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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 |||
강우규 | 김구 | 김규식 | 김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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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 ||||||||
1대 | 2대 | 3대 | 4대 | 5대 | 6대 | 7대 | 8대 | 9대 |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
10대 | 11대 | 12대 | 13대 | 14대 | 15대 | 16대 | 17대 | 18대 |
최규하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
† 대법원의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로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된 인물 | ||||||||
* 헌법재판소의 2016헌나1 판결로 탄핵된 인물 |
역대 대한민국 국회의장 | ||||||
제헌국회 개원 | ← | 초대 1기 이승만 | → | 초대 2기 신익희 |
대통령 기록관 존영[1] | |
이름 | 이승만 (李承晩 / Syngman Rhee)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평산군 |
사망지 |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
본관 | 전주 이씨 |
출신정당 | 자유당 |
종교 | 개신교(감리교) |
부모 | 아버지 이경선, 어머니 김말란 |
형제자매 | |
영부인 | 프란체스카 도너 |
자녀 | 양아들 이인수#s-2 |
생몰년도 |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90세) |
재임기간 |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
서명 | [3] |
목차
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제3대 대통령, 독립운동가, 정치가.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대통령등으로서 독립 운동을 펼쳤다. 대한독립 이후 반탁, 자유민주주의 중심으로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하여 이후 11년 동안 대한민국의 정부 수반이었다.[4] 이후, 체제를 부정하는 보도연맹 학살사건 및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등의 독재 행위로 인하여 4.19 혁명이 일어나자, 대통령직을 하야하였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호는 우남(雩南)이다. 1900년대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5]를 수여받았다. 이러한 행적에 따라, '이승만 전 대통령' 이외에도 '우남' 혹은 '이승만 박사' 라 불리기도 한다.
개요는 해당 토론에 의거합니다. |
2 생애
2.1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
양녕대군의 16대손, 이순신(李純信)의 9대손으로 아버지 이경선과 김해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두 형은 아주 어릴 적 장가도 들기 전에 모두 천연두로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집안의 장남으로 6대 독자이다. 참고로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중 누군가가 이승만과 자신이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면 그냥 가볍게 씹어주자. 양자로 들인 이인수씨는 양녕대군파 중에서 항렬이 같은 집안의 자손을 양자로 들인 것.[6][7] 각설하고 현재 양녕대군파 후손들은 이승만과 아무리 가까워도 최소 12촌(항렬이 같을 경우)에서 거의 20촌 이상이고 대부분 양녕대군파들은 30촌이 넘어갈 정도로 촌수가 멀기 때문에 결국 이승만과 가장 가까운 부계는 없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이승만의 누나 들은 자손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우씨와 심씨에게 시집갔다고 함).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뛰어난 웅변으로 유명하였으며, 서재필 등의 계몽 운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구한말 정치지형의 변화로 독립협회가 불법화 및 강제 해산당하면서 잠적하였다. 이 와중에 전단지를 돌리다가 체포되었는데 이유는 그 전단지 내용 중 일부가
황제(고종)는 나이가 많으니까 물러나고 황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 한다.[8]
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협회 시기 이승만은 박영효 계파와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전단지의 내용이 박영효 내란 음모 사건에 연결되었다. 이 때문에 5년 7개월간 투옥되었고, 다시 외부에서 권총을 들여와서 탈옥을 했다가 도중에 잡혔고 종신형이 내려졌다.
감옥에 도서관이 생기도록 하고 개신교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간수 및 동료죄수들에게 개신교를 전도하고 독립정신이라는 책까지 썼다. 다만 김옥균을 저격했던 홍종우가 그를 취조해서 목숨은 건졌지만, 이승만에게는 고문이 가해졌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해서 이로 인해 후유증을 얻고 살았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안면근육경련이 바로 이 때 생겼다는 말도 있다
이러한 고문은 이승만의 평생에 걸친 조선 왕조 혐오와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훗날 일본한테 잡혀서 고문당했다고 거짓말을 치고 다녔지만 일본한테 잡힌 적은 없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터지자, 미국과의 연결고리를 원했던 민영환을 비롯한 고관들의 끈질긴 주청으로 1904년에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되었다.
을사조약을 즈음하여서는 미국으로 건너가 일제의 침략행위를 알리고자 하였던 민영환의 사절로 미국으로 건너가 이를 호소하였으나, 미국은 이미 일본과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시기라 별 성과가 없었다. 이후 미국에 머무르며 공부하며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조지워싱턴에서 학사, 하버드대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과 국제법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은 훗날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행정학자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이었는데, 윌슨은 이승만을 아끼고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프린스턴 대학교의 ‘우드로 윌슨 스쿨'에 ‘이승만홀(Syngman Rhee·1910 Lecture Hall)’이라고 하는 대형 강의실이 있다.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박사 학위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박사 학위인데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이승만 '박사'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재학 중 재미 교포들이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미국 법정에서 통역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자 3천 달러의 보수를 요구하였다. 참고로 이후 이 사건을 담당한 미국인 변호사 수임료가 4천 달러였다. 이민자들이 그 돈을 모아 줬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으로써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며 거절하고 외면하였다.
이 부분은 이승만이 독립운동가인지 의심하게 드는 부분이다. 다만 말했다시피 당시 이승만은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그 두 사람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2.2 일제강점기 초기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하여 교육자로서, 교육활동과 실력운동에 힘썼다. 또한 교민들의 성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기여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그는 미국을 본받아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려면 국무총리제가 아닌 대통령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과도한 권력 집중에 대한 우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합의 없이 임의로 대통령(President)을 자칭하다가 여러 임시정부 요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결국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로 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9]하였으나, 임시정부에 직접 방문한 횟수는 극히 드물었다. 여담으로 그 이유가 임시정부 숙소에 수세식 화장실이 없어서 라는 설이 있다.
2.3 임시정부 대통령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민족자결주의가 확산되자, 외교독립 노선을 주장하던 이승만 역시 국제연맹에서 한반도 독립을 청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와 밀월관계에 있던 미국은 이승만의 출국비자 발급을 거절하였고, 이에 이승만은 안창호, 정한경과의 논의 끝에 윌슨에게 직접 한반도 독립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온 것이 바로 1919년 2월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승만이 3.1운동을 방해하려 했다는 오해를 사게 되면서 1920년대의 임시 정부의 자금난과 이승만의 취임 거부 등이 겹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하와이에서 노선 차이로 이승만과 정적이 된 박용만 계열이 문제 삼으면서 임시 정부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1925년 자금 문제로 탄핵되었고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승만은 임시 정부를 향한 재미교포들의 자금 지원을 차단하는 등 거리를 두었으며, 주로 미주의 한인 사회에서 활동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 참조.
2.4 임시정부와의 갈등
이승만은 탄핵 전부터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에서 각종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각 나라에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거나, 임정홍보, 독립에 지지를 호소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지만,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오히려 구미위원부가 이승만 개인시설로 이용되는 면이 있어서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 폐지 령을 발표하였으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하고 계속 활동한다. 박용만이 의열단에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언론을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 당시 이승만은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 절하했다.
1933년 국제연맹 총회가 열릴 스위스 제네바의 사무총장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인 독립 문제를 회의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 후 소련에도 가 보았지만, 역시 일본의 방해로 가자마자 쫓겨났다.
30년대 들어서 임시정부에서 反이승만 세력이 약화되자,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2.5 태평양 전쟁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고한 일본 내막기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실제로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이것이 미국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 포고문과 임시 정부 승인 요구 문서를 미국 정부에 보낸다.
1942년 미국 국무부를 방문해 임시 정부 승인과 임시 정부에 무기대여법을 통한 군사 원조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반공주의자이던 이승만은 한국을 도우면 소련이 한반도에 입성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펴 미국을 설득하려 했지만, 미국은 이미 공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소련과 동맹관계였기 때문에 거절당한다.[10]
이승만은 6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고 국제사회의 소식을 알리는 방송활동을 했었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처음 방송되었는데, 자세한 항목은 항일단파방송 사건 참조.
1943년 이승만은 미국에게 反소련전선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해 11월, 12월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한국을 '적당한 절차'에 따라 독립시킨다는 것을 발표했다. 비록 이승만은 '적당한 절차'가 신경 쓰였으나 미국 정부에 요청해도 자세한 내막을 파악할 수 없었다.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신탁통치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가긴 했었다.
1945년 5월 14일 독일 항복 후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 라는 미·영·소 3국간의 ‘얄타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에 미국은 부인했지만, 실제로 그 당시 신탁통치를 미국이 찬성했고, 소련에 대일참전을 요구하여[11] 3달후 만주 작전이 실행됨으로써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음이 밝혀졌다.[12] 결국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다.
2.6 해방 정국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뒤 38도선으로 한반도가 분할되어 북쪽에는 소련의 소군정이, 남쪽에는 미국의 미군정이 들어섰다. 미군과 함께 입국한 이승만은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 했던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로 무기한 휴회되자 1946년 6월 이른바 정읍발언을 하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결국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총선거를 통해 한국 내 자주적인 민간 정부를 수립할 것이 결의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감독에 의해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은 동대문갑구에 출마하였는데, 상대 후보는 독립운동가이자 경찰관 출신 최능진이었다.[13] 결국 최능진은 이승만을 추종하는 서북청년회과 경찰세력의 물밑 공작[14]으로 후보 등록은 무효화되었고, 이승만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된다. ##[15]
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 자격으로 대통령 중심제 헌법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같은 해 7월 20일에는 제헌국회의 간접선거로 진행된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북한의 앞선 토지개혁에 남한의 농민들이 불만을 느끼고 현혹될[16] 것을 우려했으며, 이에 따라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17]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서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18] 한편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19]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반공 노선을 지향하였다. 해방 정국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롭던 친일파들은, 우익인사들의 반공노선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있었고[20] 국내 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은 이들을 적극 등용하였다.[21] 한반도를 반소 반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던 미국에게도 친일파 청산은 별로 문제의식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통치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22][23]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였으나, 이승만 정부의 비호 아래 경찰력과 정치깡패를 동원하는 친일파들을 처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역으로 해산되고야 만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이승만 라인 또는 평화선으로 대표되는 독도와 이어도, 대한해협의 해양주권 절대 사수라는 초강경외교노선을 견지하였다. 6.25전쟁 시기에는 일본이 맥아더를 통해서 자위대 파견에 대한 의중을 떠보는 것이 귀에 들어오자, 자위대가 들어온다면 총부리를 공산군에서 자위대로 돌리라고 하였고,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임기 내 일본에 대해서는 초강경 태세를 유지하였다.
2.7 6.25 전쟁
한편 이승만과 관료들은 반공과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의주에서 먹는다."라고 장담하였으나[24][25], 이승만은 기자회견으로 군사지원 시 북진통일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북침이 발발, 전쟁이 확대될까하는 걱정 때문에 미국이 군사지원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실제 군사력은 소련의 장비와 중공의 인력을 비밀리에 지원받은 북한에 비해 터무니없이 딸리는 상황이었지만 하루 만에 북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국군이 승전을 거두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거짓 방송을 내보내며 독려하고자 했으나 실제 북한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서울 코앞까지 진격해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발발 이틀만인 27일 새벽4시에 먼저 서울을 탈출한다. 이승만이 서울을 빠져나온 직후 대구까지 내려갔으나(오후 10시) 이유는 불분명한데 다시 대전으로 올라갔고(출처:육군 군사연구소, 625전쟁의 실패 사례와 교훈) 여기서 그 유명한 서울사수방송이 시작된다. 이승만의 자신이 여전히 서울에 있으니 국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내용이 담긴 녹음방송은 27일 밤 10시부터 수 차례 울려퍼졌고. 이는 대통령의 말 하나만 믿고 피난과 탈출에 실패한 시민들이 때죽음을 당하는 주된 요인 중 하나였다. [26] 하지만 이 녹음방송이 시작된지 몇시간 만인 28일 새벽 3시경에 한강 인도교 폭파작전이 실행되었고[27] 서울을 떠나지 못한 나머지 시민들과 관료들 뿐만 아니라 서울방어를 하면서 민간인을 보호하던 국군 병력 상당수가 서울과 한강 북쪽에서 발이 묶였고 공산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한몸 건사하기 바빠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을 도망다녔는데, 그 기록이 자못 대단하다. 6월 27일 새벽 4시경 서울을 떠나 11시경 대구에 도착했는데, 여기에서 다시 오후 4시경 대전으로 가서는 상술했던 '녹음구라방송'을 서울에 틀게 해놓고는 7월 1일에는 새벽 3시에 다시 대전을 떠나 14시에 목포에 도착했고, 여기에서 장장 19시간 동안 항해 끝에 7월 2일 11시경 부산에 도착했다. 전쟁 발발 직후 대략 일주일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이승만은 파나마 모자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일반인으로 철저하게 변장하고, 부인 프란체스카와 극소수의 경호원만을 대동하고 자신이 국가원수라는 사실을 극비에 부친 채 도망다녀야 했다. 이 시간 동안 그가 제대로된 국정운영은 물론 군통수권을 행사할 수 없었음은 지극히 자명한 이치였고, 다른 정부요인들도 그의 묘연한 행적을 찾느라 분주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적을 보이기는 했다
He despaired of saving anything and inquired possibility President and Cabinet moving to Japan as “government in exile.” I made no commitment.그( 신성모 국방장관)는 아무것도 할수없다는 것에 절망해있었고, 대통령과 내각의 일본으로 이동 즉 망명정부의 가능성을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7일 무치오 주한미국대사의 보고서 중
이승만의 해외도피 시도가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보도하였다. 2015년 6월 24일에 KBS에서 [단독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이라는 뉴스 기사를 낸 것이 논란의 발단이었다. 조갑제닷컴등 보수언론은 이를 부인했지만 망명정부 요청이 있었고 미국에도 보고된것이 확인되었다.
무치오 당시 주한미국대사의 1950년 6월 27일 아침에 쓴 보고서로 대한민국 국방장관의 방문과 정부의 동향에 대한 내용이었다. 무치오 대사는 27일 아침 7시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의 방문을 받았다. (신성모)그는 현재 이승만은 새벽 3시 진해를 향해 이동하였고 정부 주요인사도 아침 7시로 이동중이다. 동시에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국방부 장관의 망명정부 타진이란 것이 당시 신성모 장관의 뜻인지, 이승만 대통령 본인의 뜻인지 확실히 구분을 못한다. 미국 외교문서의 내용에선 당시 이승만의 몽진을 추진했던 신성모 장관의 의중만을 담고 있다. 이 당시 이승만은 몽진중 대구에 이르러 다시 회차를 하였고 그날 저녁 대전에서 녹음 서울 사수 방송을 하려고 있었다. 이를 믿었던 서울 시민과 대다수 국민들은 크게 뒤통수를 맞았다.
일부 언론에선 이승만의 처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을 참고로 삼아 변호한 사례도 있다. 이승만은 항시 권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무쵸 대사가 일본으로의 망명을 주선하였으나 권총을 뽑아들어 나는 한반도를 벗어날 뜻이 없다고 강경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다만 KBS는 이승만 정부의 망명설의 근거로 야마구치 현사 내용을 보도했는데 원문에 없는 '(1950. 6. 27)'이라는 문구를 편집해서 넣은 것이 드러나 해당기사를 삭제했고 관계자들이 징계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단독 보도라고 했지만 이미 일본의 산케이 신문에서 1996년 4월14일에 보도한 바 있으며 그 다음날 조선일보(1996.04.15/사회/37면)에서 인용 보도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등도 교도통신 등을 인용해 보도하였다.
이승만의 의지가 반영 여부는 무관하게 신성모에 의해 미국을 통한 일본 망명정부 수립에 대한 타진을 했었다는 것으로 이승만의 몽진에 대한 진위가 어디까지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1]
1996년 최초보도 기사에서 언급된 '미국외교관계'의 원문이 KBS뉴스로 인한 논란으로 2015년에 알려지게 되었다. 해당 내용은 1950년 6월 27일(한국시간,미국시간으론 6/26) 주한 미 대사가 본국에 보낸 전보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피신한 상태에서 당시 국방장관겸 국무총리 서리였던 신성모와의 면담 중에 신성모가 대통령과 내각의 일본망명 가능성에 대하여 문의했고 미국대사 자신은 아무런 확약도 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8]
이승만은 이 시기에 보도연맹 학살사건같은 큰 병크를 저지르게 되는데 당시에는 유야무야 넘어가려다가 노무현 정부 시기에서야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대표되는 군 상층부의 무능함과 부정부패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남한 영내의 빨치산과 같은 저항세력을 분별하고 제거하는 과정에서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 수많은 양민학살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골로 간다[29]는 말이 이때 나왔다. 한편 한국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자국 내의 반전여론에 부담을 느낀 미국이 휴전협정을 추진하자 이에 극렬히 반대하며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켜 한미관계에 일시적인 마찰을 불러오기도 하였다.[30].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유엔군 관할이었다.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직전 3군의 헌병조직을 통합하고 각군 본부가 아닌 국방부 직속의 '헌병총사령부'를 창설하여,[31] 수용소를 관리하는 유엔군을 무시하고 한국측 헌병과 경찰병력을 반공포로 탈출에 적극 개입시켰다.
2.7.1 암살 미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건인데 1952년 6월 25일 6.25전쟁 2주년을 맞아 충무로 광장에서 이승만이 연설을 하였는데 유시태라는 의열단 출신의 노인이 이승만 바로 뒤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 하지만 권총은 불발돼 총알이 나가지 않아 이승만은 죽을 위기를 넘겼다. 4발이 불발이었는데. 김시현이 총을 일부러 그랬다는 (이승만에게 경고하기위해서) 초기증언이 있지만 실상은 정확히 알수없다. 이 암살장면을 포착한 사진은 2015년 8월달에 공개되었다. 김시현이 사주했다고 판결이 났다. 김시현이 애초에 국회의원이었는데 행사장에 들어가게 자기 신분증이랑 권총을 준비해줬다.
2.8 전후 제1공화국
한국전쟁 휴전 이후 1953년 10월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속에서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미국의 대(對)한국 안보보장을 얻어내었다. 이후 장기독재를 위해 1958년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야당후보인 조봉암을 대상으로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이전에 1952년에는 정치깡패와 경찰을 동원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위한 상태에서 야당 의원들을 협박해 발췌 개헌, 1954년에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기적의 수학자가 되어 대통령 연임규정을 수정하며 독재정치로 나아갔다. 결국 1960년 3월,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연루된 3.15 부정선거의 여파[32]로 동해 4월 4.19 혁명이 일어났다. 시위에 참여한 고등학생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을 눈에 맞고 사망했으며, 시신은 유기되었지만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33] 10년 동안의 이승만 독재정권에 억눌려왔던 분노가 폭발한 국민들은 혁명 동안 친정부 언론사인 서울신문사를 불태우고 파고다 공원의 이승만 동상을 파괴했으며,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부정축재를 벌이던 이기붕의 집을 방화하였고 경찰과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는 강경진압을 천명하였고 이승만 본인도 전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도 못했고 시민들을 향해 '야당에 의해 선동당한 국민들의 폭동, 공산당이 사주한 난동'# 정도로 인식했다.
"본인(이승만)과 러닝메이트인 이기붕 부통령 민의원 의장은 3.15 선거가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민주당을 물리치고 석권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정부가 질서유지를 위한 경우 이외에는 선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민주당의 선동을 받은 일부 시위자들이 일을 저지를 때 수습을 하지 못한 것이다. 민주당은 수치스럽게도 그들의 패배를 은폐하기 위해 그런 수단(마산 시위)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 데 대해 한국국민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제(4월 19일)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할 일이다..."
"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주게 할 뿐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며 또 지방경찰은 각각 그 지방의 정돈을 지켜서 혼잡이 없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 "
역사 깊은 빨갱이 드립은 이때도 있었다.
각계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고 교수들까지 참여해 시국선언을 발표, 하야를 요구했으며 대한민국 국군과 주한미국대사관마저 지지를 철회하자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4월 26일 총사퇴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27일까지도 "내가 사임하면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며 대한민국 국회에 사임서 제출을 거부하며 대통령직을 놓지 않으려는 추태를 보였다. 한 달간 이화장에서 거주하다가 하와이로 이주하였으며,[34][35] 1965년 7월 19일 사망하였다. 시신은 귀향하여 고국에 안장되었다.
4/19 이후에는 찾아오는 고교생들, 대학생들에게 용돈도 주고 그랬다. 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였으나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며, 애초에 집권여당과 측근들을 비호한 것이 이승만 자신이기 때문. 그리고 시위대에서는 이승만 하야 요구가 나왔던 만큼 국민의 칼 끝은 분명히 이승만을 향하고 있었다.
재임 기간 및 정부명칭은 대한민국 대통령 일람을 참조.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제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대문구) | 무소속 | - | 당선 | 무투표 당선 |
1948 | 제1대 대통령 선거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80 (91.8%) | 당선 | 간접선거 |
1952 | 제2대 대통령 선거 | 자유당 | 5,238,769 (74.6%) | 당선 | |
1956 | 제3대 대통령 선거 | 자유당 | 5,046,437 (70.0%) | 당선 | |
1960 | 제4대 대통령 선거 | 자유당 | 9,633,376 (100%) | 당선 | 부정선거로 대통령 하야 |
4 묘소
우남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와 같이 안치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國立—顯忠院) 국가원수묘역에 자리하였다. |
5 평가
이승만/평가로 분리하였다.
6 매체
- 영상물에서 이승만 역을 가장 맛깔스럽게 연기해낸 배우로는 역시 최불암이 첫손에 꼽힌다. 드라마 제 1공화국에서 처음 맡은 이래, 거의 드라마 자체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 특유의 스타일은 그 이후 이승만을 맡게 된 후배 배우들이 이승만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최불암을 흉내내었다고 일컬어질 정도. 그 외에는 신구나 권성덕 등 유명배우들이 있지만 최불암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 야인시대(2002, SBS)에서는 무풍지대에서 이기붕 역을 맡았던 권성덕이
승진해서이승만 역을 맡았다.[36] 고집도 세고 자뻑도 어느 정도 심하지만, 최소한의 민주주의 개념이나 국민들을 신경쓰는 마음이 있긴 있는데, 결국은 그렇게 안 하거나 안 하게 되는 왕조 시절로 따지면 암군에 해당하는 행보를 보인다. 옆에서 권력욕에 찌든 자유당 당원들, 즉 이기붕/박마리아나 곽영주, 장경근 및 온갖 인물들이 이승만을 구워삶고 설득하고 매달리는 식으로(이승만을 대통령 종신집권하도록 하고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 사고를 친다. 항상 한국인들을 칭할 때 '국민들'이 아니라 '백성들' 이라고 부르는 게 꽤 흥미롭다. 여기서는 계속 집권하고 있으면 민주주의가 훼손된다며 대통령직에 출마 안 하고 은퇴하겠다는 모습도 보이지만 자유당과 이정재의 동대문파의 끈질긴 노력 끝에 '백성들이 진심으로 날 원하는구나!' 라며 또 출마하여 독재를 계속한다. 김두한이 처음에 백의사 밑에서 일할 때는 김두한을 기특하게 보았으나, 점점 김두한과 사이가 불편해지기 시작하고 그것은 김두한이 국회의원 당선 후 야당 인사들과 협력할 때 절정에 달했다. 일단은 1공화국 에피소드에서는 이기붕, 이정재, 곽영주 등과 함께 주요 악역 중 한 명에 해당하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고자라니소스가 아직까지 쓰이다보니 이젠 이승만 파트까지 사용하는 사람도 등장했다(...)# 야인시대에 이어 영웅시대(2004, MBC), 서울 1945(2006, KBS 1TV)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출연하면서, '이승만 전문 배우' 타이틀을 얻었다.
7 여담
-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고의 명필로 평가된다. 이는 당연한 것이 태어났을 때부터 조선시대 사람인지라 서예의 접근도와 숙달도가 다른 대통령들과 현격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취미로 즐긴 사람과 생활로 한 사람과는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평생 서예를 연마했기에 "명인"이라 불릴 만큼 글씨의 정교와 기교가 빼어나고 한자 뿐 아니라 한글과 영어 필체도 유려하고 필체가 굳세면서 부드럽다. 그리고 글씨를 매우 길게 썼다.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필체가 반듯하여 의지가 강하고 인간적인 완숙함을 갖추고 있으며 원칙을 중시하고 보수적인 성향이 있고 자신감이 강하고 용기 있는 성격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2006년 지인용(智仁勇)이라는 작품으로 대통령 글씨로는 최대인 1억 5500만 원의 낙찰가로 경매되기도 하였다.
- 조선 왕실의 후손이고 충무공 이순신의 부하였던 무의공 이순신(동명이인)의 후손이라 한다[37]. 왕조에 대해 반대하였으며 공화정 추종자였지만, 곽영주가 '옥체'라던가, " ~옵니다" 등 군왕에게나 쓸 용어를 사용하자 매우 좋아했다. 스스로를 지칭할 때 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자신을 프린스 리라 칭했다(...) 구한말 양반자제로 태어났다 보니 그런 특권의식이 있을 수밖에.[38]
- 정작 이승만은 광복 이후 잔존한 한국 황족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매몰찼다. 궁궐, 종묘 같은 국가시설은 차치하더라도 의친왕의 사동궁이나 운현궁 같은 일종의 사유재산마저 국고로 환수하려 했고 실제로 일부는 성공했다. 8세 때 사실상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해방 때까지 환국하지 못했던 영친왕이 맥아더와 회담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나 한국행을 논의코자 했지만 냉대받았고 이승만으로부터 "본국으로 오려거든 오시오."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말년의 순정효황후 윤씨[39]는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군의 원조로 피난했는데, 휴전 후 이승만의 지시로 창덕궁으로 환궁하지 못하고 한동안 정릉 수인재(修仁齊)[40]에서 기거해야 했다. 이 부분은 이승만이 미국 거주시기에 어떻게든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는 점으로 보면 이해가 가는 게 이승만은 자신이 왕조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긴 했지만 정작 귀국한 뒤에는 그걸 적극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독립운동 경력을 강조했고[41], 심지어 권력을 잡은 뒤에도 자신은 공화국의 대통령이지 왕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 물론 이승만의 대통령시절 행보는 그냥 왕이었다.[42] 이승만 역시 위와는 또 별개로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왕과 같은 자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대화할 때 "짐은..."이라는 왕의 수사를 즐겨 썼고 주변인의 회고록을 보면 은근히 왕 느낌을 많이 냈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 하지만 워싱턴은 임기 마치고 깔끔하게 내려왔다
- 미국에 있는 동안 이곳 저곳 줄을 대서 한국을 독립시키려 노력하였는데, 일본과 미국이 한판 뜨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한국의 독립이 용이해졌다.
- 광복 후 운현궁이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인정받아 사유재산화 되면서[43] 관저로 쓰지 못하게 되자, 그 대가로 이우 왕자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운현궁에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는 등의 무례를 범했다. 출처
- 이승만 추종자들은, 이승만의 과오에 대해서 인의 장막이라는 식으로 잘 몰라서 벌어진 일이라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는 경향이 있다. 10만 명 가량이 굶어죽고 수십만 명이 후유증을 입은 국민방위군 사건조차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한다. 그런데 이승만은 좋고 나쁨을 떠나서 머리가 아주 비상하고 권력욕도 아주 강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업적이란 것은 전부 이승만이 위대하다는 것이고, 실책과 과오는 전부 부하 탓 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북한에서도 고난의 행군등으로 여론이 나빠졌을 때 김일성을 이런 식으로 미화한 적이 있다.
- 그의 저서 일본 내막기는 일본의 가미카제나 일본의 집단주의를 정확히 예측하였고, 진주만의 공습과 일본의 패망을 예측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한국 독립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드는데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
-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낙방...[44] 이것은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이었고 이후 갑오개혁으로 사라지게 된다. 다만 선접 군과 거벽, 사수로 대표되는 당시 과거시험의 폐단을 생각해보면 이승만이 자력으로 합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승만의 집안은 과거급제자를 못 낸지 꽤 되어서 사실상 평민 집안이었고 급제자를 냈다고 쳐도 방계 중의 방계인, 말 그대로 종친의 떨거지라서 빽도 못 받는다.
- 이승만이 미국에 유학했을 때는 영어 실력만 좋았을 뿐 공부 자체는 안 했다. 이 때문에 경제학 등에서 낙제를 받아 석사학위 취득에 실패하자 하버드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를 오가면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동시에 진행했고 같은 날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당시 대학에서는 최초로 한국인 혹은 동양인에게 학위를 준 대학이라는 타이틀을 갖기 위해서였다.
- 화가 났을 때 주먹을 쥐고 입김을 후후 부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독립협회를 하다가 공화정을 세우려는 음모를 꾸민 죄로 체포되었을 때 손에 불 고문을 당했기 때문. 나중에 이승만 지지자들은 이것을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당한 고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왜곡이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기에 일본 경찰에 체포당할 일도 없었다.
- 더글러스 맥아더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대할 때, 서양인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동양인을 대체로 아랫사람으로 인식하거나 소수가 동등하게 대했던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대할 때처럼 공손하게 대했기 때문이다.[45] 또한 이승만의 얘기도 잘 들어줬다고. 그래서 이승만은 맥아더가 있는 곳을 일부러 찾아갈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맥아더가 GHQ라는 수완을 발휘한 것과 같이 볼 때 그가 동양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음을 엿볼 수 있는 면이다.[46] 그래서 맥아더가 UN군 사령관에서 잘렸을 때 이승만은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전자의 이유로 이승만의 마음에 들었기도 했지만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 폭탄 사용을 주장할 정도로 북진을 할 생각이 있어 이승만과 죽이 잘 맞았지만 월튼 워커의[47] 후임으로 온 매튜 B. 리지웨이나 제임스 밴 플리트는 1.4 후퇴 이후 미국 정부의 북진 불가, 현 상황 유지 방침[48]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사사건건 충돌을 빚었다. 이들의 성격도 이승만 앞이라고 말을 가려 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불편해 했다고 한다.
-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만난 적이 있는데 만나는 과정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아이젠하워는 미군 장병들을 위로하러 온 것이라 원래 계획에 없던 이승만을 만날 생각이 없었고 이에 환영 군중대회에 각료들까지 준비해놓고 기다렸던 이승만은 개망신을 당할 처지였다. 이에 백선엽이 한미 양국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겨우 회담을 주선했다.
- 친일 혐의가 있는 자들을 기용했다는 문제 때문에 그를 친일파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가 독립운동가 출신임에도 친일파들을 기용한 건 정치적인 세력 확대, 즉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다.
- 영어 실력은 미국 의회 연설을 들어보면 알 수가 있는데 문장 읽는 수준이 중년 고등학교 영어교사가 교과서 읽는 정도로 보아 자신의 의사 표현은 가능한 정도이고 영작은 문법과 어휘로 완벽에 가까웠을 거라고 추측된다. 지금 기준이면 이승만 영어는 국내파 영어 강사 보통의 수준이지만 그 당시로 보면 상당한 정도이고 또한 당시 원어민을 구경하기도 힘든 시대에 원어민과 대화하는 정도라면 평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웃기게도 이승만이 한국어를 할 때는 혀 짧은 소리를 내서 원어민이 한국어를 하거나 교포 2, 3세인 척 했다고 한다.
- 백범일지는 이승만 집권기에 금서로써 판매와 독서가 금지되었다.
- 191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무렵 미국 입국 당시 이승만은 자신의 국적을 일본(Japan)이라고 기재했다. 다만 이것은 이승만이 친일파이거나 친일 행위를 하려고 했다던가 해서가 아니고, 처음에는 국적을 조선(Korea)이라 썼는데 당시 미국에서 '그런 나라는 없다'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적은 것.
- 백년전쟁류의 다큐멘터리에서는 독립운동가를 가장한 친일파이며, 이승만의 반일 성향은 코스프레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백년전쟁 이승만편의 부제는 '두 얼굴의 이승만'. 다만 논란이 있는 다큐라 가려서 들을 필요는 있다.
사실 친일이든 친미든 어딘가에 붙을 인간이 아니다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때 출정식을 하는 축구팀을 배웅해주며 한일전에서 질 경우 대한해협에 빠져 죽으라고 했다(...). 다행히도 당시 축구 한일전은 승리
레알 필살.
- 1백환권, 5백환권 등 그가 집권한 시기의 지폐는 모조리 그의 얼굴로 도배되어 있었다.
여담으로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처음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얼굴을 반으로 접고 다녀서 디자인을 변경하여 왼쪽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있다.물론 그냥 헛소문이다.그런데 위에서 스스로를 짐, 왕으로 여긴 걸 보면 그럴듯하긴 하다실제로 이승만이 사람들이 지폐를 접고 다녀서 자신의 얼굴을 접어서 해지니노해서지폐의 위치를 바꾸었다고 한다.
- 한때 경기도 성남시의 도로명에 그의 호를 딴 '우남로'가 있었다. 현재는 헌릉로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해당 도로에 신설될 전철역의 가칭 역명도 우남역(서울 지하철 8호선)이다.
- 제 1차 이승만 시 공모전 사건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 시 공모전 세로드립 사건 항목 참조.
- 이승만의 연설 장면[49]을 찍은 사진이 짤방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된 사용법은 뭔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발언을 적어놓고 후술할 짤을 첨부하는 방식. 아무래도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에 빗대어 역설적으로 거짓말임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레바의 트위터 글이 있다. 이 외에도 몇가지 더 있다. 자세한 내용은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항목 참조.
7.1 박정희와 이승만의 관계
박정희는 이승만을 무능한 지도자라 평가한 바 있다. 경향신문 1961년 8월 16일 1면 사설 사실 박정희는 이승만을 개인적으로 상당히 싫어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해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썩어 문드러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한 해방 귀족이 날뛰었다"'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박정희는 이승만과 가까웠던 정치 군인들의 횡포나 이로부터 빚어지는 인사 적체 문제 등을 이승만 집권기에 겪었다. 그리고 자기도 독재를 시작했다. 애초에 5.16 쿠데타 자체가 자유당 시절에 계획했던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영결식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한 추모사에서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건국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김종필은 박정희가 우남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던간에 일단 죽은 고인에 대해선 심한 비판을 삼가고 되도록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인 생각과 별도로 영결식에서의 발언은 립서비스에 가까울 수 있다. 그 증거로 박정희 대통령의 1962년 저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이승만 평가는 영결식 당시 연설과 전혀 다르다. 내용 일부 발췌 그리고 2015년 4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배나TV의 장원재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조사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대신 참석한 정일권 전 총리가 말하길 박 대통령에게 조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사는 노산 이은상에게 부탁해서 쓰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배나TV 인터뷰 [길거리중계 '이인수 박사 (부제: 우남 이승만, 어떤 인물인가?)' 편, 5분 00초부터]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에 대해서도 시큰둥하게 대했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승만 사후 이승만의 장례로 인해 갈등이 일었다. 그 과정에서 양자의 의견 조율이 안 되자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하였으나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 그로 인해 화가 난 박정희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하려면 마음대로 하라'며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이석제 당시 총무처 장관은 이 보도를 부인했다.
8 관련 인용구
평생을 우리나라의 독립, 통일, 강력한 민주정부 수립과 그 발전에 바쳐왔다. 그러나 최근 사건이 말하여주듯 과업은 완수되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져야할 책임이나 닥쳐오는 위험을 회피한 일은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1959년 2월 3일, 대선출마 질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답변 中
공산주의자는 콜레라[50]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같이 살수 없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 연설 中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51]6.25 전쟁 발발 당시 라디오 연설
- ↑ 원본이다.
- ↑ 후술하겠지만 형이 두 명 있었으나 이승만이 태어나기도 전에 요절해 사실상 장남에 독자가 되었다. 누나들은 둘이 있었는데 각각 단양 우씨, 청송 심씨네로 시집갔다.
- ↑ 로마자 표기가 Syngman Rhee다. 즉 리승만. 여러모로 일반적인 표기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표기 방식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립되지 않았었다.
- ↑ 초대 행정부의 수장, 입법부의 수장
- ↑ 당시 그의 지도교수는 이후 제28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이었다.
- ↑ 사실 이인수는 양녕대군파의 같은 항렬 대의 사람들 중에선 이승만과 거리가 가장 멀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서2남 장평도정의 후손이고 이인수는 적2남 함양군의 후손이기 때문. 촌수로는 33촌(...)이다. 아무리 항렬이 조카 뻘이라 해도 이렇게 먼 촌수인데 어떻게 양자로 입양이 되었냐면 영어를 잘해야하고 너무 나이가 많지도 적지도 않아야하고, 아직 미혼이어야 한다는 등 이승만 측이 원하는 조건에 부합되었기 때문에 입양될 수 있었다.
거 입양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너무 까다롭다. - ↑ 조선시대의 경우 제대로 된 의미에서 양자는 일족 중에서 들이고 진짜 자식으로 취급했다. 이를 보종차원에서 한다고 한다. 물론 제사를 지내게 할 목적으로 빈한한 먼 친족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이완용 참조.
- ↑ 정작 광복 후 그는 70대의 나이에 출마하여 대통령이 됐다는 아이러니함이 있다.
- ↑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는 처음에는 대통령 호칭을 반대하다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서 양보했다.
- ↑ 즉 미국이 먼저 한반도에 진주하여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길 기대했으나 무산된 것. 결국 소련이 선수를 쳐서 이북 지역부터 점령하기 시작하고, 미국은 뒤늦게 원자폭탄을 투하해 한반도의 남쪽을 그대로 넘겨받는다. 그렇기에 미국이 먼저 진주했으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소련이 가만히 있을리는 없었기 때문에 분단될 확률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소련이 미국보다 늦게 참전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애시당초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하면, 미군은 머나먼 바다를 건너와야 하고 태평양과 한반도 사이에는 일본이 있으나, 러시아는 차만 타면 올 수 있다.
- ↑ 물론 소련도 독자적으로 만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입장에서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출혈이 컸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소련을 다그친 것.
- ↑ 특히 루즈벨트는 후임인 트루먼과 달리, 그다지 소련을 견제하지 않았다.
- ↑ 당시 그 누구도 동대문갑구에 출마하여 이승만과 겨루려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이 유력했는데, 느닷없이 최능진이 출마 선언하여 도전자가 생긴 것이다.
- ↑ 정확히 말하자면, 최능진의 선거등록 문서를 서북청년단이 서류를 강탈하고 등록 자체를 무효화시켜 버리도록 온갖 공작을 벌인 것이다.
- ↑ 한편, 최능진은 이 출마 건으로 이승만에게 단단히 찍혀버렸고, 1948년 10월, '혁명의용군 사건'(이 사건은 뒷날 CIC특무대 대장 김창룡에 의해 조작된 것임이 밝혀진다.)을 빌미로 징역 5년 형 선고 받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터져 북한군에 의해 석방되었고(하지만 그는 결코 북한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며, 중도파 국회의원들과 함께 '전쟁을 중단하자'는 평화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2015년에 결국 무죄판결을 받는다), 1950년 서울이 수복되자 다시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죄목은 '평화운동을 벌여 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최능진은 이듬해 1951년 2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근교에서 전직 관동군 헌병인 특무대장 김창룡에 의해 총살형이 집행됐다. # 2015년 8월 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여담으로 최능진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2013년 별세한 정수장학회 전 이사장 최필립이다.
- ↑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다. 미국으로서는 냉전이 시작된 이상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남한에서도 농지 개혁을 시행해야 했다.
쉽게 말해 맞불작전 - ↑ 남한의 농지개혁 방식은 농지만 대상으로 한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이었다. 물론 당시 산업시설이라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토지는 농지였다.
- ↑ 정치적으로는 반대 정파인 한국민주당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한국민주당의 중심 세력은 지주들이었기 때문.
- ↑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의 학제부터가 차등이 있었으며, 이 때문인지 광복과 정부수립 과정에서 국민의 교육열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 ↑ 당연히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에 협력한 친일파들도 있었다.
- ↑ 우익 인사로 분류될 김구 역시 공산주의를 혐오하여, 친일 전력이 있는 인물들로부터 협조를 받았다. 김구가 사망 직전까지 머물던 경교장도 친일 재벌 최창학이 헌납한 건물이었다.
- ↑ 더글러스 맥아더가 뿌린 '맥아더 포고령'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대놓고 현재의 관청을 통해라고 명시했다.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어떤 놈들이 관청을 장악했는지 아는 사람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 ↑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군국주의 체제의 버팀목이었던 우익 정치인과 고위 관료, 군인들(그리고 이들의 친인척과 후손들) 상당수가 1952년 공직추방령 해제 이후에 그대로 복귀하였고 미국도 이것을 묵인하였다. 이들은 자유민주당(일본)과 요미우리 신문을 중심으로 결집해서 다시 일본 사회의 주류가 되었으며, 현재 문제가 되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침략행위 미화도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다.
- ↑ 이건 이승만이 말했는지 채병덕, 신성모가 말했는지 논란이 있다 출처 부탁
- ↑ 뭐 다들 알다시피 점심은 대전에서 먹고 저녁은 부산에서 먹게 되었다.
- ↑ 훗날 유엔군의 진격으로 평양 함락 당시, 김일성도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라"고 해놓고는 몰래 도망쳤다. 김정일을 비롯한 가족들은 이미 훨씬 전에 국경을 넘어 만주로 대피시켜놨다.
- ↑ 이 폭파작전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관여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존재하며, 당시 정황으로 보아 이승만이 관여한 것은 아니고 미군 고문관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이 최종 결정권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다리 폭파만 그렇지 서울시민들을 기만하고 도주한 것은 육성 녹음을 대전에서 한것으로 미루어 철저히 이승만의 의도였다.
- ↑ 이승만을 비난하는 쪽에선 한국정부의 고위관료로부터 미국대사와의 면담 중에 나온거니 정부가 일본망명을 요청했다고 주장하고, 이승만을 긍정하는 쪽에선 망명건을 언급한건 신성모 뿐이고 그것도 전보의 한 문장에 불과하며 그 후론 1951년 12월의 주미한국대사가 참석한 회의 전까지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누구도 망명에 대해 언급하는 기록이 없다며 정부가 공식적으로 망명을 요청했다는건 지나친 확대해석, 추측이라 주장하고 있다.
- ↑ 군인들에게 산골로 끌려가 암매장 당한다는 소리
- ↑ 이승만은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을 압박해왔고 신생약소국 이었던 대한민국이 2차대전 승전국인 미국을 협박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이승만 임기때 종종 벌어졌다.
- ↑ 당시 손원일 국방장관은 사령부 설치를 공표하면서, '옥상옥 조직이다'라고 좋지 않게 생각했다.
- ↑ 마산상고 김주열 열사의 사망으로 상징되는
- ↑ 마산 경찰서는 제1차 의거가 일어나자 즉각 '빨갱이 조작'에 착수했는데, 국무회의는 4월 13일 오제도 검사, 조인구 치안국장, 하갑청 육군특무부대장으로 하여금 대공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차리도록 결의했다. '마산사건 적색분자 색출의 능률화'가 목적이었는데, 이승만 정권답게 빨갱이라고 조작하기 위해 엄청난 기구를 만든 것이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막 #)
- ↑ 이전에는 망명이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망명은 망명을 원하는 자가 타국에 망명신청을 해서 그 국가가 승인했을 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승만은 오랜 기간 동안 활동했던 하와이에 가서 옛 동지들도 만나면서 지내다가 귀국할 예정이었으나,(이는 이승만 본인 생각이고 허정이 내보낸 이유는 그냥 추방시킨거였다.) 후 마침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영영 눌러앉게 된 것이다. 실상 이승만은 수차례 귀국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박정희 정권이 계속 거절하였고, 결국 하와이에서 별세한 이후 시신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되었다. 애초에 미국정부에 망명신청부터 하지 않았으니 그냥 해외에 가서 사망한 것뿐이다. 흔히들 잘 모르는 부분.
- ↑ 실질적으로는 추방에 가깝다.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허정이 외교관여권으로 내보낸 후 재입국을 불허했고 이는 2공화국의 장면, 3공화국의 박정희 때까지 이어졌다.
- ↑ 공교롭게도 무풍지대에서 젊은 김영삼을 연기했던 배우 이인철 역시 이 드라마에서 이기붕을 맡았다.
- ↑ 더 위로 올라가면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참고로 이기붕은 효령대군의 후손.
- ↑ 어느 정도 신분이나 지위가 있어야 사교계나 행정부서에서 상대를 해주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당시 미국 생활에서 이승만은 이러한 신분 위조(?)를 통해 사교계에 적잖이 참여했는데, 이 원인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공화국으로 시작되다 보니 왕족, 귀족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더해진 덕택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게다가 동양인이었던 탓에 자신을 도와주던 미국 여성과 같이 있거나 하면 타 백인들이 미국 여성에게 '당신 옆은 당신 남편이냐'->동양인하고 결혼한 거냐ㅉㅉ식으로 비아냥거려서 먼저 동양의 왕자라는 식으로 선수를 친 적도 있다고 한다. 아무리 동양인이라고 해도 일단 왕족이라 하면 그래도 좀 달리 봤다고...
- ↑ 순종황제의 계후(繼后). 한국의 마지막 황후다.
- ↑ 齊(제)로 썼지만 거처를 뜻하는 齋(재)를 대신해서 쓰는 경우도 있어서 수인'제'가 아니고 수인'재'로 읽는 것이 옳다.
- ↑ 당연히 양녕대군파면 왕족이라고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멀어진 후인데다(500년쯤 전에 왕족이었다는 소리다.) 이승만은 양녕대군파에서도 방계중에 방계이니 한국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이니 그걸 언급할 리 없다.
- ↑ 거의 모든 화폐에 이승만이 실렸고 화폐의 이승만 초상화가 훼손될수 있다는 이유로 오른쪽으로 옮기던 시절이었다. 화폐의 인물 초상화가 원래 왼쪽에 있다가 가운데로 옮겨간 이유는 왼쪽이 있으면 좌익이라는 이유로 중앙으로 갔고, 자기 얼굴 접힌다고 오른쪽으로 다시 옮겼다.)
- ↑ 이우 왕자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의 노력이었다. 장남인 이청 명의로 사유화되었다.
- ↑ 헤이그 특사 사건의 특사로 파견된 이상설이 이 마지막 과거의 합격자 중 하나였다. 시험 성적도 훌륭해서 병과 2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 ↑ 같이 식사를 할 때도 맥아더가 이승만의 식기를 먼저 챙겨주거나 하였다고 한다.
- ↑ 맥아더의 부친은 일찍이 일본 주재무관을 지냈으며, 더글라스 맥아더는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이미 1905년에 일본에 체류한 경험이 있었다.
- ↑ 월튼 워커도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이승만이 싫어했다고.
- ↑ 애초에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의 방침이 한국이야 어찌 되든 전쟁 끝내고 보자는 것이었다.
- ↑ 신탁 반대 운동을 하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발언을 한 연설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 ↑ 당시 표현으로는 호열자(虎烈刺)
- ↑ 주로 연설하는 사진을 올리고 "XX 여러분 XX은 안전합니다 " "여러분 안심하고 XX하십시오" 라는 식으로 쓰인다. 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