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와는 다르다.
목차
1 중국의 역사 시대 구분
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 ||||
기원전 206 ~ 220 | 한(漢) | |||
초한전쟁(楚漢戰爭) 전한(前漢) | ||||
신(新) | ||||
현한(玄漢) | ||||
후한(後漢) | ||||
220 ~ 265 | 삼국(三國) | 위(魏) | 촉한(蜀漢) | 오(吳) |
265 ~ 436 | 진(晉) | 서진(西晉) | ||
동진(東晉)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 |||
439 ~ 589 | 남북조(南北朝) | 송(宋) | 북위(北魏) | |
제(齊) | ||||
양(梁) 한(漢) 후량(後梁) | 서위(西魏) | 동위(東魏) | ||
진(陳) | 북주(北周) | 북제(北齊) | ||
581 ~ 619 | 수(隋) | |||
618 ~ 907 | 당(唐) 무주(武周) |
중국의 역사 | ||||
위진남북조시대 / 육조시대 | → | 수 | ||
오호십육국시대 | → | 남북조시대 | ||
동진 |
1.1 개요
420(혹은 439)~589
중국 역사시대 중 하나로, 크게는 위진남북조시대에 속한다.
오호십육국시대가 끝난 뒤의 시대로 남조는 유유의 송이 동진 황제에게 선양받은 420년부터 시작되고, 북조는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부터 시작된다.
간혹 북송/요나라, 남송/금나라를 2차 남북조시대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서하는 잊혀졌다
1.2 약사
북위는 화북을 통일하고 남조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양(육조)(梁)의 명장 위예(韋叡)[1]에게 종리(鐘離)에서 대패도 했고, 또 그 뒤에 6진의 난(六鎭之亂), 진경지(陳慶之)의 북벌 등이 벌어지며 헬게이트가 열렸다.[2]
이후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한 뒤에 다시 왕조가 바뀌면서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바뀌었다. 고씨의 북제는 처음에는 강성했으나, 곡율광, 고장공이라는 뛰어난 명장들이 전부 황제에게 죽으면서 쇠퇴해갔다. 반면 우문씨의 북주는 점점 강성해졌다.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두 나라의 강을 사이에 둔 대치지역에서 처음에는 겨울에 북주가 북제를 막으려고 얼음을 깨 도강을 막으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북제가 북주를 막으려고 얼음을 깼다. 역관광
끝내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 무제는 중원통일을 꿈꾸었으나 급서하였다. 황제의 장인이자 북주의 대장군인 양견은 권력을 장악해 섭정을 하다가, 선제(宣帝)는 매우 어리석어 난폭한 짓만 하다가 죽자 북주에서 선양을 받고, 수나라의 황제에 올랐다. 이것이 수문제다.
수문제는 즉위 8년(개황 8년)인 588년 10월, 한금호(韓擒虎), 하약필(賀若弼) 등의 명장들에게 무려 52만 대군을 집결, 여덟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전면적인 진군을 명령하여 남조의 진(육조)(陳)을 공격하였다. 진의 수도 건강(建康)은 순식간에 떨어졌고 우물에 숨어있던 황제 진숙보(陳叔寶)는 사로잡혀 진나라는 완전히 망했다.
1.3 특징
이 시대의 특징으로 진정 막장 오브 막장을 보여주는 지도자들이 있다. 특히 남조의 유송과 제(육조)는 아주 피가 철철 흘러 넘친다. 의외로 선비족에서 출발한 북쪽은 조금 덜했지만, 이쪽은 또 이쪽 나름 삼무일종법난 가운데 두가지가 터졌다.
또한 동진 시대 정치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권신의 선양 풍조를 방지할 목적으로 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위정통론 대신 촉한정통론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촉한이 정통으로 대두되는 시기는 한참 지나 성리학이 정립되는 남송대 이후지만.
다만 남북조 내내 남조는 열세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개간이 덜 됐으며, 강남 지방이란 게 인구도 별로 없고, 땅이 습하고 더워서 열대성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겉보기에 비해 별로 좋지도 않은 땅이었다. 벼의 품종이나 농법 등의 벼농사 기술도 덜 발달했기 때문. 훗날 수의 통일 직전 진나라의 인구는 8백만을 겨우 찍은 반면, 북주 혹은 수의 인구는 4천만을 넘겼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을 보면 장강 이북이 절반, 이남이 절반이었다가 송대에 들어 장강 이북에 비해 장강 이남의 행정구역 수가 두 배가 되었다. 실제로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강남과 강북의 경제력은 비슷했으나 안사의 난, 황소의 난,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강북(정확히는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 평야)은 전란으로 황폐화 되고, 장기간의 농사로 환경파괴가 일어났으며 벼농사의 발달로 벼농사와 생산력이 역전되기 시작한다. 당장 땅에 물기를 어느 정도 빼니 벼농사를 짓기 최적화 된 땅에 거기다가 더워서 2모작, 3모작, 그러니까 1년에 벼농사를 2번, 3번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점이 발견되어 이는 강남의 경제력을 크게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화북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뛰어난 농업 기술을 강남에 전파하고 활용하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끝내 남송(南宋)시대 때 절정에 이른다. 이 때부터 강남의 경제력이 제대로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송대에 들어 완전히 강남이 강북을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전대미문의 대혼란과 군벌의 난립으로 현실정치에서 유교는 크게 쇠퇴하고 상대적으로 도교, 불교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문화예술의 발전이 눈부셔서 늘 북쪽의 북조 국가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했지만 얘들도 막장.(...) 당최 하루도 나라가 편할 날이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아웅다웅 열심히 했다.
적어도 남조는 북방 이민족에게 망하지 않고 사직을 지켜냈으며, 일방적인 열위에만 있지 않았고 몇 차례 큰 공세를 퍼부은 적도 있었다. 남조는 양나라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들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는 안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서진의 남은 기반을 긁어모은 동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치통감만 해도 삼국 시대에 대해선 무통으로 보면서도 위나라 위주로 기재하다가, 그 뒤엔 주로 동진-유송-제-양-진으로 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남조 정권들의 지배층들은 국가적 역량이 쇠퇴한 것을 무작정 무기력하게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남조를 정면에서 깔아뭉개는 이들이 등장하는 건 이들을 아예 오(吳)의 무리로 비하하기 시작하는 북위 때부터지만, 그런 주장에 모두가 동의했던 건 아니었다. 서양에서는 남조 정권을 비잔티움 제국과 동일시해서 보는 시각이 아주 예전부터 있었다. 당장 육조시대라는 명칭부터가 성행했던 것이야 말로 남조정권이야말로 중국의 정통왕조라는 인식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주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르주 뒤비에의 세계 지도에서 나타나는 이 시기의 중국사 지도에선 대놓고 남조만 중국(China)이라고 본다. 북조에서 이민족과 한족의 공존을 중심으로 호한체제(胡漢體制)가 성립되어 이후 중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실은 이러한 국제 변화와는 전혀 별도인 것이다. 그렇기에 남조의 폐단을 억제하기 위해 과거제 도입이나 귀족층인 관롱집단의 억제를 시행했다는 사실까지 간다고 남조 정권들이 할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때문에 남조의 의의를 적게 볼 순 없다. 남중국을 적극 개발해서 중국의 범위를 확장시킨 점과 함께 과거의 한족 문화를 보존해서 이후의 통일왕조에게 전수한 점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3]
훗날의 송위 전쟁기에도 북위가 자만하고 함부로 너무 이남으로 대군을 밀어넣었다가 제대로 박살나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만큼, 늘상 북조에게 열위에 있지만은 않았다. 또한 남조 정권의 "지배층"들이 서진 시대부터 내려오는 바로 그 귀족공경들로만 계속 이어졌다고 생각한다는 건 지나치게 단순화된 견해다. 동진 시기에 하북에서 피난을 온 귀족들이 강남의 토착호족들과 연합을 하였음에도 오히려 피난귀족들이 권력의 중심이 되고 토착호족들은 시선에서 Out되는 경우는 동진 이후 군사력을 장악한 한문들이 세력을 키우면서 문벌귀족을 견제하는 정책을 펴고 피난 온 문벌귀족에 대항할 만큼 토착 호족들의 목소리가 커짐으로서 해결을 보기 시작했으며 결정적으로 북조와의 군사적 대결, 내부 권력투쟁이 지속되면서 후기에 들어선 이런 문벌귀족들이 상당히 와해되고 한문 출신들에게 상당 부분 실권이 넘어왔음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4]
또 북방과 중원의 백성들도 살육과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황족 다툼이나 파벌 다툼으로 남조를 한심하게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걸핏하면 그렇다고 좀만 기분이 나쁘면 관료 목을 막 치거나 배신을 밥먹듯 하며 이합집산이 잦았던 화북 왕조들의 형편이 남조보다 늘상 나았던 건 아니다. 심지어 제도나 문물은 북조도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통일은 북위의 바통을 이어받은 북주 그리고 수나라가 이루게 되지만, 수나라가 정작 많이 참고한 관료제는 북위나 북주보다는 남조의 그것이었다.[5] 전진이 잠깐 놀라운 융성을 자랑했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화북 일대는 다시 후진과 후연이 들어선다. 남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진 정권이 매우 실망스러운 형태로 붕괴했고 이후 전중국은 마땅한 정통통일왕조 없이 혼란의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그래도 동진이 과거 통일왕조의 저력을 이어받았던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석륵과 석호의 후조는 가장 강성할 때도 회수 일대를 지키는 옛 서진 군단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유민 군사 집단에게 막혀서 회수 이남으론 손을 뻗지 못했으며, 적어도 석륵 이상은 될 부견의 전진에게 한참 밀릴 때도 영토들을 그렇게 호락호락 내줬던 건 아니었다. 남북조의 대치는 꽤 오랜 기간을 두고 이뤄졌으며, 북위는 결국 북제와 북주로 짜개져 한동안 북방 야만족들에게도 일시 수세였던 기간에도 남조의 양나라는 번영을 자랑했다. 남북조의 대치 상황이 완전히 확고하게 북강남약으로 굳어지는 건 북주가 북제를 멸한 시기 이후인데[6], 이때는 이미 남북조가 거의 끝나갈 때 시점이다.
1.4 한국사와의 관계
우리나라의 경우엔 고구려의 장수왕이 즉위한 뒤(413) 동진이 망하고, 북위가 화북을 통일했다. 장수왕과 뒤를 이은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을 이어지면서 북위, 양에게 모두 고구려왕의 직위를 받는 등 양팔외교를 이어갔다. 이런 북방의 안정으로 나제동맹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였지만 안장왕, 안원왕 대에 가면서 왕위 분쟁이 본격화해 점차 국력이 쇠퇴한다. 말기로 가면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온달 등이 땅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또 관산성 전투(554년) 이후 신라는 전성기를 누렸다. 즉 고구려가 강성하고 다시 기울기 시작하는 시대다.
1.5 중국 남북조 시대의 역대 국가
북조 北朝 | 북위魏 (439~534)[7] | 동위魏 (534~550) | 북제齊 (550~577) | 북주周 581) | 수隋 (581~ | 수隋 (통일) 618) | ||||
서위魏 (535~556) | 북주周 (557~ | |||||||||
남조南朝 (육조시대) | 송宋 (420~479) | 제齊 (남제, 479~502) | 양梁 (502~557) | 진陳 (557~589) | ||||||
(경계) | 산동반도와 회수 이북[8] | 회수 이북 | 촉과 강릉을 서위가 점령 (551~554) | 진의 일시적 강북진출 (575) | 통일 | |||||
한국사 | 고구려 전성기 (~503) | 고구려 우세기 (503~529) | 나제동맹 우세기 (529~554) | 신라 우세기 (554~) |
1.6 북조의 역대 황제
1.6.1 북위(北魏)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헌명황제(獻明皇帝) [9] | 탁발식(拓跋寔) | - | - | - |
1대 | 북위 태조(北魏太祖) 북위 열조(北魏烈祖) | 도무황제(道武皇帝) 선무황제(宣武皇帝) | 탁발규(拓跋珪) | 등국(登國) 386 ~ 396 황시(皇始) 396 ~ 398 천흥(天興) 398 ~ 404 천사(天賜) 404 ~ 409 | 386 ~ 409 | 성락금릉(盛樂金陵) |
2대 | 북위 태종(北魏太宗) | 명원황제(明元皇帝) | 탁발사(拓跋嗣) | 영흥(永興) 409 ~ 413 신서(神瑞) 414 ~ 416 태상(泰常) 416 ~ 423 | 409 ~ 423 | 운중금릉(雲中金陵) |
3대 | 북위 세조(北魏世祖) | 태무황제(太武皇帝) | 탁발도(拓跋燾) | 시광(始光) 424 ~ 428 신가(神䴥) 428 ~ 431 연화(延和) 432 ~ 435 태연(太延) 435 ~ 440 태평진군(太平眞君) 440 ~ 451 정평(正平) 451 ~ 452 | 423 ~ 452 | 운중금릉(雲中金陵) |
4대 | - | 남안은왕(南安隱王) | 탁발여(拓跋余) | 승평(承平) 452 | 452 | - |
- | 북위 공종(北魏恭宗) [10] | 경목황제(景穆皇帝) | 탁발황(拓跋晃) | - | - | - |
5대 | 북위 고종(北魏高宗) | 문성황제(文成皇帝) | 탁발준(拓跋浚) | 흥안(興安) 452 ~ 454 흥광(興光) 454 ~ 455 태안(太安) 455 ~ 459 화평(和平) 460 ~ 465 | 452 ~ 465 | 운중금릉(雲中金陵) |
6대 | 북위 현조(北魏顯祖) | 헌문황제(獻文皇帝) | 탁발홍(拓跋弘) | 천안(天安) 466 ~ 467 황흥(皇興) 467 ~ 471 | 465 ~ 471 | 운중금릉(雲中金陵) |
7대 | 북위 고조(北魏高祖) | 효문황제(孝文皇帝) | 원굉(元宏) | 연흥(延興) 471 ~ 476 승명(承明) 476 태화(太和) 477 ~ 499 | 471 ~ 499 | 장릉(長陵) |
8대 | 북위 세종(北魏世宗) | 선무황제(宣武皇帝) | 원각(元恪) | 경명(景明) 500 ~ 504 정시(正始) 504 ~ 508 영평(永平) 508 ~ 512 연창(延昌) 512 ~ 515 | 499 ~ 515 | 경릉(景陵) |
9대 | 북위 숙종(北魏肅宗) | 효명황제(孝明皇帝) | 원후(元詡) | 희평(熙平) 516 ~ 518 신귀(神龜) 518 ~ 520 정광(正光) 520 ~ 525 효창(孝昌) 525 ~ 528 무태(武泰) 528 | 515 ~ 528 | 정릉(定陵) |
임시 | - | 여제(女帝) | 원고랑(元氏) | - | 528 | - |
임시 | - | 소공황제(少恭皇帝) | 원쇠(元釗) | - | 528 | - |
- | 북위 숙조(北魏肅祖)[11] | 문목황제(文穆皇帝) | 원협(元勰) | - | - | - |
- | - | 효선황제(孝宣皇帝)[12] | 원소(元劭) | - | - | - |
10대 | 북위 경종(北魏敬宗) | 효장황제(孝莊皇帝) 무회황제(武懷皇帝) | 원자유(元子攸) | 건의(建義) 528 영안(永安) 528 ~ 530 | 528 ~ 530 | 정릉(靜陵) |
11대 | 북위 효종(北魏孝宗) | 혜애황제(惠哀皇帝) 장광왕(長廣王) 동해왕(東海王) | 원엽(元曄) | 건명(建明) 530 ~ 531 | 530 ~ 531 | - |
12대 | 북위 열종(北魏烈宗) | 절민황제(節閔皇帝) 광릉왕(廣陵王) | 원공(元恭) | 보태(普泰) 531 ~ 532 | 531 ~ 532 | - |
13대 | - | 폐황제(廢皇帝) 안정순문왕(安定順文王) | 원랑(元朗) | 중흥(中興) 531 ~ 532 | 531 ~ 532 | - |
- | - | 무목황제(武穆皇帝)[13] | 원회(元懷) | - | - | - |
14대 | 북위 현종(北魏顯宗) | 효무황제(孝武皇帝) 출황제(出皇帝) | 원수(元脩) | 태창(太昌) 532 영흥(永興) 532 영희(永熙) 532 ~ 534 | 531 ~ 534 | 운릉(雲陵) |
1.6.2 동위(東魏)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문헌황제(文獻皇帝) [14] | 원역(元懌) | - | - | - |
- | - | 문선황제(文宣皇帝) [15] | 원단(元亶) | - | - | - |
1대 | - | 효정황제(孝靜皇帝) | 원선견(元善見) | 천평(天平) 534 ~ 537 원상(元象) 538 ~ 539 흥화(興和) 539 ~ 542 무정(武定) 543 ~ 550 | 534 ~ 550 | - |
1.6.3 서위(西魏)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문경황제(文景皇帝)[16] | 원유(元愉) | - | - | - |
1대 | 서위 중종(西魏中宗) | 문황제(文皇帝) | 원보거(元寶炬) | 대통(大統) 535 ~ 551 | 535 ~ 551 | 영릉(永陵) |
2대 | - | 폐제(廢帝) | 원흠(元欽) | - | 551 ~ 554 | - |
3대 | - | 공황제(恭皇帝) | 원곽(元廓) | - | 554 ~ 556 | - |
1.6.4 북제(北齊)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문목황제(文穆皇帝) [17] | 고수(高樹) | - | - | - |
- | 북제 고조(北齊高祖) 북제 태조(北齊太祖)[18] | 신무황제(神武皇帝) 헌무황제(獻武皇帝) | 고환(高歡) | - | - | |
- | 북제 세종(北齊世宗) [19] | 문양황제(文襄皇帝) | 고징(高澄) | - | - | |
1대 | 북제 현조(北齊顯祖) 북제 위종(北齊威宗) | 문선황제(文宣皇帝) 경열황제(景烈皇帝) | 고양(高洋) | 천보(天保) 550 ~ 559 | 550 ~ 559 | 무녕릉(武寧陵) |
2대 | - | 폐황제(廢皇帝) 민도왕(閔悼王) | 고은(高殷) | 건명(乾明) 560 | 559 ~ 560 | - |
3대 | 북제 숙종(北齊肅宗) | 효소황제(孝昭皇帝) | 고연(高演) | 황건(皇建) 560 ~ 561 | 560 ~ 561 | 문정릉(文靖陵) |
4대 | 북제 세조(北齊世祖) | 무성황제(武成皇帝) | 고담(高湛) | 태녕(太寧) 561 ~ 562 하청(河淸) 562 ~ 565 | 561 ~ 565 | 영평릉(永平陵) |
5대 | - | 후주(後主) | 고위(高緯) | 천통(天統) 565 ~ 569 무평(武平) 570 ~ 576 융화(隆化) 576 | 565 ~ 576 | - |
- | - | 초공애황제(楚恭哀皇帝) [20] | 고엄(高儼) | - | - | - |
임시 | - | 안덕왕(安德王) | 고연종(高延宗) | 덕창(德昌) 576 | 576 | - |
6대 | - | 유주(幼主) | 고항(高恒) | 승광(承光) 577 | 577 | - |
임시 | - | 임성왕(任城王) | 고개(高湝) | - | 577 | - |
임시 | - | 범양왕(范陽王) | 고소의(高紹義) | - | 578 | - |
1.6.5 북주(北周)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덕황제(德皇帝)[21] | 우문굉(宇文肱) | - | - | - |
- | 북주 태조(北周太祖))[22] | 문황제(文皇帝) | 우문태(宇文泰) | - | - | - |
1대 | - | 효민황제(孝閔皇帝) | 우문각(宇文覺) | - | 557 | 정릉(靜陵) |
- | - | 천왕(天王) | 우문육(宇文毓) | - | 557 ~ 559 | 소릉(昭陵) |
2대 | 북주 세종(北周世宗) | 명황제(明皇帝) | 우문육(宇文毓) | 무성(武成) 559 ~ 560 | 559 ~ 560 | 소릉(昭陵) |
3대 | 북주 고조(北周高祖) | 무황제(武皇帝) | 우문옹(宇文邕) | 보정(保定) 561 ~ 565 천화(天和) 566 ~ 572 건덕(建德) 572 ~ 577 선정(宣政) 578 | 560 ~ 578 | 효릉(孝陵) |
4대 | 북주 고종(北周高宗) | 선황제(宣皇帝) | 우문윤(宇文贇) | 대성(大成) 579 | 578 ~ 579 | 정릉(定陵) |
5대 | - | 정황제(靜皇帝) | 우문연(宇文衍) | 대상(大象) 579 ~ 580 대정(大定) 581 | 579 ~ 581 | 공릉(恭陵) |
1.6.6 요(遼)의 황제[23]
대수 | 묘호 | 시호 | 휘(거란식/중국식) | 연호 | 재위기간 |
초대 | 태조(太祖) | 대성대명신열천황제 (大聖大明神烈天皇帝) |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야율억(耶律億) | 신책(神冊, 916~922), 천찬(天贊, 922~926), 천현(天顯, 926) | 916~926 |
2대 | 태종(太宗) | 효무혜문황제 (孝武惠文皇帝) | 야율요골(耶律堯骨)/ 야율덕광(耶律德光) | 천현(天顯, 927~938), 회동(天顯, 927~938), 대동(大同, 947) | 926~947 |
3대 | 세종(世宗) | 효화장헌황제 (孝和莊憲皇帝) | 야율올욕(耶律兀欲)/ 야율원(耶律阮) | 천록(天祿, 947~951) | 947~951 |
4대 | 목종(穆宗) | 효안경정황제 (孝安敬正皇帝) | 야율술률(耶律述律)/ 야율경(耶律璟) | 응력(應曆, 951~969) | 951~969 |
5대 | 경종(景宗) | 효성강정황제 (孝成康靖皇帝) | 야율명의(耶律明扆)/ 야율현(耶律賢) | 보녕(保寧, 969~979), 건형(乾亨, 979~982) | 969~982 |
6대 | 성종(聖宗) | 문무대효선황제 (文武大孝宣皇帝) |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 야율융서(耶律隆緖) | 건형(乾亨, 982), 통화(統和, 983~1012), 개태(開泰, 1012~1021), 태평(太平, 1021~1031) | 982~1031 |
7대 | 흥종(興宗) | 신성효장황제 (神聖孝章皇帝) | 야율지골(耶律只骨)/ 야율종진(耶律宗眞) | 경복(景福, 1031~1032), 중희(重熙, 1032~1054) | 1031~1055 |
8대 | 도종(道宗) | 인성대효문황제 (仁聖大孝文皇帝) | 야율열린(耶律查剌)/ 야율홍기(耶律洪基) | 청녕(清寧, 1055~1064), 함옹(咸雍, 1065~1074), 태강(太康, 1075~1084),[24] 대안(大安, 1085~1094), 수창(壽昌, 1095~1101)[25] | 1055~1101 |
9대 | - | 천조황제 (天祚皇帝) | 야율아과(耶律阿果)/ 야율연희(耶律延禧) | 건통(乾統, 1101~1110), 천경(天慶, 1111~1120), 보대(保大, 1121~1125) | 1101~1125 |
1.6.7 금(金)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휘(여진식/중국식) | 연호 | 재위기간 |
초대 | 태조 (太祖) | 응건흥운소덕정공 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 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 |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 완안민(完顏旻) | 수국(收國, 1115~1116) 천보(天輔, 1117~1123) | 1115~1123 |
2대 | 태종 (太宗) | 체원응운세덕소공 철혜인성문열황제 (體元應運世德昭 功哲惠仁聖文烈皇帝) | 완안오걸매(完顏吳乞買)/ 완안성(完顏晟) | 천회(天會, 1123~1134) | 1123~1135 |
3대 | 희종 (熙宗) [26] |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27] | 완안합라(完顏合剌)/ 완안단(完顏亶) | 천회(天會, 1135~1138) 천권(天眷, 1138~1141) 황통(皇統, 1141~1149) | 1135~1149 |
4대 | - | 해릉양왕(海陵煬王)[28] | 완안적고내(完顏迪古乃)/ 완안양(完顏亮) | 천덕(天德, 1149~1153) 정원(貞元, 1153~1156) 정륭(正隆, 1156~1161) | 1149~1161 |
5대 | 세종 (世宗) | 광천흥운문덕무공 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 聖明仁孝皇帝) | 완안오록(完顏烏祿)/ 완안옹(完顏雍) | 대정(大定, 1161~1189) | 1161~1189 |
6대 | 장종 (章宗) | 헌천광운인문의무 신성영효황제 (憲天光運仁文義武 神聖英孝皇帝) | 완안마달갈(完顏麻達葛)/ 완안경(完顏璟) | 명창(明昌, 1190~1196) 승안(承安, 1196~1200) 태화(泰和, 1200~1208) | 1189~1208 |
7대 | - | 위소왕 (衛紹王)[29] | 완안과승(完顏果縄)/ 완안영제(完顏永濟)[30] | 대안(大安, 1209~1212) 숭경(崇慶, 1212~1213) 지녕(至寧, 1213) | 1208~1213 |
8대 | 선종 (宣宗) | 계천흥통술도근인 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 英武聖孝皇帝) | 완안오도보(完顔吾睹補)/ 완안순(完顔珣) | 정우(貞祐, 1213~1217) 흥정(興定, 1217~1222) 원광(元光, 1222~1223) | 1213~1223 |
9대 | 애종 (哀宗) [31] | 순정황제(順靖皇帝) | 완안영갑속(寧甲速)/ 완안수서(完顔守緒) | 정대(正大, 1224~1232) 개흥(開興, 1232) 천흥(天興, 1232~1234) | 1223~1234 |
10대 | 소종 (昭宗) [32] | 말황제(末皇帝)[33] | 완안호돈(完顔呼敦)/ 완안승린(完顔承麟) | 성창(盛昌, 1234) | 1234 |
1.7 남조의 역대 황제
1.7.1 유송(劉宋)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효목황제(孝穆皇帝)[34] | 유교(劉翹) | - | - | 흥녕릉(興寧陵) |
1대 | 송 고조(宋高祖) | 무황제(武皇帝) | 유유(劉裕) | 영초(永初) 420 ~ 422 | 420 ~ 422 | 초녕릉(初寧陵) |
2대 | - | 소황제(少皇帝) 영양왕(營陽王) | 유의부(劉義符) | 경평(景平) 423 ~ 424 | 422 ~ 424 | - |
3대 | 송 태조(宋太祖) 송 중종(宋中宗)[35] | 문황제(文皇帝) 경황제(景皇帝)[36] | 유의륭(劉義隆) | 원가(元嘉) 424 ~ 453 | 424 ~ 453 | 장녕릉(長寧陵) |
임시 | - | 원흉(元兇) | 유소(劉劭) | 태초(太初) 453 | 453 | - |
4대 | 송 세조(宋世祖) | 효무황제(孝武皇帝) | 유준(劉駿) | 효건(孝建) 454 ~ 456 대명(大明) 457 ~ 464 | 453 ~ 464 | 경녕릉(景寧陵) |
5대 | - | 폐황제(廢皇帝) | 유자업(劉子業) | 영광(永光) 465 경화(景和) 465 | 464 ~ 465 | - |
6대 | 송 태종(宋太宗) | 명황제(明皇帝) | 유욱(劉彧) | 태시(泰始) 465 ~ 471 태예(泰豫) 472 | 465 ~ 472 | 고녕릉(高寧陵) |
7대 | - | 폐황제(廢皇帝) 창오왕(蒼梧王) | 유욱(劉昱) | 원휘(元徽) 473 ~ 477 | 472 ~ 477 | 창오왕묘(蒼梧王墓) |
8대 | - | 순황제(順皇帝) | 유준(劉準) | 승명(昇明) 477 ~ 479 | 477 ~ 479 | 수녕릉(遂寧陵) |
1.7.2 남제(南齊)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선황제(宣皇帝)[37] | 소승지(蕭承之) | - | - | 만안릉(萬安陵) |
1대 | 제 태조(齊太祖) | 고황제(高皇帝) | 소도성(蕭道成) | 건원(建元) 479 ~ 482 | 479 ~ 482 | 태안릉(泰安陵) |
2대 | 제 세조(齊世祖) | 무황제(武皇帝) | 소색(蕭賾) | 영명(永明) 483 ~ 493 | 482 ~ 493 | 경안릉(景安陵) |
- | 제 세종(齊世宗)[38] | 문황제(文皇帝) | 소장무(蕭長懋) | - | - | 숭안릉(崇安陵) |
3대 | - | 울림왕(鬱林王) | 소소업(蕭昭業) | 융창(隆昌) 494 | 493 ~ 494 | - |
4대 | - | 해릉공왕(海陵恭王) | 소소문(蕭昭文) | 연흥(延興) 494 | 494 | - |
- | - | 경황제(景皇帝)[39] | 소도생(蕭道生) | - | - | 수안릉(修安陵) |
5대 | 제 고종(齊高宗) | 명황제(明皇帝) | 소란(蕭鸞) | 건무(建武) 494 ~ 498 영태(永泰) 498 | 494 ~ 498 | 흥안릉(興安陵) |
6대 | 제 열종(齊烈宗)[40] | 동혼양후(東昏煬侯) 소숙황제(昭肅皇帝) | 소보권(蕭寶卷) | 영원(永元) 499 ~ 501 | 498 ~ 501 | - |
7대 | - | 화황제(和皇帝)[41] | 소보융(蕭寶融) | 중흥(中興) 501 ~ 502 | 501 ~ 502 | 공안릉(恭安陵) |
1.7.3 소량(蕭梁)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양 태조(梁太祖)[42] | 문황제(文皇帝) | 소순지(蕭順之) | - | - | |
1대 | 양 고조(梁高祖) | 무황제(武皇帝) | 소연(蕭衍) | 천감(天監)502 ~ 519 보통(普通) 520 ~ 527 대통(大通) 527 ~ 529 중대통(中大通) 529 ~ 534 대동(大同) 535 ~ 546 중대동(中大同) 546 ~ 547 태청(太淸) 547 ~ 549 | 502 ~ 549 | 수릉(修陵) |
임시 | - | 임하민왕(臨賀岷王) 전폐제(前廢帝) | 소정덕(蕭正德) | - | 549 | - |
2대 | 양 태종(梁太宗) | 간문황제(簡文皇帝) | 소강(蕭綱) | 대보(大寶) 550 ~ 551 | 549 ~ 551 | 장릉(莊陵) |
- | 양 고종(梁高宗)[43] | 소명황제(昭明皇帝) | 소통(蕭統) | - | - | - |
- | - | 안황제(安皇帝)[44] | 소환(蕭歡) | - | - | - |
3대 | - | 예장흥문왕(豫章興文王) | 소동(蕭棟) | 천정(天正) 551 | 551 | - |
임시 | - | 무릉인왕(武陵仁王) 후폐제(後廢帝) | 소기(蕭紀) | 천정(天正) 552 | 552 | - |
4대 | 양 세조(梁世祖) | 원황제(元皇帝) | 소역(蕭繹) | 승성(承聖) 552 ~ 555 | 552 ~ 554 | 강릉(江陵) |
5대 | 양 숙종(梁肅宗) | 민황제(閔皇帝)[45] 정양후(貞陽侯) | 소연명(蕭淵明) | 천성(天成) 555 | 555 | - |
6대 | 양 목종(梁穆宗) | 경황제(敬皇帝) 효성황제(孝成皇帝)[46] | 소방지(蕭方智) | 소태(紹泰) 555 ~ 556 태평(太平) 556 ~ 557 | 555 ~ 557 | - |
임시 | 양 열종(梁烈宗) | 영가왕(永嘉王) 사황제(思皇帝) | 소장(蕭莊) | 천계(天啓) 557 ~ 560 | 557 ~ 560 | - |
1.7.4 후량(後梁)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양 고조(梁高祖) | 무황제(武皇帝) | 소연(蕭衍) | - | - | 수릉(修陵) |
- | 후량 고종(後梁高宗)(후량 선제 추숭) | 소명황제(昭明皇帝) | 소통(蕭統) | - | - | - |
1대 | 후량 중종(後梁中宗) | 효선황제(孝宣皇帝) | 소찰(蕭詧) | 대정(大定) 555 ~ 562 | 555년 ~ 562년 | 평릉(平陵) |
2대 | 후량 세종(後梁世宗) | 효명황제(孝明皇帝) | 소규(蕭巋) | 천보(天保) 562 ~ 585 | 562 ~ 585 | 현릉(顯陵) |
3대 | 후량 공종(後梁恭宗)[47] | 후주(後主) 효정황제(孝靖皇帝) | 소종(蕭琮) | 광운(廣運) 586 ~ 587 | 585 ~ 587 | - |
1.7.5 남진(南陳)의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진 태조(陳太祖)[48] | 경황제(景皇帝) | 진문찬(陳文讚) | - | - | - |
- | - | 시흥소열왕(始興昭烈王)[49] | 진도담(陳道譚) | - | - | - |
1대 | 진 고조(陳高祖) | 무황제(武皇帝) | 진패선(陳覇先) | 영정(永定)557 ~ 559 | 557 ~ 559 | 만안릉(萬安陵) |
2대 | 진 세조(陳世祖) | 문황제(文皇帝) | 진천(陳蒨) | 천가(天嘉) 560 ~ 566 천강(天康) 566 | 559 ~ 566 | 영녕릉(永寧陵) |
3대 | - | 폐황제(廢皇帝) 임해왕(臨海王) | 진백종(陳伯宗) | 광대(光大) 567 ~ 568 | 566 ~ 568 | - |
4대 | 진 고종(陳高宗) | 효선황제(孝宣皇帝) | 진욱(陳頊) | 태건(太建) 569 ~ 582 | 569 ~ 582 | 현녕릉(顯寧陵) |
5대 | - | 후주(後主) 장성양공(長城煬公) | 진숙보(陳叔寶) | 지덕(至德) 583 ~ 586 정명(禎明) 587 ~ 589 | 582년 ~ 589 | - |
1.7.6 북송(北宋)의 황제[50]
대수 | 묘호 | 이름 | 연호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재위기간 | 능호 |
01 | 태조(太祖) | 조광윤 (趙匡胤) | 건륭(建隆, 960~963.11) 건덕(乾德, 963.11~968.11) 개보(開寶, 968.11~976.12) | 960.2.4 | 976.11.14 | 16년 284일 | 영창릉(永昌陵) |
02 | 태종(太宗) | 조경(趙炅) [51] | 태평흥국(太平興國, 976.12~984.11) 옹희(雍熙, 984.11~987) 단공(端拱, 988~989) 순화(淳化, 990~994) 지도(至道, 995~997) | 976.11.15 | 997.5.8 | 20년 174일 | 영희릉(永熙陵) |
03 | 진종(眞宗) | 조항(趙恒) | 함평(咸平, 998~1003) 경덕(景德, 1004~1007)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천희(天禧, 1017~1021) 건흥(乾興, 1022) | 997.5.8 | 1022.3.23 | 24년 319일 | 영정릉(永定陵) |
04 | 인종(仁宗) | 조정(趙禎) | 천성(天聖, 1023~1032.11) 명도(明道, 1032.11~1033) 경우(景祐, 1034~1038.11) 보원(寶元, 1038.11~1040.2) 강정(康定, 1040.2~1041.11) 경력(慶曆, 1041.11~1048) 황우(皇祐, 1049~1054.3) 지화(至和, 1054.3~1056.9) 가우(嘉祐, 1056.9~1063) | 1022.3.24 | 1063.4.30 | 41년 37일 | 영소릉(永昭陵) |
05 | 영종(英宗) | 조서(趙曙) | 치평(治平, 1064~1067) | 1063.3.1 | 1067.1.25 | 3년 331일 | 영후릉(永厚陵) |
06 | 신종(神宗) | 조욱(趙頊) | 희녕(熙寧, 1068~1077) 원풍(元豊, 1078~1085) | 1067.1.25 | 1085.4.1 | 18년 66일 | 영유릉(永裕陵) |
07 | 철종(哲宗) | 조후(趙煦) | 원우(元祐, 1086~1094.4) 소성(紹聖, 1094.4~1098.5) 원부(元符, 1098.6) | 1085.4.1 | 1100.2.23 | 14년 331일 | 영태릉(永泰陵) |
08 | 휘종(徽宗) | 조길(趙佶) |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 숭녕(崇寧, 1102~1106) 대관(大觀, 1107~1110) 정화(政和, 1111~1118.10) 중화(重和, 1118.11~1119.2) 선화(宣和, 1119.2~1125) | 1100.2.23 | 1125.1.18 | 25년 329일 | 영우릉(永祐陵) |
09 | 흠종(欽宗) | 조환(趙桓) | 정강(靖康, 1126~1127.4) | 1125.1.19 | 1127.1.9 | 1년 355일 | 오국성부근 |
1.7.7 남송(南宋)의 황제
대수 | 묘호 | 이름 | 연호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재위기간 | 능호 |
10 | 고종(高宗) | 조구(趙構) | 건염(建炎, 1127.5~1130) 소흥(紹興, 1131~1162) | 1127.6.12 | 1162.7.4 | 35년 42일 | 영사릉(永思陵) |
11 | 효종(孝宗) | 조신(趙昚) | 융흥(隆興, 1163~1164) 건도(乾道, 1165~1173) 순희(淳熙, 1174~1189) | 1162.7.24 | 1189.2.18 | 26년 209일 | 영부릉(永阜陵) |
12 | 광종(光宗) | 조돈(趙惇) | 소희(紹熙, 1190~1194 | 1189.2.18 | 1194.7.24 | 5년 157일 | 영숭릉(永崇陵) |
13 | 영종(寧宗) | 조확(趙擴) | 경원(慶元, 1195~1201) 가태(嘉泰, 1201~1205) 개희(開禧, 1205~1208) 가정(嘉定, 1208~1225) | 1194.7.24 | 1224.9.17 | 30년 55일 | 영무릉(永茂陵) |
14 | 이종(理宗) | 조윤(趙昀) | 보경(寶慶, 1225~1227) 소정(紹定, 1228~1233) 단평(端平, 1234~1236) 가희(嘉熙, 1237~1240) 순우(淳祐, 1241~1252) 보우(寶祐, 1253~1258) 개경(開慶, 1259) 경정(景定, 1260~1264) | 1224.9.17 | 1264.11.16 | 40년 60일 | 영목릉(永穆陵) |
15 | 도종(度宗) | 조기(趙祺) | 함순(咸淳, 1265~1274) | 1264.11.16 | 1274.8.12 | 9년 269일 | 영소릉(永紹陵) |
16 | 공제(恭帝) | 조현(趙顯) | 덕우(德祐, 1275~1276.4) | 1274.8.12 | 1276.2.4 | 1년 176일 | 위치미상 |
17 | 단종(端宗) | 조하(趙昰) | 경염(景炎, 1276.5~1278.4) | 1276.6.14 | 1278.5.8 | 1년 328일 | 영복릉(永福陵) |
18 | 소제(少帝)[52] | 조병(趙昺) | 상흥(祥興, 1278.5~1279.2) | 1278.5.10 | 1279.3.19 | 313일 | 홍콩부근추정 |
2 일본의 역사 시대 구분
일본의 역사 日本史 | |||||||||||||||||
선대 | 고대 | 중세 | 근대 | 현대 | |||||||||||||
~ A.D 538 | 538~1185 | 1185~1868 | 1868~1945 | 1945~ | |||||||||||||
조몬 시대 | 야요이 시대 | 고훈 시대 | 아스카 시대 | 나라 시대 | 헤이안 시대 | 가마쿠라 시대 | 겐무 신정 | 남북조시대 | 무로마치 시대 | 전국시대 | 에도 시대 | 일본 제국 | GHQ | 일본국 | |||
메이지 | 다이쇼 | 쇼와 | 쇼와 | 쇼와 | 헤이세이 | ||||||||||||
에미시 | 에조,에조 공화국, | 홋카이도 | |||||||||||||||
구석기 시대 패총시대 | 구스쿠 시대,삼산시대, | 류큐 왕국 | 오키나와 현 | 미국 | 오키나와 현 |
초기에는 정통성에서 앞서는데다 닛타 요시사다 등 고다이고 천황을 따르는 남조의 무사를 중심으로 서일본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궁지로 모는 경우도 많았지만, 확실한 기회를 머뭇거리다 여러 번 놓치게 되면서 점차 북조 쪽으로 힘이 기울게 된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큐슈의 왜구들을 직접 지배하고, 명으로부터 "일본 국왕"의 칭호를 받는 등(물론 후대의 천황주의 역사가들한테 엄청 까였다) 북조가 완벽하게 강성하면서 남조의 고카메야마 덴노가 삼종신기를 북조의 고코마츠 덴노에게 물려주고 흡수통합되는 형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흡수통일 당시에는 덴노를 북조와 남조 혈통이 로테이션 돌리는 식으로 하자고 정했지만, 막상 통일되고 나니 칼자루를 쥔 북조가 입 싹 씻어버리고 덴노 혈통을 독점하게 된다. 이에 열받은 남조의 잔당 세력이 난을 일으키지만, 군권 대부분을 장악한 무로마치 막부에 숙청당하고 대부분의 남조 혈통이 평민화되거나 절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승자는 북조이지만, 메이지 덴노 이후로 진짜 정통은 남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친왕"으로 불리던 후계들도 훗날 덴노로 추숭되었다(자세한 것은 덴노 항목과 일본의 역대 덴노 항목 참고). 이를 남북조정윤론이라 한다.
한국사로 치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와 거의 겹치며, 왜구들의 발호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이에 대해선 해당 항목 참조.
3 베트남의 역사 시대 구분
막 왕조가 세워지고 남쪽으로 몽진한 후레왕조가 대립하는 시대를 말한다. 1533~1592.
베트남/역사 참조. # 위키백과의 해당 영어 항목
이후엔 후레왕조 하의 찐 군벌과 응우옌 군벌에 의해 나라 전체가 둘로 쪼개 지게 되는데(다만 칭왕하진 않았다), 이 시대는 남북국시대라고 하지 남북조시대라고 하지는 않는 모양. 하긴 그러고보면 남베트남과 북베트남도.
4 한국의 역사 시대 구분?
발해와 신라가 병존해 있던 시대인 남북국시대를 달리 이르는 말...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이는 '朝'와 '國'이 말하고자 하는 차이를 짚지 못한 완전히 잘못된 표현. 중국의 경우 북위 → 동위 / 서위 → 북제 / 북주 → 수(이상 북조)와 동진 → 송 → 제 → 양 → 진(이상 남조, 후에 수에 흡수)의 계승성이 존재하므로 '왕조(朝)'의 계승이 존재하고, 일본의 경우 덴노 혈통의 계승성이 얽힌 문제이므로 역시나 '왕조(朝)'의 계승이 존재하므로 '남북조' 표현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남북국 양립 시대의 중간에 왕조의 계승성이 존재하는 교체가 없고 두 왕실의 혈통의 연관성도 없으며 두 왕조가 사라지면서 고려의 통일로 향해 나아감으로, 남북조라는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전혀 없다.[53]
부여의 경우 해모수 집단의 이동으로 해부루가 쫓겨나와 가섭원 일대에 동부여를 건국하여 동북부여로 쪼개지는데 동부여가 남쪽에 위치해있다.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고, 왕성이 해씨이나, 각자 고씨와 부여씨로 남남으로 정착했다.
'조(朝)'와 비슷한 예로는 '대(代)'가 있다. 예를 들어 하 - 은 - 주에는 계승성이 존재하므로 '3대'라고 칭하고, 오대십국시대에 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의 경우에도 계승성이 존재하므로 '5대'라고 칭한다. 그러나 '5호 16국'이나 '10국'의 경우 지방정권 + 계승성 따위 쌈싸먹었으므로 그냥 '국(國)'으로 칭한다.
역사 속의 나그네 등 남북통일이 된 뒤 시대를 다루는 대체역사소설에서 한반도가 일제강점기 이후 남북한으로 나뉘어있던 과거 시대를 남북조 시대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는 설정을 많이 사용한다.- ↑ 몸이 약해서 가마를 타고 지휘했지만, 위호(韋虎)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북위군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 ↑ 하지만 정작 양나라는 양무제의 말년 혼치와 후경의 난으로 사실상 멸망하고, 후경의 난을 처리한 진패선이 진나라를 건국한다.
- ↑ 사실 육조시대는 강남의 기반을 닦았다는 의의가 있다. 중국사에서 중심지가 맨날 변하며 중국 문명을 보면 각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세를 넓혀온 감이 있다. 사실 중원부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징행이 된다. 중원이라 인식되는 범위도 학설에 따라 좀 달라지기도 하지만 최소 진나라와 한나라 같은 중국 통일왕조가 중국 통일할 때부터 중원은 이미 가장 잘 나가는 지역이라는 위치를 위협받고 있었다. 당시 중국 대륙의 각 지역의 중심지들을 거점으로 삼고 출발하는 세력들부터가 대전략을 논할 때 중원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상징적 의미 때문에 정치적으로 점령할 필요성이 있긴 있었지만사실 어떻게 보면 한족이 아니라 유목 민족들이 중원 지역을 중심지로 살린 감도 있고 지금도 중국에서 중원의 위상은 좀 미묘하다.뭔가 상징적인 뜻들이 많기는 하지만 중원의 많은 지역들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느낌(?) - ↑ 그러나 이런 문벌귀족들이 완전하게 힘을 잃지는 않았다. 최전성기가 지나가 버린 당나라 시기에도 황제 가문인 농서 이씨조차 벼락출세한 한미한 가문이란 소리를 들었고 후대 왕조들에 들어서서도 문벌귀족들의 후예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구품관인법 연구 참조.
- ↑ 정확히는 양나라에서 후경의 난이 일어난 바로 그 시점부터이다.
- ↑ 단 건국은 386
- ↑ 양주(梁州, 량주), 서주 등
- ↑ 북위 도무제 추존
- ↑ 북위 문성제 추존
- ↑ 북위 효장제 추존
- ↑ 북위 효장제 추존
- ↑ 북위 효무제 추존
- ↑ 동위 효정제에 의해 추존됨.
- ↑ 동위 효정제에 의해 추존됨.
- ↑ 서위 문제에 의해 추존됨.
- ↑ 북제 문선제 추존
- ↑ 북제 문선제 추존
- ↑ 북제 문선제 추존
- ↑ 북제 유주 추존
- ↑ 북주 명제에 의해 추존됨.
- ↑ 북주 명제에 의해 추존됨.
- ↑ 2차 남북조시대
- ↑ 혹은 대강(大康)
- ↑ 혹은 수륭(壽隆)
- ↑ 또는 민종(閔宗)
- ↑ 또는 무령황제(武靈皇帝)
- ↑ 내란 중에 피살. 금나라 최악의 폭군. 사후 서인으로 격하되었다.
- ↑ 또는 위왕(衛王)이나 무평황제(武平皇帝). 정변으로 피살당함.
- ↑ 允濟(윤제)에서 永濟(영제)로 바꿨다.
- ↑ 또는 의종(義宗)
- ↑ 정식 추승은 아니고 속자치통감에 따르면 그를 따르던 친족과 병사들이 올렸다고 한다.
- ↑ 이 황제의 재위기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다. 중국 역사상 최단기간 재위한 황제. 항목 참조.
- ↑ 송 무제 추존
- ↑ 송 효무제 즉위 후 중종에서 태조로 변경
- ↑ 송 효무제 즉위 후 경황제에서 문황제로 변경
- ↑ 제 고제 추존
- ↑ 제 울림왕 추존
- ↑ 제 명제 추존
- ↑ 제 소보인 추존
- ↑ 양 무제 추존
- ↑ 양 무제 추존
- ↑ 후량 선제 추존
- ↑ 양 폐제 추존
- ↑ 북제 문선제 추존
- ↑ 양 소장 추존
- ↑ 소선이 추존
- ↑ 진 무제 추존
- ↑ 진 무제 추존
- ↑ 2차 남북조시대
- ↑ 초명은 광의(匡義)였으나 형의 이름을 피휘해 광의(光義)로 바꿨다가 즉위 후 경(炅)으로 고쳤다.
- ↑ 원에서 마지막 황제를 송공제 조현으로 간주하고 조병에게는 정식 시호나 묘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흥제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자세한 건 소제 항목을 참고.
- ↑ 발해와 신라가 계승성에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다. 남북국은 삼국시대가 그 전신으로 하였고 삼국을 어느 정도 계승하였다. 당나라의 등장 이후 한반도 남부는 백제가 멸망하여 신라에 흡수되었다. 한반도 북부에는 멸망한 고구려의 뒤를 이어 발해가 출현하였고 고구려의 계승하였다. 후삼국시대에도 신라의 지방 호족들은 삼국의 계승을 외치면서 궐기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삼국 유민 의식은 상당한 듯 하다. 고려는 신라와 백제, 발해 지배층의 귀순을 받아들이면서 한반도의 통일을 완성한다. 고려시대 내내 고려가 신라의 후계인가 고구려의 후계였는가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이로 보아 중국, 일본과는 다소 특이한 형태라고는 해도 한반도의 남북국시대가 아예 계승성과 담을 쌓았다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