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피스톨즈

영어: Sex Pisto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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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의 사진. 좌측부터 스티브, 시드, 존, 폴.
재결성 후 2008년의 사진. 좌측부터 글렌, 폴, 존, 스티브.한때는 말랐던 로튼도 아저씨가 되니 얼굴살이 찌고 배가 나왔다

1 밴드

1.1 개요

영국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펑크 록 밴드.
지금 시대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희대의 막장짓과 더불어 록의 조류를 바꿔버린 밴드.

유명한 곡으로는 메가데스도 커버한 적이 있는 <Anarchy in the UK>(드럼매니아 초기 버전에 수록), 영국 국가를 패러디한 <God Save the Queen> 등이 있다.

그 밖에도 레드 제플린쓰레기 발언[1]이나 멤버 시드 비셔스의 막장 행보 등으로도 유명하다. 막장짓뿐만 아니라 이들이 낸 정규 앨범 하나가 그 후의 락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놨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등장하기 전 까지는 펑크 록은 그저 "별로 연주능력이 신통치 못한 뮤지션들의 개러지 음악"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등장하고 나서야 펑크록은 대중앞에 정형화된 하나의 음악이자, 록 음악의 근원을 다시 탐색하는 방법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펑크가 존재할 수 있었고, 헤비메탈이 이들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 NWOBHM과 스래쉬 메탈로 진화할 수 있었으며, 주류 록 음악에 대한 반발로 그런지로 대표되는 얼터너티브 록이란 카테고리가 등장한 것을 보면 록의 큰 흐름에서 이들의 앨범을 빼놓을 수는 없다.

공식 사이트

여담으로 섹스 피스톨즈의 Sex라는 단어 때문에 한국에서는 밴드명을 안전핀(...)이라고 순화하여 번역한 적도 있었다.

1.2 약력

1.2.1 결성

기원은 1973년에 안티패션샵을 경영하던 맬컴 매클래런이 자기 가게 단골들이자 친구들이었던 폴 쿡과 스티브 존스의 밴드 매니저를 맡아주기로 이야기가 오가면서 시작된다. 이 전까지는 월리 나이팅게일과 글렌 매틀록이 각각 보컬과 베이스 담당으로 참가했고, 이듬해 스왱커스(Swanker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다만 이 때는 창작곡이 거의 없었고 주로 글램 아트록 밴드인 록시 뮤직의 곡을 연주하는 커버 밴드 정도였다고. 게다가 정식 공연도 1975년에 딱 한 번만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 뒤로 미국에서 뉴욕 돌즈 매니저로 잠시 있다가 귀국한 맬컴이 밴드 매니저로 공식 영입됐는데, 보컬이었던 나이팅게일과 다른 멤버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서 새 보컬리스트를 찾게 됐다.[2] 이 때 맬컴의 동료 버니 로즈가 (런던) 첼시의 킹스 로드에서 'I hate Pink Floyd' 티셔츠를 입고 있는 쟈니 로튼(본명 : 존 라이든)을 보고 소개시켜 줬다. 쟈니는 이전부터 맬컴의 가게에서 옷을 고르곤 했기 때문에, 쌩판 모르던 인물은 아니었던 듯.

그래서 가게 한 구석에서 보컬 오디션이 열렸는데, 쟈니는 가게에 있던 주크박스를 들여다보더니 앨리스 쿠퍼의 Eighteen[3]을 틀어놓고는 제멋대로 부르면서 막춤을 췄다. 맬컴은 쟈니의 똘끼에 감탄했는지 그 자리에서 오케이 했지만, 쟈니 이전에 벌써 자신의 밴드 이미지를 만들던 스티브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쟈니와 맬컴 앞에서 "저 빌어먹을 개자식이랑은 절대 안해!"라고 했다고...[4] 밴드 이름도 이 시기에 정해졌는데, 맬컴 매클래런이 운영하던 옷가게 이름인 'Sex'(...)와 모든것에 반항하는 의미로 'Pistol'을 붙여 맬컴이 작명했다.

첫 공연은 1975년 11월부터 시작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돼지 멱따는 보컬에 아무렇게나 갈겨대는 기타 등 존재 자체가 민폐(…)로 여겨져 클럽이나 공연장에서 쫓겨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관객들을 조롱하고[5] 굉장히 최악의 사운드를 뽑아내는 등, 당시에 이색적이지만 별로 좋지 않은 밴드로 유명해진다. 병신같지만 멋있어. 심지어 한 공연에서는 무대 앞 첫 줄에서 밴드의 친구[6]가 싸움에 휘말리자, 이를 돕기위해 패싸움에 뛰어들면서 대서특필되는 사건도 터진다.[7]

하지만 쟈니의 신랄한 가사가 붙은 창작곡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음악 외적이던 그 자체이건 막장 행보가 계속되면서 펑크라는 것에 점점 가까워져 갔다. 1976년 3월에 런던의 100 클럽에서 공식 데뷰했는데, 이 때도 제대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몇 달 되지 않아 펑크 록 자체가 새로운 장르로 사람들에게 인식 되면서, 가장 과격하고 가장 반사회적이던 이들의 행보가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알려진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전설적인 100클럽 펑크 스페셜 공연에 출연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8] 같은 해 10월 메이저 레이블인 EMI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이 때 나온 첫 싱글이 'Anarchy in the UK'.

1.2.2 빌 그런디 쇼에서의 스캔들

1976년 12월에는 '빌 그런디 쇼'[9]라는 텔레비전 토크쇼에 출연했는데, 여기서 영국 텔레비전 방송 역사상 처음으로 'Fuck'이라는 단어를 써서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런디 쇼가 하필 황금시간대에 방송되는 방송이었던 터라, 프로그램은 몇 주간 방송 금지를 먹고 섹피도 출연 금지 조치를 받았다.

다만 이 에피소드에도 다소 간의 비화가 있는데, 이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취소되는 바람에 '대신 너희들이 방송 뛰어라.'는 식으로 내던져지듯 섭외되어 멤버들 모두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특히 빡돌아버린 스티브가 을 진탕 마시고 녹화에 들어갔고, MC인 그런디가 은근히 섹피를 까는 낌새를 보이자 바로 청국장을 다섯 시간 동안 우려낸 듯한 구수한 퍼레이드를 선사해 버렸다. 게다가 생방송이었기 때문에 검열삭제를 못하고 그대로 전파를 타고 영국 전역에 방송되었으며, 방송사에 항의 전화가 빗발치게 날아왔다.[10]

논쟁이 시작됐던 인터뷰는 12월 1일 수요일, Thames TV 시사 프로그램 Today에서 진행되었다. 실제 인터뷰는 빌 그런디의 소개와 44초 정도의 영상이 방영된 것을 제외하고 1분 40초 가량이었다.
녹화는 그런디의 소개 몇 초 후에 시작되었고, 스튜디오에서는 그와 밴드 멤버 네명이 마주 보고 있었다. 피스톨즈(The Pistols, 섹스 피스톨즈를 말함) 뒤에는 친구들 한 무리가 서 있었다. 아래 내용은 당시 있었던 대화 내용이다.

Grundy(빌 그런디) : …목에 체인을 감구요. 겨우 그게 다죠, 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불량배들(fellas)일 뿐이죠? 펑크 로커라고 합니다. 새 유행이라고 하더군요. 영웅이라고도 합니다. 깔끔한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는 아니구요. ㅡ 보면 아시겠지만, 저만큼 취해 있군요. ㅡ 그들에 비하면 깔끔하죠. 섹스 피스톨즈라는 그룹입니다.

BG : 제가 듣기론 음반사로부터 4만 파운드를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그건 좀…
음… 반-물질주의적 인생관에 조금 어긋나지 않나요?
글렌 : 아뇨. 많을 수록 좋죠.
BG : 정말입니까?
글렌 : 그럼요.
BG : 음, 그럼 더 얘기해 주시죠.
스티브 : 존나 써댔죠. 그지?
BG : 모르겠군요. 그렇습니까?
글렌 : 네. 다 썼어요.
BG : 정말입니까?
글렌 : 다 마셔버렸죠.
BG : 정말입니까? 하느님 맙소사! 자, 한가지 물어보겠습니다…
글렌 : 뭐죠?
BG : …정말 진지하게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절 웃기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글렌 : 아뇨. 다 썼다니까요. 없어요.
BG : 정말요?
글렌 : 네.
BG : 아뇨, 제 말은 여러분들이 하고 계시는 음악 말입니다.
글렌 : 아 그거요.
BG : 진지하게 (음악을) 하시는 겁니까?
글렌 : 음...
BG :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 브람스 모두…
쟈니 로튼 : 그 분들은 저희들의 영웅이시죠, 그치?
BG : 정말요? 뭐… 뭐라구요?
쟈니 : "대단하신" 분들이라구요.
BG : 그렇습니까?
쟈니 : 그럼요- 영감을 많이 주셨죠.존나 꼴리죠!
스티브 : 근데 그사람들은 죽었죠!
BG : 글쎄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생각하세요?
쟈니 : (작게) 그거야 그 사람들 개소리(shit)고.
BG : 그게 뭐라구요?
쟈니 : 아뇨. 나쁜 말입니다. 다음 질문요.
BG : 아니 아니, 나쁜 말 뭐라구요?
쟈니 : shit이요.
BG : 정말입니까? 이런 세상에, 절 죽도록 당황시키시는군요.
쟈니 : 아, 그래요, 지그프리드…
BG : (섹스 피스톨즈 뒤쪽에 서 있던 수지[11]와 친구들을 보며) 뒤에 계신 여성분들은 어떻습니까?
글렌 : 저 사람 니 아버지 같다, 아님 할아버지나.
BG : …걱정되시나요, 아니면 즐기고 계시나요?
수지 : 즐기고 있어요.
BG : 그러십니까?
수지 : 네.
BG : 네, 그럴 줄 알았죠.
수지 : 늘 만나뵙고 싶었어요.
BG : 그렇습니까?
수지 : 네.
BG : 끝나고 보도록 하죠, 그럴까요?
(웃음)
스티브 : 이 더러운 새끼, 이 변태 영감탱이야. (You dirty sod, you dirty old man.)[12]

BG : 아, 계속 해요 감독님, 계속 해요. (잠시 멈춤) 계속 하시죠. 5초 남았으니 막말 계속 해 보시죠.(Well keep going chief, keep going. Go on. You've got another five seconds. Say something outrageous.)
스티브 : 이 더러운 개새끼야(You dirty bastard).

BG : 계속 해보시죠.(Go on, again.)
스티브 : 이 더러운 씨발놈아(You dirty fucker).

BG : 참 재치있는 자식일세.(What a clever boy)
스티브 : 이런 씨발 쓰레기같은 새끼(What a fucking rotter).

풀 영상

방송 사건 이후 섹피는 범죄 집단과 마찬가지로 취급되었고, 잡혀 있던 공연 일정도 대부분 취소되고 말았다.[13] 사실 방송 직후에 섹스 피스톨즈의 전국 투어인 "Anarchy in the UK tour"가 잡혀있었는데, 좋든 싫든 이 투어에 영향이 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맬컴 매클래런은 "투어 취소 사태는 내가 유도한 면이 있다. 그래야 더 노이즈 마케팅이 되기 때문"이라고 훗날 술회한 바가 있다. 그런데 이 양반 허세가 심해서 백퍼센트 믿을수는 없다

1.2.3 전성기 - 시드 비셔스의 합류

하지만 오히려 EMI에 낸 싱글은 날개돋힌 듯 팔렸고, 1977년 1월에 계약이 취소될 때까지 밴드의 자금줄이 되었다. 치솟는 인기와 반비례하게 멤버들 간의 반목은 여전했는데, 특히 글렌 매틀록의 경우 쟈니가 쓴 가사가 너무 반사회적이고 과격하다며 태클을 걸다가 2월에 짤렸다.[14] 후임은 초기의 수지 앤 더 밴시즈와 'Flowers of Romance'라는 단명한 밴드에서 드럼을 치던 쟈니의 친구 시드 비셔스로 결정되었다.[15] 아무튼, 원래 섹스 피스톨즈의 초기 곡들을 대부분 작곡했고 음악적인 기둥이었던 글렌 매틀록의 탈퇴로 밴드는 중요한 작곡가 한명을 잃는다.

3월에는 A&M과 두 번째로 전속 계약을 체결했는데, 같은 레이블의 뮤지션들이 '저런 또라이들 받아들이려면 우리를 잘라라.'고 징징거리는 바람에 6일 만에 쫓겨났다.[16] 하지만 그 사이 'God Save the Queen'이 담긴 밴드의 두 번째 싱글이 발매되어 며칠 사이에 25000장이 팔려나갔다. 5월에 신생 음반사였던 버진 레코드와 세 번째 계약을 맺었는데, 이 계약이 밴드가 맺은 음반 계약 중 마지막이자 가장 긴 계약이 되었다. 여기서 'God Save the Queen'의 두 번째 싱글과 'Pretty Vacant'의 싱글이 발매되었고, 각각 음반판매 순위 2위와 6위를 차지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공연이나 이벤트 참가에는 여전히 심한 제약이 뒤따랐는데, 7월 중순에 템스 강에서 열린 야외 파티에서 'Anarchy' 등을 연주하다가 경찰에 진압당하기도 했고[17] 극우 왕당파 폭력배들이 멤버들을 습격해 상해를 입히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폴 쿡은 지하철 역에서 테디 보이 갱들에게 다구리를 당한적이 있고,[18] 쟈니 로튼은 건물 주차장에서 극우파에게 두들겨 맞아서 아예 왼손에 칼빵을 맞는 바람에 아직도 왼손을 쓰는데 약간 불편하다고 한다. 결국 섹피 이름으로 예정되었던 공연들이 거의 모두 취소되자 'The SPOTS(Sex Pistols on Tour Secretly)'라는 이름으로 즉석에서 지은 가명을 써서 몰래 출연하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10월에는 밴드의 네 번째 싱글인 'Holidays in the Sun'과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 앨범인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이 나왔고, 각각 싱글 순위 8위와 앨범 순위 1위의 판매량을 기록했다.[19]

1.2.4 해체

그러나 인기가 많아진 섹스 피스톨스는 여러 공연을 연속적으로 벌였는데, 이 당시 매니저였던 맬컴은 멤버들을 혹사시키는 강행군을 감행한다. 점점 멤버들과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1978년 1월 애틀랜타에서 첫 미국 투어를 개최했는데, 이 때 밴드는 그냥 막장이었고, 특히 시드가 마약 때문에 벌이던 병크와 영국 황색언론 기자들의 폭동 조장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공연을 하기도 벅찼다고 한다. 샌 안토니오에서는 쟈니 로튼에게 햄버거가 날아들었고, 스티브 존스는 날아오는 맥주캔을 피해 기타를 쳐야만 했다. 결국 빡친 시드 비셔스가 관중 한명을 베이스로 팼다. # 댈러스에서는 시드 비셔스가 관객에게 맞아서 코피를 흘리면서 공연을 해야 했고, 관객들은 쟈니 로튼의 티셔츠를 찢었다. 섹스 피스톨즈가 미국의 펑크 밴드들과 공연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공연 한번뿐이었다.

투어 스케줄이 저렇게 잡힌 이유는 당시 섹스 피스톨즈의 전과기록을 문제로 미국 비자가 안 나와서였다고 한다. 미국 입국도 주영 미국 대사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비자를 얻어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애틀랜타 전에 시카고를 비롯한 몇개의 공연이 더 잡혀있었는데, 취소됐다.

결국 1월 14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공연 직후 빡친 쟈니가 뉴욕으로 가버리면서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말콤은 새 보컬로 열차 강도짓을 벌이고 브라질에 숨어 지내던 로니 빅스를 영입하는 만행을 벌였고, 소속사였던 버진 레코드도 섹피의 싱글을 포함한 모든 후속 앨범 발매를 거부했다.

조니와 시드는 각각 PiL(Public image Limited)과 솔로 활동을 따로 벌이기 시작했지만, 시드의 경우 여친이었던 낸시의 사망과 살해 혐의 등이 겹쳐 체포되는 등의 악재[20]가 겹친 끝에 1979년 마약 과용으로 죽고 말았다.[21] 이후 조니와 스티브, 폴은 밴드를 막장으로 이끈 주범으로 매니저 말콤을 지목했고, 수 년간에 걸친 지루한 소송과 맞고소 끝에 1986년 승소해 그 동안 밀린 계약금과 앨범 로열티 등을 고르게 배분받을 수 있게 되었다.

1.2.5 재결합

이렇게 꽤 찌질하고 혼란스럽게 밴드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가…싶었지만, 쟈니가 1994년에 PiL을 해체한 뒤 1996년 섹피 결성 2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재결성을 선언하면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다음은 1996년 3월 16일 런던 100클럽[22]에서의 인터뷰 중 일부다.전문은 여기에

Q : (섹스 피스톨즈의 재결합이)폐기처분 되기 직전의 마차를 끄는 말에 불과하다는 맬컴 매클래런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존 라이든(이하 A로 통일) : 그 녀석이 아직도 우리 홍보를 해주니 정말 고맙군.
Q : 당신들은 서로를 여전히 증오하는가?
A : 그래, 복수심이 남아있지. 하지만 우리는 너희들의 돈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어.
Q : 얼마나 벌려고?
폴 쿡 : 시끄럽게 만들지 마. 올해 끝나고 말해줄테니까.
Q : 그린 데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A : 초딩같이 버벅이는 놈들이지.
Q : 왜 이리 (재결합에) 오래 걸렸나?
A : 음, 오랫동안 도망치려고 했어. 매니저와 다른 멤버 놈들에 의해 끔찍하게 잘못되어버린 결말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거든. 돈이 전부가 아니고, 끝이 아니야. 난 항상 누군가가 그것이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 꽤나 화가 나거든. 난 그걸 건드리고 싶다.
Q : 예전에 섹스 피스톨스의 재결합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은 "시드를 무덤에서 파내야 되냐?"라고 되물었다. 그 때보다 더 나은 공연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나?
A : 생각해보긴 했는데, 시드의 재는 공항에 이미 뿌려졌잖아.(시드 비셔스 항목 참조) 염병할 놈의 청소기가 필요하겠군!뭔가 시드를 두 번 죽이는 답변이다. 근데 그런 짓 하는 사람 그것도 영국인으로 있잖아.
Q : 글렌, 책 쓰는 걸 그만 둔 뒤로 무얼 하면서 살았는가?
글렌 : 많은 걸 했지. 존, 고마워. 이번달에 크리에이션에서 앨범이 하나 나와. "Who's he think he is when he's at home"이라고.
Q : Oasis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A : 그냥 팝 밴드잖아. 니도 알면서.
글렌 : 그 녀석들에 대한 발언을 원하지 마. 그 녀석들은 원채 거칠어서 우릴 칠지도 몰라.[23]
Q : 더 클래시가 따라서 재결합을 할 것 같나?
A : 난 걔네 잘 몰라.
Q : 당신들은 스타디움 록 밴드(말 그대로 대형 공연을 하는 유명한 메이저 밴드를 일컫는다)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이제 당신들이 그러한 밴드가 되었다.
A : 아닌데? 어떤 스타디움을 말하는거야? 니가 스타디움이라 말했는데, 니가 거짓말쟁이구만? 핀스버리 파크는 스타디움이 아니고, 필드야.
Q : 콘서트가 만약 잘 되면 계속 활동할 생각인가?
A : 아마 안될거고, 지속되지 않을 거야. ...(중략)... 나는 핀스버리 파크에 비가 내려서 너희들의 휠체어가 진흙탕에 붙어버렸음 좋겠다.
Q : 시드의 어머니가 섹스 피스톨스의 수입에 어느 정도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A : 우린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돌보고 있어.
Q : MTV Unplugged에 출연할 것인가?
A : 우리가 구세군처럼 보이냐? (Top of the Pops - 영국 BBC에서 방영하는 음악 프로그램 - 에 출연할 생각은 없냐 묻자) 아냐, 그럴 생각 절대로 없어. 그런 쇼들은 너무 구려. 그런 X같은 질문은 좀 하지 말아.
Q : 번 돈은 어디에 쓸 것인가?
스티브 : 창녀에. 나는 그럴 거야.
[24]

재결성의 이유가 " 때문이다"[25]였기 때문에 밴드 부활 선언 직후 그 때까지 음악 활동을 하던 주변 뮤지션들은 충격을 받아 은퇴하거나[26] 밴드를 맹비난하는 등[27] 갖가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온갖 여론에도 불구하고 밴드는 잘 돌아가고 있고, 2011년까지도 꾸준히 공연을 하였다.돈은 진짜 미친듯이 쌓였을 것이다

멤버는 시드 영입 전과 마찬가지로 쟈니, 스티브, 글렌, 폴 네 명이었고, 새 노래 없이 예전 곡들만 갖고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 직후 'Filthy Lucre Live'라는 라이브 앨범이 나왔다.

2006년 유니버설 뮤직 그룹에 전작 재발매권을 넘겼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2012년 9월 24일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가 리마스터 재발매되었다. 판권이 정리되면서 [28] 오리지널 마스터에 접근이 가능해진데다 프로듀서인 크리스 토마스가 리마스터링을 검수해서 소리가 상당히 좋아졌다고.

1.3 평가

여러 조사에서 나오는 록 뮤직의 명반들과는 달리, 이들의 앨범을 들어보면 '뭐야 이건' 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형편 없는 연주실력을 보여준다.[29] 하지만 그것 만이 전부는 물론 아닌데, 이들이 쓴 가사, 단순한 3코드 배킹 연주,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하라!'라는 대중성, 저항 정신 등이 시공을 초월하여 충격과 공포를 던져주는 음악을 만들었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이런 결점들을 벌충하고도 남는다. 물론 이들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아니지만, 파급 효과로 따지면 섹피를 능가할 밴드는 없다는 것이 중평.[30][31]

쟈니는 '음악을 하고 싶었던게 아니라 소음을 내고 혼란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히면서, 다른 멤버들의 음악성 때문에 결국 타협과 절충을 거친 앨범이 나왔다면서 다소 부정과 긍정이 섞인 입장 표명을 했다. 그렇다고 쟈니의 뜻만이 강요되었다면 이런 결과물이 나왔을 지도 의문.[32]

가끔씩 다른 밴드의 곡을 커버하기도 했는데 정말 제멋대로 부른다. 그 외에도 멤버들이 호크윈드의 골수팬이어서 호크윈드의 곡들을 커버한 적도 있다고.

쟈니의 자조적인 회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펑크록 혹은 그 상위 개념인 인디록 밴드들에게는 선구자로 여겨진다. 90년대 중반 홍대 주변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밴드들도 섹피와 너바나 등의 고전적인 펑크/얼터너티브 곡들을 카피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들 중 노브레인의 경우 아예 섹피의 정규 앨범 수록곡을 몽땅 커버한 트리뷰트 앨범인 'NEVERMIND THE SEX PISTOLS-HERE'S THE No BRAin'[33]을 내놓기까지 했다. 쟈니가 이걸 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으려나.

그리고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함께 펑크 룩이란 패션사조를 전세계급으로 전파한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만화처럼 번개맞은듯한 삐죽솟은 스파이키 헤어,낡은부츠,장화에 클립과 옷핀을 옷에 꽃은채 다녔고,찢어진 청바지,티셔츠,자켓,스웨터등 온갖 옷에 스크래치를 내고 찢은옷과 다양하고 화려한 가죽점퍼를 입고다녔다..그것도 무려70년대에[34][35]

1.4 멤버

섹스 피스톨즈의 핵심 멤버들은 모두 다섯 명이다. 물론 쟈니 영입 직후 스티브 뉴와 닉 켄트가 잠깐 멤버가 된 적은 있었지만, 얼마 안되어 탈퇴하는 바람에 듣보잡화.

섹스 피스톨즈의 보컬이자 리더.
  • 글렌 매틀록 (Glen Matlock)
섹피의 첫 번째 베이시스트. 쟈니와 동갑인 런던내기로,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를 나와 멤버들 중 가장 고학력자에 속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이 혐오한다는 비틀즈를 좋아한다는 의심을 받았고, 음악 성향도 1960년대의 '기교만 앞서고 유들유들한' 팝 록 쪽에 가까워서 특히 쟈니와 마찰을 많이 빚었다. 결국 1977년 초에 밴드에서 잘렸다, 하지만 멜로디 메이킹 재능이나 곡 작업 자체에는 섹스 피스톨즈 멤버들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심지어 섹스 피스톨즈 곡 중 명곡으로 꼽히는 <Anarchy in the U.K.>, <God Save the Queen> 같은 곡들은 모두 글렌 매틀록의 작품이다.

밴드에서 잘린 이후에도 계속 베이시스트로 음악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96년에 다시 쟈니를 비롯한 예전 멤버들과 함께 2기 섹피를 결성했고, 지금도 멤버로 남아 있다. 물론 재결성 기자회견에서도 쟈니가 '우리는 아직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는 식의 말을 한 것으로 봐서는, 아직까지 앙금이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듯. 어쨌든 시드가 재림하지 않는 이상 대체할 베이시스트가 없고, 성질도 나이들면서 죽었는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파이터즈 히스토리에 등장하는 짝퉁 대기군인매트록 제이드는 이 사람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 시드 비셔스 (Sid Vicious, 본명: 사이먼 리치 Simon Ritchie 또는 존 비벌리 John Beverley)
섹스 피스톨즈의 두 번째 베이시스트...이긴 한데 현실은 얼굴마담.
  • 스티브 존스 (Steve Jones)
1955년생인 섹피의 기타리스트로, 드러머 폴 쿡과는 어렸을때부터 친구 사이. 섹피의 전신인 스왱커즈에서는 기타 겸 보컬이었다. 집안이 워낙 막장이라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15세인가 그 쯤 까막눈에서 벗어났다.(...) 해산 후에도 꾸준히 활동하다가 섹피 재결성에도 참여하는 등 여전한 음악인 인생을 살고 있다.

전형적인 뒷골목 불량아 출신답게 성질머리며 말투도 거칠었고, 당시 불량아들이 대부분 그랬듯 훌리건 경력도 있으며, 특히 도벽이 엄청나게 심했다고 한다. 심지어 초기에 사용하던 악기며 앰프 등등은 거의 악기상을 털어서 마련한 것이었고 심지어 1973년 데이빗 보위의 지기 스타더스트 고별공연의 악기를 몽땅 털어서 나온 일화는 유명하다(!!).[36] 쟈니의 말에 의하면 '그놈은 빌어먹을 신발 끈도 훔칠거야'래나. 참고로 유일한 섹피의 정규 앨범 제목도, 쟈니의 회상에 의하면 스티브가 무심코 던진 욕설에 삘꽂혀서 지은 거라고 한다. 덕분에 처음 나온 LP 커버에는 점잖게는 고환, 상스럽게는 부랄을 뜻하는 'BOLLOCKS'의 B가 스티킹돼서 나오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역시 4명의 막장이 모였어도 각자 재능이 융화된 것이 불세출의 밴드 섹스 피스톨즈인 만큼, 그에게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바로 칼박이었던 것이다. 아직 디지털 레코딩이란 단어도 없던 시절, 스티브 존스가 기타를 친 것을 녹음해서 들어보면 언제나 일정한 시간으로 박자가 딱딱 끊겼다고 하니 흠좀무. 쉽게 말해 1분 30초부터 35초까지 스트로크가 10번 들어가는데 1초단위로 녹음 테이프를 잘라보면 정확히 스트로크가 두 번씩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ㅎㄷㄷ. 이건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못 받은 사람치고는 기가 막힌 재능이다.

2011년 갱신된 롤링 스톤 선정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인에서 97위에 올랐다.참고로 바로 밑이 러쉬의 알렉스 라이프슨. 한국은 테크닉적인 면에 치중하느라 록 음악 본연의 인기에는 다소 소홀한 감이 있는데, 라몬즈의 조니 라몬이 항상 위대한 기타리스트에 랭크되는걸 보면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 폴 쿡 (Paul Cook)
1956년생인 섹피의 드러머. 위에도 적혀있듯이 스티브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 사이였고, 양조장에서 일하며 같이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가기도 했다. 스티브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성깔이 있었는지, 술에 취해서는 계속해서 짜증나게 굴던(...) 쟈니를 물리적으로 개바른 적도 있다.

글렌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맨땅에서 시작한 터라 별다른 기교는 없지만, 까딱하면 쟈니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의 똘끼로 엉망진창이 되기 십상이었던 연주를 견고한 드럼 비트로 다스리는 재주가 출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섹피의 정규 앨범이며 싱글을 들어보면 요즘처럼 신나게 달려대는 펑크 넘버들보다는 약간 느린 듯한 템포를 지니고 있다.

스티브와 마찬가지로 해산 후에도 계속해서 음악을 했으며, 섹피 재결성에도 당연히 참가. 현재 그의 딸인 홀리 쿡도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티브 존스와 쟈니 로튼이 LA에 살고있는데 반해 폴 쿡은 아직도 그의 고향인 런던의 셰퍼드스 부시에 살고 있다고 한다.

1.5 그 외의 인물들

  • 맬컴 매클래런 (Malcolm Mclaren)
섹스 피스톨즈를 존재하게 한 매니저. 세인트 마틴 아트 스쿨을 졸업한 미술학도였으며, 1960년대 후반 상황주의 운동의 영국 지부인 King Mob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 초반부터 옷가게를 하면서 기기묘묘한 옷을 팔기 시작했다. 1974년경에는 영국에 온 미국의 프로토 펑크 밴드 뉴욕 돌스의 매니저를 맡기도 했다.[37]
쟈니 로튼의 말마따나 섹스 피스톨즈 초기에는 탁월한 일처리와 심도있는 전략으로 멤버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는 자신의 이기심을 다 드러내고 밴드에게 무리한 일정을 강요하여 멤버들을 지치게 만드는 동시에, 멤버들을 이간질 시키는 등 막장행보를 이어간다. 영화 그레이트 로큰롤 스윈들을 보면 알겠지만, 섹스 피스톨즈 전기영화랍시고 나온 영화 주제에 맬컴 매클래런이 주인공이다!(…). 섹피 해체 후에는 자기가 직접 음반 활동을 벌였는데, 1982년에는 "Duck Rock"이라는 힙합 앨범을 발표한 바 있다.[38]
2010년 4월 8일 으로 사망했다.
  • 비비언 웨스트우드 (Vivien Westwood)

펑크 패션의 대모라고 평가받는 인물로 현재도 자신의 이름을 딴 옷가계를 운영하며 패션 디자이너로써 활동하고 있다. 맬컴 매클래런과 함게 옷가게를 운영하면서 펑크 패션의 확립과 확산에 이바지했다. 원래는 초등학교 영어교사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패션 디자이너로 전업을 한다. 이 당시 맬컴과 연인관계였다. 펑크 패션의 기본처럼 여겨지는 가죽재킷 + 체크무늬 본디지 팬츠같은 것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디자인에서 출발한 것. 사실 당시 영국 펑크를 제외하면 펑크패션은 그냥 거지 패션이었다. 짧은머리에 간단한 티셔츠에 청바지정도.

  • 제이미 리드 (Jamie Reid)
섹스 피스톨즈의 디자이너. 그 유명한 "괴문서 로고"를 비롯해서 섹스 피스톨즈의 앨범 쟈켓, 로고 등 많은것을 디자인했다.

1.6 관련 영화

섹스 피스톨즈에 관한 영화는 두 편이 있는데, 하나는 1979년에 개봉한 더 그레이트 로큰롤 스윈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1996년 개봉한 The Filth and The Fury이다.

  • 더 그레이트 로큰롤 스윈들
섹스 피스톨즈 해산 후 제작된 영화. 원래 기획 당시에는 이 시기에 섹스 피스톨즈가 공중분해 될거라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기 대본이나 내용은 섹스 피스톨즈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쓰여져 있었다. 애초에 제목도 "Who killed bambi?"였다. 그러나 영화가 아직 기획단계에 있을때 섹스 피스톨즈가 공중분해 되어버렸고, 밴드가 막장테크를 탄 만큼 영화 또한 산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영화 내용도 상당히 엉망진창이고 오히려 시드 비셔스와 맬컴 매클래런이 주연처럼 나온다(...). 이 영화에서 쟈니 로튼은 엄청나게 소외되어있다. 영화 내용을 요약하자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섹스 피스톨즈의 이야기는 다 매니저인 맬컴님께서 꾸며낸 위대한 로큰롤 사기극이라는 것. 물론 섹스 피스톨즈가 철저한 계획 하에 만들어진 밴드이고 맬컴 매클래런의 전략이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평가절하가 너무 심해서 편하게만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로 시드 비셔스의 신화가 생겨나게 된다 이 영화는 줄리언 템플이 감독했다.
  • The Filth and The Fury
섹스 피스톨즈 재결성 후, 맬컴 매클래런을 제외한 오리지널 멤버들이 담담하게 당시를 회상하는 방식의 다큐멘터리. 섹스 피스톨즈 멤버들의 인터뷰는 철저히 조명을 꺼놓은 상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늙은 모습은 철저히 나오지 않는다. 당시의 일들을 당시의 시대에서 재조명하기 위한 감독의 연출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 역시 줄리언 템플이 감독했다. 오리지널 멤버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해체 당시에는 섹스 피스톨즈가 너무 과대평가 되어있어서 그것을 깎아내릴 필요가 있었는데, 더 그레이트 로큰롤 스윈들같은 영화가 필요했는데, 그로부터 15년동안 너무 많은 가짜정보와 억측이 난무해서 이제는 진솔하게 이야기 할 필요가 생겼다"라고 한다. 결국 일종의 역사 바로잡기를 위해 만든 진솔한 영화.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멤버들의 개인적인 이야기, 소박했던 초기의 상황, 밴드가 왜 막장으로 흘러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심지어 쟈니 로튼은 시드 비셔스에 관해 이야기 하다가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한다(!!!!).

1.7 에피소드

  • 글렌 후임으로 들어온 베이시스트 시드 비셔스의 경우 너무 연주 실력이 형편없어서[39], 정규 앨범에는 그의 연주가 녹음되지 않았을 뿐더러 앰프에 잭도 꽂지 않은 상태로 공연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베이스 연주는 스티브가 대신 맡아 녹음했다고.[40]
  • 재결성 후에도 70년대 당시의 포스에는 못미치지만, 여전한 반골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몇년 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을 당당히 거부한다며 자필로 휘갈겨 쓴 거부문을 전달해, 전미 음악계에 멋지게 똥칠을 했다. 대충 내용을 요약하면, "록큰롤 명예의 전당은 오줌 자국이다."라고 비하하고 있다고. 기분 나빠하지 말고 '저 영감들 여전히 건강하네'라고 받아들이면 편하다.

2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등장하는 스탠드

섹스 피스톨즈(죠죠의 기묘한 모험).

3 동명의 만화

고토부키 타라코 작 BL 중심 만화. 자세한 건 섹스 피스톨즈(만화) 참조.
  1. 존이 훗날에 레드제플린의 후기 음악을 좋아한다고 인터뷰한 걸로 봐선 노이즈 마케팅에 가깝지만…. 지미 페이지도 섹피에 대해 극찬을 한 적이 있다. 가사 빼고.
  2. 섹스 피스톨즈의 다큐멘터리 The Filth and The Fury를 보면 맬컴이 "저놈은 멋이 없으니 잘라라"라고 해서 잘랐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3. 혹은 School's Out이라는 설도 있다.
  4. 스티브와 쟈니는 정말 상극이었지만, 서로를 미친듯이 까면서도 나름 잘 지낸다…. 로튼이라는 애정아닌 애정섞인 별명도 스티브가 지어준것이라니….
  5. "박수 쳐 이 병신들아!"라거나 "아무도 놀 줄 모르는군." 같은 말은 예사로 내뱉었다….
  6. 비비언 웨스트우드였다!
  7. 이때 이 일을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에 목격하고 기고한 사람이 바로 펫 샵 보이즈의 닐 테넌트이다! 링크
  8.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 맬컴 매클래런과 프로모터 론 와츠의 주도로 이틀간 열린 페스티벌. 런던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100 클럽"에서 열린 페스티벌인데, 당시 떠오르는 장르이던 펑크록을 전국적으로 알린 기념비적인 페스티벌이다. 참고로 당시 이 이벤트의 전파와 확산에는 캐럴라인 쿤같은 저널리스트들의 도움도 컸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아직 레코드 회사들과 계약도 되지 않은 밴드들로 라인업이 채워졌으며, 당시 관객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훗날 대부분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더 포그스의 셰인 맥고운, 더 슬리츠의 비브 알버틴, 애드버츠의 게이 애드버츠와 티브이 스미스 등등).
  9. 빌 그런디는 1923년생으로, 1993년에 사망했다. 살아 있었으면 90대 노인. 당시 이미 50대였다.
  10. 여기서 확인해볼 수 있다. 영상은 유튜브에 많다.
  11. 훗날 영국의 전설적인 펑크/고스 밴드가 되는 수지 앤 더 밴시즈의 보컬
  12. 후에 스티브는 빌 그런디가 술마시고 수지에게 찝쩍거리는 모습이 보기 역겨워서 그런 욕을 했다고 했다.근데 스티브도 여자 엄청 밝히잖아
  13. 여기에 빌 그런디는 2주일 출연 정지를 받았지만 이 여파는 어마어마해서 두 달 뒤에 프로그램은 종영할 수 밖에 없었다.
  14. 글렌이 비틀즈를 좋아해서 쫓아냈다는 설이 있다. 'God Save the Queen'을 엄마가 싫어해서 연주하기 싫다고 한 적도 있고, 아무튼 음악적으로 마찰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쟈니 로튼은 무언가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글렌 매틀록은 그와 달리 그냥 "팝 스타"가 되는게 꿈이었다고 한다. 많은 록 역사가들은 글렌 매틀록과 쟈니 로튼 사이의 파워게임에서 쟈니 로튼이 승리한것으로 평가한다.
  15. 여기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있는데, 원래는 쟈니 로튼의 친구인 쟈 우블이 들어오려 했다. 그런데 매니저 맬컴 매클래런이 "시드 비셔스가 더 간지난다"라는 이유로 쟈 우블을 내치고 시드 비셔스를 끌어들인다. 쟈 우블은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에서 쟈니 로튼과 함께하게 된다.
  16. 이 시기에 뜻하지 않게 돈을 무지하게 많이 벌었다. EMI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 위약금 + A&M의 계약금 + 곧바로 A&M과 계약을 해지하는 바람에 받은 위약금…ㅎㄷㄷ
  17. 평론가 존 새비지는 이를 두고 "권력이 문화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별 이유가 없이 진압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영상
  18. 1977년 중반쯤 가면 그 당시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서브컬쳐 집단인 테디보이들과 펑크들간의 반목이 심해진다. 이 둘은 모드족과 로커들의 싸움처럼 거의 시가전 수준이었다고…
  19. 허나… 앨범 스타일이 스타일인지라 순위 차트에는 검열삭제가 된 채로 게재되었다. 1위를 했음에도 밴드 이름과 앨범명이 검은색 마크로 가려진채 랭크되거나, 아예 빈칸으로 남겨놓은 차트도 있었다.
  20. 이게 또 음모론자들을 자극해 시드가 살해했느냐 다른사람한테 살해됐느냐를 놓고 논란이 있다. 시드 비셔스가 살던 방에는 마약상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당시 시드 비셔스는 완전히 약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황을 알기 힘들다고 한다.
  21. 1990년대에 와서 밝혀진 사실인데, 어머니가 구해다 준 약을 과다복용하고 죽었다고 한다. 사실상 자살인 셈이다. 그의 사망 전 24시간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적이 있다.
  22. 섹피가 처음으로 밴드로서 공연을 했던 클럽
  23. 사실 이 당시 오아시스는 그야말로 최전성기였다.
  24. 컨셉에 맞춘 농담일 확률이 높지만, 영국은 성매매가 비범죄화된 국가다.
  25. 이것도 사실 노이즈마케팅 수단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밴드들이 고상한척 하지만 실제로는 일정수준 이상이 되면 돈때문에 움직이는게 현실인데 이들은 이걸 과감하게 깨버린것. 훗날 인터뷰에서는 1978년 1월에 엉망으로 끝내버린 역사를 바로잡고 싶었다라고 한 바 있다.그러나 로튼의 경력을 봤을 때 둘 다 맞는 것 같은건 기분 탓이다
  26. 섹피의 영향을 받아 음악을 시작했다는 수지 수는 섹피 재결성 기자회견 직후 음악계에서 은퇴 선언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 오보였고, 지금도 잘 활동하고 있다. 물론 폭풍까임을 시전했음은 사실이다.
  27. 버즈콕스 등.
  28. 영국은 버진그룹인데 미국 판권 소유자가 한때 워너 브라더스였을 정도로 판권이 좀 꼬여있는 상태였다.
  29. 때문에 DIY 정신과 펑크 씬 내의 영향력 때문에 심하게 하이프된 음반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도 일부 존재한다.
  30. 사실 이런 사운드의 원형은 신 리지(Thin Lizzy)이고, 스티브 존스는 이후 신 리지의 백업 기타리스트로 몇차례 참여하기도 한다.
  31. 실제로 섹스 피스톨즈의 사운드는 대부분 스티브 존스가 일궈내고, 멜로디 라인은 글렌 매틀록이 만들고, 정신은 쟈니 로튼이 만들고, 그 가운데에서 폴 쿡이 중재했다고 한다. 시드는 얼굴마담 스티브 존스는 글램록/하드록의 팬이었으며 로드 스튜어트(맛탱이 가기 전)라든가 스몰 페이시스, 뉴욕 돌스, 신 리지같은 뮤지션들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이래놓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모르겠다...집이 가난해서 난 레코드 플레이어가 없어서 음악 잘 안들었다."라고 했다. 쿨시크.
  32. 말은 이렇지만 사실 쟈니 로튼은 음악을 무척 많이 들은 사람이라고 한다. 캔, 캡틴 비프하트, 벨벳 언더그라운드, 스투지스, 호크윈드같은 당대의 하드록/프로토 펑크/개러지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혹자는 섹스 피스톨즈를 안 했어도 밴드를 했을 인물이라 평가한다. PiL를 결성해서 꽤 오랜기간동안 앨범을 낸 것으로 알 수 있다.
  33. 섹스 피스톨즈 좆까라 여기 노브레인이 납신다.
  34. 십수년이 지난 21세기인 지금도 길거리 스트리트 패션으로 사랑받는것을 보면 펑크룩의 생명력은 영원할듯 보인다. 현재 패션계에서는 펑크 룩 이후 패션으로 사람을 놀래키는 일은 힘들어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35. 사실 펑크 룩의 선구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따로 있다. 텔레비전의 베이시스트였던 리처드 헬(Richard Hell)로 평범한 옷차림을 한 밴드 멤버들과는 다르게 옷을 찢고 옷핀으로 연결하는 패션을 선보였다. 당시 미국에 있었던 맬컴 매클레런이 이 패션에 감명받고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함께 그것을 섹스 피스톨즈에 이식시켜 본격적인 펑크 룩의 시작을 알렸다.
  36. 이 때 공범이 바로 폴 쿡이었다...
  37. 이 당시 뉴욕 돌스는 거의 맛이 간 상태였고, 인기가 하락세에 접어들었는데, 맬컴 매클래런이 "나한테 묘안이 있으니 내 말을 따르라"라고 야심찬 아이디어를 내놓게 된다. 그 아이디어는...멤버들에게 빨간색 가죽옷을 입힌 뒤 공산주의 컨셉의 밴드로 탈바꿈 하는 것이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망했어요.
  38. 이 앨범의 수록곡인 <buffalo Gals>에 나오는 한 구절은 에미넴의 <Without Me>에 샘플링되었다.
  39. 고작 4코드만 연주할 줄 알정도로 기본기조차 형편없다...
  40. 그렇지만 시드가 전혀 녹음을 하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Submission이나 Bodies등의 곡에서는 시드가 몇 소절이나마 직접 녹음했다고 한다. 로튼이 자서전에서 '글렌을 세션으로 기용해야 했다'고 쓴 것은 오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