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의 역대 군주 | ||||||
12대 경장제 세륭 | ← | 13대 성명문무제 융순 | → | 14대 효애제 순화정 |
隆舜
생몰기간 (? ~ 897)
재위기간 (877 ~ 897)
남조의 13대 군주이자 2대 황제이다. 877년, 아버지 세륭(世隆)이 죽자 뒤를 이어 아들 융순[1] 이 즉위했다. 융순은 스스로를 대봉인(大封人)이라 칭했는데, 『자치통감고이』 ‘서운건(徐雲虔)의 『南詔錄』에 따르면 남조의 별명은 학탁(鶴拓)인데 그 후손들은 또한 자신들을 ‘大封人’이라고 불렀다. 라고 나오는데 이는 봉(封)을 국호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남조의 별칭이 ‘봉’이었기 때문에 추룡의 아들 융순은 봉국(封國)의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로 ‘대봉인’을 자처한 것이다. 융순은 정사를 보지 않았고, 사냥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데에 전념했다. 국사는 대부분 신하들이 맡았다. 877년, 영남서도절도사 신당(辛讜)이 타서 단강보(段琷寶)와 만나 화의를 청했다. 신당은 옹주(邕州)에서 많은 전투를 밤낮으로 하여 당나라는 많이 피폐해졌다며 부담을 덜하기 위해 화의를 청한다 했다. 그런데 남조는 그런 거 없다하며 서천(西川)을 약탈했다. 결국 당에서는 명장 고병을 보내 화의를 청하기로 했으나, 당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 눈 먼 신하들이 오랑캐라고 무시했다. 878년, 12월에 남조에 사신으로 보낸 자굉(賈宏) 등이 남조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당시 신당은 다리에 병을 앓고 있었는데, 서운건이 대신 파견되었다. 이에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최안잠(崔安潛)이 화친을 주장하는 고병을 탄핵하고 남조와의 화친을 극렬히 반대했다.
최안잠이 상언하기를, “만은 새나 짐승의 마음을 품고 있어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어찌 천한 노예로 하여금 귀한 주인을 섬기게 하여 국가의 대례(大禮)를 잃게 할 수 있겠습니까? 최담 등의 의논은 채택할 만합니다. 신은 청컨데 의정자(義征子)를 모집하여 10호를 1보(保)로 삼고 산동의 날랜 병사 6천을 징발하여 여러 주(州)에 주둔시킬 것을 청원합니다. 이렇게 5년을 계속하면 만을 노예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당서 「남만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