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맥퀸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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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맥퀸의 생전 모습. (2006 F/W 레디 투 웨어 컬렉션 피날레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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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맥퀸의 로고

알렉산더맥퀸
이름리 알렉산더 맥퀸 Lee Alexander McQueen
국적영국
출생 - 사망1969년 3월 17일 ~ 2010년 2월 11일
수상2003년 미국 패션디자이너 협회(CFDA) 올해의 세계디자이너
2001년 올해의 베스트 브리티시 디자이너
경력알렉산더 맥퀸 수석 디자이너
공식사이트alexander mcqueen

네이버캐스트

2 개요

영국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그의 디자이너 브랜드의 이름. 본명은 "Lee Alexander McQueen"이며, 별명은 '패션계의 악동'.
초창기 그의 디자인은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다. '옷에 대한 모독이다 vs 천재적이다'. 결국 패션계는 그의 손을 들어줬지만.

3 생애

택시 기사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맥퀸은 어릴 적부터 학교에 매일 패션 화보집을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고 한다.
그런 맥퀸의 모습을 본 또래 애들은 그를 계집애라고 놀려대기 일수였고, 나중에는 심한 따돌림까지 당했다고.
그후 맥퀸은 학교를 그만두고, 16세에 런던 '새빌로우 (최고급 남성 맞춤복의 성지)'에 위치한 양복점 '앤더슨 & 셰퍼드 (Anderson & Sheppard)'에서 견습생으로 패션계에 입문하게 된다.

브랜드의 시그니처 아이콘은 해골 프린트. 전세계적으로 해골 프린트의 스카프가 대유행 했으며,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짭이 넘쳐났다)

90년대 중후반 런던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초창기에는 기괴하며 날카롭고, 덜 다듬어진 거친 느낌의 의상들을 쏟아내며 영국 언더 패션계의 총아로 주목받았다.
그의 이름을 패션계에 한방에 각인시킨 그 유명한 '범스터 팬츠'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고.

같은 영국 출신의 또다른 천재 '존 갈리아노'와 함께, 패션쇼에 드라마틱한 요소를 많이 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간단히 정리를 해보면,

1997 S/S - La Poupee (모델들이 물로 가득 찬 무대를 걸어나옴)
1997 F/W - It's a Jungle Out There (뮤지컬 '캣츠'의 고양이같은 메이크업을 한 모델들이 불붙은 드럼통과 폐차들 사이를 걸어나옴)
1998 S/S - The Golden Shower (아크릴로 만든 무대 위로 비를 내렸다. 모델들은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걸어나옴)
1998 F/W - Joan (직선 무대 끝에 원형 무대를 설치, 마지막 모델이 원형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무대 주위가 불타오름)
1999 S/S - No.13 (장애인 육상 선수 '에이미 멀린스'가 특제 의족을 차고 오프닝을 장식.
피날레에는 모델 '샬롬 할로우'가 하얀 크리놀린 드레스를 입고 등장, 무대에 설치되어 있던 두대의 로봇이 페인트를 뿌려대는 퍼포먼스로 마무리)
1999 F/W - The Overlook (무대 바닥에 아이스링크를 설치. 피날레에 스케이터들이 맥퀸의 의상을 입고 스케이팅을 하며 무대를 누빔)
2000 S/S - Eye (무대 중앙에 거대한 송곳 조형물들이 설치되고, 그 주변으로 물을 채워 모델들이 걸어나옴.
쇼 후반부에는 모델들이 와이어에 매달려 공중을 날아다님. 맥퀸의 처음이자 마지막 뉴욕 패션위크 참가쇼)
2000 F/W - Eshu (아프리칸 에스닉에 영감을 받은 쇼. 특별한 무대 연출은 없음)
2001 S/S - VOSS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쇼. 강화유리로 된 우리를 만들어 모델들이 그 속을 걸어나옴.
피날레에는 무대 중앙에 설치되어 있던 유리 구조물이 사방으로 산산조각 나며 그 속에 있던 기괴한 가면을 쓴 플러스 사이즈의 모델이 나체로 등장)
2001 F/W - What a Merry-Go-Round (무대에 실제 회전목마를 설치. 맥퀸의 생전 마지막 런던 패션위크 참가쇼)
2002 S/S - Dance of the Twisted Bull (스페인의 투우에서 영감을 받은 쇼. 무대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 특별한 무대 연출은 없음)


1997년부터 2001년까지 프랑스의 패션 하우스인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직을 맡은 바 있다.
이 시기는 프랑스의 럭셔리 그룹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30대 디자이너들의 영입에 열을 올리며 정체된 브랜드들의 리뉴얼에 힘을 쏟던 때로, LVMH가 보유하고 있는 대표 브랜드들, 즉 '루이비통', '크리스티앙 디올', '지방시', '로에베' 등의 수석 디자이너들이 한꺼번에 물갈이되는 대격변의 시기였다.
('루이비통 - 마크 제이콥스', '크리스티앙 디올 - 존 갈리아노', '지방시 - 알렉산더 맥퀸', '로에베 - 나르시소 로드리게즈')

2시즌만을 거치고 크리스티앙 디올로 떠난 '존 갈리아노'의 후임으로 지방시 명가에 합류하게 된 맥퀸은, 지방시에서의 데뷔 무대인 1997 F/W 오트 쿠트르 컬렉션이 '역겹다'는 악평을 들으며 좋지 않은 출발을 보였고, 마지막까지 지방시와 그의 궁합은 좋은 편이 아니였다.
또 '마크 제이콥스'와 '존 갈리아노'의 경우, LVMH측에서 개인 브랜드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맥퀸에게는 그러한 지원이 전무하기도 했고.
결국 맥퀸은 2001년 LVMH에 버금가는 이탈리아의 럭셔리 그룹 PPR에 자신의 브랜드를 매각하기에 이른다.
(PPL이 소유하고 있는 브랜드는 '이브 생 로랑', '발렌시아가', '구찌', '알렉산더 맥퀸', '스텔라 맥카트니', '보테가 베네타' 등이 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지방시에서의 마지막 쇼인 2001 S/S 오트 쿠트르 컬렉션은 취소되고, 극소수의 VVIP만이 초대되어 살롱쇼 형식으로 선보이게 된다.
이 컬렉션은 프레스의 출입이 완전 통제되어, 그 어떤 보도자료도 없는 관계로 지금은 환상의 쇼가 되어버렸다.
컬렉션 테마는 아프리칸 에스닉을 중심으로, 그가 지방시에서 선보인 작품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졌다고.

하지만, 이후 PPR의 '프랑소와 앙리 피노' 회장이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맥퀸은 지방시 시절에 습득한 고급 기술력과 든든한 자본을 바탕으로 브랜드를 성장시키며 승승장구, 패션계를 대표하는 천재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3.1 죽음

2010년 2월 11일, 그의 저택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여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1세.
자살의 이유로는, 마치 친남매와도 같았던 '이사벨라 블로우 ('TATLER'의 前에디터, 스타일리스트이자 명망높은 패션계 인사)'의 자살, 연이은 어머니의 사망 등에 따른 우울증으로 예상하고 있다. .[1]

맥퀸의 사후 브랜드의 향방이 불명확해진 가운데, 결국 13년간 맥퀸의 오른팔이였던 '사라 버튼'이 수석 디자이너직를 맡아 브랜드를 유지시키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2010년 7월, 미완성 중이였던 16벌을 사라 버튼과 디자인팀이 마무리지어 맥퀸의 마지막 컬렉션을 선보였다.

그녀의 컬렉션은 기존의 알렉산더 맥퀸보다 공격적인 면이 줄어들었고, 한층 여성스러우며 부드러워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맥퀸의 전위적임을 페미닌보그체?하게 해석했다고 볼수있다.

브랜드 자체의 인기는 맥퀸 사망 후 열린 2010년 패션쇼가 절정이었으며[2] 그 이후 약진을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절대 망한 것은 아니며, 마니아들에 의해 꾸준한 사랑을 받고있다.

4 콜라보레이션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섹스 피스톨즈, 장 폴 고티에마돈나가 서로에게 영감을 받아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면, 맥퀸은 비요크, 레이디 가가와 함께 하면서 많은 협업을 했다.
비요크의 경우 그녀의 곡 'Alarm Call'의 뮤직 비디오를 맥퀸이 디렉팅 하였고, 그녀의 'Homogenic' 앨범 커버는 맥퀸과 '닉 나이트'의 합작품이다.

레이디 가가는 맥퀸의 2010 S/S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의 피날레를 통해 자신의 신곡 'BAD ROMANCE'를 전세계 최초로 공개하겠다고 밝혔고, 인터넷을 통해 동시 생중계된 이 컬렉션을 보기 위해 (가가팬들이 신곡을 듣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사이트가 다운되기도 했다.

가가의 2집 'Born This Way'에 수록된 'Fashion Of His Love'라는 곡은 맥퀸을 위한 헌정곡이다.
  1.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그의 디자인에는 늘 죽음에 대한 동경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그가 죽음을 희롱하는 사이, 죽음이 그에게 매혹을 느꼈던 모양”이라며 애도했다.
  2. 서술한 레이디가가의 팬까지 몰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