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자동차

기업개요
로고파일:Attachment/kia motors logo.jpg
정식명칭기아자동차주식회사
영문명칭KIA MOTORS CORPORATION
설립일1944년 12월 11일[1]
창업자김철호
업종명승용차 및 기타 여객용 자동차 제조업
기업규모대기업
상장여부상장기업
상장시장유가증권시장(1973년 ~ 현재)
편입지수코스피
KRX100
KOSPI200
주식코드000270
모기업현대자동차그룹
홈페이지

1 개요

2015년 미국 슈퍼볼 광고. 모델은 피어스 브로스넌이다.

대한민국자동차 산업과 자전거 산업의 역사를 이끌고 지켜봐 온 기업. 방위산업체이기도 하다.

2 역사

국내 최초로 가솔린 엔진을 생산한 기아자동차는 1944년 12월 11일 학산 김철호에 의해 '경성정공'이란 이름으로 설립되어[2] 우리나라 최초의 자전거 '3000리호'를 출시(다들 아시는 그 삼천리자전거의 기원이 된다)[3]하고 1952년 2월 회사 이름을 기아산업(주)로 변경하였다.[4][5]

1962년 기아마스타 시절에 일본 마쓰다와의 기술 제휴로 배기량 356cc의 3륜 화물차 K-360을 생산하였으며, 1974년 마쓰다 파밀리아의 차체를 바탕으로 최초의 국산 FR 승용차 브리사를 제작하였다.[6] 브리사는 당시 현대자동차포니새한자동차제미니와 격돌해 한때는 국산 승용차 시장 1위를 차지하는 최강자의 위치에 있었을 정도로 막강했던 차량.

1976년에는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시킨다. 현재의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및 특수차량 공장.[7] 현재도 일부 SUV, 버스, 봉고트럭, 군용차는 광주공장과 특수차량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1981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산업합리화)로 인해 정부로부터 '중소형화물차 및 버스 전문생산업체'로 지정받아 경영 위기를 맞았으나, 같은 해 10월 전문경영인 체제가 들어선 이후[8]로 트럭을 개조해 내놓은 소형승합차 봉고를 출시하면서 오히려 기업 이름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이쯤부터 마쓰다 차량을 OEM 생산해 수출하기 시작했다. 주로 일본과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1986년 말부터 오대양 육대주를 휘날리는 깃발(또는 물결무늬)을 형상화한 로고로 변경하고 1987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풀리고 프라이드, 콩코드로 부활, 이후 1992년에 세피아를 출시하고 아산만공장(현 화성공장)을 지으면서 확실하게 그룹을 키워갔다.

1994년 지금과 같은 로고로 변경한다. 바뀐 이유는 그 전 로고의 굴뚝이 환경오염을 연상하게 해서 바꿨다는 것이 정설이다.출처1 출처2

현대차 인수 뒤에는 내수용 한정으로 차량 외부에 원형의 다른 로고를 붙였지만, 인지도가 낮고 BMW의 로고와 비슷한지라 "어차피 현대나 기아나 타원 모양의 로고이니 통일감 있게 예전 그대로 하자" 해서 2004년 2세대 스포티지의 출시 때 지금의 타원형 로고로 다시 돌아왔다.[9] 단, 수출용은 기존의 타원형 마크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1997년 경영의 악화로 부도를 맞고, 1998년 10월 입찰을 통해 현대자동차아시아자동차와 함께 인수되어 현대그룹에 편입되었다. 1999년에는 기아자동차판매, 아시아자동차, 기아대전판매, 아시아자동차판매 4개사를 합병하였다.

2000년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여러 계열사들이 현대그룹에서 분가하면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2011년에는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여 정통성을 강화한 기념으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이름이 빠지게 되었다. 지못미.

유명 테니스 선수인 라파엘 나달의 스폰서이기도 하다.
배우 하정우가 기아차 딜러라 카더라

3 1997년 부도

기아그룹은 1997년 기아차를 중심으로 기아중공업(구 기아기공, 현 현대위아), 기아전자(본텍, 2005년에 현대오토넷으로 합병), 기아정기(카스코, 2007년에 현대모비스로 합병.), 기아특수강(현 세아베스틸), 기산 등의 28개 계열사에 직원 5만 5천명, 1996년 자동차 수출 30억달러의 재계 순위 8위의 거대 그룹이 되었다. 특히 특정 일가의 소유가 아닌 소유 분산이 잘 이루어져 있고 전문 경영인 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는 모범 기업으로 인정받았다.[10] 하지만 이러한 소유구조 때문에 강력한 재벌들 사이에서 매우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1993년 자동차 산업 진출을 노리던 삼성그룹이 대량 주식 매입에 나서면서 삼성그룹과 기아그룹이 충돌하기도 했다. 여론의 비판을 받은 삼성이 지분 일부를 다시 매각하지만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설은 끊임없이 제기된다.[11]

이후 기아는 국제 경쟁의 격화와 경기침체, 계열사의 부실한 경영 실적 등으로 1997년 봄부터 위기설에 휩싸이다가 결국 1997년 7월 15일 부도유예협약 적용대상이 된다. 이후 28개 계열사를 14개로 줄이고, 기아차노조가 무분규, 임금동결 선언을[12] 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으나 결국 10월 법정관리로 넘어가고 김선홍 회장 등 경영진은 완전 퇴진하게 된다. 외환위기의 혼란 속에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제시되지만 결국 1998년 10월 국제입찰을 통해서 현대자동차에 매각된다.

기아그룹 부도의 원인으론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첫번째는 잘못된 예측에 바탕한 무리한 사업 확장. 기아그룹은 1990년대 아시아자동차, 기아특수강, 기산(건설) 등에 전폭적인 투자를 했으나 아시아의 트럭과 기아특수강의 철강은 수요예측이 잘못돼서 만성적인 공급 과잉이었고, 주택건설에 뛰어든 기산은 부동산경기 침체로 엄청난 자금이 묶이고 말았다. 이 3개 계열사의 적자때문에 기아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커졌다는 것.생사 갈림길 선 기아그룹 패인 분석 특히 전문경영인에 불과한 김선홍 회장이 프라이드의 성공이후 자만심에 취해 무리한 몸집 부풀리기만 하는 등 여타 재벌을 흉내내는 오너놀이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많았다. 기아사태와 경제민주화

두번째는 삼성의 무리한 인수추진과 갑작스런 자금 경색에 따른 일시적 위기. 기아그룹이 계열사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외환위기 이전 한국재벌들은 대부분 만성적자 상태에서 은행빚 돌려막기로 수십년째 운영중이었다. 1997년 3월 삼미그룹 부도로 인한 금융시장의 경색에 유탄을 맞은 것뿐이라는 주장이다.[13] 더구나 기아그룹은 주력사인 기아차는 흑자였기 때문에 방만한 몇 개 계열사만 정리하면 충분히 자력회생이 가능했다는 주장이 당시 기아 임직원들 사이에선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14]

5개 재벌 그룹의 10개 계열사 재무관리팀에서 간부와 임원으로 25년간 일하였던 김건씨의 "엉터리 재무제표 읽는 비법" 12페이지에서 언급한 바에 의하면 1997년 당시 기아자동차가 설립 이후 34년 동안 단 1년만 흑자를 내었을 뿐이며 실제 적자는 3조 3천억원 가량이었지만 재무제표에 나타난 적자는 3800억원에 불과하였다고 나온다.

이 와중에 곁들여진게 일명 삼성음모론이다. 나중에 '삼성 엑스파일'을 통해 기아차 매각 앞뒤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아차 쪽에 금융권이 추가 지원을 하지 않도록 삼성이 정치권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인 정황이 실제로 드러나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기도 했다.[15] [16]삼성이 삼성생명과 제2금융권을 통해 기아의 자금 경색을 유도하고 정부를 압박해 기아 경영진 퇴진을 이끌어 냈다는 것. 이후에 기아차를 인수할려 했으나, 자동차 산업 철수를 결정하면서 인수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7] 실제 삼성은 1997년 초에 '기아차 성장 한계 봉착' '자동차 업계 대대적인 구조조정 필요' 등의 보고서를 공개해서 기아를 흔들기도 했다. 삼성자동차 보고서 파문 부도유예협약 직후인 8월에는 '쌍용, 기아차 인수가 필요하다'는 삼성내부 보고서가 유출되기도 했다. 1999년 외환위기 청문회 당시 김선홍 회장은 "삼성이 이를 바탕으로 금융계열사 등을 통해 빌려줬던 5000억원대의 자금을 거둬들였고, 결국 기아가 파산에 봉착했다"면서 음모론을 제기했고,

이에 대해 몇가지 추가 이야기가 있는데 1995년 당시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기아차 소하리 공장 출고장에 있던 봉고 J2의 사진을 찍다 기아자동차에 걸리는 바람에 기아와 삼성 간의 알력이 발생한 바 있고(1995년 6월 17일 한겨레 기사), 1997년 3월에는 중앙일보의 취재헬기가 기아자동차 아산만공장(현 화성공장) 상공을 선회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1997년 3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참고로 봉고 J2 사진을 찍다 걸린 사건에 대해 삼성중공업에서는 사내 차원에서 중징계를 내리는 조치를 취했다고. #[18]

부도가 나자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 발생되었는데, 회사의 실질적인 주인인 노조와 경영자가 정치로 회사의 위기를 풀어나가려 시도한 것이다. 적은 규모의 부정 혹은 부도였다면 14%의 지분율을 가지고 있던 노조가 1% 지분율의 경영자를 쫓아냈겠지만, 너무 부도의 규모가 크자 양 측이 합심해서 정부를 상대로 정치적인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관련기사

한편 부도 및 법정관리 당시 차범근최진실노 개런티로 기아자동차의 광고를 나서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담으로 후에 기아자동차는 회생 후 감사의 의미로 차범근에게 엔터프라이즈를, 최진실에게는 카니발을 기증했다고 한다. # #

4 특색

현대가 안정적인 쪽을 선호한다면 이쪽은 모험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쪽을 선택했다. '기술의 기아'라는 이름에 걸맞는 행보를 보였었는데, 예를 들자면 국내최초로 차체(Underbody, "섀시(chassis)"라고도 함)를 독자 개발한 세피아라든지, 영국 로터스에서 생산 라인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로드스터인 엘란, 세계 최초의 온로드 중심 소형 SUV스포티지[19][20], 그리고 대한민국 대형버스 최초로 자체 디자인을 적용하여 GD마크를 획득한 그랜버드 등이 있다. 게다가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박정희 정권 시절에 이미 부품면에서 90% 이상의 국산화를 이루어낸 브리사까지 포함하는 등 기아의 기술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엔진에 있어서도 연비위주의 현대자동차와는 달리 성능 위주의 세팅을 하였으며, 후에 자체 개발한 엔진인 T8D엔진 역시 성능위주의 세팅으로 나왔다. 이 엔진은 엘란의 생산분과 크레도스 등에 쓰였는데 성능은 그럭저럭 괜찮았고 당시의 한국엔진 중 가장 스포티했다. 부도 전에는 사실상 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했던 회사로 엔지니어 마인드가 국내 자동차 업체 중 최강이었다고 봐도 할 말이 없는 회사. 창업주부터가 애시당초 일본에서 기계공업에 종사해서 돈을 벌었던 인물이다. 엔진 특성으로 보면 대체적으로 마쓰다의 터보엔진을 당시 국내 실정에 맞게 자연 흡기로 개조하고 출시한 엔진이 많고, 전체적으로 회전수가 높게 잘 돌아가고 압축비도 높은 편. 비슷한 자연흡기용 엔진과는 다르게 전부동식 피스톤핀이나 피스톤 쿨링용 오일제트를 장착하는등 약간 오버스펙인 면이 있다. 터보용 엔진에 어울리는 부분이지만, 자연 흡기로 고치면서도 다운그레이드 하지 않은 부분 부분이 남아있는 편.[21]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이전에는 유럽의 차량들을 도입하여 생산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아시아자동차까지 포함하면 피아트 124, 피아트 132, 푸조 604 등이 있으며, 몇십년 후의 일이지만 기아자동차가 영입한 피터 슈라이어와 유럽 전용 모델 기아 씨드를 포함하여 이들은 기아자동차의 유럽 DNA로 분류되고 있다.

다만 자동차 디자인 부분에서는 현대자동차보다 뒤쳐져서 촌스럽다거나 거친 느낌을 주는 자동차가 많고, 자동차 내부의 스위치 질감이나 배치도 현대자동차보다 저렴한 느낌이 나는 것이 단점이었다. 현대는 일반인들이 사고 싶은 차를 만들고, 기아는 엔지니어들이 타고 싶은 차를 만들고, 대우는 도대체 왜 차를 만드는지 모르겠고, 쌍용은 차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삼성은 뭐하는지 모르겠고

이렇다보니 현대자동차 인수 후 '기술의 기아'라는 이미지가 퇴색되고 '디자인의 기아'로 이미지 변신 후에는 과거 기아자동차를 추억하는 오너들 사이에서 나의 기아차는 이렇지 않아라는 반응도 일부 있다.

어찌됐든간에 현대에 인수 된 이후 현대차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받아서 차를 제작하지만 어차피 이정도는 해외 메이커에서도 흔한 일이라 기아의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팅과 설계를 하기도한다. 같은 플랫폼이라도 서로 비교해보면 은근히 다른 부분이 많은 등 비교 시승해보면 재밌다.근데 깨알같은 차이라 일반인에게 큰 의미는 없다 그러나 역시 현대차 그룹 산하기 때문에 정말로 마음대로 차를 제작할 수 없다는건 큰 애로사항이다. 아우디폭스바겐의 예처럼 서로 차종이 겹치건 말건 상관 안하고 마음대로 차를 개발해서 판매하는 것 과는 매우 대조적인데 아무래도 기준점이 현대에 있기 때문에 기아차는 상대적으로 파워 트레인 공급 등에서 많은 차별을 받는다. K9의 엔진 같은건 유명한 예시고 트림이나 옵션 구성도 묘하게 제한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22]어차피 상술된 스위치 질감 같은 실내 인테리어 문제는 2015년 현재에 와서는 일부 구형차종을 빼고 완전히 해소 된 문제다. 하지만 파워 트레인 공급이나 미묘한 트림 구분은 쉽게 해소되기 힘든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현대차 그룹의 정책상 기아는 틈새시장 공략용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엑센트에는 1.6 디젤 엔진에 DCT 미션을 달고 나오지만 프라이드는 그런거 없고 1.4디젤에다 인기가 떨어지는 수동 미션만 나온다던지, 내수용 경차MPV, 미니밴같은 차량은 기아에서만 생산 한다던지. 어쨌든 위에 설명된 사항은 무조건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젊은 층이나 일부 매니아들은 기아차의 옵션구성을 더 반기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취향에 맞춰 차를 구입하는데는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5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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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표가 아니다, 하나의 표다
르노삼성 망했어요, 한국지엠 망했어요, 쌍용 망했어요, 수입차는 아예 관심이 없다. 르노삼성 잘나가다 왜이러니
현대자동차 다음으로 국내시장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현대자동차에게는 매번 판매량에서 밀렸으며, 그나마 현대자동차보다 우위를 점한 차종은 시장에 먼저 진입한 SUV와 봉고를 위시한 트럭, 승합차, 카렌스, 카니발, 카스타의 미니밴이다. 2000년대 후반 이후 국내 내수 점유율이 상승했으나 현대차와의 판매 간섭현상으로 현대차의 내수 점유율이 조금 줄었다. 다만 기아의 내수 점유율 상승분이 현대차의 내수 점유율 감수분보다 많아 현대기아의 내수 점유율 합은 더늘었다.

중고 비율이 꽤나 높았으나 현대에 인수된 후로는 별 차이가 없다. 2000년대 중반 들어서 현대가 기아의 가능성을 보고 이것저것 기아라는 브랜드로 모험을 시키는 형편.
하지만 제 버릇 남 못준다고 동급의 현대차보다는 달리기 성능을 중시하는 경향이 여전하다. 요즘에는 유럽 전용 판매모델인 씨드(Cee'd)시리즈로 해외에서도 톡톡히 돈 잘 벌고 있는 중. 현재는 시장에서의 동일계열사간 동일 차급에서의 판매 간섭을 최소화하기위해 주력하는 차종을 서서히 나눠가는 추세이다.

참고로 무개조급이기는 하지만 WRC 우승기록이 있는 무시무시한 회사다.(1995년 박정룡 선수가 세피아를 몰고 호주 랠리에 참전) 게다가 해외 지사의 출격이긴 하지만 다카르 랠리 완주 경험도 있다.[23][24] K5를 시점으로 차명을 통일하기 위해 현대처럼 독자적인 차명 체계를 잡아가는데 하필이면 그 앞자가 놀랍게도 'K'이다. 그 첫 대상은 K7. K7을 시작으로 파워트레인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독자적으로 차량 개발 체계를 구축하려는듯. 동급 차종의 경우 한세대에서 반 세대 전의 현대자동차 플랫폼을 가져와서 쓰던 것을 아예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쓸 요량이라고 한다. 현대자동차를 닮아간다고 옵션 장난질 한다고 같이 욕을 먹고 있지만 그래도 기술 개발에 한해서만은 현대자동차 이상으로 믿을 수 있는 회사. 앞날이 기대되는 회사이다..라고 적혀있지만 현대차나 기아차나 전부 같은 사람들이 만든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연구개발 인력은 구분되어있지 않으므로 당연히 플랫폼을 포함한 기술은 모두 현대자동차와 공유한다. 사실 개발 시점에 따라 새로운 플랫폼이 기아차에 가장 먼저 적용되는 경우도 있으니 기술 논쟁은 사실상 무의미. 실제로 기아자동차 합병 이후 기아자동차 소속 연구개발 인력들은 모두 현대자동차로 옮겨갔고, 기아자동차 소하리 연구소는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로 통합되었다. 현재도 디자인을 제외한 현대기아차의 연구개발 인력은 모두 현대자동차 소속이다.

K시리즈 이후로 2008년에 주가가 바닥까지 쳐서 주당 5000원 대였던 이후로 K5, K7의 연이은 히트로 인해 2011년 1월 20일 3년만에 6만원대까지 10배가 넘게 올라갔다. K9 안습

5.1 디자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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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디자인을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정하고, 정의선 전 대표이사(현대자동차그룹 승계자로 내정되어 있다) 취임 후 빠른 변화와 발전을 보여오고 있는 중이다. 취임 직후 폭스바겐, 아우디 출신의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를 디자인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해 와서 '직선의 단순화'를 모토로 자동차 디자인이 획기적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슈라이어 부임 이후 나오는 자동차 디자인은 멀리서 봐도 기아차 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통일된 패밀리 룩으로 가는 중이며, 그릴 모양은 Tiger Nose(호랑이 코)라는 고유의 모양으로 가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차에 인수된 이후로 디자인면에서는 확실히 전보다 좋아져서 쏘울, 신형 스포티지등은 외국에서 신선한 디자인으로 호평받고 있으며, 그외 여러 모델들이 외국 디자인상을 받았다. 기아 K5는 라이벌인 현대 쏘나타보다 디자인에 대한 평가가 더 높다.[25] 최근 현대차 디자인이 전통적인 세단형을 버리고, 4도어 쿠페 스타일로 가거나 플루이딕 스컬프쳐라는, 마치 스타트렉같은 SF에서나 볼 것 같은, 너무 급진적이고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가는 반면, 기아는 '무난함+오래봐도 질리지 않음+세련됨 추구' 스타일로 가고 있다. 그리고 슈라이어 부임 후 나온 기아의 모델들은 은근히 폭스바겐, 아우디 쪽 모양과 비슷하다. 피터 슈라이어는 인터뷰에서 "It's not fancy and has a timeless design. It looks natural." ("팬시하지 않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고 유행을 타지 않으며 자연스럽다")라고 했다.

반면 기존의 기아자동차의 특색이던 독자 개발은 거의 못하고, 현대자동차에서 개발된 플랫폼과 엔진을 기반으로 차량을 설계하고 제작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 즉, 기술개발등 엔지니어링은 현대에게 맡기고, 디자인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선택과 집중 측면에서 보면 효율적인 방식이긴 하나, 엔지니어링을 전적으로 현대에 맡겨버려서, 현대가 잘 나갈때는 동반 상승하겠지만 만약 현대에 도요타 리콜 사태디젤게이트같은 품질 위기가 닥치면 같이 위험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대에서 엔지니어링, 기아에서 디자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든 기아든 가리지 않고 엔지어니링과 디자인 부문은 남양연구소에서 통합하여 맡아 개발하고 있다. 그 남양연구소가 편제상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실 직속으로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 떄문에 현대를 배슁하는 세력은 기아도 묶어서 같이 까고 해외에서는 기아를 현대의 Division[26] 취급하는 경향도 있는데, 엄연하게 말하면 현대-기아는 Division이 아닌 독립된 회사이며, 기아자동차가 연구개발을 현대에 위탁해서 연구개발만 같이 할 뿐이다. 나머지 부분, 즉 판매나 마케팅, A/S 등은 조직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경쟁관계에 있다. 오히려 푸조-시트로엥의 연합체인 PSA그룹과 비슷하다고 할 만하다.

6 사명(社名)

일어날 기(起) + 버금 아(亞)를 쓰는 기아라는 사명은 영어로는 "Rising Out of Asia"라도 번역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이런 뜻을 생각하고 사명을 지었다기 보다는, 영어의 기어(Gear)를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사명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아니면 기어의 일제 잔재어인 기아를 음차해서 起亞가 나왔을 수도 있다. 일단 기아에서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어 기아에는 飢餓(굶주림)라든가 棄兒(갖다버린 아이)같은 부정적인 뜻이 있어 어감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예전부터 많았다. 기아타이거즈 프로야구단을 KIA로 표기하는 이유도 이것. 우승에 굶주린 구단

미국에서도 KIA가 Killed In Action(작전 중 사망, 전사자)를 뜻하기 때문에, 군사용어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놀림의 대상과 구매시 거부감을 주며 잦은 사고나 낮은 안전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K.I.A(케이 아이 에이)라고 약자로 읽어야하므로 그냥 키아 라고 읽으면 문제 없긴 하지만, 사실 한국차가 미국 진출 초창기에는 싼 맛에 타는 그저 그런 차라는 인식이 많았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팔릴 차도 안 팔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7 비판

현대자동차/비판 문서를 참조. 현대차에 인수된 이후 기아차의 차량 대부분은 현대차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현대의 안 좋은 점도 답습하고 있다.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문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국민을 호구로 봐서 까인다" 이다.

8 생산차량

8.1 승용차, SUV, RV, 승합차, 경상용차

8.2 버스, 트럭

8.3 삼륜차

1960년대~70년대에 생산했었다. 마쯔다와의 기술제휴로 생산했지만 마쯔다의 삼륜차 부품을 들여와서 생산했다.

8.4 군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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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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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씨티은행쪽의 주문실수로 주식시장에 상장 주식 수보다 많은 5억주 매수주문이 들어온 적이 있다.

향토기업 출신이 아니고 딱히 지역색을 띤 것도 아니지만 종종 호남 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 이는 과거 기아자동차의 자회사였다가 합병된 아시아자동차가 광주를 거점으로 활동했었고,[33] 이를 모체로 하여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이 현대에도 광주권 지역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기아자동차의 창업주 김철호도 경북 칠곡군 태생이고 사업 시작도 서울에서 했기 때문에 중간에 인수한 아시아자동차의 사정을 제외하면 기아자동차는 호남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기아자동차의 기반은 주력 생산공장인 광명공장과 화성공장, 그리고 과거에 소재했던 시흥공장의 위치에서도 알 수 있듯 수도권을 기반으로 하며, 오히려 타 생산업체보다도 수도권에 사업장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기아자동차 서비스센터와 홈플러스가 있는 자리가 원래 기아자동차 시흥공장 자리였다.

일각에선 기아 타이거즈의 모기업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미지 면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크게 관련이 없는 편이다. 기아 타이거즈는 전신인 해태 타이거즈IMF로 부도가 난 해태그룹으로 부터 그대로 인수받아 운영하는 것에 불과하며, 구단 인수 시점도 2001년이라 기아자동차가 현대자동차그룹으로의 인수 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구단 인수는 모기업인 현대자동차의 입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보는게 맞다. 참고로 현대자동차는 프로축구 구단으로 호남 지역에 연고를 두는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을 운영 중이기도 하다. 오히려 1990년대 중반에는 한국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부산에 연고를 둔 구단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를 직접 창단하기도 했었다. 구단 운영정책과 지역색을 연관지어 보자면 같은 영남 지역이기 때문에 이쪽이 조금 더 신빙성이 높다. 따라서 스포츠 구단 운영 정책과 호남 지역과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광주공장은 무진대로 남과 북쪽에 각각 1개씩 위치하는데, 다른 사업장과는 달리 광주 시가지 한복판 노른자위 땅에 있다. 그 이유는 원래 도시 중심에 지은것이 아니라 광주공장의 전신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들어섰을 때만 해도 그곳은 광주의 시가지의 바깥쪽이었기 때문이다. 광주 동구 대인동에 있던 버스터미널도 시외에 새로 크게 지어야 한다고 해서 현재의 광천터미널이 들어섰는데 같은 이유다. 현재는 상무지구를 개발하고 서구 북구 광산구 등이 지속적으로 개발 되면서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공장 사이를 가르는 왕복 16차로짜리 무진대로의 풍경도 장관. 사실 이 도로 이름도 원래 '기아로'였다가, 서쪽으로 이어지는 무진로와 통합되면서 바뀐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위에서 정리한 광주공장은 승용차 생산 공장이다. 원래 상용차 생산을 전문으로 했고 또 아시아자동차의 본부가 있었지만 2005년 이후 승용차 위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광주에는 이곳 말고도 광산구에 특수차량 생산공장이 위치해있다. 군용차량은 현재 이곳에서 생산 중이며 기아 그랜버드도 이곳에서 생산하고 있다.

기아차의 미국법인은 기발하고 엽기적인 광고로 매우 유명하다. 쏘울의 햄스터 광고도 이들의 작품이며 이 기발하고 엽기적인 광고 센스는 슈퍼볼 광고에서 절정에 달한다. 보자

기아사태 이전까지만 해도 창녕에 창녕공업고등학교라는 사립학교도 가지고 있었으나 기아사태 이후에 현대자동차가 창녕공업고등학교까지는 인수하지 않아서 1999년 이후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2015년 들어서 넥센타이어가 창녕공업고등학교를 인수하려고 했다가 잡음이 생겨버린듯.

9.1 스폰서십

직영중인 기아 타이거즈 외에도, 글로벌 이미지 제고를 위해 각종 스포츠 종목에서 활발한 스폰서십을 제공중이다.[34]

10 관련 문서

  1. 회사 설립 등기가 이뤄진 날이다.
  2. 1994년에 발간한 기아자동차 창업 50년사에 의하면 1944년 7월부터 창업 준비를 해왔고 그해 12월 11일, 경성지방재판소에 설립등기를 마쳤다고 한다.
  3. 삼천리자전거는 현대그룹에 인수되기 훨씬 전인 1979년에 분사되었기 때문에 현대자동차그룹에서는 빠졌다. 그러나 현대자동차그룹 아래에서는 옛 기아의 역사가 점점 희석되어가고 있는 반면, 삼천리자전거는 아직도 기아차의 역사를 기리고 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삼천리자전거 항목을 참조.
  4. 기아자동차 창립 40주년 기념 책에서는 부산공장에서 만들고 처음 만든 그 해에 사명을 바꿨다고 한다.
  5. "아시아에서 일어선다."는 뜻의 起亞, 영어 gear (당시의 일본식 발음으로는 기아)의 두 가지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6. 여담이지만 이때 미국 GM와 기술제휴를 할 뻔 했다가 철회되기도 했다.#,먼저는 GM의 상용차 브랜드인 GMC와 제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7. 단, 특수차량 공장은 1991년에 준공되었다.
  8. 유한양행이 행했던 그것 맞다. 김상문 당시 회장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선언해 민경중 당시 아시아자동차 사장을 회장으로, 기아기공 사장이던 김선홍을 기아자동차 사장으로 선임했으며 김상문 본인은 주주의 위치만 가졌다.
  9. 두 회사 로고는 가로세로 비율이 조금 다르지만, 수출 지역에 따라 현대 기아 차종이 회사를 바꿔 투입될 때, 금형 수정 없이 엠블렘만을 바꿔 붙일 수 있어 경제적이기도 하다.
  10. 당시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의 기아자동차 지분은 불과 1%로 소유주가 아닌 전문경영인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김선홍 회장은 비등기이사였다.
  11. 삼성은 1994년 12월 자동차 산업 진출 허가를 받아서 삼성자동차를 설립힌다. 닛산자동차에서 기술을 도입해서 SM5의 생산이 시작된 건 1998년부터다.
  12. 당시 기아차 노조는 민주노총의 핵심 강성노조로 유명했다. 1995년 1월 노동법 날치기에 항의하는 총파업을 주도한 것도 기아차 소하리(광명) 공장. 현대차 노조를 포함해서 다른 곳이 머뭇거릴때 제일 먼저 파업을 개시한 것이다. 이런 노조가 무분규 선언을 할 정도였다. 마냥 강성노조라고 하는건 옳지않다. 당시 기아차의 최대주주(각 14%)는 종업원으로 구성된 우리사주조합과 포드사였다.
  13. 실제 당시 재벌중에는 부채비율 1000% 재계순위 10위의 한라 등 기아보다 재정상태가 엉망인 곳도 많았다. 하지만 한라, 쌍용, 대우 등 이런 그룹들은 외환위기 이후 결국 망했다.
  14. 흑자는 4조원대의 회계부정으로 만들어낸 장부상의 흑자였다.
  15. [1]
  16.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 당시 삼성그룹이 정관계에 기아차 인수를 위해서 모종의 로비를 한 정황이 일부 드러나기도 했다. 그 잘난 삼성도 남의 회사 회계부정, 그리고 다가올 IMF 위기는 전혀 몰랐는 듯 관련기사
  17. 1998년 국제입찰 당시 삼성은 입찰제안서를 제출했으나 정작 본 입찰에는 빠지고 곧바로 삼성차도 프랑스 르노에 매각했다. 무서워서!
  18. 이 사건 발생 후 몇년 뒤에 출시된 삼성의 트럭이 SV110 야무진 트럭. 삼성중공업 산하에 자동차사업부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19. 아울러 스포티지 생산 시 프레임에 엔진 등 대부분의 구동계를 협력업체에서 통합 조립하여 공급하는 모듈 개념을 국내 최초로 선보이기도 했다. 모듈 공장은 당시 스포티지 프레임을 생산하던 서진산업이 기아에서 위탁받아 운영했는데 막장으로 치닫던 공장을 정상 가동시켜 놓으니 모비스에서 도로 뺏어갔다.
  20. 사실 요 부분은 좀 논란이 있다. 기아차 팬들은 스포티지가 세계 최초의 온로드형 SUV이며 차후 주류가 된 온로드 형 SUV는 모두 이 스포티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실제 SUV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적으로 온로드형 SUV의 시초로 보는 차종은 차급은 다르지만 스즈키사이드킥이라는 차종이다.(GM에서 트랙커라는 이름으로 OEM받기도 했고, 국내에도 수입되었다) 자동차 역사로 본다면 이미 1950년대에 라다에서 나온 온로드타입 SUV도 있고... 무엇보다 사이드킥이나 초대 스포티지 모두 프레임 설계 차종이고, 실제 모노코크 설계인 완전한 온로드형 SUV로 나온 것은 토요타라브4이고, 이후에 나온 대부분의 온로드형 SUV는 이 라브4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다. 외국쪽에서 스포티지의 평가는 '한 수 아래의 한국시장에서 웬일로 당시 시대 흐름을 잘탄 차가 하나 나왔네...'수준이지 스포티지를 외국에서 벤치마킹했네 어쩌네 하는건 다 헛소리. 기아자동차가 당시 비주류라서 그런 평가를 받는다는 견해도 있는데, SUV계보를 보면 당시 소련이나 체코같은 비주류회사들의 SUV들도 가치가 있으면 다 소개해 주고 있다. 스포티지가 '시대를 앞선 차종'이라는건 맞지만, '시대를 선도했다'는 주장은 좀 심하다.
  21. 대표적인것이 기아 캐피탈에 들어간 B5 DOHC 엔진으로, 원래 마쓰다 파밀리아 GT라는 핫해치에 들어가던 1600cc 터보 엔진을 가지고 배기량을 국내 자동차 세금체계에 맞게 1500cc로 줄이고 터보를 떼어낸 엔진이었다.
  22. 예를들어 정말로 최고급 옵션으로 도배된 차를 구입 하려면 현대차가 유리하다던지. 엔진 바리에이션도 현대가 더 다양하거나 매력적이라던지.
  23. 2000, 2001년 스포티지, 2009, 2010년 쏘렌토
  24. 1988년에도 K-111을 튜닝한 로드마스터로 참전하여, 비공식이지만 국내 기업 최초로 다카르 랠리를 완주하기도 했다. 문제는 제한 시간을 초과하는 바람에 다카르 랠리에서는 탈락 처리 되었고, 그래서 공식이 아닌 비공식으로 국내 최초가 되어버렸지만. 참고로 당시 드라이버 중에는 1995년에 세피아로 WRC 호주 랠리에 참전해 우승한 그 박정룡 선수가 있었다.
  25. 외국에서 쏘나타를 제끼고 여러 디자인 상을 수상.
  26. 도요타-렉서스, 쉐보레-폰티악, 크라이슬러-지프 등 한 회사에서 만든 다른 이름의 브랜드.
  27. 아시아자동차 생산 차량.
  28. K2의 러시아 버전. 프라이드의 기존 수출명과 같은 차명을 사용한다.
  29. K5의 수출명.
  30. 팔릴 당시 카렌스2와 병행생산.
  31. 특이하게 울산에서 생산되었는데, 싼타모를 베이스로 했기 때문이다.
  32. 수출용 모델로 슬로바키아에서 생산.
  33. 참고로 아시아자동차의 창업주였던 이문환은 호남 출신인 사업가다. 아시아자동차가 기아자동차에 넘어간지 오래된 현재는 그의 친척들이 아시아자동차와는 무관하게 활동 중이다.
  34. 기아는 과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니폼 스폰서(2005~2012년)이기도 했는데 그다지 성적이 화려하지 않아(하지만 유로파 리그 우승까지 하여 투자한것을 생각하면 손해는 아니었다고) 2012년부로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틀레티코는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스폰서를 맡았는데 그 아틀레티코가 2013-14 시즌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는 통에 기아에서 안타까워했다는 후문.
  35.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만 후원하고 있다. 그러니까 빙엿을 후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
  36. 양재동 사옥에 입주하기 이전에 쓰던 여의도 사옥의 현 주인이 바로 현대카드이다.
  37. 주역 로봇들의 자동차 형태는 기아자동차의 모델들이다.
  38. 주인공 이정수가 대놓고 자신을 기아자동차 하도대리점 직원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구조대장의 차를 제외하면 모두 기아차들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