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1 疏通

소(牛) + 통(桶)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악성 유저들이 원하는 것
한국 게이머들이 주구장창 요구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수없는것

일반적으로는 의사소통의 줄임말로 사용된다. 흔히 인터넷 방송 등에서 시청자들과 채팅 또는 전화 연결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방송의 주체자가 딱히 컨텐츠가 없거나 시간 상 애매할 때 소통을 한다는 것은 그 시간 동안 시청자들의 채팅을 읽어주고 반응을 하겠다는 뜻이다.

1.1 사회, 문화 전반에서 교조화된 소통

2008년을 전후로 이명박 대통령의 이미지가 '불통 이미지'로 낙인이 찍히고 핫이슈화되면서 '소통'이라는 개념을 중시하는 사회 마인드가 자리잡았는데, 이게 어느틈엔가 빠른 속도로 교조화되어 버려 소통을 조금이라도 신경쓰지 않으면 즉시 불통의 낙인을 찍고, 그 불통의 낙인이 주는 페널티는 엄청나게 가혹해지기 시작했다.

'소통'의 교조화는 지금 우리가 있는 나무위키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2011년, 즉 리그베다 위키 시절 악플러문서에는 '비판과 악플의 구분'이라면서 '작가는 독자와 소통해야 하는 의무' 운운하는 내용이 써 있을 정도였다.[1]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부 문서에서는 문서 주제의 대상이 가진 문제점을 비판하는 곳에서도 소통을 극도로 교조화시키는 경향이 드러나고 있다.

소통의 교조화는 그 원인을 찾아보자면 대략 이렇다. 2008년부터 시작된 이명박 대통령과 보수집권세력의 불통 이미지에 대한 반발로써 소통의 개념이 미덕으로 자리잡고, 이 시점을 전후해서 아프리카TV, 다음팟 같은 개인 인터넷 방송이 보급되었는데, 이 인터넷 방송들은 실시간으로 방송 주체에게 채팅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에서 그당시 미덕으로 자리잡던 '소통'의 이미지가 있었기에 이후 인터넷 방송 제작자들은 '소통'을 언제나 중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소통의 교조화가 낳은 폐단 중의 하나는 멘탈이 약하고 귀가 얇은 창작자들이 자기만의 색을 쉽게 잃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1.2 소통을 빙자한 갑질

다양한 분야에 사용되고있는 갑질이지만 주로쓰이는곳은 온라인게임 게시판등지에서 가장 많이 쓰인다. 항상 소통을 원한다는 게시글을 써 자신들이 정당함을 유저들에게 호도하지만 해당 게시글들을 잘 읽어보면 결국에 하고자 하는말은 "내가 하는말은 진리야 무조건 내말대로해"라는 갑질내용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들은 처음에는 언뜻보기에 점잖게 말하는것 같지만 자신들이 말하는것이 바로수용이 되지 않을경우 "소통없는 더러운 게임회사"라는 여론몰이를 시작해버리는 문제점이 있는데다가 더 문제가 되는건 이런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나오면 여론몰이로 나쁜사람 혹은 게임사의 알바로 몰아가는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점이다

2 小桶

작은 통 또는 소금을 적게 담은 작은 섬. 흔히 서 말가량을 담는다.

3 蕭統

501~531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황태자로 시호는 소명태자(昭明太子), 자는 덕시(德施)이다. 아버지는 무제, 어머니는 무목황후(武穆皇后) (丁氏)[* 원래는 귀빈이었으며 이름은 정영광(丁令光)으로 그들의 장남로 태어났다.[2] 훗날 삼남 소찰후량을 건국하자 고종(高宗) 소명황제(昭明皇帝)로 추존되었다.

아버지가 즉위한 502년 11월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3살 때 이미 《논어》와 《효경》을 읽어냈고 5살 때 오경을 독파했다고 전해진다. 515년 5월 관례(冠禮) 의식을 치르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국정에 참여하여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펼쳐보이기도 하였다. 또 문장가로서도 매우 유명하여 3만여 권의 장서들을 소장하였다고 전해지며 그로 인해 주변에는 항상 유명한 문인들이 모였다. 그는 문인들과 함께 여러 유명한 문장을 모은 《문선》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뱃놀이를 하던 도중 배가 전복되어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해 병을 얻었고 531년 5월 30일 향년 31세로 사망했다. 아버지 무제의 장수와 본인의 요절은 양나라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3.1 평가

태자가 성인의 의복을 착용하면서부터 황상은 바로 조정의 정사를 사피고 관장하도록 시켰는데, 백관이 올리는 업무가 태자 앞에 쌓이고 맡겨지면 태자는 잘못된 것을 분별하였고, 가을철의 터럭 같은 것이라도 반드시 가렸으나 다만 명령하여 개정하게 하였으며 조사하여 탄핵을 덧붙이지 않았으며, 송사를 평등하게 결단하여 대부분 온전히 방면하였고 너그럽게 용서하여 무리를 화합시켰으며, 기뻐하고 화를 내는 것을 안색에 드러내자 않았다. 책을 읽고 문장을 짓기를 좋아하였고 훌륭한 인재를 끌어들여 가까이 하고 상을 주고 아끼는데 싫증내는 일이 없었고, 궁궐을 나간 지 20여년 동안에 소리와 음악을 기르지 않았다. 장마와 폭설 때마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보내어 민간 마을을 두루 돌게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살펴서 구제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공손하여 동궁에서 비록 한가롭게 있으나 자리에서 일어나 항상 서쪽을 향하였고, 저녁에 부름을 받아 들어가야 할 때면 자리를 바르게 하고 새벽까지 이르렀다. 누워서 병을 앓게 되자 황제께 우려를 끼칠까 두려워하고 칙령을 내려 물으면 번번이 스스로 힘을 들여 편지를 썼다. 죽게 되자 조정과 재야가 놀라고 건강에 거주하는 남녀들이 궁문으로 달려갔으며 도로에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3.2 가족 관계

  • 소덕황후(昭德皇后) 채씨(蔡氏)
  • 소예(蕭譽) - 생모 불명
  • 원황태후(元皇太后) 공씨(龔氏)
  • 小口[3](蕭𧫷) - 생모 불명
  • 소감(蕭譼) - 생모 불명
  1. 그 후 2013쯤에는 이 부분은 셰익스피어의 예를 들면서 '작가는 소통해야 할 의무는 없다'라고 수정되었다.
  2. 동복 형제로 그들의 삼남 간문제 소강, 오남 여릉왕 소속이 있다.
  3. 이름은 𧫷인데 이 글자의 독음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