 총학생회에 더 가까웠다.
- ↑ 허민 당시 총학생회장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허민 후보와 운동권 후보가 1:1 결선을 치루게 됐는데, 이 때 허민 후보와 대항하던 운동권 측에 반감을 가진 다른 운동권들이 허민 후보를 밀어줘서 당선됐다고 한다. 허민 고양원더스 구단주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
- ↑ 예컨대 연세대의 경우, 1990년대에 '94, '97, '99년에 걸쳐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있었다.
- ↑ 사외이사 겸임, 학교 법인카드로 다이아몬드 반지 구매 등이였다
- ↑ 실제로 학생회 집행부에 21세기 출신, 혹은 21세기 친화적 성향의 멤버들이 있었다
- ↑ 이 당시 학교로 선본은 두 개로 갈라져서 나왔다.
- ↑ 정확히 표현하자면 총학생회는 '본부진입'안을 내놓았었다. 간단히 말해 본부 건물에 들어갔다 항의집회하고 나오는 안.
여기서 '점거'를 결정한게 사회대 학생회였다엄밀히 말해 당시 사회대 학생회의 공식 방침 역시 점거안은 아니었다. 당시 사회대 학생회는 성향이 다양한 좌파계열 인물들의 연합 집행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개 중 과격한 일파에서 몇몇 과/반을 선동하여 점거안을 현장에서 제출토록 한 것. 당시 점거는 사회대 학생회나 총학생회 모두 이렇다 할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상황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결정된 측면이 컸다. 애시당초 본부진입안 자체가 어중간한 안이기도 했고. 당연하지만 점거 이후의 모든 상황은 총학생회+사회대학생회가 함께 결정하여 진행하였고 징계도 사회대 학생회장과 총/부총학생회장이 사이좋게 나눠가졌다. - ↑ 학생들 선거로 탄핵을 당한 게 아니라, 운동권이 장악하고 있던, 각 단대 학생회들의 투표로 탄핵을 당해서, 당시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는 말이 많았다.
- ↑ 당연한 이야기지만 총학생회칙상 투표함이 개표전에 개봉됐으면 그 투표는 무효가 된다
- ↑ 서울대총학생회회칙상 휴학생은 후보 등록이 불가능하다. 2010년에 개정되어서 2010년 11월 선거부터는 가능해다.
- ↑ 비권은 한 선본만 나왔는데도 무효표와 엇비슷하게 득표를 했다.
- ↑ 이른바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 서울대와 지거국들을 통합하여 인문계열은 무슨 캠퍼스, 공학계열은 무슨 캠퍼스 하는 식으로 운영한다는 떡밥이었다. 학생회장(루트비히놈)은 농활가서 페이스북에 전체공개로 셀카나 올리고 연애나 하고 있었다.
- ↑ 08학번이 마지막 학번임에도 불구하고 2012년까지도 학생회가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결국 출마하는 사람이 없어서 선거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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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가해자가 속해 있던 인문대에서는 18%의 역대 최저의 투표율이 학생사회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을 보여주었다.서울대 성폭력 대책위 사건 문서에 따르면 인문대 전 학생회장은 해당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한다. 사건의 전말을 잘 아는 위키러가 수정바람 - ↑ 투표율이 부족하면 투표함 관리자들이 투표함을 들고 과방, 반방, 교실 등으로 돌아다니며 투표 받던 관행
- ↑ 전자투표제도는 서울대 내에서는 이번 자유전공학부 학생회와 총학생회 선거에서 최초로 시행되었다.
- ↑ 거기에다가 당시 연석회의 의장의 학번은 04였다!
- ↑ 두 번째 디테일 선본에서 부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 ↑ 기존 문서에는 "커밍아웃한"이라는 부분이 누락되어 있었다. 이는 해당 총학생회장 이전에 존재하였을지도 모르는, 커밍아웃하지 않은 성소수자 총학생회장의 존재 가능성을 무시하는 워딩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해당 선본 및 학내 언론에서도 지속적으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총학생회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왔다.
- ↑ 원래 1990년 PD 계열 총학생회에서 총학생회가로 채택했던 곡. 그 후 범NL 계열 총학생회가 계속 들어서면서 잊혀졌다가 21세기연합-PD 계열이 서울대 학생운동의 주류를 차지한 90년대 중반에 재발굴되어 그때부터 계속 사용되었다. 메아리가 펴낸 음반에도 수록되어 있다.
- ↑ 여기서의 '아지'는 선동이라는 뜻의 영단어 agitation의 약자. 이러한 상황에서의 '아지'는 민중가요를 부르기 전에 외치는 구호를 말한다.
- ↑ 원곡은 한국민족민주전선(북한이 남한 내 지하조직이라고 주장하는 유령단체)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