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쿱 벡

야쿱 벡
Yqkub beg
阿古柏 (아고백)
1820~1877.5.30

중앙아시아에서 마지막 유목제국을 세운 군인-정치가이다. 중앙아시아의 호간드칸국의 장군이었던 그는, 중앙아시아의 신강지역에서 예티샤르를 건국하고, 청나라의 건륭제가 18세기 말에 합병한 신강(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까지 진출했으나, 그 틈을 타서 청나라군에 패하여 그의 왕국은 붕괴되고 그는 도피중 급사하였다.

원래 우즈벡인 또는 타지크인으로서 중앙아시아에 있던 코칸드 칸국(khanate)의 장군이었다.

초기경력은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그는 코칸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장군에 이르렀다. 1865년까지 야쿱벡은 코칸드 한국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864년 청나라가 아편전쟁-태평천국의 난으로 쇠하자 18세기에 합병했던 신강에서부터 감숙성-섬서성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던 이슬람교도(회교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코칸드한국의 군인이었던 야쿱벡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위구르족의 본거지였던 타림분지에 진격하여 그곳에 주둔중이던 청나라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더욱 동진하여 1870년에는 돈황과 톈산 산맥 너머 신강의 수도였던 우루무치까지 점령했다. 그리하여 100여년전에 건륭제가 합병했던 이곳이 위태로워졌다.

영국과 러시아는 청나라를 약화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심산으로 야쿱벡의 왕국을 승인하고, 이들을 원조했다. 그리하여 영국은 인도를 통해 야쿱벡에게 서양식 무기를 원조했고, 영국은 아예 이곳에 영사관까지 설치했다. 야쿱벡은 스스로 에미르라고 칭하고, 자신의 왕국을 카슈가리아 혹은 예티샤르라고도 했다.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와도 수교했다. 오스만은 범투르크 국가의 입장에서 야쿱벡 왕국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하려고 하여 그를 에미르로 인정하고 군사고문까지 파견했다. 청나라조차 이홍장을 비롯한 해방파를 중심으로 야쿱벡의 동투르키스탄을 자치왕국으로 인정하던가 아예 러시아에게 할양하여 그 지불금으로 해군력을 확충하려 할 정도로 위구르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야쿱벡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였기 때문에 왕이 되자마자 선정은 커녕 탈레반식의 폭정을 저질렀다. 이슬람 근본생활 방식을 위구르인, 회족인들에게 강요한것도 모자라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원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현지의 위구르들에게조차 폭군, "호로자식"청나라?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게다가 같은 무슬림이지만 다른 교파를 믿던 회족인들(둥간족)에게 지하드를 선포하여 이들을 학살하는 최악의 병크를 저질렀다. 이때문에 회족이 분노하여 청나라에게 가담했고 민심의 이반이 있었으며, 청나라 정부가 공격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일부 위구르 독립운동가들이나 이들에 동조하는 이들이 야쿱벡 왕국을 마치 위구르족의 독립국가였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야쿱벡 자신부터가 중앙아시아에 있던 코간드 한국의 우즈벡족 혹은 타지크족 군인이었고 지배층이 코간드 한국인들이었을 뿐, 분리운동을 일으켜 타림분지에 거주하던 위구르족을 제압해 자립한 상황이었고, 오히려 위구르인들은 중과세를 매기고 탈레반식 근본주의를 실시하는 야쿱벡을 싫어했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얼마전에 합병한 지역에 독립왕국을 세운 야쿱벡을 묵과할 수 없었고, 1875년 좌종당을 토벌군을 총지휘하기 위한 흠차대신에 임명하고, 12만명의 공격군을 보냈다.[1] 1876년 6월 청군과 야쿱벡군은 교전했고, 태평천국에 참전했던 좌종당은 야쿱벡군을 격파하고 우루무치를 청의 지배하에 놓이게 하였다. 7월에는 톈산북로의 야쿱벡군에게 다대한 손실을 주었다. 1877년 겨울 청군은 다시 남진하여 발판성을 함락시켰다.[2]

야쿱벡은 영국의 중재를 통해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선으로 정전하려고 했으나, 이미 승기를 잡은 청군이 멈출 이유가 없었고, 투루판 지역에 대한 총공세를 펼쳤다. 또한 야쿱벡을 지원해줄 수 있었던 러시아나 영국은 국내사정상 중앙아시아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투루판이 청군에 함락되자 중앙아시아로 피했던 1877년 5월 30일 야쿱벡은 급사한다. 이는 음독자살이라는 설이 있으나 중풍일 가능성도 있다 [3] 야쿱벡이 급사하자 이후 야쿱벡 왕국은 와장창 무너졌고, 패잔병은 11월까지 모두 처리되었다. 야쿱벡의 가족들도 모두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성년들은 처형되고, 미성년 자손들은 궁형을 받고 청나라의 내시가 되었다.이보시오 만주양반 내가 고자라니

평가

현재 신장자치구[4] 는 중국전토의 1/6을 차지하는 크고 아름다운 영토로서, 건륭제가 청나라로 복속시킨 곳이긴 하지만, 야쿱벡이 위구르에서 멸망하지 않았다면, 이곳은 영영 중국의 영토로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홍장의 제안처럼 러시아에 할양했거나 혹은 야쿱 벡 왕국을 그대로 두었다면 이곳은 후에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계 공화국처럼 제정 러시아랑 소련의 영토가 되어 소련 해체기인 20세기 후반기에 독립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동투르키스탄? 위구르스탄? 하지만 야쿱벡의 엄청난 병크들로 이 곳은 청나라에 수복되었고, 1878년까지 신강지역은 다시 청나라에 합병되고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모두 이 곳을 중국의 영토로 못박고 있다. 그 영역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신강 위구르 자치주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중국의 지배를 받으며 이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위구르의 잠깐영웅이었으나 한순간의 악행으로 대차게 망한 케이스다(...) 만약 폭정만 없었더라면 위구르와 회족이 협력하여 그나마 반란이 조금은 성공을 했을텐데 수구꼴통이었던지라 화를 초래했다.(...)
  1. 일설에 의하면 9만명이라고도 한다.
  2. 애초부터 청에 비해 국력이 열세이고 기술력도 뒤쳐지는 위구르로서는 상대가 될턱이 없었다. 게다가 국왕인 야쿱벡의 병크로 내분까지 발생한터라 청군에게 박살나기 쉬웠다.
  3. 서울대 김호동교수의 설이다.
  4. 중화민국은 소수민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치구가 아니라 그냥 신장성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