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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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물은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에 의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었습니다.[1]
대한민국 대통령
1대2대3대4대5대6대7대8대9대
이승만윤보선박정희
10대11대12대13대14대15대16대17대18대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 대법원의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된 인물
* 헌법재판소의 2016헌나1 판결로 탄핵된 인물

틀:12.12의 주역들

대통령 기록관 존영[2]
이름전두환(全斗煥)
출생지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본관완산 전씨
출신정당무소속, 민주정의당(당선후)
종교가톨릭(세례명 : 베드로) → 불교[3]
부모아버지 전상우, 어머니 김점문
형제자매6남 4녀 중 4남
영부인이순자
자녀슬하 3남 1녀
생몰년도1931년 1월 18일 ~ 현재
재임기간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서명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1ㆍ12대 대통령이자 독재자.[4] 호는 일해(日海)[5][6], 자는 용성(勇星)이다.

2 설명

군사반란을 통한 정권 장악 과정에서 서울의 봄, 5.18 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에서의 시민 학살을 자행하였으며, 집권기 동안 권력 유지를 위해 땡전뉴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평화의 댐, 수지 김 사건 등 온갖 불법적이고 반민주적인 행위들을 자행하였다. 결국 6.29 선언으로 노태우와 함께 재판[7][8]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현재는 사면되었다.

집권하자마자 삼청교육대 등 인권유린 사건이 줄을 이었고, 사법적 측면에서 볼때 항일기보다 엄혹한 판결 및 국민통제가 있었다. 전국민에게 가혹한 고문, 체벌이 일상화 되었다.[9] 사법정의 및 언론기능은 이 시기 완전 무력화 되었으며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전두환의 집권 시기부터는 전 대통령 박정희로 인한 경제성장 제약과 경제적 폐해가 다소 호전되었다.[10] 중공업 과잉투자가 대대적으로 정리되었고 3저호황을 통해 80년대 전세계서 눈에띄게 빠르고 안정적인 성장을 보였다.

또 한편으로 전두환의 80년대는 한국의 엘리트화가 진행된 시기로 전두환은 소수의 재벌 및 상위 관료로 나라를 재편한 시기였다는 지적이 있다. 실효적이 재벌 견제와 수많은 중소기업 육성책이 지원되었으나, 소위 엘리트 주의라는 것이 기승을 부리며 한국 사회에 자리잡은 시기이기 때문. 우리나라에 고질적인 일류 대학교 학벌 선호 문제도 이 시기에 고착화 되었다. 이러한 특권층 사회화 부작용은 다음 대통령 노태우 시기에 한꺼번에 터져나와서 지존파 사건 등 이른바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회에 대한 극단적 반감으로 이어진다.

3 생애

3.1 어린시절

경상남도 합천군 출신.

5세때 대구로 가족이 이주하여 학창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

형제가 6남 4녀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것은 셋째 형과 본인, 그리고 남동생과 누이들 뿐이었다. 이 남동생이 새마을운동의 흑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전경환이다. 이후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졸업하여 육군 보병장교로 임관한다.

전두환의 형제관계는 다음과 같다.

  • 장남 전열환(1918~1925) : 7살때 집에서 놀다가 마루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 차남 전규곤(1921~1921) : 생후 5개월 당시 옆집 처녀의 등에 업혀 있다가 그 처녀의 실수로 땅에 떨어져 역시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둘 다 캐안습.
  • 장녀 전홍렬(1918년~?)
  • 차녀 전명렬(1922년~)
  • 3녀 전선학(1928년~)
  • 4녀 전학렬
  • 3남 전기환(1929년~) :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무렵을 전후해서 순경으로 경찰관에 들어갔다. 1974년 최종계급 경사로 경찰을 그만두었으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뜬금없이 경찰의 대부라는 소문이 퍼지고 경찰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전기환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성격은 동생인 전두환과는 달리 천하의 순둥이로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한다. 현재도 생존해 있다.
  • 4남 전두환(1931년~)
  • 5남 전석환, 어려서 사망
  • 5녀 전점학(1935년~)
  • 6남 전경환(1942년~)

3.2 5.16 쿠데타 이전

대위 시절의 모습

5월 16일 전두환은 육군본부에서 육사출신들과 5.16 군사정변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정한다. 해당 문서에도 서술했듯,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 후 전두환은 혁명위원회에 가서 "왜 미리 우리들한테 말 안 해 줬냐며 따졌고, 여기서 전두환은 자신이 육사를 맡기로 하고 육사로 떠났다. 하지만 이미 육사는 육사교장 강영훈의 지시로 혁명이란것에 반대 분위기 였고, 이에 전두환은 육사교장을 뒤쫓아 육본으로 다시 갔다. 거기서 강영훈은 여러 이유를 들어 혁명 지지 시위를 거절했지만, 전두환은 강영훈이 장교와 생도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지지시위를 방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군부혁명 본부는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고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결국 18일, 육사에서 군부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였고,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 부여에 도움을 주었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때 그의 계급은 고작 대위, 나이도 겨우 30살이었다

3.3 5.16 쿠데타 이후

1962년 전두환은 박정희로부터 전역하고 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전두환과 몇몇 동기생들이 조직한 군사조직이 하나회로 확립 되는 것도 이 시기이며. 전두환과 하나회는 군대 내부의 박정희 친위대를 표방하며 정권의 비호를 받고 계속 승승장구한다.

1969년 육사 동기들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한다.[11] 1970년 육군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는데, 전과를 올리며 승승장구했지만, 상관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당시 9사단장이자 이후 육군특수전사령부의 2대 사령관인 조천성 장군이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테니스나 치고 앉았다'고 29연대장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전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관례에 따라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모두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가 존재한다. 이유는 인사오류+ 민간인 상대 문제 행위 + 작전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맡겨 놓은 사례 다수 + 전투수행능력 부족 + 연대장 부임 이후 파티가 너무 잦음 등 부정적 평가가 쏟아진 것이다. 기사 결국은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1973년 육사 11기중 최초로 준장이 된후, 1979년에는 요직인 국군보안사령관이 된다.

3.4 10.26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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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중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한 상황에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수습하였다. 그러던 중 12.12 군사반란를 일으켜 군을 장악하였다. 이후 5.17 내란을 통한 반란으로 헌정을 중단시키고 이 과정에서 대통령 직선제 등을 요구한 시위인 서울의 봄이후 벌어진 5.18 민주화운동 진압과정 중 무고한 시민이 사망하기도 하는 등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정권을 장악했다. 이 반란은 아직 김재규에 대한 재판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했다.

전두환은 쿠데타로 집권해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1980년초 백곰 미사일 사업을 취소한다. 덩달아 플루토늄 반납, ICBM 개발 계획 취소, ADD 해체,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동의 등 이전 박정희 정권에서 대미관계 악화에 따라 추진한 자주국방 정책의 방향을 역행시켰다. 국방을 미국에 헌납하고, 미국과 거대 무기 도입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그런 방식으로 미국에 집권을 보장 받았다.[12]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이후 전두환은 1980년 8월에 정치인, 군인, 교수, 기업인,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함과 동시에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사회정화운동을 실시하여[13] 정치계와 사회 저변에 대규모 탄압작전을 시작한다(대표적으로 삼청계획과 연예인 사회정화운동 등.). '한국판 굴라크'로 불려진 삼청교육대와 삼청계획 5호에 덤으로 낀 사회보호법[14]도 이때 생겼다.

최규하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을 명분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진행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은 다득표를 얻어 대통령직에 오른다. 한편 이때 선거는 장충체육관에서 소수에 의한 간접회의로 열렸는데 이것은 평생 오명으로 따라다니게 된다. 전두환 부부는 심지어 후임 노태우 부부에게 "우리는 체육관 선거로 집권하지 않았어요."하는 말을 듣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국가적 요청과 역사적 소명에 부응하여 80년대의 국가 장래를 개척해 나아감에 있어, 대통령 각하께서 공약하신 정치발전과 경제적 발전을 균형있게 추구하며 여하한 경우에도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확고히 보전할 수 있는 국가안보태세를 정착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족적이고 사회정의가 넘치는 민주복지사회의 건설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여하한 형태의 용공 내지 사회주의적인 정치활동이나 정부수립 기도도 용납해서는 안 되며, 북괴와의 대결에 있어 국민적 단합을 와해시키려는 계급의식의 선동 및 조장, 소요 등 민중봉기를 통한 정부전복 기도를 단호히 봉쇄해야 하겠읍니다.

둘째, 학원의 학구 목적의 서클활동이나 자치활동 등 자율적인 권리와 합법적인 의사표시는 최대한으로 보장할 것이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인 불법시위 및 소요행위 등은 국력의 불필요한 소모와 사회혼란 등, 결과적으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므로 기필코 근절되어야 하겠읍니다.

세째, 권력형 부조리를 비롯한 각종 사회적 비리를 과감히 척결하고, 만연된 사회적 불신풍조를 불식하여 성실한 노력만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명랑한 사회기풍을 만들어야 하겠읍니다.

넷째, 부정부패와 권모술수, 선동과 중상모략 등으로 점철된 정치풍토를 쇄신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나 권력에의 맹종을 시정하여, 부정과 불의에 대하여는 여야를 막론하고 자유로운 비판을 할 수 있는 건설적이고 활성화된 도의정치를 구현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겠으며,

다섯째, 언론은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이익이 우선되고 윤리와 도덕이 존중되는 건전한 풍토를 조성하는 데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종교 및 신앙의 자유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하에서 최대한 보장하고, 비록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정치활동은 이를 보장하되 종교단체, 집회 또는 선교활동 등을 빙자한 정치활동은 강력히 통제되어야 하며,

일곱째, 노동운동은 노사 공히 공동운명체적인 입장에서 상호이해와 협조로서 공존공영할 수 있는 바탕 위에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도록 유도하고 기업의 부당노동행위 및 수탈행위와 노조의 불법적인 집단행동 등을 다같이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여덟째, 밀수, 마약, 폭력배, 부정식품, 강력범 등 각종 사회악을 말끔히 근절시켜 사회정화를 기하고,

아홉째, 학원의 기업화와 과열과외 등 비뚤어진 교육풍토의 쇄신과, 퇴락한 윤리 도덕관을 바로잡아 도의사회를 구현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혼란요인과 사회적 병폐가 깨끗이 시정되어야만 우리 사회는 여하한 내외의 도전이나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의와 인정미 넘치는 풍요한 민주복지사회의 기틀이 확립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 전두환, 1980년 6월 5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분과위원장 및 위원에 대한 훈시 中

3.5 11대 대통령(1980~1981)

취임하자마자 연좌제를 폐지하고, 야간통행금지, 심야영업금지령을 해제했다. 이후 야간통행금지는 잠시 부활했다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였다.

집권과 동시에 전직 대통령 박정희를 아주 심하게 깎아내렸다. 전두환은 우리 사회가 총체적 불신과 부정이 가득한 사회로 묘사하였는데 그 원흉을 박정희로 지목했다. 박정희 말기는 지도층의 타락, 그중에서도 특히 성적 방탕과 방종이 매우 심각하던 시기였는데, 전두환은 박정희를 명예롭지 못한 인물로 치부하며 국민한테서의 윤리 회복을 선언하였다.[15]

정당해산령을 내려 여러 정당을 해산시킨 후 1980년 10월 27일에 국민투표를 거쳐 새 헌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1981년 1월에는 새로 창당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고 당 총재에 취임, 그 후 새 헌법에 따라 간접선거로 12대 대통령에 당선하였다.

3.6 12대 대통령(1981~1988)

전두환은 취임 후 3S정책을 시행했다. 스포츠, 성 개방, 영상 산업 진흥을 3S 정책이라 불렀는데 이는 한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있었던 정부에 대한 불만을 돌리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두발 및 교복자율화를 실시하였고, 후에 교복 자율화는 학부모들과 여러단체에 항의가 들어와 얼마 후 폐지된다.

한편 이 시기부터 대학 입시 경쟁이 치열해져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유명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전두환 정부는 사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학원과 과외를 폐지하는 강압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 전반적인 엘리트화를 전두환은 추구하였고 청소년 시절에 대학 입시로 자살하는 일이 이때부터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대학은 거의 매일 휴학상태였다. 86 아시안 게임 전까지 학내에 장갑차 및 소총을 든 군인이 상주하였다. 학원.과외 폐지는 전두환 대통령 퇴임이후 집권한 노태우정부때 현실성이 없다는 문제로 다시 부활한다.

전두환은 집권 직후 록히드마틴과 F16 도입 계획을 체결하였고, 전두환 집권을 좋지 않게 보던 미국 로널드 레이건은 TV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전두환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반미감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3년 11월 전두환은 한국을 공식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중지를 약속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추진한 미사일, 핵 등 자주 국방 계획은 전두환 집권과 함께 폐기되었고, 훗날 노태우 정부는 미사일 설계도까지 전부 없어졌다며 한탄했다. 노태우 시절에 군이 전작권 전환 추진을 제일 먼저 시행한 것은 이 시기 경험이 크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탄압을 방관한 미국에 대한 감정이 커졌다. 반미의 시작, 공산주의 사상 유입이 이 시기부터.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에 있었는데 어떻게 군대가 이동하여 광주에서 발포하고 학살을 저지를수 있냐는 것. 그 당시 매우 심각한 논쟁 거리였다. 또한 그 당시는 유교문화가 사회 저변에 아직 뿌리 깊던 시대라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은 대국(大國) 미국이 자신들을 도우러 올 것이라 실제로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오히려 한국의 무기 도입을 감사해하며 전두환과 웃으며 악수하고 전두환을 지지하였다.

한국 공업화가 시작된 1920년대로부터 60여년이 넘게 경과함으로써 자연스레 산업 고도화가 이루어졌고 전두환 집권기에 이르면 중화학공업 생산 규모가 경공업 수준에 이르게 되었고 박정희 시대의 무리한 중화공업을 정리해 나감으로써 체질개선을 꾀하였다. 또한, 컬러 TV 수상기가 보급된 것도 이 시기인데, 컬리 TV는 박정희 대통령은 사치품이라 금지하고 있었다.[16]

아직 사회가 미성숙한 시대라 줄서기 에티켓조차 없던 시대였다. 공중도덕은 두말할 나위도 없어 외국인들은 한국의 길을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며 첫째로 침을 뱉는데 맞을까, 둘째로 껌을 밟을까[17], 셋째로 서로 밀치고 먼저 들어가려고 하여서 버스나 지하철은 두려워서 탑승할수 없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소변보고 대변보는 것은 기본. 가격은 정가가 없어서 무조건 흥정을 해야 했다. 좀도둑은 기승했고 밤늦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 사회 전반적으로 조폭 문화, 양아치 문화가 흥하던 시대. 항상 신문과 뉴스에서는 공중도덕을 지키자고 했다. 줄서기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정부는 대대적으로 세계인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어야 한다며 줄서기 캠페인을 벌였고, 가격 흥정하지 말기 정가대로 제시하기, 길거리 침뱉고 껌뱉지 말기, 노상방뇨 금지 운동을 펼쳤다.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에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고, 이어서 노태우 정부는 공중화장실 문화를 바꾸는 캠페인을 벌여 시골 똥통과 다를 바 없었던 곳곳의 공중화장실 사용 에티켓도 깨끗하게 정비된다.

매매춘이 만연하던 시대였다. 특히 이 시절 일본인에게 한국 기생관광은 엄청나게 유명해서 조금 나이든 일본인들은 한국하면 매춘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술을 엄청나게 마셨는데 그 시절 회사원은 퇴근 후 가볍게 술집이나 다방에서 아가씨 희롱하고 오입하다 집에 돌아오는게 일과였다. 대학생이 희소한 시대였는데, 80년대 중반까지 조금 이름있는 대학교 학생들은 사창가 여자와 동거를 하는 것이 유행아닌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사창가 여성들에게 미래 결혼을 약속하며 접근, 동거 생활을 하며 무료로 향락을 누리다 군대 등으로 적절히 도망간다는 컨셉.[18] 당시 TV 프로그램은 늘 불륜, 매춘녀와의 염문, 배다른 아이, 엄마없는 아이 이야기를 다루었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여서 미국, 일본 관리가 일부러 한국을 경유하는 출장일정을 잡곤 하는게 알게 모르게 용인된 사실. 한국을 소개하는 팜플렛에 매춘 관광이 비중있게 소개되어 있었고 매춘은 주요 달러 수입원 중 하나였다. 당시 전두환은 연회를 자주 열었고 때때로 외국 사절을 초대하기도 하였는데[19], 김종필은 이 시대를 회고하기를 그 당시 연회에 동원된 10대 후반~ 20살 초반의 무렵의 어린 여성들은 국가를 위해 일을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1983년 미얀마 방문때 북한 스파이의 표적이 되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일어났으나 그 시각에 현장에 없어 휘말리지 않았다.

1986년에는 최초로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고 평화의 댐 건설 홍보를 시작했다. 이때를 처음으로 전라도 이외지역에서 데모가 일어났다.

1987년 초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정부와 부산시 사회가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심지어 멀쩡한 사람들까지 남녀노소 통금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다 잡아들여서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킨 기관으로, 박인근 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갖은 폭행과 살인으로 500명 가량의 원생이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유기되고 암거래로 대학에 팔려나가는 천인공노한 짓거리를 벌였다. 35명의 원생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집단탈출한 끝에 사건의 전말이 알려졌음에도 전두환은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하고 압력을 가해 사건을 덮어버린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정권에 대한 반발과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화 요구가 강했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고, 간선제의 여당후보로 노태우를 내세웠다.

1987년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숨지는 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이 일어나자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다.

대통령에서 물러날시 전두환은 한명의 장기적인 독재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정파 혹은 정당의 독재로 가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노태우를 후계자로 세우고 정당의 우두머리로 수렴청정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는 훗날 김영삼의 등장으로 실패로 끝났다.

3.7 사형선고 및 대통령 예우 박탈

1995년 검찰에 구속,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사건의 시작이었다. 정확한 죄목은 반란수괴 · 반란모의참여 · 반란중요임무종사 · 불법진퇴 ·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 상관살해 · 상관살해미수 · 초병살해 · 내란수괴 · 내란모의참여 · 내란중요임무종사 · 내란목적살인 ·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로 인한 재판이었다.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의 고발하였으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내란)를 처벌할 수 없다"라며 공소권 없음을 내세워 방어를 해드렸다. 그러나 이후 3건의 헌법 소원으로 헌법재판소는 1995. 12. 15. 95헌마221등 에서 성공한 내란이라도 처벌 할 수 있음을 판시하였고, 이 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시효문제를 해결하였다.

대통령 퇴임 후 야권계의 핵심 정치인이었던 김영삼이 정권을 잡은 후 1995년 말에 노태우와 전두환을 구속한다. 노태우 구속은 1995년 11월 16일, 전두환 구속은 1995년 12월 3일. 이 당시 체포가 발표되자 자택 앞에서 자신은 체포에 응할 이유가 없다는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바로 고향 합천군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고향에서 검찰에게 붙잡혀 서울로 이송되는데 이것을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사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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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맞잡은 두 손을 보라[20][21]

재판이 진행되고 최후진술에서 다음 서면을 제출하며 "그들은 아무 죄가 없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 라는 말을 했다.

본인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 법정에 서게 된 것을 본인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이러한 일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 아래 과거정권의 법통과 정통성을 심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의 권력이 제 아무리 막강하다 하여도 역사를 자의로 정리하고,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또한 국가의 계속성과 현정사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정권이 바뀌었다 하여, 그 정권의 정치적 시각과 역사관에 의해 과거정권의 정통성을 시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한 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나라를 위하여 노력한 처절한 삶의 기록입니다. 우리나라가 건국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과 국정 담당자는 온갖 역사적 시련을 그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였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자급자족하며,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놓았다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건국 이후의 우리나라 역사가 독재와 부정부패로만 뒤덮인 암흑의 시기였다면, 어떻게 오늘날의 번영이 가능하였겠습니까.

따라서 지난 반세기의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런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며, 의도적으로 매도만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본인도 국정을 담당했던 한 사람으로서 10.26 사건 이후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때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였으며,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는 정의로운 선진조국을
창조하려는 개혁의지를 가지고 국정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부덕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본의아니게 정책수행의 부작용이 발생하여 국민에게 불편과 피해를 준 점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난 89년 12월 30일, 당시 여 야 4당의 합의에 의해 국회의 증언대에 섰을 때, 이미 과거에 있었던 모든 잘못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 한 사람에게 있으며, 이를 위해 국민이 원한다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그 무엇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한 본인의 마음은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개인적으로는 미얀마에서 수많은 국가의 인재들을 잃고, 이 땅에 홀로 귀국했던 그 날부터 하루하루의 삶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뜻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여분의 인생이라 생각하고 보내왔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본인의 생명에 연연하거나 처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으며, 오직 바라는 것은 본인 하나의 처벌로 국론분열과 국력의 낭비를 막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입니다.

끝으로 본인은 과거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적인 재판이 본인에서 끝이 나고, 앞으로는 과거정권을 긍정적으로 승계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높이고, 좀더 밝은 미래를 향하여 온 국민이 매진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군사반란 수괴와 부패 혐의로 추징금과 사형 판결을 1심에서 받는다. 그리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결국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에 의해 인정된 죄목은 아래와 같다.

1. 반란수괴
2. 반란모의참여
3. 반란중요임무종사
4. 불법진퇴
5.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6. 상관살해
7. 상관살해미수
8. 초병살해
9. 내란수괴
10. 내란모의참여
11. 내란중요임무종사
12. 내란목적살인
13.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위와 같이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 받음으로써, 경비•경호를 제외한 연금, 치료, 비서관 지원 등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모두 박탈당했다. 법률상 국가장은 가능하지만, 국립묘지 안장은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전직대통령예우에관한법률〉에 의거해 전두환, 노태우는 기본적인 경호 이외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다.

왠만한 사람이면 사형을 당해도 모자람이 없을만한 죄목이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리고 같은 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의 건의를 받아들인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12월 사면되었다. 하지만 추징금은 사면되지 아니하여, 이후 추징금 납부가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29만원 드립도 나왔다.

2013년 7월 16일 검찰이 시공사 본사와 기숙사, 연천 허브빌리지 등 그의 자택 및 그와 관련된 기업에 전격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압수한 미술품을 경매에 내놓아 낙찰총액 72억원을 기록하며 마무리 되었다. 아직 약 1200억원의 추징금이 남아있는 상태. 2013년 9월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아직 전부 납부하지는 않고있다.

2015년 9월까지 추징금을 완납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추징금이 선고된 년도가 1997년인데 18년 넘게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은 것이다. 현재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안전가옥에서 여유롭고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2003년 SBS와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광주는…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나는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3.8 이후

2015년 현재까지도 정정한 모습을 보이며 꾸준히 매스컴에 등장하는 중이다. 오랜 동지 노태우는 병환을 앓으며 정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한 점과는 대조적. 현재까지 각종 청와대 행사나 대통령 취임식, 장례식에 참석하며 지내는 중이다.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영결식에 참석한 것이 유명한 사건이다. 김대중 대통령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

전두환은 김대중을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이후 전두환을 불러 국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해준데 대해서 항상 감사해 한다는 멘트를 했다. 특히, 자신을 구속하여 넣은 김영삼의 장례식에 직접 조문을 오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두환의 하나회 월드와 제5공화국을 개박살도 모자라 숙청까지 했던 김영삼을 싫어 할듯하면서도 결국 와 주었다. 하나회와 김영삼을 용서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고. 기사 하지만 하는 짓을 보아하니 아직 그 버르장머리를 고치지는 못한 것 같다. 김수환 추기경 문서 참고.

4 평가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5 이모저모

  • 알아주는 골초였다. 공식석상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은 당시 사진이나 방송영상에서 꽤 많이 보여왔고, 심지어 본인의 퇴임식에서도 연단에서 줄담배를 피워댔다고... 당시 전매청(현 KT&G)에서 전두환이 피는 담배는 최고급 연초만을 엄선해서 납품했다고 한다. 청와대 정례회의 때 본인은 한 두가치 정도만 피우고 늘 놔두고 갔는데, 관료들이 서로 나눠 가지려 했었다고 한다. 고령인 현재는 건강을 위해 금연했다고...
  • 위 문단을 천천히 읽어왔다면 알겠지만, 군 시절 권력과 엄청난 인맥 아래 거침이 없었다. 대령때 주요 지휘관 회의에 참모로서 참여하였는데 주요 장성들의 담화발표시 맨 앞줄에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상태로 듣는 등 당시 서슬퍼런 군부 사회에서도 아랑곳 없이 행동했다고 한다[22]. 그가 장군으로 진급했을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친히 금일봉과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는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도 묘사한 바 있다.
  • 대한민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설립한 교육기관(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다. 이승만은 조선~대한제국 시절에,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는 모두 일제강점기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미국 관료는 박정희 시기의 군장성 및 관료들은 미국에 대한 심한 열등감에 짓눌려 거의 말을 못하며 수줍어 하는 분위기 였는데 전두환은 자신만만해 한다며 다른 시대가 시작된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다고 평가.
  • 전두환은 고등학교 재학시절에 축구선수로서 체육특기생이었으며 포지션골키퍼였다. 학창시절엔 운동하는 건강한 소년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며 여자관계가 꽤 복잡한 걸로도 유명하다. 축구 외에 복싱도 꽤 잘했다고 한다.
  • 전두환 정부 시절, 외래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했는데 '골키퍼'는 끝내 바꾸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골키퍼'를 '문지기'로 쓰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전두환이 육사 골키퍼에서 육사 문지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공부는 잘 못했지만, 리더쉽은 대단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유학성처럼 계급이 높거나, 노태우처럼 공부를 훨씬 더 잘하는 사람들을 전두환이 이끌었던 것을 보면... 그래서 학창시절의 전두환을 시기하는 학생이 대판 싸움을 걸어왔고 이 싸움에 승리한 덕에 학교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어째됐든 입시에는 나름 노력한 덕분인지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갔는데, 사실 추가합격으로 들어갔다. 1차 합격자들이 육군사관학교 지원을 대거 포기하자 보충인원으로 들어갔는데 행운도 상당히 받쳐줬던 셈.
  • 전두환이 박정희의 눈에 들어온 계기는 5.16 군사정변. 당시 전두환은 대위 계급으로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였는데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모교로 찾아가서 자신의 후배에 해당하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빼다가 예복을 입히고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벌여줬다. 이후로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정계진출을 권유받지만 전두환은 거절하고 군에 남는 쪽을 택했다. 이 때 박정희는 차지철에게도 같은 권유를 했고, 차지철은 이에 응해 정계에 진출한다.[23]
  • 친구 노태우와 걸어온 인생이 거의 판박이이다. 군 장성 → 대통령. 그리고 젊은 시절에 체력이 좋았다. 물론 노태우 대통령은 제대로 된 선거절차를 거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 문서 참조.
  • 강력범죄에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직접 수사에 관여한 적도 있는데 그것이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이다. 1981년에 이윤상이라는 중학생이 모교 체육교사인 주영형(30)에게 유괴당하자 전두환이 직접 방송에 출연하기까지 했다. 81년도는 전두환이 집권후 민심 수습책을 고민하던 시기.
범인은 듣거라. 윤상이를 데리고 파출소로 와서 자수하면 최대한의 선처를 베풀겠다. 윤상이가 살면 네놈도 살 것이고 윤상이가 죽으면 네놈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윤상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전두환은 범인 주영형을 체포하자 직권으로 형법을 개정해버리고 주영형을 사형판결 확정 후, 단 열흘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주영형을 체포한 경찰관을 고속승진시킨 끝에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에 속하게 하였다. 이 사건을 스스로 해결한 전두환은 다시 방송에 출연해서 대국민선언을 했다.
국민 여러분, 아동유괴살인에 대해서는 앞으로 무조건 이렇게 조치할 것입니다.
  •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 말년에 치매로 인해 측근이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설명했는데 처음에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결국 알아들었는데 아, 학생들은 전부 빨갱이라고 하던 그 친구라고 했다고(...)...
  •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이 정말 부럽다고 한 적이 있었다. 기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저 나라의 대통령은 국민들이 반대하자 어린 대학생이라도 자기 뜻대로 모조리 감옥에 쳐넣을 수 있는데 미국은 그게 안되지 않느냐고 대답하여 기자들을 당황하게 만들 일화가.
  • 농담으로라도 애처가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인물이다. 결혼을 한 것도 이순자를 좋아해서가 아닌 이규동 라인을 타기 위해 한 결혼이며, 이 때문에 결혼한 이후에도 여자 관계가 정말 복잡하고 별의별 이야기가 다 있었다.
  • 그와 8촌 이내의 친척관계를 가진 사람 중 하나가 현재 야구선수인 전현태이다. 명절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연희동 저택에 세배하러 간다고. 그런데 이 선수의 소속팀이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강한 호남지역 팀이라는 것이 아이러니.
  • 국민들에게는 권위주의로 정치적 억압을 가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언변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기사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 여단장 시절인 1976년, 문재인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특전사 최우수 표창을 직접 준 적이 있다. 그러나 문 전 대표가 복학 뒤 1980년 5.17 내란 때 복학생협의회 활동으로 문제가 되어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청량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표창 주고 가둬버리기?
  • 전사모, 국내야구 갤러리, 일베저장소 등의 극우 진영에서는 매우 좋아한다.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절 경제호황과 더불어 빈부격차가 최저를 찍은 시기라면서 진정한 서민 대통령이라고 찬양한다. 특히 야갤은 엔두(엔젤두환), 전땅크, 야구의 아버지라 부르면서 띄워준다.
  • 합성 갤러리에서 주로 'xx는 xx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나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라는 대사가 합성 소스로 쓰이며 그의 애마 전차와 함께 등장한다. 전차를 타고 나타나서 짜라빠빠를 진압하러 갔다가 패배하거나, 인관 관악기로 바뀌기도 하며 설날에 심영에게 세배를 받고 전차를 심영에게 주기도 한다. 그 덕분에 전차를 보면 전두환 대통령이 떠오르는 인터넷 밈이 생기기도(...) 보통 동시대의 M48을 타고 나왔지만 최근에는 장태완 장군과 겹쳐서인지 은근 K2 흑표 전차와 많이 얽히는 편이다. 그런데 흑표는 국방정책으로 유명한 노무현이나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와 엮이기도...
  • 2010년 1월 SS501 멤버 김현중이 전두환 팔순잔치에 참석했다가 대중들에게 욕을 먹었다. 김현중 본인은 소속사인 DSP 이호연 사장 생일에 참석한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실제로 전두환과 이호연 사장 생일이 1월 18일로 같긴 하다. 이호연은 연예계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는데, 전두환과도 인연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6 대중매체에서

박용식이 연기한 전두환 (드라마 제4공화국)장광이 연기한 전두환 (영화 26년,응답하라 시리즈[24])
이덕화가 연기한 전두환 (드라마 제5공화국)

탤런트 박용식씨가 전두환과 용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 박용식 씨는 훗날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전두환 역을 맡아 혼신의 열연을 보여주었다. 박용식 문서에서도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후속작 제5공화국에서는 이덕화가 전두환 역할을 이어받으며 절륜한 연기를 펼쳤다. 비록 외모적인 유사성은 박용식에 미치진 못했지만, 주인공으로서의 묵직한 포스를 내며 특히 대머리와 함께 [25] 특유의 말투까지 재현해내며 상당한 싱크로율은 선보였다. 본인도 연기에 상당히 만족했다는 것이 후문. 이를 위해 집안 친척인 최병서에게 특훈을 받았다는 후문도 전해지기도.. 그리고 이덕화 본인이 악역 전문배우로 명성을 날린 적이 있는 사람인데 조선왕조오백년장희재, 사랑의 종말의 남현필, 사랑과 야망의 태수 등 완벽한 인간말종 연기를 달인 수준으로 실감나게 잘했던 과거가 있어서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냉혹한 면모를 잘 살려서 연기한 덕분에 외모는 박용식에 비해 미치진 못했지만 분위기는 되려 박용식을 압도했다.

드라마 삼김시대와 영화 26년에서는 장광이 전두환 역할을 맡았다. [26] 해당 작품은 전두환 대통령 퇴임 후 현재의 모습을 담아낸 이미지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와 작은 운동장급의 광활한 그의 사택에서 쓸쓸히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에는 곽진배에게 붙들려 힘없이 표적에 잡히는 등 안습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종보스김갑세 회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선물을 주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데 악역으로서 보이는 악랄한 연기는 일품.

이 외에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정종준이, MBN 다큐 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에서는 윤동환이 전두환 역할을 맡았다. 물론 배우들도 전부 대머리

7 관련 문서

  1.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 확정되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었음.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2. 공식 초상화
  3. 대통령 퇴임 후에 개종했다.
  4. 11대는 제4공화국(유신 체제), 12대는 제5공화국에 해당된다.
  5. 친일 문학가 겸 친독재자 서정주가 지어둔 호. 그는 전두환을 '단군 이래 위대한 지도자'라며 찬양한 바 있다고 한다.(출처필요)
  6. 고향 경남 합천군에는 이 호를 본딴 일해공원이 있다.
  7. 군사재판군사법원에서 군형법에 의거하여 진행되는 재판을 이르는 것이며, 전두환과 노태우 등 내란 수괴와 내란 중요임무 종사자들은 최종적으로 형법상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를 받아 민간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8. 당시 장태완 등이 군형법상 내란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으나, 검찰의 법리 및 공소시효 등의 검토 결과 형법이 적용되었다.
  9. 이 당시 일본 관광객이 많았는데, 일본인 관광객은 한국 사람들에게 항일기가 더 행복하지 않냐고 물어보았고 일본 신문은 공공연히 일본 지배가 나았다고 말했다. 일본인과 일본 매체의 이런 언행은 우리나라에서 반일 소재로 사용되었다.
  10.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은 본인이 군인 출신인만큼 경제는 전문 관료에게 맡기고 관여하지 않았다. 집권하자마자 경제 과외부터 받아야 할 정도로 잘 알지 못했지만, 비전문가인 독재자의 다 해쳐먹겠다는 욕심이 여러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건 그나마 칭찬할 일이다.
  11. 이에 대해 전두환은 "나는 내 동기들 중에서 소령은 제일 늦게 달았지만 대령은 제일 빨리 달았다"고 회고했다.
  12. 덕택에 노태우 정부에서 제일 먼저 이야기된 것이 전작권 반환이었다.
  13. 1980년 국보위 창설 시부터 '정화운동기획단'으로 출발하여 11월부터 사회정화위원회로 계승되어 정권 유지를 뒷받침하다가 노태우 시기인 1989년에 해체되어 민간단체인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로 재탄생했다.
  14. 이 법은 범죄자가 유사한 죄로 2회 이상 실형을 받고 그 형기의 합계가 3년 이상인 자가 다시 유사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등의 사유로 인해 상습성이 인정될 때는 형량과 상관없이 추가로 장기간의 보호 감호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하는 법인데, 1989년 지강헌 탈주 사건과 보호감호 중 사망자 속출 등 장기간 보호감호 처분에 따른 반발과 부작용이 발생하고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1989년 사회보호법을 개정해 보호감호 기간이 7년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나, 이후 사회보호법상의 보호 감호가 ‘사실상의 이중 처벌’로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오다가 2005년 8월4일에 폐지되었다.
  15.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 시기부터 0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다. 00년대 중반 박근혜가 정치적으로 뜨기 시작하면서 박정희 역시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였고 그들이 폄훼했던 박정희가 어느새 국부의 반열에 오르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16. 컬러TV 방송은 미국, 일본 등에는 60년대부터 보편적이었다.
  17. 껌이 유난히 많았는데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에게 껌 떼어 오는 일을 시키기도 하였다.
  18. 당시 결혼 연령대는 여성은 20대 초중반, 남자는 20대 중후반이었다.
  19. 박정희 대통령은 여자를 붙여준 적도 있다. 미국 대통령 영부인은 이것으로 당황해 했다는 일화가 있다.
  20. 사진을 보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비해 대담한 모습을 보여준다. 가오가 선다
  21. 두 사람은 재판장에서 몇 달 만에 재회했는데, 오랜만에 보자마자 전두환이 대뜸 하는 말이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후라이 주나?"였다. 노태우는 "안 준다."라고 대답했고 전두환도 "우리도 안 줘."라 대답하며 두 사람의 짤막한 대화는 끝이 났는데 백담사에 칩거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노태우 그 놈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귀싸대기 맞는다."라며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던 전두환은 죽을지도 모르는 일생일대의 위기 앞에서 오랜 사적인 감정을 훌훌 턴 듯하다. 아니면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 순해졌는지도.
  22.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육사 11기생인데 그 위의 선배들은 전시 상황이라 약식으로 교육받았고, 자기 기수부터 정식 교육 과정을 이수하였으니 실질적인 육사 1기생은 자신들이다 하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육사 선배들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거기에다 군내에서 무시 못할 사조직의 수장으로 인망도 높았으니,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배들을 잡아먹을 수 있었다. 12·12사건 주동자 가운데에는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도 전두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23.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가른 선택이였다. 만약 차지철이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묵묵히 군인으로 남았으면 오히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못하고 장교 임관이나 계급이 더 높은 차지철이 일으켰을수도있다. 차지철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박정희에게 엄청난 충성을 맹세했고, 이것은 결국 야당의원과 김재규에게 원한을 샀었다. 그리고 그 원한의 결과는 차지철의 죽음이다. 박정희,차지철의 죽음과 김재규의 잘못된 육본판단으로 구속된상황에서 그 누구도 전두환을 막을자가 없었다.
  24.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는 카메오로 나왔다.
  25. 직접 드라마 촬영을 위해 머리를 삭발한게 아니라 원래 머리가 엠(M)자 형으로 벗겨지는 탈모증세가 있었다. 이는 타 작품에서 전두환 역할을 맡은 배우 모두가 마찬가지.
  26. 이 분 이전에 전두환 전담 배우로 유명했던 박용식 씨가 자신의 후배 성우인 박지윤의 친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둘 다 KBS 성우극회 소속...본인의 포스를 2명이서 다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