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구려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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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고국원왕(故國原王) / 국강상왕(國岡上王) | |
성 | 고(高) | |
휘 | 사유(斯由) / 쇠(釗) / 소(召) | |
생몰년도 | 음력 | 304년? ~ 371년 10월 23일(67세?) |
재위기간 | 음력 | 331년 2월 ~ 371년 10월 23일 (40년 8개월) |
1 소개
고구려의 제16대 왕. 아버지인 미천왕과는 선명히 대비될 최악의 업적을 남겼다. 당시 고구려와 전선을 펴고 있던 서쪽의 전연과 남쪽의 백제 모두에게 발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군사적인 재능만큼은 확실하게 부족했다.
시호가 여러가지가 전해지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 강상왕(岡上王): 삼국유사
- 국원왕(國原王): 삼국유사
- 고국원왕(故國原王): 삼국사기
- 국강상왕(國岡上王): 삼국사기
- 강상성태왕(岡上聖太王): 모두루 묘지명[1]
전연은 고국원왕 재위기인 338년 고구려의 신성 앞까지 와서 무력시위를 했다. 고구려가 쫄아서 화해하자 돌아가기도 했지만 불과 4년 뒤 전연은 5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다.
먼저 342년 모용황의 전연의 군사에 의해 국내성이 함락당했고[2] 부왕 미천왕의 능도 털림과 동시에 태후 주씨(어머니)와 왕비도 볼모로 끌려갔다(...). 그 뒤 그때 털린 것들을 돌려받기 위해 전연에 스스로 신하를 칭하는둥 굽신거리며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결국 모용준 때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고 주 태후를 비롯한 볼모들도 돌아오는데 성공하지만 다시 태자 구부(후의 소수림왕)가 볼모로 가야했다.
그 이후인 370년, 전연이 전진에게 망하면서 태자는 돌아오게 된다. 과거 전연의 망명객을 전연으로 다시 송환해야했을 만큼 안습했던 치욕을 전연 왕족 일부[3]가 망명했을 때 그대로 묶어 전진으로 보내버리는 등으로 복수를 하면서 치욕을 만회할 국력을 기를 기회를 노리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백제였다.왠지 골목대장한테 얻어맞고 동네바보한테 화풀이하는 거 같다
하지만... 369년 노구를 이끌고 2만의 군대[4]를 긁어모아 백제 북방의 치양성을 공격하다가 백제의 왕 근초고왕에게 역관광을 당한다.[5] 결국 이러한 행태에 분노한 근초고왕이 371년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에 고국원왕은 친히 나가서 전투를 벌이다 화살에 맞아 사망한다. 엄밀히 말해 전사한 것은 아니고 전투가 끝난 후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四十一年 冬十月。百濟王率 兵三萬 來攻平壤城。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 薨。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梟斬釗首』 過辭也。】41년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6]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고 하였으나 지나친 말이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전사한 업적(?) 때문에 국사에서는 4세기 백제의 전성기를 드러내는 하나의 예로서 많이 등장하신다. 국사를 배울 때마다 그의 업적(?)으로 '전사'가 빠지지 않는 등 사망전대 취급이라 안타깝게 여기는 학생도 있다. 선생 중엔 근초고왕을 '원'망하면서 죽어서 고국'원'왕이라는 개드립 암기법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고. 후대의 일이지만 고려 원종이 백승현(白勝賢)의 주청대로 왕 자신의 휘를 고대 주나라의 성군 강왕(康王)의 이름자랑 같게 바꾸려다 하필 그 이름이 제 명에 못 죽은[7] 고국원왕의 휘와 같다는[8] 걸 알고 기겁해서 그냥 옛날 이름 그대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 후대까지도 영원히 고통받는 고국원왕.
안악 3호분이 고국원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나 다른 주장도 있다.
2 삼국사기에서의 안습한 기록
一年春二月 고국원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二年春三月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秋八月 평양성을 증축하다
四年冬十二月 겨울에 눈이 오지 않다
五年春一月 신성을 쌓다
五年秋七月 곡식이 서리의 피해를 입다
六年春三月 동진에 사신을 보내다
九年 전연의 모용황이 신성까지 침략해오다
十年 왕세자를 전연에 사신으로 보내다
十二年春二月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다
十二年秋八月 왕이 거처를 환도성으로 옮기다
十二年冬十月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략할 전략을 논의하다
十二年冬十一月 전연의 모용황이 남도로 침략하다
十三年春二月 전연의 모용황이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다
十三年秋七月 평양 동황성으로 천도하고 동진에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冬十一月 눈이 많이 내리다
十五年冬十月 전연이 침략해 와서 남소성을 빼앗다
十九年 송황을 전연으로 돌려보내다
二十五年春一月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다
二十五年冬十二月 전연이 왕모 주씨를 돌려보내다
三十九年秋九月 치양에서 백제와 싸워 패하다
四十年 전연이 망하다
四十一年冬十月二十三日 고국원왕이 죽다
3 창작물에서
"나의 아들들이, 나의 손주들이... 반드시 백제의 질주를 멈추게 할걸세"예언자?!그리고 백제는... 몇년 뒤에 진짜로 망했어요!
"어찌하여 하늘은 나 태왕 사유를 내고 부여구 그대를 낳았단 말인가!"지못미!
전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의 등장인물. 물론 고구려 왕으로 나온다. 연기자는 불륜 전문 배우 이종원. 다혈질적인 성격에 툭하면 물건을 집어던지는 게 취미고 술잔도 자주 깨먹으신다. 부여구(근초고왕)를 소금장수놈이라고 비하하지만 실상은 자신도 소금장수 아들내미.[9] 사실 미천왕이 소금장수를 했다는 사실을 잘 알만한 사람이, 그것도 아들(!)이 소금장수를 디스한다는 것 자체가 정황상으로 볼때 큰 오류다. 미천왕: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자신감 넘치고 오만하기 그지 없으나 오직 고구려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냉혹한 면도 있다. 과도할 정도로 고압적인 면이 다분하다. 여구의 연인(?) 여화와 정략결혼할 모양으로 결국 결혼해 강제로 범하는(?) 식의 하룻밤을 보낸다. 허나 그 마음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
야심이 불타다 못해 넘쳐 거의 극중 최종보스 포지션이였으며 최근 전개에서는 백제의 내란을 지켜보면서(한편으론 조장하며) 얼마나 더 뜯어낼 것인가 고심 중이였다.
헌데 참 묘한게 이 때 고구려와 고국원왕은 이미 전연의 모용황에게 한번 털려 제1왕비가 볼모로 잡혀 가 있는 처지였으며 다시 말해 암울하던 시절. 헌데 여기에 고구려는 어째 그런 기색이 없으니 어찌보면 대체 뭘 믿고 저리 나대냐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정도...[10] 대신 이상하리만치 대방(지금의 황해도) 영토에 집착한다. 이건 고구려는 서천왕, 백제는 책계왕, 분서왕때 이야기지 말입니다!
결국 평양성 전투에서 훗날 근구수왕이 될 구수(...)가 쏜 화살을[11] 오른쪽 가슴에 맞고 돌아가시는데, 이걸로는 성에 안 찼는지 결국 성벽 아래로 떨어져서이 드라마의 인물들이 다 그렇듯, 성벽 아래로 떨어져도 목은 절대로 안 부러진다. 백제군 진영에 누워서 근초고왕의 훈훈한 간호를 받다가 끝까지 위에서 본 것처럼 백제 언더테이커 광개토대왕을 암시하는 떡밥과 주유 기믹을 양껏 남기고 돌아가셨다.
- ↑ 강상성태왕은 고국원왕이라고 추정만 하고 있다.
- ↑ 5만명의 주력부대를 북쪽 평야지대로 보냈고 남은 병력은 남쪽에서 자신이 지휘했는데, 전연군이 험한 남쪽으로 쳐들어와 통수맞았다...
- ↑ 그냥 왕족도 아니고 섭정 격인 태부(태재) 모용평이었다.
- ↑ 이때 적기를 든 군대만이 쓸만한 군대고 나머지는 잉여인간들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위 '잉여'들은 고구려에 복속된 지방민으로서 열악한 무장에 사기가 떨어지는 동원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 그리고 이 시점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리게 된다.
- ↑ 삼국 시대의 국왕 가운데 삼국사기에 사망 날짜가 제대로 명기된 몇 안 되는 왕이 고국원왕이다. 삼국사기는 왕의 사망을 보통 "어느 왕이 재위 몇 년만인 무슨 해 몇 월에 죽었다"고 개월수까지만 적는 편이고, 이런 식으로 몇월 며칠날에 죽었다고 날짜까지 적어 놓은 경우가 정말 얼마 없다는 걸 감안하면 자국 왕이 전사한 것에 한이 맺혀도 단단히 맺혔던 듯.
- ↑ 고려사절요에 실제로 사용된 표현(不得其死)이다.
- ↑ 주 강왕과 고국원왕은 모두 이름이 쇠(釗)이다.
- ↑ 이 때문에 당초에는 부여구에 대한 동정심도 있었던 듯하다.
- ↑ 드라마에서는 어머니와 제1왕비가 볼모로 잡혀간 사실이 언급되기는 한다.
- ↑ 그런데 고국원왕이 맞고 죽은 흐르는 화살, 즉 유시(流矢)는 원래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을 말한다. 고로 근구수왕에게 맞아 죽었다는 설정은 이순신 장군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총탄 맞고 죽었다거나, 당태종이 양만춘에게 화살 맞고 애꾸가 됐다거나, 해럴드 2세가 윌리엄 1세에게 화살 맞고 죽었다는 설정이나 매한가지. 즉 어디까지나 설정이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일기토 스타일을 좋아하긴 하니 봐줄 수는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