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의 역대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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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隆
생몰기간 (844 ~ 877)
재위기간 (859 ~ 877)
남조의 12대 군주이자 1대 황제이다. 859년, 아버지 권풍우(勸豐祐)이 죽자 뒤를 이어 아들 세륭이 즉위했다. 중국 정사에 속하는
신당서에는 이름을 추룡(酋龍)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세륭의 세(世)자가
당태종 이
세민(李
世民)과 겹치기 때문에 선대 황제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해서 피휘했다. 마찬가지로 세륭의 륭(隆)자 역시
당현종 이
륭기(李
隆基)의 휘가 똑같아서 이를 피휘했다.
[1] 860년,
당선종이 붕어해 당 조정에서는 사자를 파견해 이 사실을 알렸으나 같은 년에 붕어한 권풍우에 대한 사자는 오지 않아 세륭은 크게 노했다. 세륭은 즉각 반당정책으로 전환하였고, 결국 이 해에 국호를 대예(大禮), 연호를 건극(建極)이라 개원했다. 황제국을 자칭한다는 것은 곧 당나라와 조공관계를 끊겠다는 의미이다. 남조는 이 해에 파주(播州)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당 조정에서는 남조의 발호를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묘휘를 범했기 때문에 쉽게 처리할 수 없었다. 당 조정은 결국 이름을 바꾸면 책봉을 할 수있도록 하겠다는 조서를 남조에 보내기로 했다. 861년,
의종은 좌사랑중(左司郞中) 맹목(孟穆)을 조제사(弔祭使)에 임명하여 남조로 파견하기로 했으나, 그 전에 남조가 수주(雟州)를 공격했으므로 이행하지 않았다. 862년, 당 조정은
안남도호부를 구원하기 위해 전호남관찰사인 채습으로 하여금 안남경략사를 위무하게 했다. 이에 보복심으로 남조는 교주(交州)를 공격해 안남을 흔들었다. 정우와 채습은 군대를 나누어 남조군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1년 뒤인 864년, 교주는 함락되었는데 교주의 1차 2차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병졸과 죽은 병졸을 합치면 약 15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 조정은 더이상의 손실을 내지 않기 위해 당시 명장으로 인정받던 고병(高騈)을 안남도호로 임명했다. 이후에도 남조와 당은 안남과 촉에서 국지전을 펼치다가 869년, 당의 성도까지 파상공격을 퍼부었다.
자세한 전쟁 내용은 당-남조 전쟁 문서 참고. 874년, 고병이 남조에 반격을 가해 여주, 공래관 등을 수복하자 남조는 조종정(趙宗政) 등 30여인의 사신단을 꾸려 맹약을 체결하기를 청하였다.
[2] 고병은 세륭을 의심해
토번의 상연심(尙延心) 등과 연락해 남조를 정탐했는데, 융주(戎州)의 마호(馬湖), 목원천(沐源川), 대도하(大度河) 등에 성을 쌓았다. 세륭은 이 일로 노발대발하다가 877년, 붕어했다. 시호는 경장제(景莊帝)이다.
- ↑ 잘 알려져 있는 연개소문도 당고조 이연의 연(淵)자를 피휘해 천(泉)으로 기록한 케이스와 같다고 보면 된다.
- ↑ 『통감』에 따르면 이때 추망 조종정이 가지고 온 남조의 국서에는 천자에게 올리는 표문은 없고 오직 남조의 독상(督爽)이 중서성에 보내는 첩만 있었다. 그 내용은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서 남조가 중국의 아우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중국에 대해서 ‘臣’을 일컫지는 않았다. 당시 남조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황제국이므로 황제국인 당나라와 형제관계는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황제국이라는 점에서 국격은 대등하다 여겨 남조는 그 첩에서 ‘臣’을 자칭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