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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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현재 모습(2007년), 인구는 15,818명이다.

1 개요

그리스의 도시. 흔히 혹독하고 자비심 없는 비인간적인 단련 과정을 이야기할 때 인용하곤 한다.[1] 고대 그리스어로는 스파르타가 아니라 스파르테(Σπάρτη)이나, 이는 아티카식이며 도리아식으로는 스파르타(Σπάρτα)이므로 딱히 틀린 명칭은 아니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스파르티'라고 읽는데 Η/η 모음 읽는 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건국왕 라케다이몬의 아내인 스파르타의 이름을 딴 것이며, 당시 폴리스의 공식 명칭은 라케다이몬(Λακεδαίμον = 라케데몬)이었다. 때문에 스파르타 전사들의 방패에는 '라케다이몬'의 첫글자인 대문자 '람다(Λ)'가 그려져 있다. 하프라이프 3을 예지한 스파르탄

2 역사

2.1 고대 도시국가 시절

그리스의 역사
Η ΙΣΤΟΡΊΑ ΤΗΣ ΕΛΛΆΔΑΣ
선사고대
미노아 문명미케네 문명암흑시대고졸기아테나이헬레니즘 제국
(안티노고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로마 제국
스파르타
마케도니아
중세근대
비잔티움 제국
(니케아·라틴제국·
에피로스·트레비존드)
오스만 제국제1공화국그리스 왕국제2공화국그리스 왕국그리스국
현대
그리스 왕국군사정권그리스 공화국

2.1.1 성립

미케네 문명이 멸망한 직후, 고대 그리스의 암흑시대에 스파르타 지역에는 4개의 정착촌이 있었다. 이 중 2개의 정착촌이 동맹하여 다른 2개의 정착촌을 멸망시킨 것이 스파르타의 기원으로, 스파르타 특유의 이중왕(Dual King) 제도도 여기에서 기인했다고 보고 있다.

스파르타는 미케네 문명이 파멸할 때 살아남은 몇 안되는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아테네와도 비슷한데, 스파르타는 특히 미케네 문명 시대의 전통이 잘 보존된 도시로 여겨진다. 스파르타 특유의 집단 전사 문화나 자유로운 여성 문화는, 미케네 문명 시대의 그리스 전사 문화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고대 시대에 스파르타는 서쪽에 있는 폴리스 메세니아를 정복하였으며, 독특한 사회 체계로 알려진 리쿠르고스 체계가 성립되었다고 전해진다.

페르시아 전쟁 이전부터 그리스 육군 최강국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그 결과 페르시아 전쟁 시 결성한 델로스 동맹에서 수장직을 맡았다. 사실, 병력동원비율이나 그 구성원들의 외교관계를 생각하면 이때 그리스는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주력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스편에 든 나머지 도시국가들도 대부분이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소속국들이였다.

페르시아가 반드시 멸망시키고자한 도시가 스파르타와 아테네란 점에서는 당연히 생존을 위해 모든 걸 걸어야 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테베는 페르시아와 함께 연합전선을 꾸리기도 했다.

2.1.2 페르시아 전쟁

스파르타가 후세까지 이름이 남은 것은 페르시아 전쟁 중에서 벌어진 테르모필레 전투가 이후 그리스를 비롯한 많은 유럽국가에서 군인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전투 자체는 그냥 사흘을 버티지 못한 국지전에 불과하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이곳에서 한번 더 전투가 있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군이랑(…) 아테네에 위치한 전쟁박물관에 가면 그 당시의 선전물들을 볼 수 있는데, 그리스 사람들 정말 테르모필레 한번 징하게 우려먹는다.

스파르타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바로 플라타이아 전투로, 그리스 본토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주도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주력이 된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을 크게 물리치며 페르시아를 내쫓는데 성공한다. 스파르타의 페르시아 전쟁은 여기서 마무리가 된다. 이후 아테네는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 등 세력 확장을 위해 페르시아와 추가적인 전쟁을 벌였으나 스파르타는 소극적으로 나서며 손을 뗐다.

2.1.3 펠로폰네소스 전쟁

페르시아를 격퇴한 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우호적인 폴리스들을 모아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만들었고, 아테네도 마찬가지로 우호적인 폴리스를 모아 델로스 동맹을 만들었다. 점차 격화되어가던 충돌은 마침내 격렬한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전 그리스 세계를 휩쓸고 간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승리한 것은 스파르타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모된 전쟁비용과 물자를 동맹관계에 있던 폴리스들에게 전액부담하게 하면서 타 폴리스와 동맹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렇게 된 이유는 스파르타가 강력한 군사력에 비해서 장기전에 필요한 전비와 물자 생산 능력을 가지지 못했고 식민지 메세니아에서 조달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지만 타 폴리스를 스파르타 아래로 보는 스파르타 특유 패권주의 사상도 주된 원인이었다.

2.1.4 빛 좋은 개살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 스파르타는 이전의 맹주였던 아테네를 누르고 그리스의 맹주가 되지만 아테네처럼 오랫동안 패권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아테네는 풍부한 문화와 무역을 통한 자금력,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그리스를 이끌었지만 스파르타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링크의 서술이 훨씬 말이 된다. 다음 항목(2.1.5. 몰락)과 함께 이 항목의 객관성이 의심되므로 전문가 확인 필요.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으나, 테베코린트가 치고 올라오는 것을 걱정하여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대신, 친스파르타 정치인들로 이루어진 과두정을 패배한 아테네와 그 동맹국에게 강요하였다.

아테네 밑에서 민주주의를 맛보다가 느닷없이 친스파르타 정치가들의 독재를 맛봐야 했던 시민들은 이에 심하게 반발한다. 게다가 친스파르타 정치가들은 민주주의자를 죽이는 테러를 저질렀기 때문에 반감은 더욱 심해졌다. 아테네는 항복한 뒤, 단 일년만에 스파르타에게 반기를 들어 스파르타가 세운 30인의 독재 정부를 엎어버리고 민주주의로 되돌아간다. 아테네를 따라 곳곳에서 과두정이 붕괴되었으나 스파르타는 쉽게 손을 쓸 수 없었다.

패권국 스파르타가 가진 문제는 이렇게 각처에서 반기를 드는 폴리스들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스파르타군은 분명 당시 최강이었으나 1만 남짓의 소수 정예라[2]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수가 너무 적었고 게다가 이러한 반란을 견제하기 위해서 외부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내부의 헤일로타이라는 노예 계급의 존재 때문에 불가능했다.[3] 이는 아테네라는 명백한 적수만 상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고 이는 마치 현대 미군이 소수의 보병으로 이라크 전쟁을 이긴 뒤 전후 처리에 골머리를 썩혔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이를 커버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전체를 움직였지만, 이들 또한 스파르타에 불만을 가지기는 마찬가지인데다 스파르타군처럼 마음대로 장기 주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이기기 위해 페르시아와 연합해 해군을 편성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받았는데 이는 그리스 연합의 명분 자체가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망각한 짓이었다. 이것 때문에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그리스 연합의 존재 이유가 불분명했으므로 그리스계 폴리스들은 스파르타가 단지 그들의 야욕 때문에 그리스 연합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과거의 필로폰네소스 동맹, 델로스 동맹 처럼 자발적인 연합이 불가능 하였다. 아테네가 패배한 뒤, 스파르타 휘하의 그리스 연합은 매우 불안정하였다.

델로스 동맹을 이끈 아테네는 그들 자체가 동맹국 중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하였으므로 여러가지 해외 원정도 하고 수백척의 전함을 끌고 다니면서 문제를 처리하는 등 맹주 노릇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지만[4] 스파르타는 오직 중장보병 군사력에만 의존하던 가난한 국가였기 때문에[5] 이러한 프로젝트를 가동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전함을 보유하는 문제가 가장 심각하였는데 이 전함이라는 것이 유지하는 것 자체가 매우 비쌌다. 노잡이만 해도 수만 명이니… 따라서 다른 폴리스들에게서 스파르타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그다지 얻지 못했다.

2.1.5 몰락

결국 스파르타가 패권국이 된 뒤, 1년 만에 보이오이타의 맹주이자 오랫동안 스파르타의 동맹이였던 테베,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2인자로서의 위치에 있었던 코린트가 손을 잡고 민주정 복구 이후, 제국까지 되돌리고자 했던 아테네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스파르타에 대향해 코린토스 전쟁을 일으킨다.

이는 스파르타가 패권국이 되면서 기존의 동맹국들까지 차별하는 행태를 보인데 대한 반발심 때문이였다. 애초에 반기를 든 두 국가가 전통적인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이란 점을 생각하자. 스파르타는 이때에도 어쨌든 지상전에서는 우위를 점했지만 돌아온 아테네에게 해상전에서 다시 완패를 맛보고 패권국으로 거느리던 여타 폴리스들이 아테네에게 붙어 2차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는 것을 막지 못해 페르시아에게 중재를 간청하게 된다. 이후에도 스파르타에 반기를 든 세력은 곳곳에서 나타났고 이에 각지에서 정신없이 싸우다가 끝내 스파르타는 테베군에게 완패당한다.

그 절정은, 여기서 써먹은 사선대형전 부대원이 게이로 이루어진 것으로 유명한 신성부대(Sacred band)가 나선 것으로 유명한 에파미논다스의 레욱트라 전투. 테베군이 우익 대신에 좌익쪽의 병력을 두텁게 한 방진에 스파르타군 우익은 말 그대로 궤멸적 피해를 입고 말았다. 직후 반 테베 세력과 힘을 합쳐 반격을 시도했으나 에파미논다스의 군단에 야습을 허용해버려 1만의 보충병과 잔여병력마저 싸그리 날아갔다.

이때, 테베에게 당한 패배는 사실상 스파르타의 멸망이라 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안 그래도 수가 줄어들고 있던 '완전시민 계급'의 중장보병이 레욱트라 전투 한방에 거의 깡그리 바닥나버렸다. 이 피해는 스파르타가 도저히 복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기존의 중장보병 개개인의 전투력보다는 전술의 중요도가 커지면서 스파르타처럼 굳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병사 하나하나를 인간병기로 만들 필요성이 없어져갔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고집스럽게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침내 레욱트라 전투에서 그 대가를 치루게 된다. 테베인들은 스파르타 식의 훈련과는 거리가 먼 시민들이었고 따라서 개개인의 전투력 수준은 스파르타인들에 비해 떨어졌다. 하지만 단지 좌익에 물량을 집중한다는 간단한 아이디어로 스파르타군의 우익을 붕괴시키고 배후로 돌아 협공함으로써 스파르타군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테베도 신성부대만큼은 스파르타에 필적할 정도의 훈련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아서 최대 30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고대 시대 이래로, 스파르타의 성인 남성 인구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폐쇄적이고 가혹한 사회구조를 유지하니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주민은 없으며 애당초 받아주지도 않았고, 영아 살해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끝없는 전투로 계속 인적 자원이 소모되며, 워낙 비싼 아고게 비용을 감당 못해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시민권이 박탈돼버리는 일도 빈번하니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테베에게 패배할 무렵,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핵심인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의 숫자는 페르시아 전쟁시의 1/10 정도인 천여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미 전설적인 스파르타인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 나머지는 이런저런 편법으로 끼워넣은 다른 계층의 구성원들이였다.[6]

경제 면에서도 스파르타는 몰락하게 된다. 흔히 "노예 계층"으로 묘사되는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 계급은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피정복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시기부터 스파르타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이웃 폴리스인 '메세니아'를 점령하고, 메세니아 주민들을 "국가의 노예"로 삼음으로서 농업 경제력과 자기들 내부적으로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생활상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자국의 화폐가 다른 폴리스에서 쓰레기 취급을 당할 정도로[7] 부실한 스파르타의 경제구조는 이런 체질상 개선의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테베에 패배한 이후, 테베는 스파르타로부터 메세니아를 독립시켜서 떼어내 버린다. 메세니아인들은 수백년 만에 독립을 되찾았다. 이로써 스파르타는 농업 경제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남은 토지는 대귀족에게 집중되어 사회 내부의 불평등이 가속되면서 전통적인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양성도 어렵게 되어버렸다. 더구나 스파르타 본토 내의 농업의 수확량도 매우 적었는데 이를 스파르타가 메세니아로부터 농업을 의존하다보니 본인들 스스로 신 농사법 개발이나 종자개량에는 무지하였고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거나 전수받은 메세니아인이나 노예를 반란군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죽여버린 탓에 새로운 농사법이 전수되지 못하였다.

개인주의와 빈부격차도 문제였다. 스파르타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집단주의를 택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철저하게 개인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성인 남성들은 15명씩 조를 짜서 함께 공동식당(Syssitia)에서 식사를 했지만, 그 비용은 각자 개인이 부담하는 독특한 체제였다. 자녀를 학교(Agoge)에 보내는 비용도 모두 개인의 몫이었다. 공동 식비나 교육비를 내지 못하는 것은 스파르타 시민으로서 최악의 수치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시민의 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스파르타가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빈부 격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경제 시스템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부(富)가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토지를 소유한 가문이 고작 100여개 정도로 줄어들었다. 빈곤의 늪에 빠진 절대 다수의 스파르타인들은 양육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예 출산을 포기하였다. 그 결과,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진 남성인 스파르탄(Spartan; Spartiate)들은 기원전 640년 9천명에서 300년 뒤에는 1천명으로 급감하였다. 아무리 무적의 군대를 갖고 있던 스파르타라고 하더라도 그 숫자가 턱없이 줄어들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몰려드는 적들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 부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 스파르타인들이 스스로 검소함을 버리고 사치에 취하면서 생긴 문제도 있다. 기본적으로 극단적인 검소함을 강조하는 스파르타의 현실상 스파르타인들은 그러한 격리된 환경속에서 생활했기에 경제관념에 무지하거나 제대로 인지를 못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 스파르타가 동맹시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하면서 소위 돈맛을 알게된 스파르타인들은 거의 무제한적인 사치에 빠지게 된다. 경제관념을 알고 있어도 사치에 빠지기 쉬워서 몰락하기 쉬운데 경제관념을 모르는 매우 극단적인 케이스의 부류가 사치에 빠지면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토지를 팔아제끼는 사태까지 번진다. 이는 결국 앞서 이야기된 공동식사 문제와 교육비와 같은 비용을 내지 못하는 사태가 되면서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진 남성인 스파르탄(Spartan; Spartiate)들이 대거 몰락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자연스럽게 병력으로 동원하거나 그들의 기본 사회체제인 극단적인 전사양육에 참여하는 숫자가 대대적으로 감소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형태는 시민권을 갖는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체제 변화가 오는 과정에서도 스파르타는 그러한 사회구조 개혁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복고를 주장하는 형태나 그저 정체된 사회체제를 유지함으로서 스스로 몰락을 자초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전쟁과 내부적인 이유의 몰락이 가속화되면서, 스파르타는 그나마 명맥은 유지되었지만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패권국의 지위를 노릴 수 없는 약체 폴리스로 전락한다.

2.1.6 헬레니즘 시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헬레니즘 시대에는 아기스 4세와 클레오메네스 3세가 고대 스파르타 체계의 복구를 위한 복고적 개혁을 시도했다.[8] 재산공유, 공동식 등 전통적 풍습의 부활을 내건 이 개혁은 일시적으로 성과를 올렸지만 결국에는 귀족들의 반발과 마케도니아의 개입 등으로 실패하였고 아기스 4세와 클레오메네스 3세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9]

어차피 스파르타가 어느 정도 재건된다고 해도,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과는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자릿수가 다른 헬레니즘 국가들에게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헬레니즘 시대의 스파르타는 기껏해야 펠로포네소스 반도의 지역 강국에 불과했으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마케도니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연명하는 것이 한계였다. 다만 필리포스 2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스파르타를 굳이 정복하려 하진 않았다.

아무튼 이때의 개혁 때문에 공동식사 등의 리쿠고로스 체계가 복귀되고 잔존하는데 성공하였다.

2.2 로마 제국 시대와 그 이후

스파르타 역시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 똑같이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또한, 로마인들은 한때 페르시아를 상대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패권을 다투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역사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이들 두 도시에게는 속주세 면제라는 혜택을 주었다. 이 혜택은 그리스 애호가인 네로가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하나 베스파시아누스가 원상복귀 시켰는데 그때도 이들 두 도시는 꾸준히 제외되었다.

로마 치하에서도 문화 도시로 각광을 받은 아테네와는 달리, 스파르타는 특이한 생활 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관광지로서 각광받았다. 예를 들어 아고게 항목에서 언급하는 소년들의 채찍질 버티기 대회(…) 같은 것이 로마 제국 시대에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스파르타 병영 체험을 본 로마 귀족과 부호들이 그 답례로 돈이나 음식을 바닥에 던져주면 그것을 주어다가 생활비를 충당하였는데 한때 대제국이었던 국가가 사실상 재주 부리고 돈을 받는 약소국으로 몰락한 것이다. 그래도 서고트족의 침입 때 나름대로 활약을 했다던데 확실하지 않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7세기경 슬라브인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이르자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평지로 돌아가 거의 명맥이 끊겨 소규모 마을로 전락했고, 주민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다른 대도시들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세 시대 펠로폰네소스 반도(모레아)의 수도 미스트라스가 성장하면서 거의 버려진 상태까지 갔다가, 후술하듯 그리스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1834년에 재건되었다.

결국, 자신들이 만든 체제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한 국가였다.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라는 좋은 선례를 남기고 문화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아테네와는 달리, 스파르타는 "스파르타식"이라는 흉폭한 단련 체제 외에는 정말 후대에 남긴 것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2인 집정관 체제가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통해 어찌어찌 로마에 수출이 됐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스파르타의 체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히틀러 유겐트 등을 훈련시키거나 하는 식으로 국가를 개조하는 일을 생각했다. 그것까지 따진다면 스파르타는 정말로 후대 세계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 사교육 부문의 한 축이 되고 있다. 각국의 엘리트 체육이 사실상 스파르타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3 현대

Σπάρτη(스파르티)

펠로폰네소스 주 라코니아 현의 현청 소재지. 인구는 3만 5천 명이고 이 중 읍내(?)에 1만 7천 명 정도가 거주한다.

지금도 그리스의 수도이자 최대도시인 아테네와는 달리, 그냥 지방 중소도시가 되었다. 아테네에 비해 현대의 스파르타에는 딱히 가도 구경할 게 별로 없는데, 이는 고대 스파르타인들이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드는 데 돈을 많이 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현대의 스파르타는 1834년 오톤 왕의 칙령에 의해서 고대 스파르타의 터에 재건된 것이다. 하지만 현대 스파르타 인근에 동로마 제국 당시의 요새인 미스트라스 성채(Μυστράς)와 콘스탄티노스 11세 시절에 부흥했던 모넴바시아(Μονεμβασιά)의 유적이 자리 잡고 있어 이 유적들을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이 스파르타에 숙소를 잡는 경우가 많다. 스파르타에 가게 되면 볼 것이 거의 없는 스파르타 유적에 실망하지 말고 미스트라스와 모넴바시아로 가 보는 것이 좋다.

왕국시대(1832-1923, 1935-73)에 그리스 왕세자(디아도코스 διάδοχος)의 칭호가 바로 스파르타 공(Duke of Sparta)이었다. 다만 스파르타 공이라는 작위의 유례가 없었고 당시 그리스 법은 왕 이외의 그리스 시민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일에 법적 근거를 제공하지 않았으므로 영국의 웨일즈 공 등과 달리 단지 관례적인 칭호에 그쳤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그리스에서 가장 보수색이 짙은 도시로, 좌파 시장이 한 번도 배출되지 않은 곳이며, 1974년의 국민투표 당시 군주제 유지 결과가 더 많이 나왔던 도시이기도 했다. 2012년 총선에서도 신민주당황금새벽당 득표율이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원조 마초 군국주의의 위엄 하지만 2015년 총선에서도 변함없이 황금새벽당이 10%의 득표율을 올리긴 했고, 신민주당이 1위를 하긴 했지만 신민주당의 득표율은 고작(?) 32.7%에 그쳐서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동네는 아니다. 한편으로 사회당의 득표율이 11.6%를 차지해서 가장 높은 득표율이 나왔는데 그 만큼 전국적으로 사회당이 몰락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 전에 후보조차 내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좀 나은 편이지만… 또 스파르타가 속한 라코니아 현은 2015년 그리스 구제금융 국민투표에서도 구제금융 찬성표 비중이 가장 높게 나왔다.

3 사회

This is Sparta!

스파르타는 1계급의 시민권자 스파르타이아이, 2계급의 주변인과 항복한 자들인 페리오이코이, 3계급의 노예 헤일로타이로 유지되었다.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는 스파르타 시민 계급은 전체의 5~10%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며 이들은 오로지 정치와 군사에만 참여하고 헤일로타이들의 봉양으로 먹고 살았다. 2계급인 페리오이코이는 시 외곽지에 사는 피지배민들로 1계급에겐 금지된 일인 상공업에 종사하며 시민권이 없고 예비군으로서 군역을 졌다. 3계급인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타인들을 위해 토지 경작의 의무를 졌다. 이들 헤일로타이는 모두 국가 소유였으며 스파르타이아이에게 분배되었다. 이들 헤일로타이는 가정을 꾸릴 권리가 있었으며 국가로부터 생산물을 지급받아 그걸로 삶을 영위했다. 2계급과 3계급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스파르타는 지속적으로 이들의 숫자를 갖은 술수를 통해 줄이려고 탄압을 가했다. 밑에 나오는 스파르타의 사회는 당연히 1계급인 스파르타이아이 얘기들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스파르타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그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는 독특함과 잔혹함으로 악명 높은 사회 체계이다. 이런 정신나간 제도는 리쿠르고스에 의해 확립되었는데 그에 대한 전기를 쓴 플루타르코스 조차도 워낙 전설적인 인물이라 실제인물인지도 의심스럽다고 할 정도다. 현재까지도 그 혹독한 훈련방식과 강인한 정치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식 훈련'은 혹독하고 집중적인 교육을 의미하는데, 주로 현대 대한민국 사교육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영어로 Spartan이라 하면 스파르타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스파르타인들이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는 데에서 검소하고 엄격한 의미도 가지고 있다. Spartan lunch라고 하면 과일 샐러드에 우유 정도의 간소한 점심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물론 당대 스파르타인들이 보기에는 이마저도 사치다.

전통적으로 고령자들을 우대했다. 고령자란 끊임없이 전쟁이 반복되는 스파르타인의 삶에서 끝까지 살아남을만큼 강하고 지혜로운 전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일화로는, 올림피아 경기때 한 아테네 출신의 노인이 자신이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을때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시민들은 그 노인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거나 야유를 보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누가 자리 좀 양보해줘라' 라는 말이 관중석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노인이 스파르타인들이 앉아있는 응원석에 갔을때 그곳에 앉아있던 스파르타 젊은이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이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일부가 일어나기까지 한 이 상황에서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노인이 말하기를, "모두가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진 알지만, 그것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은 스파르타인들 뿐이구나." 이 장면은 300 그래픽 노블판에서 그대로 언급된다. 영화판에서 사신의 팔을 자르던 바로 그장면에서 한쪽에 있던 스파르타인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비슷하게 전사를 중요시했지만 고령자는 이미 늙고 쇠약해 싸울 수 없다며 천시했던 흉노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대규모의 노예로 경제적 부양을 받을 수 있었던 스파르타와는 달리, 흉노는 유목만이 겨우 가능한 거칠고 척박한 황무지가 생활권이었기 때문이다.

3.1 정치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우선 군사령관과 제사의 집전을 맡는 2명의 왕이 있었으며 산하에 장로회, 민회, 감독관이 있다. 장로회는 60세 이상의 귀족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왕을 보좌하고 법안을 제안할 권리가 있는데 왕들은 모두 장로회 소속이다. 민회는 30세 이상의 시민들로 구성된 곳으로 법안의 인준, 거부, 동맹, 전쟁 선포, 조약 체결을 결정하는 곳으로 공직자를 선출하고 장로회를 견제했다. 감독관은 민회와 장로회를 감독하는 에포루이라 불리는 5명의 감독관으로 민회에서 선출되는데 임기는 1년이고 권력이 대단했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실권자들은 이 감독관들이었다.

3.2 성인들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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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중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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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경보병

스파르타 남성들은 20세에 아고게를 졸업하면 30세까지 군대에 복무해야 했다. 30세가 지나면 가정을 이룰 권리가 주어지지만 그래도 저녁식사는 꼭 부대에서 해야했다. 스파르타 남성들은 50세까지 전투에 참가해야 했다.[10]

심지어 결혼조차도 국가에서 정해준 여자와만 할 수 있으며, 결혼 당일날까지 훈련을 받다가 당일날 저녁에야 아내의 집으로 보내져 첫날밤을 치르고 다음날 아침부터 또 다시 훈련을 시작하기에 제대로 된 가정생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이거 뭐 노예랑 다를게 뭐가 있어

그렇다고 혼외관계가 금지되는 건 또 아니다. 훌륭한 전사의 피를 받기 위하여 남편이 씨내리(…)를 구해오기도 했다.

그리스 중장보병 방진 중 그나마 전술적 기동이 가능했던 군대가 스파르타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11] 전술기동이 가능한 숙련된 병사를 길러내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즉 단순히 평균적으로 뛰어난 전사와 군인을 양성하는 시각보다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을 신체적 정신적 금욕과 고행을 강제하는 교육으로 억제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주변국과의 지속적인 마찰을 버티는 것은 물론 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노예들을 실질, 정신적 공포 양면으로 끊임없이 억압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대신 피정복민과의 동화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고립을 유지하며 교육을 천시, 선군정치를 일삼던 폐해는 결국 훗날의 몰락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로마군과는 완전히 정반대로서, 로마군이 처음부터 개개인이 다 전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평범한 시민이 간단한 군사훈련을 받은 뒤 군인이 되는 것을 상정하고 작전계획을 짰기에 체계적인 군단제도를 완성한 것은 물론 전술과 전략도 최대한 연구했으며, 패배할 경우 그 책임은 적전도주나 명령거부 등 명백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이상 지휘관에게 있었으므로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무능력을 병사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로마는 군단병에게 보급을 최대한으로 해주었기 때문에 스파르타군은 트로이 전쟁[12]이나 테르모필레 전투 등에서는 대활약을 했지만 훗날 전술과 전략이 좀 더 발달하면서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즉 하나의 도시국가로 남아가기에는 스파르타 정도의 문명도 나름대로는 성립했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방식으로 거대한 문명을 일구게 되는 로마와 비교하면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13] 또 하나의 도시국가가 아니라 패권국가를 지향하기에도 한계가 명확했다.

3.3 공동 식사

스파르타인들의 독특한 풍습 가운데 하나가 공동 식사다. 빈부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 15명이 한 조(피디티온(Phidition)이라고 한다)를 이루어 식사를 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식사조가 아니라 함께 싸우는 전투조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결원이 생겨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여야 할 때는, 기존의 조원들이 만장일치로 승인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 밥도 같이 먹고 싸움도 같이 해야 할 테니[14]. 식사의 질은 복불복이었는데, 형편없는 빵과 검은 선지국[15]으로 때울때가 잦았으나 어떨때는 괜찮게 먹기도 했다. 피디티온의 각 일원은 매달 납부해야 하는 물건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보리가 약 73리터, 포도주가 약 35리터, 치즈가 3킬로그램, 무화과가 1.5킬로그램 등이었기 때문(이걸 못 내면, 시민권 박탈. 다만 정상적인 시민이라면 다 헤일로타이가 경작해주는 농경지가 있었으므로, 어지간해서는 못 낼 일이 없었다). 그리고 식사조에 이런 걸 낸다는 건, 당연히 이런 것들을 먹었다는 뜻이다.

다만 검은 선지국은 워낙에 맛이 없기로(...) 유명한 모양인지 어느 아테네인[16]이 먹어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테네의 돼지가 먹는 것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스파르타인이 왜 이리 용감한 줄 알겠다! 이런 걸 먹고 사느니 죽겠다고 싸우지!"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스파르타인은 "아테네의 돼지도 그 죽을 10년만 먹으면 용감해질 것이오!"라고 응수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다른 이야기로는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소스가 그 국맛을 보고 역겨워서 뱉어버리자, 요리사가 "이 국을 맛있게 먹으려면 스파르타식으로 운동한 뒤 에우로타스 강에서 목욕해야만 합니다, 전하." 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국군 최강전설[17] 그래서 오늘도 똥국인가, 취사병? 취사병이 문제가 아니라 메뉴짜는 군지단이 문제.

하지만 검은 선지국은 어디까지나 평소의 식단이었고, 전쟁에 나가게 되면 오히려 살아있는 산양과 닭 등을 끌고가서 매일 직접 도살하여 신선한 고기를 공급해 주었다고 한다.그래서 잘 싸운건가 싸울 때는 고기 줌ㅋ 개꿀

3.4 여성들

여성들도 남성들만큼 엄격하지는 않았지만 스파르타 여자들은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 또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서 남자에 버금가는 신체단련을 했다. 남자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남자들처럼 벌거벗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운동으로 단련된 덕택인지 스파르타 여성들은 미인으로 유명했다. 현대로 치자면 여성들 전원이 건강미가 넘치는 피트니스 모델들이었던 것.

이렇게 고생하는 대신에 고대 그리스 기준으로, 스파르타의 여자들은 상당한 수준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남자들은 군에 종속되어 살아가니...

아테네는 물론 다른 그리스 국가들의 경우 부인은 물론이고 특히 미혼 여성은 종교 축제일이나 장보기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지만, 스파르타에서는 여자들이 마음대로 바깥에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운동 경기도 할 수 있었다. 에드가 드가소년들에게 도전하는 소녀들(Petites filles spartiates provoquant des garçons)이 그런 상황을 묘사(상상)한 것.


이 옷은 그나마 상당히 긴 편이다. 노출이 심한 것은 상단은 가슴, 하단은 허벅지에서 놀 정도로 짧다.

여자아이들이 입는 옷이 거의 하의실종 패션 수준으로 아주 짧았다. 이러한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다녔으니 엉덩이나 넓적다리가 훌렁훌렁 마구 보였다. '페플로스'라고 하는 옷인데, 이 옷은 엉덩이를 간신히 덮을 만한 높이에 몸을 한바퀴 두를 수 있는 너비의 장방형 천 한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옷을 입는 방법은 자신의 왼쪽어깨로 팔을 뺀 다음, 오른쪽 어깨부분에 옷 양쪽을 이어서 매듭을 짓고 나머지 부분은 허리띠로 묶어 고정시키는 식이었다. 결국 자연스럽게 오른쪽 부분은 가슴부터 허리까지 노출되는 것.[18]

아테네인들이 다른 모든 것을 제껴두고 스파르타에서 가장 기겁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테네에서는 여자들을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꽁꽁 가둬두고 있는데, 스파르타에서는 숫제 거의 다 벗고 길거리에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아무래도 사회가 이렇게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편이다 보니 여성의 발언권 자체도 아테네 등 완전히 시궁창인 나라들과 비교하면 상당한 수준이었다. 물론 정치적 발언권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남성들은 여성들 사이의 평판에 흠이 갈까 무척 노력했다고. 일부러 잘못한 남성이 있으면 그에 대한 처벌로 여자들 사이에 세워 놓고 수치스러운 놀림을 듣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초적 사회다보니 꽤나 수치스러웠을 것.

하지만 여성들도 16살이 되도록 초경을 하지 못하거나 기준보다 유방이 작거나 불임이면 여자로써의 구실을 못 한다고 살해당하는 등 안 좋은 면도 있었다. 즉, 현대 여성과 비슷한 지위를 보장받은 것이 절대 아니다. 정리하자면 스파르타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비슷하게 운동하고 자유로이 외출하며 발언권도 제법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건강한 모체에서 건강한 아들(=전사)이 태어나므로 여자 역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 라는 우생학적 사고방식에 기인한 것일뿐이다.
여자들의 신체 단련은 첫 아이를 얻거나 폐경이 될 때까지만 의무였다. 그 다음에는 자유.

그리고 결혼도 막무가내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두운 방에 결혼 적령기의 여인들을 모아놓고 한창 피가 끓는 남자 청소년이나 청년들을 집어넣으면, 남자는 손에 잡히는 여자를 데리고 나오고... 그 다음엔 역시 어두운 방에서... 일이 끝나면 남자는 다시 군대로 돌아가고, 아내를 다시 만나려면 30살이 되어야 했다. 물론 제대로 된 가정 생활은 불가능, 왕이라도 무조건 왕비 아닌 자기 조원들과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

3.5 노예 계급 : 헤일로타이 메세니아

이러한 극단적인 군국주의적 사회제도는 스파르타의 사회에 기반을 두는데, 노예를 다른 폴리스들보다 악랄할 정도로 학대했다. 특히 기회만 된다면 들고 일어날 생각을 하는 노예들인 헤일로타이의 숫자가 스파르타 시민들의 20배에 달한다. 다른 지역의 폴리스인들과 만난 헤일로타이들은 "스파르타인들의 살점을 뜯어 먹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스파르타인들을 증오했다.

그 사정을 알고보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헤일로타이의 나라 메세니아(Μεσσηνία)[19]는 스파르타 서쪽에 있는 이웃나라였으나, 기원전 7세기에 스파르타에 정복 당했다. 그리고 그 뒤로 수백년 동안 스파르타에게 말도 못할 학대를 받게 된다…

스파르타는 형식상 메세니아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았으나, 폴리스 전체를 노예로 삼아서 스파르타의 예속 하층민 계급인 헤일로타이로 만들었다. 헤일로타이들은 토지 생산물의 절반을 세금으로 바쳤으며, 스파르타인들은 이 세금 덕분에 농사나 상업 대신 군사 훈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형식상으로는'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신년 행사는 헤일로타이의 나라 메세니아에 대한 전쟁 선포식이었다. 형식상 전쟁 상태였기 때문에 수시로 스파르타인들이 몰래 들어가서 헤일로타이를 이유없이 쳐죽였다… 주로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강인하고 똑똑한 헤일로타이만 골라 죽였다고 한다. 한번은 용기가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2천 명이 넘는 헤일로타이들에게 해방의 상징으로 화관을 씌우고 여러 신전으로 행진을 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뒤 그 헤일로타이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한마디로 죄다 몰살 한번은 헤일로타이들 중에 건장하고 똑똑한 자들을 골라서 이들에게 스파르타의 전쟁에 나간다면 자유를 주겠다고 구슬러 군사훈련을 시켜주겠다고 불러낸 다음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렸다는 말도 있다.

스파르타인과 헤일로타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헤일로타이들은 개가죽으로 만든 우습게 생긴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혼혈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헤일로타이와의 결혼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헤일로타이를 교육에 활용하기도 했는데, 일부러 헤일로타이를 잡아오고 나서 을 잔뜩 먹여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헤일로타이를 놀려댔다고 한다. 그리고 '술을 너무 마시면 이렇게 추악하게 되니 마시지 마라'는 교훈을 얻는 것이다. 또한, 천박하고 우스꽝스러운 춤과 노래를 강요하는 등 온갖 굴욕을 주었다.

이따위 짓을 당하고 있었으니 메세니아인들은 수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스파르타에 항거했다. 하지만 가난한 노예의 도시가 주민 전체가 인간 병기인 스파르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고[20] 그때마다 무참하게 진압당했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코린토스 전쟁에서 테베에게 참패하자, 승리한 폴리스들은 스파르타의 국력을 깎아낼 목적으로 메세니아를 스파르타에서 떼어내서 독립시켰고, 마침내 독립을 회복한 메세니아는 타 폴리스 지원 아래 스파르타에 대한 모든 식량과 물자 운송을 중지하였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겪는데 그 이유는 메세니아 착취와 군사력에만 신경 쓴 스파르타는 본토 농지들도 소수의 귀족들이 독점하였고 농사나 기술개발에 무관심한 결과, 식량 생산은 타 폴리스에 비해 형편 없었고 화폐나 무역같은 경제면에도 무지하였기 때문에[21] 무역을 통한 식량 조달도 어려워져 스파르타는 만성 식량부족과 양극화로 인해 분열과 대규모 기아사태에 직면하게 되면서 스파르타의 장점인 강력한 중장보병 양성도 어렵게 되었다. 이는 당연히 군사력 약화로 이어져 스파르타의 국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두 번 다시 코린토스 전쟁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다. 농업을 무시한 탓이다 [22]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수천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옛 메세니아 땅인 칼라마타[23]와 스파르티 사이의 지역감정은 극히 좋지 못하다.

3.6 교육 : 아고게(Agoge)

스파르타식 교육을 참조.

교육에 관한 한, 의외로 선진국이었다. 무려 공교육과 평생교육, 여성교육이 모두 실현된 경우.
다만 교육비는 모두 개인부담이었으며, 실제로 교육받는 계층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먼저 공교육과 평생교육은, '공동 식사' 문단에 소개한 피디티온이 그것. 물론 1차적인 기능은 식사조인 동시에 전투조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기능이 바로 교육수단이었다. 젊은 사람들과 나이든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밥상머리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 추측과 유머로 넣어둔 드립이 아니라, 사료에서 확인사살할 수 있는 내용이다.[24][25]

다음으로 여성 교육은, 여자들도 운동을 시키고 훈련을 시켰다는 데에서 더 설명이 필요한지. 여성들을 집 안에만 몰아넣었던 아테네에 비하면, 오히려 이쪽이 선진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26]

다만, 이런 교육법으로 중점적으로 가르치고자 한 것이 고작(?) 싸우는 방법이었다는 점은 안습. 스파르타는 고대 경제에 필요한 농업과 기술 교육같이 생산적 교육은 소홀히 하였기에, 코린토스 전쟁 이후에 메세니아가 독립하면서 스파르타는 초라하게 몰락한다. 특히, 모든 그리스 폴리스가 선민사상이 강했지만 스파르타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고 군사원정을 제외하고는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타지에서 들어오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어려웠다. 사실상 우물안 개구리인 샘.

이런 군사교육도 대부분 개인능력향상과 오래된 진법 훈련이 전부였기에, 시대가 바뀌면서 개인능력보다는 전술(&쪽수)이 그리고 새로운 진법 전략, 신무기 개발 등이 중시되면서 스파르타의 무장보병전술은 군사적 우위에서도 서서히 몰락해 갔다.

3.7 종교

스파르타인들은 매우 종교적이었다. 다신교 사회였음에도 종교에 집착하는 것이 거의 '광신적'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종교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특히, 신탁을 중시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신탁을 받은 것은 반드시 지켰다. 심지어 전투나 원정을 나가기 직전에 점을 쳐서 길흉을 알아보면서 나쁜 결과가 나오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스파르타에서 역시 주된 숭배 대상은 제우스였다. 또한, 헤라클레스가 중시되었는데 이는 헤라클레스가 스파르타 왕가의 조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케네 문명 시절의 스파르타의 지배자로 전해지는 메넬라오스헬레네도 부부 신으로서 신격화 되어 숭배되었다.

3.8 기타

  • 대화하는 기술을 중시하고 웅변에 대한 전문 교육까지 존재하던 다른 폴리스 사람들과 달리, 스파르타인들은 과묵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 과묵한 가운데서 한 마디, 한 마디하는 말은 하나같이 상대방의 허를 찌를 수 있었다고.[27] 어쩌면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28]이라는 말도 스파르타인을 보고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스파르타인들은 적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뿐이다."
  • 스파르타인들은 군사 원정을 제외하고는 여행을 극도로 꺼렸는데, 그 와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오니아 반란 당시 이오니아인들은 아테네나 다른 폴리스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에도 구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이오니아 사절은 스파르타의 왕에게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치면 막대한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씨도 안먹혔다(…). 그러자 사절은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쳐서 당신네들의 용맹을 증명해보라." 라고 은근히 도발을 걸었다. 페르시아인들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 들은 스파르타인들은 귀가 솔깃해졌고 왕은 이오니아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사신은 솔직히 "배를 타고 한 달 정도 가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파르타 왕 曰 "저 자를 내쫓아라! 스파르타인을 배타고 한 달이나 걸리는 외국으로 내보내려 하다니!" 다른 폴리스들도 그랬지만 스파르타는 나라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까지 걷는데 하루, 이틀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작은 폴리스였다. 식민지 비스무리하게 확보한 영토는 그리스 내에서 가장 넓었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부 1/3 정도.[29] 물론 진짜 이유는 군사 원정 간 사이에 노예들이 반란 일으키니까.
  • 전쟁은 막대한 물자와 돈을 소비하는 사회활동이고 비록 메시니아 착취로 평등한 경제평등은 이룩하였으나 장거리 원정이나 전쟁이 장기화 될 경우 스파르타는 아주 후덜덜한 방법으로 전비를 마련하였는데 그게 바로 그리스 부자들을 왕의 이름으로 초대를 빙자한 납치로 몸값을 받아내는 방법으로 쓰기도 하였다.
  • 의외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널리 퍼져 있었던 판크라티온이나 권투는 스파르타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판크라티온이나 권투는 한 명이 죽거나 패배를 인정해야 시합이 끝났는데 스파르타인은 패배를 인정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훈련으로는 행해졌지만 시합에 참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던 듯.
  • 스파르타 전사들은 각각 소년 하나씩을 데리고 다니며 전사 훈련을 시켰는데 이것이 후세가 '동성애 관계'로 오해하면서 확대해석 되었다. 또한, 여성들에게도 유사한 관계가 있어서 성인 여성이 소녀 하나씩을 데리고 당대 여성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 그리스인들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과 붉은 옷을 입는 것을 게으름과 나약함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인들은 단 하나의 예외 폴리스만 빼고 모두 머리를 짧게 깎고 붉은 옷가지보다는 흰 색이나 푸른 색, 자주색 옷을 선호했는데 그 단 하나의 예외 폴리스가 바로 스파르타. 우리는 머리 기르고 빨간 옷 입어도 이렇게 근면하고 강인하다라는 상징이었다나 뭐라나. 그래서 스파르타인이 페르시아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리스의 관습을 알고 있던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에 대해 게으르고 나약한 놈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고 이하생략.
  • 전설과 역사의 경계에 걸쳐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널리 퍼뜨린 인물은 아테네인이 아니라 스파르타 출신의 리쿠르고스였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각주로 소개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 참고.[30]

4 이야깃거리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300은 스파르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스파르타 시민군이 협곡 테므로필레에서 그리스를 침략하는 페르시아 제국과 전투를 벌이는 내용.그것이 테르모필레 전투이다.도중에 레오니다스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에게 "우리는 무자비한 전체주의 제국이라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거요.그리고 역사는 왠 폭군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외세와 맞서싸운 집단이 있었음을 기억해 줄 거요." 라는 언급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상영 내내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양국이 대치하는 구도를 보아 동서의 대립이 배경인듯 하다.

더불어 원작을 더 뒤틀어 이라크 전쟁의 영향으로 인한 지독한 백인우월주의와 마계 수준으로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장애인 비하로 점철된 페르시아 진형 묘사는 두고두고 까이는 까임거리. 앨런 무어는 300을 "동성애 공포증과 인종차별과 멍청한 마초 작품"이라고 깔 정도.

무한도전하하가 이 영화가 유행할 때 해당 영화를 패러디한 특집에서 스파르탄 옷을 입고 미션을 수행할 때 "스파르타!"를 외치기도 했다. 이후, 좀 이 구호를 우려먹다가 소집해제한 이후에는 쓰지 않지만…

게임 갓 오브 워 시리즈의 주인공 크레토스가 바로 이 스파르타의 장군이었다.[31] 우리가 알고 있는 스파르타에 대한 이미지 보다 신 살해자랑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악무도한 주인공이다. 이명으로 스파르탄이나 스파르타의 망령이라고도 불린다. 갓 오브 워 3에서는 망명의 블레이드를 이용해서 마법, 스파르타의 분노를 사용할 수 있다. 공중에서 밀집방진을 한 망령들이 나타나 방패로 방어를 한 뒤 창으로 찌른다.

강현준의 만화 캣에서 나오는 개 이름이 스파르타이다. 주인인 H가 허세를 부리고자 멋지게 지은 이름인데 정작 개는 똥개. 하지만 똥개임을 부정하고 가혹한 훈련을 치루며 명견이라고 자랑하는 주인 덕분에 참 고생 많이한다. 대조적으로 널럴한 주인 K를 가진 고양이 K를 부러워할 듯. 외전에서 거대화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크면서도 주인 말을 잘 듣는 멋진 개라고 부러워할 뻔했으나 역시나 거대하게 나온 고양이 K 때문에 똥개임이 드러나자, 인간들에게 외면당하면서 굳어버렸다.
  1. '스파르타식'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2. 그나마도 핵을 이루는 스파르타 완전 시민의 숫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3천여, 레욱트라 전투 당시에는 1천여 정도만 남았다. 나머지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편입시킨 여타 계급.
  3. 스파르타 인구의 20배에 가까운 숫자의 노예가 있는데다가 늘 온갖 학대와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만 되면 들고 일어나려 했다.
  4. 전성기의 아테네는 단독으로 최대 200여 척 이상의 함대 내지는 2~3만의 중장보병을 움직일 수 있었다.
  5. 그나마도 지속적으로 수가 줄어들고 있던 상황. 단독으로 1만여를 동원할 수 있다던 중장보병 중에서도 순수 스파르타 시민들은 이 무렵에는 3천 명 이하로 떨어졌다.
  6. 주로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에서 몰락한 반자유민(페리오이코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7. 스파르타의 화폐는 철막대기였다. 이것 역시 리쿠르고스의 개혁 때 정해졌다고 하는데, 사치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다른 폴리스 상인들이 철막대기를 받고 사치품을 스파르타에 팔아낼 리가 없기 때문이다.
  8. 시민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일정 액수 이상의 돈을 낸 노예들을 시민으로 삼기도 했다 한다.
  9. 아기스 4세는 폐위되어서 끔살, 클레오메네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로 망명갔다가 그 곳에서 내분에 휩쓸려 사망.
  10. 다만 이 시기 신체 노화가 본격화되는 50세 이전까지 지적장애나 중증 정신질환, 신체적 결손 등이 없는 모든 일반 남성에게 병역의무가 주어지는 건 폴리스 대부분이 똑같았다. 당장 소크라테스만 해도 40대 중반의 나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끌려간 바 있으며, 이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아테네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1. 저 위의 테르모필레 전투의 경우, 스파르타군이 방진을 흐트러뜨리고 뒤로 도망치는 척 했다가 순식간에 방진을 다시 짜고 공격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때의 만티네아 전투의 경우, 방진을 현장에서 재배치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참고로 전장에서 한번 흩어진 방진을 다시 수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적이 보고만 있을리 없으니까.
  12.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가 바로 스파르타의 왕이다. 그런데 일리아드의 시대에는 스파르타가 도리아인의 나라도, 어딘가 맛이 간 군사국가도 아니었다. 이때의 스파르타는 미케네 계열, 쉽게 말해 아테네와 비슷한 성격의 그리스 국가다. 다만, 미케네 문명 시기는 청동기로 무장한 전차 전사들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고전기 그리스 문명과는 상당히 성격이 다르다.
  13. 그래도 개인차는 좀 있어서,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의 용장 레굴루스를 쳐부순 카르타고군 지휘관이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푸스였다.
  14. 노예가 빈 냄비를 들고 돌아다니면, 조원들이 빵 조각을 넣어 의사를 표시했다. 제대로 넣으면 승인, 찌그러뜨려 넣으면 반대라는 뜻.
  15. 돼지의 피와 식초, 소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6. 다른 판본에는 향락으로 유명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인 시바리스의 사람이라고도 한다.
  17. 스파르타와 직접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 영국의 기숙학교와 사관학교에서 학생들이 먹는 식사는 정말 스파르타의 그것을 연상케 할 정도로 형편이 없었다. 그 이유도 강인하고 금욕주의적인 성품을 유지하기 위한 명목이었다. 스파르타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18. 당시, 그리스인의 의복은 거의 다 이러한 방식으로 단순했다. 그중, 페플로스는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단순하고 짧았던 것.
  19. 현대식 발음으로는 메니아이다.
  20. 특히 메세니아의 무기 소지와 군사 훈련 자체가 금지였다. 그러다보니 중장갑으로 무장하고 전투훈련에 이골이 난 스파르타군을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열악한 무기로 무장한 메세니아인들이 이길리가 없었다.
  21. 그나마 스파르타 내부 안에서 화폐 비슷한 역할을 하던 것이 녹슨 철막대기였다. 당시 금, 은, 청동으로 만든 화폐를 사용하거나 물물교환 형식으로 무역이 되었는데 외지에서 온 상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녹슨 철막대기(녹 제거도 어렵지만, 무게가 상당하다)를 받아줄 리가 없었다.
  22. 사실 제 아무리 군사훈련에만 몰두하는 인간흉기들이 모인 국가라 할지라도 도시국가인 이상 농촌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더군다나 고대니깐 말이다. 그렇다고 무역과 해운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학원도시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다
  23. 메시니아의 주도이며 올리브로 유명한 그곳 맞다.
  24. '노인들이 '한때 우리는 용맹을 날리는 건장한 청년이었지' 라고 노래하면 청년들이 '우리가 지금 그러하니, 원한다면 직접 와서 보시지' 라고 화답하고, 그러면 소년들은 '우리 곧 누구보다도 훨씬 강건하게 되리니’ 라고 받아서 합창하였다.', 플루타르코스, 『리쿠르고스』
  25.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연령 집단을 섞어놓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자기들보다 더 경험이 많은 연장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공동식사를 할 때에는 시내에서 행해진 고귀한 행동들이 거론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결과 거기에는 무례함이나 폭음, 사악함이나 음담패설 같은 것은 거의 있을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이 식사하는 관습은 더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30세가 넘은 사람들은 집으로 걸어갈 때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밤길을 헤매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밤중에도 낮처럼 걸어야 했으며, 60세 이하의 병역의무가 있는 자는 횃불조차 밝힐 수 없었다.', 크세노폰, 『라케다이몬인의 국가제도』
  26. '리쿠르고스는 여성에게 훈련을 가하였다. 경주, 씨름, 쇠고리, 창던지기 따위로 처녀들의 몸을 단련하여 튼튼한 모체에서 자녀들이 나며, 또 순산하게 되기를 도모하였다. 여자들이 부자연스럽게 안방에 숨어 있는 풍습을 버리고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노출시키고 행렬 속에 끼며, 제례를 드릴 때는 남자들이 있어도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게 하였다. 남자들의 행동이 바르지 않을 때에 여자들의 야유는 질책으로서 큰 가치가 있었다. 장한 일을 하여 여자로부터 칭찬받는 남자는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물러갔으며, 여자들의 농과 야유에는 심각한 꾸중의 칼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장소에는 연장자뿐만 아니라 왕과 원로들도 임석해 있었다. 처녀들이 이와 같이 나체를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추잡하지 않고 점잖으며 순박한 기질을 양성하고 건강의 가치를 가르쳐 주며, 남자 못지않게 영예와 용기를 사랑하기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리쿠르고스』
  27. 당장에 상술된 필리포스 2세와 스파르타인간에 오고 간 서신 이야기만 봐도 스파르타식 화법(?)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스파르타인들은 사실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전투에 뛰어난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전투 외에 다른 분야에는 어두운 척 하지만, 일단 그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들은 짧은 언명으로 그대의 지식이 어린애 수준이라는 것을 폭로시켜 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8. 당시 시대에는 금보다 은이 더 귀했다는 건 대표적인 도시전설성 낭설이다.(다만 이 낭설 자체는 인터넷이 있기 훨씬 전부터 입말로 떠돌아다닌것이다) 당시에도 금이 은보다 훨씬 귀했다. 문자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후 동전 형태가 아닌 은과 금 중에서 은이 비쌌던 경우는 단 한 차례도 발견되지 않는다.
  29. 디민, 스파르타인들이 건설했다던 이탈리아의 타란토같은 경우는 이런 사고 방식이 확립된 리쿠르고스 체제 이전에 건설된 경우라 위의 예시에 대한 반례로 상관없는 듯 하다.
  30. '이 곳에서 그는 크레오필로스의 후손들이 보존해온 것으로 보이는 호메로스의 시들을 처음으로 보고 ... 열심히 이것을 베끼고 정리하였다. 그것이 스파르타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국에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호메로스의 이 서사시들은 이미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다소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의 시를 일부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시를 최초로 만천하에 알려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리쿠르고스였다.', 플루타르코스, 『리디아』
  31. 사실, 크레토스는 스파르타로 유입되온 유입종자 이민자이므로 스파르타의 사회 구조상 장군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