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메네스

Eumenes
BC 362? ~ BC 316

고대 마케도니아의 장군이자 학자. 필리포스 2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왕궁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서기관이긴 하지만 항상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원정을 했던 것을 보면 서기관 업무에 군사적인 업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1]

1 개요

출신지는 카르디아로, 보통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어릴 적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함께 원정을 수행한 부장 중에 유일하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이름을 올린 장군으로 학자적 식견이 대단히 뛰어나고 군사적인 역량도 대단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로스 4세를 지지했고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지역을 받았지만 점령하지 않은 지역이라 페르디카스의 지원을 받고 직접 전투를 벌여 점령한 후에 기병을 6,500명이나 모으는 능력을 보여준다.[2]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때 네오프톨레모스를 기습해 병사들을 차지하고 기원전 321년에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크라테로스, 네오프톨레모스를 전사시켰으며, 여러 장군들이 트리파라디소스에서 협약을 통해 에우메네스를 처단하기로 하면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여동생 클레오파트라의 지지를 받았고 올림피아스에게 후원을 받았다.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받자 맞서 싸웠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전투에서 패해 기원전 320년에 노라로 퇴각했으며, 이후 폴리페르콘의 도움을 받아 노라를 탈출해 페니키아를 점령했다.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때 바빌론 근처에서 주둔하다가 페우케스타스를 설득해 안티고노스와 싸우도록 했으며, 셀레우코스 1세, 안티고노스 등을 상대로 기원전 317년에 파라이타케네, 기원전 316년에는 가비에네 등에서 싸웠다.

능력이 뛰어났지만 말로가 상당히 좋지 않은 인물인데, 이는 스스로의 실수라기보다도 부하 운이 없었기 때문으로 부하들에게 섭섭지 않게 대해줬는데도 배반당하고 말았다. 안습. 게다가 부하들이 배반한 것도 그 자신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부하들이 배반한 이유중 가장 큰 이유가 에우메네스인은 마케도니아인이 아닌 외국인(그리스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키타인 아니면 페르시아인이라는 추측도 있다)이라서 외국인인 그에게 명령받아 동족과 싸우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점을 뛰어넘을 만한 인덕은 없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전투 도중에 아군의 전리품들이 적에게 넘어가 부하들이 보물(물질적인 것이 아닌 포로로 사로잡힌 은방패부대의 부녀자를 말함)에 에우메네스를 팔아넘겼는데, 그 부하들이 마케도니아의 정예부대인 은방패부대(...)로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죽이고 난 뒤 이들마저 죽였다. 에우메네스는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잘해주었지만,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에우메네스는 "재수없는 이방인" 그 이상은 아니었으며, 결국 기회가 되자 좋다구나하고 그를 팔아넘긴다.

안티고노스의 배신에 대한 다른 설도 있는데, 에우메네스를 후원하던 지방 총독의 태만으로 인해 병사들의 후방에 남겨진 가족들이 적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자 안티고노스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에우메네스를 팔아넘겼다고도 한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의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 분할파에게 맞서다가 사망한 것이다. 그런 입장의 차이 외에도 마케도니아인이 아니라 이민족 출신이었고, 무인이 아니라 문관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점 때문에, 제국 분할파 장군들이나 심지어 휘하 장군들에게도 경원시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대단한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에우메네스에 맞서고 그에게 여러번 패배한 안티고노스조차 그를 잡았을때 죽일까 말까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에우메네스가 제국의 충신으로서 죽기를 원해 결국 에우메네스를 죽이게 된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포함해서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그런데 그 손을 꼽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엄청난 사람들이었다. 필리포스 2세에 알렉산드로스 3세,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 그리고 그의 숙적 안티고노스 등...

거기다가 상대보다 항상 열세의 상황에 이민족 문관 출신이라는 약점으로 아군도 믿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마지막에 배신당하기까지 연전연승한걸 보면 말이 안나온다.

에우메네스에 대한 글

2 페르가몬 시조설

항간에는 에우메네스의 후손이 페르가몬 왕국을 세웠다고 알려져있지만,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아탈로스 왕조와 에우메네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3 왕궁일지

에우메네스는 생전에 왕궁일지를 적었으며,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된 문헌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현재는 없다. 다른 책에서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야기를 하면 꼭 언급이 되는 책이라 현재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현대에 와서도 꾸준하게 왕궁일지를 찾으려는 역사학자가 많다. 당시에 쓰여진 책의 소재가 주로 파피루스, 혹은 양피지였기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로마기록이 담긴 양피지가 긁혀나가고 있다.[3]

4 충신인가 야심가인가?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의 전기에서는, 에우메네스가 분열되어가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과 그 후손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다 사망한 의로운 영웅으로 기록되어있다. 헌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에우메네스를 탐욕과 야심을 채우려든 전쟁광 정도로 묘사한다. 심지어 원정에서 돈을 챙기고 숨겼다든가, 헤파이스티온과 심하게 싸워 놓고 막상 죽으니까 애도했다면서 에우메네스가 겉과 속이 다르다고 까는 사례들도 들어있다.

플루트라코스가 단순히 음해성 기록만 모았다고 의심할 수도 있지만, 에우메네스에 대해 남겨진 유리한 역사 기록 역시 그의 동향 사람이자 친구였던 히에로뉘모스[4]에게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비록 에우메네스가 패하고 난 후에 쓰여지긴 했지만, 중립성이 의심받을 수도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에우메네스가 대의를 내세우며 싸웠지만 결국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 한 것으로 의심할 수도 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권력을 잡으려 했던 다른 장군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자신이 알렉산드로스 가문의 충신인지 또 다른 야심가인지 증명할 단계 이전에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하고 죽었으니, 결국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에우메네스 충신설에 대한 글

5 대중문화 속의 에우메네스

이와아키 히토시만화히스토리에》는 에우메네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작중 필리포스 2세의 평가로는 알렉산드로스와 에우메네스가 싸우면 알렉산드로스가 2판 이기고 에우메네스가 1판 이기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저 일반적인 피해에 총대장이 사망하며, 에우메네스는 괴멸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생존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좀 더 설명을 붙이자면 각각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싸우면 알렉산드로스는 3번 중 2번 승리하겠지만, 전사자 3000명 중 알렉산드로스가 포함될 것이며, 에우메네스는 9000명의 병사를 죽여도 남은 1000명 중에 있을 것이라 한다.[5]
  1. 사실 이 시기의 서기관이라는게 비서에 더 가깝다.
  2.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때 동원한 기병이 5,000명이다.
  3. 양피지의 경우 워낙 비싸기 때문에 이전 기록위에 덧대어서 글을 쓰는 재활용이 많이 이루어졌고 특히 그리스시대의 양피지는 많이 재활용되었다. 그리고 로마기록은 역사적 가치가 그다지 없어서 웬만한 양피지기록물들은 뒤에 내용덧댄게 확인되면 그냥 긁어서 복원하는게 현실. 참고로 로마기록에 역사적 가치가 없는건 엄청나게 많아서 그렇다.
  4. 히스토리에에서 나왔던 그 얼떨떨한 히에로뉴모스와 거의 동일인물인듯.
  5. 이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풍신수길에서 나오는 내용을 차용한 듯 싶다. 풍신수길 상권 p.283을 보면 히데요시는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노부나가군과 가모우군이 각기 5천과 1만을 이끌고 싸우면 어느 쪽의 편을 들지 묻는다. 그리고 히데요시 자신은 노부나가의 편을 들면 오다군의 5천 중 4900명이 죽어도 노부나가님은 살아남은 100명에 속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재기하겠으나, 가모우는 투구를 쓴 장수 다섯을 베었다고 하면 그 중 하나는 무조건 가모우 우지사토의 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