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준섭

1 대한민국의 권투선수

대한민국의 아마추어 권투선수. 국가대표로 1984 LA 올림픽에 출전,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권투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다.

실상 이전에 복싱에서 두세차례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 송순천은 결승에서 독일(단일팀)선수를 일방적으로 두들기고도 판정패하여 당시 중계아나운서가 국력의 약함을 들어 국민들의 아쉬움을 대변했고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지용수도 결승에서 아쉽게 판정패한 바 있었다.


이런 가운데, 84년 대회는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대한 미국과 서구권 불참에 보복으로 아마추어 권투 최강급인 쿠바와 동구권이 불참한 가운데 다이너마이트 김승연 회장의 전폭적 지원에 각체급에 유망주 선수들이 즐비하여 다수의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었다.

당시 미들급 신준섭은 체급이 체급인지라 동메달 정도 기대하던 선수였고 대신 라이트플라이급 김광선, 플라이급 허영모, 밴텀급 문성길, 페터급 박형옥, 라이트웰터급 김동길이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고 이들은 막장 판정과 엉터리 경기진행만 아니었으면 모두 금메달이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우선 김광선은 1회전에서 미국의 폴 곤잘레스를 만났는데 초반 유효타를 많이 허용한 김광선이 2R부터 특유의 몰아치기를 하는데 미국선수가 코너에 몰릴때마다 주심이 김광선의 헤드기어가 조금 벗겨진 걸 지적하면서 서너차례 경기를 중단시키면서 제대로 인파이팅 경기도 해보지 못한채 심판전원일치 판정패를 당하고 말았다.

문성길은 16강에서 미국 로베르토 샤론과 대결하는데 이 경기는 미국에서 육상 칼 루이스경기 말고 최고의 시청율을 보였다. 경기는 서로 다운을 주고받다 2R부터 문성길의 돌주먹이 작렬하고 상대를 초죽음을 만들고 8강에 진출했고 역시 문성길의 돌주먹이 작렬 중 상대의 머리에 눈썹이 찢어졌다고 부상에 의한 RSC패, 탈락하고 만다.(여담으로 문성길이 아마추어에서 유일하게 우승을 못한 주요 대회가 올림픽이었다. 결국 그는 서울 올림픽 직전에 프로로 전향한다. 그리고 기간을 못 채운 채로 프로 전향했다가 아시안 게임 우승으로 얻은 병역 특례가 취소되어 현역 입대한다.)

박형옥은 8강에서 판정승했으나 왠 거지같은 배심원단에 의해 승부가 뒤집혀 탈락한다. 한국복싱의 불운의 정점은 김동길이 찍는데 이건 완전 막장에 가까운 것이었다. 경기는 시종 김동길의 우세속에 우리와 미국과 완전 상관없는 우간다 소년한테 판정을 하라고해도 김동길의 승리에 손을 들텐데 미국 제리 페이지의 판정승, 관중들의 적막과 함께 제리 페이지의 어색한 제스쳐가 이어진다. 당시 대한복싱연맹 김승연 회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8:2 가르마에 상하 흰색 양복과 백구두로 나타나 선수단 철수를 공언한다. 물론 차기대회 개최국으로 이는 취소되었지만 여기서 반전이 생긴다.

최소 접전을 벌이고 판정을 기다리던 우리선수들 손이 올라가는게 아닌가! 신준섭은 전북 남원태생으로 고교때 복싱을 시작했고 국내선발전에서도 번번히 탈락하는 평범한 선수였다. 전국체전과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셨으나 83년 로마월드컵에서 금메달을 회득,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결국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그런데 웰터급 이상 체급에는 애당초 기대를 하지 않은지라 1회전 통과부터 한줄 기사에 불과했고 문성길, 김동길이 탈락한 이후에는 복싱은 전멸했다란 분위기가 퍼졌으나 다크호스 신준섭, 전칠성, 안영수가 선전한다. 신준섭은 우간다, 캐나다, 나이지리아, 푸에르토리코 선수를 차례로 물리치고 결승에서 버질 힐과 만나 일대접전을 폈고 판정에서 신준섭의 손이 올라간다. 인상적인 것이 미국이 독판치던 복싱에서 판정으로 간다는 것이 곧 패배로 인식된 것인지 결과발표 전 신준섭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버질 힐은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유튜브에서 보시라!

이렇게 대한민국 복싱 첫 금메달이 탄생했다. 이후 신준섭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은퇴하고 현재 미국에 이민가서 살고 있다.

2 슬램덩크의 등장인물

신준섭(슬램덩크)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