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대체산업화

輸入代替 産業化
ISI/ Import Substitution Industrialization
수입대체공업화, 수입대체 전략이라고도 한다.

1 개요

수입대체란 원조,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재화를 국내에서 생산하도록 이끄는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국영화 또는 무역장벽같은 보호무역주의로써 국내 산업을 보호하게 된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산업화를 달성하는 것을 수입대체산업화라고 한다.

2 배경

1차 세계대전을 분수령으로 세계경제에는 아우타르키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대공황을 거치면서 높은 관세, 무역 수량 제한 등은 만연해져 갔다. 이에 19세기 정치적 독립을 얻은 이후에도 식민지 무역 구조(1차 산품 수출, 공산품 수입)에서 벗어나지 못한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은 더이상 수입에만 의존하기에 어려운 상황에 놓여졌다. 그 결과 라틴아메리카경제위원회(ECLA)에서 이를 채택하게 되었고 비교적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자 제2차 세계대전이후 독립을 취한 여러 나라들이 이를 따르게 되었다.

3 장단점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에 외화를 절약할 수 있고, 만성적인 무역 적자를 보고 있는 경우 국제수지의 불균형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요가 있는 시장을 대상으로 생산력, 고용을 늘리기때문에 위험, 비용이 적다. 또한 산업시설이 구축되어 있다면 전후방연관관계를 모두 발현시키기 쉽다. 그러나, 국내 소비시장이 협소할 경우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힘들고, 따라서 효율성의 저하를 피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최종재에만 중점을 둘 경우 중간재 수입이 늘어남에따라 되려 외화수급의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1]

4 실제사례

4.1 대한민국

수입대체를 실시한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유명하다. 그는 이승만 정권의 시멘트, 비료 수입대체를 승계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식량, 자동차, 무기 등 다방면에 걸쳐 국산화를 추진, 장려하였다.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건물, 산업시설, 사회간접자본을 재건, 확장해야만 했고 이에따라 건설 자재의 수요 급등은 필연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건설 자재들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핵심 건설 자재인 시멘트 국내 생산을 추구하여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도움을 받고 연산 20만톤 규모의 문경시멘트 공장을 건설하게 된다. 박정희정권 이후로도 이러한 기조는 유지되어, 쌍용시멘트 영월공장[2], 한일시멘트 단양공장[3], 현대시멘트 단양공장[4], 아세아시멘트 제천공장[5], 동양시멘트 삼척공장[6], 쌍용시멘트 동해공장[7]등이 연이어 세워졌고 이는 경인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와 같은 인프라 구축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해방이후 농업국가 대한민국은 흥남비료공장을 북한에게 빼앗김에따라 화학비료를 전량 해외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8] 이에 이승만 정권은 미국 해외개발처(AID) 차관과 내자를 투입하여 세계적 규모의 제1비인 충주비료공장[9]을 건설토록 하였다. 이는 1959년부터 시운전에 들어갔으며, 1963년부터 연간 요소 8.5만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연간 국내 수요의 1/4에 이르는 규모였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그런 움직임은 가속화되었다. 1963년, 이승만정권에서 짓고 있던 제2비인 나주 호남비료공장[10]이 가동되기 시작하였으며, 1967년에 이르면 제3비인 영남화학 울산공장[11], 제4비인 남해화학 공장[12], 제5비인 한국비료 울산공장[13] 그리고 용성인비 생산시설을 갖춘 풍농비료[14]이 잇따라 완공되어 가동에 들어갔다. 그결과, 1967년, 질소자급률 41.9%, 인산 자급률 12.6%, 칼리 자급률 5.3% 등 국내 자급률 25.3%를 달성하며 국내 연간 생산량 113.2만톤을 기록하였고, 1970년, 마침내 국내 생산량이 국내 비료 연간 소비량을 초과하게 되었으니 이는 1962년에 비해 성분중량 기준으로 20배가까이 늘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은 1971년 통일벼 보급에 따라 일시적으로 비료 수요가 급증하는 호재 속에서 수출보조금 지급 등을 통해 잉여 비료 수출 활로를 모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잉생산을 해결할만한 물량 확보에 실패하였으며, 합작으로 설립한 회사로부터 인수해야 하는 비료의 인수가격이 높다는 점과 합작상의 계약 불리(일정량을 의무적으로 인수, 그렇지 못하면 정부는 수출보상금을 지급) 문제에 직면하여 제1차 석유 위기와 함께 생산 위축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증산을 멈추지 않았고, 제6비인 충주 공장[15]과 제7비인 여수 남해화학 공장[16] 등을 뒤이어 건설하고 1974년부터 자체적으로 유안을 생산하는 등 질적 개선을 꾀하였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연산 실중량 300만톤, 성분중량 100만톤 이상의 화학비료 생산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는 1970년대의 것보다 각각 갑절을 웃도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것의 수출경쟁력이 없고 국내 수요에 비해 너무 과다하다고 판단하여 1981년 제1차 비료산업 합리화 계획을 수립, 실시함으로써 연간80.3만톤수요로 하향 조정하였다. 이에따라 계약 만기에 맞춰 영남화학 제1공장(진해화학)[17]을 폐쇄하고 영남화학과 남해화학을 불하하였으며 제6비인 충주비료공장이 매각되어 폐쇄되는 등 대대적인 감축이 이루어졌다.

한편, 박정희 정부는 50년대 후반부터 발달하던 대한민국의 자동차산업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1962년 5월 31일 자동차공업 보호법을 제정함으로써 외국차 수입제한, 부품 수입제한, 국산화율 의무화, 신규진입 규제, 해외투자 유도를 법제화하는 등 [18] 최종재 공산품의 자급자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5 관련 항목

  1. 최상오, 외국원조와 수입대체공업화
  2. 1962. 9. 7. 기공, 1964. 4. 준공
  3. 62. 11. 20. 기공, 1964. 6. 20. 준공
  4. 1964. 7. 준공
  5. 1966. 12. 13 준공
  6. 1967. 4. 24. 준공
  7. 1968. 10. 31. 준공
  8. 남한에도 소규모 공장이 있었으나 원자재 조달 등의 문제로 작동이 불가능했다. 1946~1947년 GARIOA로 유안, 초안, 과석, 염화가리 등 총 31만톤을 긴급지원받았고, 1948년도에는 46만톤을 수입한다
  9. 1955. 9. 착공, 1961. 4. 준공
  10. 1954. 계약 체걸, 1958. 착공, 1962. 12. 28. 준공, 현 LG케미칼
  11. 1964. 11. 29. 기공, 1967. 3. 14. 준공 현 동부한농화학
  12. 1965. 5. 2. 기공, 1967. 4. 준공
  13. 미쓰이물산과 합작, 1967. 4. 20 준공. 현 삼성정밀화학
  14. 일본으로부터 외자 도입
  15. 1973. 10. 26. 준공
  16. 1973. 10. 기공, 1977. 8. 4. 준공
  17. 계약기간 만료인 1982년
  18.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7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