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 3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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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 북한국보 제67호.

인근 고분군 중에서 무덤 벽화의 내용, 표현법, 상태 덕분에 가장 유명하다. 357년 고국원왕시기 축조 되어 1949년 발굴, 1958년 첫 보고서가 나온 이래 꾸준히 조사 연구되고 있다. 무덤의 벽화는 초기 형태로 이후의 고구려 고분 벽화 발전사 뿐만 아니라 당시의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연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 구조와 벽화

석실봉토분으로 남쪽으로 뚫린 입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며 안은 돌기둥과 석벽으로 분리된 5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전후로 크게 전실, 후실 구조에 좌우 곁방 있는 구조는 당대 중국묘의 영향을 받은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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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벽화. 서쪽 방에는 묘주로 보이는 인물과 그 부인의 그림이 있으며 그 외 곳곳에 악단, 무용수, 부엌, 마구간, 푸줏간, 수레, 가마 등등 당시 생활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당시 신하, 군대 등을 묘사한 출행도도 있는데 최근 디지털 복원되어 상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됐다.

3 묘주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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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를 그린 벽화. 얇은 흰색 관, 백라관을 쓰고 있다. 상당한 수준의 무덤이다보니 당연히 묘주의 정체에 대해서도 많은 추측이 있어왔다.

일단 첫번째는 이 정도 규모의 무덤은 왕릉일 것이란데서 평양전투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을 묘주로 보는 설이 있다. 묘주도에서 왕릉의 근거를 찾는데, 그림 속 인물이 흰색 관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당시 고구려왕만이 하얀 비단으로 만든 백라관을 썼다는 중국 기록(수서)과 연결지어 왕이었을 것이다라고 보는 주장이다.

두번째는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온 동수의 묘주설인데, 묵서명에 동수의 이름이 남겨져 있는데서 시작됐다. 일단 이 주장에 따르면, 왕릉설의 백라관 근거는 단순히 하얀 모자로 통한다는 것 이외엔 여러 정황상 확정적 단서가 되기는 어려우며, 더군다나 왕릉으로 보기에 더 큰 문제는 당시 축조된 고구려 왕릉들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장군총같은 집안 지역의 적석총들이었던 반면, 안악 3호분은 도읍지에서 멀리 떨어진 황해도에 위치한 중국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무덤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한국의 기존 학계 및 중국, 일본 학계에서는 동수묘설에 무게가 실리는 상태이다.

하지만 동수의 이름이 쓰인 문제의 묵서명이 묘주 옆이 아니라 문간에 그려진 묘주의 부하로 보이는 관원 그림 머리 위에 쓰여져 있어서, 묘주가 고국원왕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소장파 학자들 및 북한 학계에서는 바로 이 관원이 동수이며, 동수가 고국원왕을 위해 어떤 공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특별히 동수의 이름을 묵서명으로 남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번째는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4 기타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안악 3호분 왕릉설에 따라 백라관을 묘주도를 기반으로 고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