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경

沈惟敬 (Shěn Wéijìng / 선웨이징)
?~1597

1 개요

중국 말기의 무장. 가흥 지역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발발 후 조선에 파견되어, 일본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접촉했다. 1593년에는 일본까지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 그의 요구사항을 들었는데, 조선 4도 할양, 명의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보낼 것 등 그의 요구가 너무나 터무니없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이를 도요토미가 왜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으로 조작하여 명 황실에 보고한다. 그리고 고니시를 위시한 일본 내 반전파들이 도요토미에게 명이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속이기로 입을 맞춘다. 그러니까 고니시와 짜고 희대의 국제사기를 벌인 것.

명은 이 구라를 믿고 심유경의 외교능력에 감탄하면서(...)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한다는 문서를 보냈는데, 거짓 내용을 읽어주기로 한 도요토미의 승려 사이쇼 죠타이가 명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구라는 탄로나게 된다. 머리 끝까지 열받은 히데요시는 그대로 전쟁을 재개할 것을 명령하고, 그렇게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자신의 구라가 탄로난 뒤 심유경은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천자를 능멸한 죄로 참형에 처해진다. 고니시 역시 목이 잘리기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사면된다.

2 평가

다만 그를 무조건 까기는 어려운 것이 명의 입장에서 보면 최소한의 피해로 조선을 회복시킬 수만 있다면 마다할 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명의 목적은 자국 군대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협상이 성공하고, 조선의 영토를 보전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화의가 가능성이 있을때의 이야기였고 애초에 전쟁 지속 중단 여부의 결정권을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끝까지 야욕을 버리지 못했기에 화의는 애초부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명이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언제까지나 왕 책봉에 더해봐야 조공을 받는 정도인데 히데요시는 조선 영토를 병합하려고 했기 때문. 그 증거가 화의 도중에 발생한 제2차 진주성 전투로 드러났는데도 심유경은 사태를 파악할 생각도 없이 끝까지 화의를 밀어붙였다. 이는 심유경이 처음부터 조선에 온 목적이 일본과의 화의였기에 전투로 전란이 매듭지어질 경우 자신의 입지가 난처해질걸 염려해 사실왜곡을 감행하면서까지 화의를 진행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니시 유키나가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장기간 양국을 속이는데 성공했지만 애초에 심유경이나 고니시 유키나가나 양국에서 입지가 거의 없던 인물들이라 속이는데 한계가 있어 결과적으로 화의가 파탄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이로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력을 추스릴 충분한 시간을 벌어놓고 재침을 시도할 수 있었고 명은 또다시 정유재란에 참전했다가 잘 준비된 일본군과 제대로 붙어 엄청난 인명피해 및 막대한 재정 소모와 병력 손실을 입기에 이르니 심유경의 화의 추진은 명에게 이득을 주기는 커녕 더 많은 손실을 입힌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심유경이 명나라의 신하라는 점을 감안하면 심유경의 행각은 국가 대 국가의 관점에서 볼 경우 명나라가 괜히 조선에게 외교분쟁을 해결해주겠다고 나섰다가 결과적으로 조선에게 사기를 친 꼴이 된다.

3 창작물에서

  •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외교를 강조한 해당 작품의 특성상 진주인공 중 한명으로 후반부터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등장한다. 3권에 첫 등장하는데 사실상 진주인공이자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후반부를 이끄는 주연인 셈.
  •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임진록 2에서는 명 영웅으로 등장한다.[1]
  • 임진왜란 1592에서는 고니시와의 회담이 영가의 난을 진압하고 명군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묘사되었다.
  1. 마법장수는 넣어야 하는데 왜란 당시에 활약을 펼친 명나라인들은 대부분 무인이였기에 이름이 알려진 인물중 거의 유일하게 문관이 심유경이라서 그랬던것 같다. 그런데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임진년에서 수백년 전의 인물인 제갈공명과 가공의 장수인 순비연이 마법장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