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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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부터 1993년까지 사용한 마크.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사용한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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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부터 1999년까지 사용한 마크. 이때부터 기아 마크를 사용하기 시작한것으로 추정된다.

콤비가 나온 아시아자동차 기업광고.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상용차 CF이다. 콤비뿐만아니라 후반에 AM919, AM트럭 등 당시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한 차량이 나온다.

1 개요

1962년 5월 3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재건 방안의 하나로 국내 자동차 공업을 육성한다는 취지하에 제정, 공포한 자동차 공업 보호 육성법에 기인해 1964년 12월 21일에 이탈리아 피아트, 프랑스 생카(SIMCA) 그리고 SIAVE 은행과 차관 협정을 체결, 이듬해인 1965년 7월 2일에 호남 연고 기업인인 이문환(李文煥)에 의해 설립 자본금 8억 2천 8백만원으로 설립되었다. 1969년에 동국제강에 인수되고 1976년에 기아산업[1]에 인수되었다. 사용하던 공장은 현재 기아차 광주공장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상세

첫 모델인 세단 피아트 124를 선보인 것은 현대자동차포드 20M 모델을 선보인 것보다 1년 뒤인 1970년 3월이지만 설립 연도로 보면 아시아자동차가 설립된 것은 1965년 7월이므로, 국내 자동차 공업을 이끈 선두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첫 모델인 피아트 124는 그 내구성이나 경제성, 그리고 당시 중상류층이 선호하던 보수적인 외형으로 단번에 신진의 코로나, 현대 코티나와 더불어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의 강력한 3각 경쟁 주도를 이루었지만 피아트와의 계약 문제로 인하여 불과 3년 만에 단종된다. 기아차에 인수된 이후 피아트의 상위 모델인 피아트 132를 들여와서 1980년대 초까지 생산했다.

1980년 2차 오일 쇼크 이후 1981년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로 승용차 생산은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현 한국GM)가, 중 · 소형 트럭 생산은 기아자동차가 독점하게 되었으며, 이는 1986년까지 지속되었다. 1986년에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 해제 이후에 기아자동차도 승용차를 개발하지만 이는 기아자동차의 브랜드로 판매되었고, 아시아자동차는 군용 차량과 대형 버스, 트럭을 계속 생산해 자체 브랜드로 판매했다. 아시아자동차가 기아자동차와 합병된 이후에도 광주 공장에서 군용차량을 생산하고 있다.

1995년 아시아자동차 브라질 바히아 공장 건설 체결 당시 모습.

하지만 1990년에 여태까지 SUV 시장을 독점하던 쌍용자동차 이외의 회사에서 처음 내놓은 SUV인 록스타를 내놓은것을 시작으로 아시아자동차는 다시 승용차 시장에 재진입을 시도하며 모기업인 기아차와 되도록 중복되지 않는 틈새시장을 노리고자 했는데, 1995년에는 '네오마티나'라는 스포티지의 플랫폼을 활용한 퓨전 RV 컨셉카를 공개한 이래 여러가지 세그먼트 버스터나 RV 타입의 승용차의 개발을 시작하면서 1990년대 후반에 시판하려고 했고[2][3] 실제로 이중에 몇몇 모델은 양산 직전 단계까지 개발이 진척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프랑스의 푸조 806을 들여와 미니밴을 개발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게다가 내수시장이 적은 우리나라 상용차 시장의 약점을 타개하기 위해 1992년부터 브라질 교포출신 사업가인 전종진의 협조로 아시아자동차 브라질 지사(AMB)를 세워 타우너와 토픽을 수출하기 시작했으나 1995년에 브라질 정부 측이 수입차 관세를 70%로 올리면서 대신 1997년부터 브라질 바히아 주에 생산공장을 세우려 했지만, 결국 그 해에 기아그룹의 부도로 인해 모조리 흑역사가 되면서 단 하나도 빛을 보지못하고 사장되고 브라질 시장 개척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97년 초에 아시아자동차도 기아차와 동일한 로고를 달고 아시아자동차판매(주)를 세워 독자 판매망을 구축하려 했으나, 기아그룹의 자금난으로 부도유예 협약 대상업체로 선정되어 법정관리로 들어가면서 그해 12월부터 타우너, 토픽, 레토나의 판매권을 기아자동차의 자회사인 기아자동차판매로 넘긴 뒤[4] 대형차량 판매/생산과 군용차량 납품에 주력했고, 1998년 국제 입찰에서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를 분리 매각하거나 통합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결국 두 회사 모두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다. 이후 1999년 6월 30일부로 아시아자동차판매, 기아자동차판매, 기아대전판매와 함께 기아자동차와 통합되어 아시아자동차는 자동차 업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합병 이후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하던 모델들은 기아자동차의 브랜드로 변경되어 명맥을 이어 오다가 현대자동차 주도의 라인업 재정비로 인해 단종되었다.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했던 차량 중 현재까지 생산되어 출시되고 있는 모델은 1994년에 출시한 대형버스인 그랜버드가 유일하며 꾸준히 장수하는 대형버스 모델이다.

한편 아시아자동차 브라질지사와 합작한 수입상 전종진도 1998년에 사기 혐의로 검찰에 체포되어 2000년에 석방되어 국외로 잠적하다가2006년에 브라질 연방경찰에 체포되어 브라질에 수감되었고 2008년에 국내로 송환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5] 전종진 씨에 관한 정보 이러한 사기 사건으로 인해 현대/기아차의 남미시장 진출이 한동안 틀어지게 되었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경찰버스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했다.(이후 기아자동차로 계승)

3 생산차량

기아자동차#s-8 문서를 참조.

4 기타

현재 대만에서 양명산을 오르는 버스로 아직도 AM버스가 사용 중이다.

그리고 프라이드 복고풍 버젼인 제노비아, 소형 해치백인 ARV, 타우너 콘셉트, 프레지오의 콘셉트인 스태퍼가 1997년 4월23일자 매일신문에 실려있다! 링크
  1. 기아자동차. 기아(起亞)가 아시아에서 일어나다라는 의미이니 적절한 인수대상이다.
  2. 당시 아시아자동차에서 한참 개발중이던 카렌스의 형제차 미니밴도 개발이 상당부분 진척되었고, 1997년 서울모터쇼에 공개된 ARV라는 박스카형 소형차는 컨셉카가 공개되었을 당시 상당히 독특한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기아그룹 부도 사태로 모조리 나가리가 되었다. ARV는 컨셉카가 처음 공개된 시점이 1997년이었는데, 만약에 성공적으로 양산이 되었으면 닛산 큐브나 토요타 bB보다도 먼저 나온 박스카형 소형차가 될수있었을 것이다.
  3. 하지만 양산이 나가리된 ARV는 완전히 사장되지 않고, 아시아자동차가 기아자동차에 흡수합병된지 10여년이 지난 후에 그 독특했던 기본 컨셉이 다시 부활될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쏘울이다. 공교롭게도 쏘울이 생산되는 공장은 광주공장으로, 구 아시아자동차 공장이다.
  4. 레토나가 기아 브랜드로 판매된 것도 그 이유이다.
  5. 2003년에 대법원에서 이미 징역 10년이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