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 | |||||
9대 샤푸르 2세 | → | 10대 아르다시르 2세 | → | 11대 샤푸르 3세 |
목차
1 즉위전
샤푸르 2세의 동생으로서 샤에 오르기 전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아디아바네의 왕이었으며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이때문에 기독교들 눈에는 연산군보다 더 지랄맞은 폭군으로 간주되었지만, 페르시아인들에겐 매우 덕망있으며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았다. 페르시아인들은 그에게 '자비로운 자'라고 칭송했으며, 아랍인들도 '덕망있는 자'라고 칭찬했다. 그에대한 보답으로 재위기간 중 세금을 부과하지 않음으로서 보답했다고 한다.[2]
2 바지사장(...)
피르다우시의 《샤나메》라는 책에 의하면 샤푸르 2세는 한 살 연하인 아르다시르 2세를 후계로 지명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왕위를 다시 물려받을 수 있도록 유언하였고, 이로인해 아르다시르 2세는 재위가 4년째 되는 해에 물러나고, 샤푸르 2세의 아들 샤푸르 3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이 과정에서 어떠한 암투가 벌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샤푸르 2세가 오늘내일하는 처지였기에(...) 한살 어린 아르다시르 2세에게 옛다 기분이다. 제위를 물려주고 너도 얼마안가 오늘내일하겠지... 대신 사후 제위는 자신의 아들인 샤푸르 3세에게 물려주도록 손을 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힘이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어찌되었든 바지사장(...)
3 외치
당시 아르메니아는 친로마파와 친페르시아파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다. 친페르시아파의 마누엘은 로마파에 의해 살해당한 파페스의 미망인을 옹립하고, 자신은 아르메니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의 주둔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준비가 이루어지는 동안, 어떤 귀족이 페르시아군이 마누엘을 잡으려고 한다는 허위 보고를 한다. 이에 놀란 마누엘은 페르시아군과 교전했으며 자신도 그 와중에 전사한다.
하지만 더 이상의 분쟁을 원하지 않는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와 아르다시르 2세는 평화조약을 맺는다. 하지만 그 조약은 샤푸르 3세가 즉위하고 1년이 지난 384년에 성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