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바시스

고대 그리스의 군인이자 작가인 크세노폰의 저작이다. 국내에는 페르시아 원정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페르시아다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장남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하자, 동생 퀴로스는 그의 형과 왕위를 다투기 위해 그리스 용병 1만 명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첫 전투인 쿠낙사 전투(BC 401)에서 퀴로스는 전사하고 반란은 실패한다. 그리스 용병들은 명분없는 전쟁에 끼어들고, 보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배신으로 지휘관을 잃는 등,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때 크세노폰이 나서서 지휘를 맡게 되고, 졸지에 적지 한복판에 고립된 용병들의 기나긴 탈출이 시작된다.

용병들은 페르시아군에게 쫓기고, 도망간 지역에서도 이민족들의 저항에 부딪히는 등, 퇴각 도중 죽고 낙오하는 자가 속출해, 결국 6000명으로 줄어든다. 크세노폰은 퇴각 과정에서 다양한 음모론에 휘말리고[1] 각종 비난을 듣지만, 그의 전략과 필사적인 노력에 힘입어 흑해 연안에 도착, 용병들은 페르시아의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환영단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탈출에 성공한 그들을 보고 거대한 군세를 유지한 채 파프라고니아이오니아에 식민 군사도시를 건설해 일대의 지배자가 되려 한다거나, 그리스 도시를 치려 한다는 등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반대로 용병들은 크세노폰이 그들을 선동해 해산시키려 한다는 비난까지 듣는다.[2] 반 년 동안 적지에서 생존을 위해 싸워온 용병들은 정예병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6000명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스파르타에서는 용병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그리스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흑해를 건너 페르시아로 쳐들어가는 원정대로 보낸다. 크세노폰은 이 때 부대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용병들이 다시 페르시아로 건너가 어떻게 되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크세노폰은 이 때의 이야기를 책에 기록했고, 이것이 아나바시스(진군기)이다.

워리어(영화)와 그 원작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히스토리에에서도 에우메네스가 좋아한 책으로 언급된다.

여담으로 이 사건은 당대 그리스 인들의 전투력이 전투민족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리스 인들이 단결하여 본격적으로 침공해온다면 페르시아 제국은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이 이미 드러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즉 페르시아의 약체화와 그리스의 잠재력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는 분석이다. 고작 1만명의 그리스 인들이 제국 내부를 거의 갈아엎고 다녔으니. 물론 그리스 인들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서로 싸우느라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북쪽에서 갑툭튀한 어느 왕에게 강제 통일되어 결국 페르시아 제국을….
  1. 실제 크세노폰이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2. 스파르타가 패권을 차지한 뒤, 각 도시에 소수의 병사와 총독을 파견해 놓은 당시 그리스 상황에서, 용병 세력은 큰 위협이었다. 크세노폰 본인도 그리스 도시를 공격할 뻔 한 위기가 수 차례 있었는데, 자신이 간신히 막았다고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