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청의 역대 황제
5대 세종 옹정제 인전6대 고종 건륭제 훙리7대 인종 가경제 용얀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44대 나이랄트 토브 칸45대 텡게린 테트게센 칸46대 샤이시얄투 이루겔투 칸
묘호고종(高宗)
시호만주식용키양가 황제
중국식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한호[1]압카이 워히여허 한
(Abkai Wehiyehe Han)
칸호[2]텡게린 테트게센 칸
(Tengeriin Tetgesen Khaan)
만주어아이신기오로 훙리
(愛新覺羅 弘曆, 애신각라 홍력)
연호
(청)
만주어압카이 워히여허
중국어건륭(乾隆)
몽골어-
생몰기간양력1711년 9월 25일 ~ 1799년 2월 7일 (88세 4개월)
음력1711년 8월 13일 ~ 1799년 1월 4일 (88세 4개월)
재위기간[3]음력1735년 10월 8일 ~ 1796년 2월 9일 (60년 124일)
재위기간
(태상황)
음력1796년 2월 9일 ~ 1799년 1월 4일 (2년 10개월 24일)

말년의 사진이 묘하게 신구를 닮았다

최후의 중화적 절대군주[4]
강희제옹정제가 일군 청나라의 최대 황금기를 누린 황제[5] [6]

1 일생과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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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을 입은 건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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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의 풋풋한 모습, 1736년 건륭 원년, 그의 나이 26세 때 모습이다.

청나라의 6대 황제. 선대 황제인 옹정제의 아들로, 1711년에 태어났다.

1735년 옹정제가 57세 로 사망하자 25세 로 재위를 이었으며, 60년이나 재위하여 중국 역사상 강희제 다음으로 오랫동안 재위하였으며, 이 시기에 청제국의 국력은 사상 최대에 달하였고 그 국토 역시 최대 판도에 달하였다.

건륭제는 중국 사상 최초로 자의에 따라 퇴위한 황제이다. 일설에 따르면 건륭제는 조부인 강희제의 61년 치세라는 대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1795년 재위 60년만에 퇴위하여 상황(上皇)이 되었다. 이에 따라 건륭제의 아들이 가경제로 즉위하게 된다.

건륭제는 퇴위 후에도 사실상의 실세로서 군림하였는데, 이것은 건륭제의 총신인 뉴호록 화신(鈕祜祿 和珅, 니오후루 허션)의 체포 등이 건륭제가 죽은 뒤에야 이루어진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건륭제는 퇴위 4년 만인 1799년 89세(…)로 사망하였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건륭제가 정치 실권을 쥐었음을 들어 현직 황제로서의 60년에 상황으로서의 4년을 더해 64년으로서 중국사상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쥔 황제로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 황제가 되기 전

건륭제가 태어난 해는 강희제의 치세가 50년에 다다랐을 때였다. 건륭제는 훗날 옹정제가 되는 윤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건륭제의 어머니인 희귀비 니오후루씨(熹貴妃 鈕祜祿氏)는 만주인이지만 정실 황후는 아니고 후궁이었다.[7][8] 건륭제는 황자들의 교육기관인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를 했지만, 당시 강희제의 아들들은 20명이 훌쩍 넘었고 손자들까지 따지면 100명에 육박했다. 당연히 대부분은 강희제는 얼굴조차 기억 못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륭제는 금방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보였다. 탁월한 문재를 보였고, 사서삼경에 통달했으며 사냥에서도 용감하게 곰과 싸웠다. 그 모습을 본 강희제는 건륭제를 칭찬하며 관심을 보였고 늙은 몸이었지만 직접 무예를 가르쳐주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강희제의 마음에 가장 드는 것은 건륭제가 부모님인 옹정제와 적모(嫡母), 자신의 어머니에게 꼬박꼬박 예를 다하며 문안을 올리는 것이었다. 유교 가르침에 감화된 강희제에게는 대단히 좋게 보일 수밖에 없는 광경.

강희제가 죽기 직전, 옹정제에게 건륭제를 후임으로 삼으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9] 이러한 이유로 건륭제는 평생 동안 강희제를 대단히 존경했다. 강희제의 초상화를 보면서 자신을 다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재위 60년에 상황으로 물러난 것도 강희제의 기록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옹정제 때가 되자 건륭제는 차기 황제 1순위가 되어 후계자는 이미 정해졌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옹정제의 아들은 10명이었지만 생존한 아들은 4명에 그중에 한명은 재위 중 태어난 젖먹이 10째 홍첨으로 장성한 아들은 셋째 홍시 넷째 홍력 다섯째 홍주 셋뿐이었는데 다른 나머지 황자들의 생모는 한인 출신인데다가 홍력만 유일하게 만주족 생모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건륭제는 아버지의 가벼운 일을 도와주며 정치에 관여를 하고 있었는데, 강희제 때의 황태자 사건 등으로 청나라는 차기 황제를 미리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형은 패륵에 불과한데 혼자 넷째 홍력만 군왕도 뛰어넘어 보친왕에 책봉 되는 등 거의 대놓고 옹정제가 태자 취급하는데다가 신하들도 건륭제의 위치가 공고해 보이자 셋째 형 경패륵 홍시는 판세를 바꿔보려고도 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옹정제의 눈 밖에 나는 결과밖에 되질 못했다. 결국엔 셋째형 홍시는 사사당하고 황실 선원보에서 제명된다. 다섯째 홍주는 일찍부터 정치와 멀리하고 형에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건륭제 즉위 후에도 상당히 예우 받았다. 옹정제 10년차에 워커홀릭 옹정제의 건강이 악화 되서 사실상 황태자인 감국(監國)[10]에 임명되며 사실상 옹정제의 업무를 상당부분 떠맡았으며 3년 후 옹정제가 죽자 후계자는 당연하게도 건륭제의 차지가 되었다. 25세의 일이었다.

3 재위 기간

3.1 개혁

  • 백마를 조공 품으로 받는 건륭제

건륭제는 황제가 된 후 존경하는 할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건륭제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벌였는데 대부분은 강희제처럼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하기보다는[11] 전쟁은 장군들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독려를 하는 편이었다. 이때 건륭제의 부대는 팔기 군 대신 만주족과 한족이 합쳐진 군대였는데, 준가르 정벌군 총사령관이었던 반제(班第), 준가르 및 동투르키스탄 정벌에서 활약한 조혜(兆惠), 만주족 출신의 장수 아계(阿桂), 건륭제의 처남인 부항(傅恒), 그의 아들인 복강안(福康安)[12] 등이 활약하였다.

건륭제는 옹정제 때 탄압받은 숙부들을 사면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드는 것은 막았다.[13]

건륭제는 곧 보갑제(保甲制)와 이갑제(里甲制)라는 제도를 뜯어고쳤는데 보갑제는 100 가구를 모아서 갑(甲), 그리고 그 10개의 갑을 모아 보(保)로 나누어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끼리 서로 질서와 치안의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고 이갑제는 보와 갑에서 세금을 인구에 따라 모아서 재정을 충당하는 제도였다.

본래 북송왕안석이 신법으로 쓰려다가 수포로 돌아간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이후 강희제가 부분적으로 시행하다가 옹정제 때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보·갑의 장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백성들의 호적을 조사하고 그 기록을 관아에 바쳤고 수상한 촌민들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고 뒤로는 세금을 무겁게 매겨 막대한 사익을 취하자, 1740년(건륭 5년), 건륭제는 정확한 인구조사를 위해 각지의 보·갑장에게 가구당 세는 사람의 수를 군역을 지는 장정이 아닌, 집안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계산하였는데 계산한 백성들의 수는 나이, 성별과 이름을 패에다 적어 각자의 집 문 앞에 걸어놓고 매년 인구조사를 하여 북경의 군기처와 호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건륭제는 청나라의 총인구수를 보다 정확히 알게 되었고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여 사익을 취하려 한 경우를 차단하여 또한 이를 방치하거나 세금을 빼돌린 총독이나 순무에게도 중징계를 내려 특히 이 중 그 행태가 심한 자는 참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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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륭제의 남순

강희제처럼 건륭제도 남순을 자주했다. 한번 움직이면 기본으로 황자와 공주, 대신, 환관, 시녀, 요리사, 호위병 등 3000여 명이 움직였고, 유명한 유적지를 돌아보며 풍류를 즐기고 시인과 화가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강희제는 남순은 자주 했어도 예산을 철저하게 짜서 백성들의 부담은 없었는데, 건륭제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신나게 놀고 없으면 다시 돈을 여기저기서 마련해서 계속 움직이는 식이라 백성들의 부담이 극심했다고 한다.

그러고 훗날 사서 등을 편찬할 때 자신의 남순을 강희제의 남순, 사냥원정[14]과 비교하며 정당화 하는 한 편 부정적인 의견은 없애는 엄청난 정치공작을 펼쳤는데, 이걸 보면 자신도 이 행위가 정상적이거나 당연한 합리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부정적 결과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라서...

3.2 십전무공

건륭제는 60년의 치세 동안 총 10회의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하여 자신의 별호를 십전노인(十全老人)으로 자칭하였다.[15] 이 10회의 원정은 위구르나 진촨(金川) 유역처럼 현재의 중국 영토인 곳으로 감행한 것도 있으며, 베트남이나 미얀마처럼 외국에 감행한 것도 있었다. 어쨌든 총 10회의 원정으로 건륭제는 을 제외하면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그 영토는 현재의 캐나다보다 큰 약 1,100만㎢에 달한다. 이 시기 청의 판도 하에 있던 인구는 무려 4억에 달했다.

이 당시 건륭제의 최대 업적은 바로 준가르의 복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희제, 옹정제때부터 이어져 온 청나라 최대의 위협 세력인 준가르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국경을 신장 일대까지 넓혔고, 또한 이후 대금천과 소금천을 완전히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네팔을 정벌하여 티베트 서부 국경을 안정시킴으로써 청나라와 그 뒤를 잇는 현대 중국의 서부 국경을 확정한 것은 건륭제의 온전한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만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이 신강의 면적은 한반도의 10배 가까이 되며, 만주와 맞먹는다. 현재 중국 영토의 1/6을 늘려놨으니... 하지만 이 지역은 후에 회교도의 난이 벌어지기도 하며, 100년 후에는 야쿱 벡이라는 중앙아시아의 모험가가 침입해서 난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19세기 안 그래도 흔들리는 청나라의 혼란을 더 증폭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건륭제의 정복 전쟁이 반드시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남쪽의 버마베트남 정벌에 있어서는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전염병 등의 문제로 인하여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다만 형식적인 복속을 얻어내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이러한 정복 전쟁을 위해 건륭제는 막대한 군비를 소모하여 이는 청나라의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3.3 말년

건륭제의 치세 후기에 총신 화신이 막대한 축재를 감행하였고 이를 건륭제가 눈감아 주어 순식간에 청의 관료사회는 부패하게 되었다. 화신이 해먹은 게 당시 청나라 20년 치 예산에 맞먹는다고. 심지어 건륭제 본인도 말년에 생일선물로 불상 3만개를 받는 등 재산을 모으는 데 골몰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곧바로 민생에 나쁜 영향을 주어서 건륭제가 퇴위한 이듬해인 1796년에는 한족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쇠퇴의 조짐은 보다 일찍부터 있었는데, 이미 1774년 백련교도 왕륜(王倫)이 난을 일으키다 진압된 바가 있고, 1786년에도 대만의 임상문(林爽文)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건륭제 말년의 문제들은 가경제도광제 대에 고스란히 짐이 된다.

3.4 대체적인 평가

정리하자면, 무리한 원정으로 인한 군사력과 재정 소모, 부정부패와 축재, 관료사회의 부패 진행 등 건륭제 말년의 어둠은 청나라 멸망의 전주곡이었다고 해석된다. 여담으로 말년의 '암군' 건륭제는 신하들과 상인, 거부들로부터 금전을 우려내는 데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한편 건륭제는 막대한 문화 사업을 단행하여, 중국은 물론 그 때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과사전 사업을 완수하였다. 이 사업의 동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있는데, 그 중 청나라가 진행한 '문자의 옥(文字之獄)'의 일환으로써, 전국의 책을 검열하여 백과사전에 등재하면서 청에 비판적인 서적을 폐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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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상을 떠올리는 건륭제 머리에 쓴 것만 보고 제갈량인줄 알면 골룸

참고로 이 그림은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이자 청나라 궁정 화가였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 이름은 낭세녕)가 그린 그림이다.

시를 굉장히 좋아했고, 평생 동안 4만자가 넘는 시를 썼다고 한다.[16][17] 다만 대부분은 별로 좋은 평가는 못 받는다고... 오죽하면 조조의 시는 몇십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오늘날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인데,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그저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있을 뿐이다 는 말이 나올 정도. 아무튼 정말 좋아한 것은 맞아서 대신들의 신하에도 이런 시를 선물로 줄 정도였으며, 평소에도 유명한 시인을 초청하기를 좋아했다. 만주족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주족의 한화(漢化)를 걱정한 황제이기도 하다. 강희제 이후, 궁궐 내에도 중국어가 스며들게 되자 건륭제는 이 때문에 만주 귀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건륭제는 너무 많은 중국어가 만주어 상주문에 스며들었다고 불평한 후, 대학사 나친을 우두머리로 새로운 만주어 단어를 만들 태스크 포스 팀을 구성했다. 이들의 활약 덕택에 중국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만주어에서 대거 사라졌는데, 대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가 생겼다.

3.5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

건륭제의 재위기는 당시 조선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의 시기와 거의 일치하며 청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서 그런지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중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참고로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1603~1867/68)의 쇼군은 8대 요시무네(吉宗, 재임 1716~45), 9대 이에시게(家重, 재임 1745-60), 10대 이에하루(家治, 재임 1760-86), 11대 이에나리(家齊, 재임 1786-1837)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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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 말년인 1793년 영국의 대사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가 정식으로 교역을 하자고 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건륭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모직물과 기기묘묘한 완구 및 마차, 열기구와 지도 따위를 가져왔는데 하필이면 마차의 마부가 황제 바로 앞에 앉게 되는 식으로 설계가 된 바람에(…) 건륭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 이유 뿐만은 아니었겠지만 하여간 건륭제는 오랑캐 놈들이 참 조잡한 장난감을 가져와서 별짓을 다하는구나. 우리 청나라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대답하며 요구를 거절했다.

청나라 신료들은 매카트니에게 청나라식 삼배 구고두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으나 매카트니는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건륭제의 뒤편에 영국 왕 조지 3세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매카트니는 한쪽 무릎만 꿇을 뿐이었다.[18]

또한 매카트니는 당시 청나라의 공행 무역을 폐지하고 자유무역을 허용하고 일부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건륭제는 청나라는 모든 것이 다 있는 천자의 나라다. 너희 오랑캐들이 청나라에서 나는 비단, 도자기 수입도 감사하지 못할 망정 뭐가 어째? 안돼.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야 그렇겠지만, 이미 청나라의 수준과 기술은 영국 등 서양에 비해 굉장히 뒤떨어졌다.[19] 결국 한 반세기쯤 뒤에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중화의 나라 대청제국은 서양 오랑캐 영국에게 신나게 얻어 터지게(...) 된다.

한편 조선과 다른 쪽으로 연관이 있었는데,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때 조선 사신단에 끼어간 인물이 바로 박지원. 열하일기가 바로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저서이다.

4 가정 관계

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 부찰(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건륭제도 이 황후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황후는 성정이 어질고 소박했으며 태후에 효성스러웠고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다. 한 번은 건륭제가 크게 앓은 적이 있는데 쾌유한 뒤에도 어의는 "반드시 100일은 푹 쉬어야만 원기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당부했다. 황후는 매일 밤 건륭제의 침실 밖에 거주하면서 정성을 다해 100일 동안 시중을 든 뒤에야 비로소 합방했다.[20]

건륭 13년에 지방 순행 중 더저우(德州)에서 죽었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 그 지역에는 건륭제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의 죽음과는 별 상관없어 보이지만 건륭제의 개혁 성향이 이즈음부터 크게 꺾이고 본인은 천자 놀음에 더 신경 쓰면서 제국은 슬슬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런데 건륭제는 이 황후의 남동생인 푸차 푸헝(富察 傅恒)의 부인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야사가 존재한다.

첫 황후의 죽음 이후 황후가 된 계황후 오라나랍씨(繼皇后 烏拉羅拉氏)는 건륭 30년 남순 중 미스터리하게 북경으로 돌려보내지고, 총애를 잃은 채 냉대를 받다가 죽게 된다. 심지어는 죽고 난 후의 장례 절차마저도 황귀비의 예에 따라 치르도록 건륭제가 명령하였으며, 건륭제는 슬퍼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친자인 12황자만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총애를 잃은 이유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있으며, 여러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이후에는 한족 출신인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 위씨를 총애하였으며, 그녀의 아들인 15황자 영염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가경제가 된다. 그녀는 사후 효의순황후 위가씨(孝儀純皇后 魏佳氏)로 추증된다.

참고로 딸바보 아버지였는데, 65세 때 돈비 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늦둥이 막내딸 고륜화효공주를 특별히 총애했다고 한다. 화효공주는 건륭제의 외모며 성격, 재능을 유난히 닮아 여러 면에서 출중했던지라 음? 건륭제는 그녀를 보며 '네가 아들이었다면 너를 태자로 삼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딸을 각별히 사랑한 건륭제는 그녀가 후궁 소생의 공주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고륜공주로 봉해주었으며[21], 미행이나 사냥에도 그녀를 동반하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또 본인이 각별히 총애했던 권신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巨富)였던 뉴호록 화신의 장남 뉴호록 풍신은덕(공주와 동갑이었다)과 일찍이 정혼시켰고, 1789년 11월 17일에 결혼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기록에 의하면, 그녀의 혼인 당시 융숭한 총애와 사치스러운 혼수는 저번 공주의 혼사에 비해 10배나 되었고, 공주의 집으로 실어 보내는 물건들은 대충 어림잡아 봐도 수백만 금이 넘었으며, 그녀가 시가로 가던 날에는 수천 수백 명에 달하는 고관들이 참석하여 그녀를 작별하는 절을 했다고 한다.

5 과대평가

이 황제의 치세기 할아버지 강희제, 아버지 옹정제와 함께 강건성세의 치세라고 불리며 봉건시대 중국의 마지막 호황기로 손꼽혔으며, 음습하고 내치에 주력한 아버지 옹정제의 치세와 달리 정복전쟁이라는 화려한 군공 때문에 오랫동안 높은 평가를 받았다.

허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아의 성세, 속빈 강정이라는 평가가 대세.

즉위 초에 아버지에 대한 각박한 평가에 대한 반발 심리로 너그러운 정치를 행했으나 이로 인해 옹정제가 축적해둔 국부는 순식간에 고갈되었으며, 옹정제의 엄격한 관리로 1000년에 한번 올까한 기풍이라는 평가를 받던 관료들의 기강 또한 순식간에 문란해졌다. 특히 옹정제 시절부터 강력하게 추진된 황무지 개간 사업에서 아버지와 달리 자신에게 올라오는 보고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백성들에게 크나큰 부담을 주었다.

실례로 옹정제는 초기 개간의 성과가 좋자 크게 기뻐했으나, 계속되는 보고에 '이렇게 빠른 개간이 가능하단 말인가?'라고 의심해 실상을 자세하게 조사했고 그에 따라 엄청난 토지가 서류에만 등록된 개간지임을 밝혀냈다. 이는 관료들이 황무지를 개간지로 등록해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관료들은 옹정제에게 갈렸다. 허나 건륭제는 '나만한 군주가 어디 있어'라며 자뻑(...)에 빠져 살았다.

게다가 할아버지를 본떠 다섯 차례에 걸친 강남 유람을 단행해 그 지역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는데, 강희제가 국비로 예산을 철저하게 편성하고 그나마도 아껴 사용해 돈을 남겨온 것이나 옹정제가 국비 부담을 우려해 아예 유람을 떠나지 않던 것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다. 운하와 양쯔 강 주변의 백성들에게 유람 비용을 징수하여 주변지역에서는 거듭되는 세금징수를 피해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인구의 씨가 마를 지경으로 황폐해졌으며, 말년에는 황금불상을 모으는 취미를 들여 백성들의 삶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자기 아버지가 차려놓은 밥상을 지 손으로 차 버린 셈.

또한 서양에서 중국에 대한 평가가 급폭락했던 것도 건륭제 시기였다. 강희제는 가톨릭 군주가 아니라는 점만 빼곤 최고의 군주라는 극찬과 함께 엄청난 학구열과 뛰어난 군공과 정치력을 선보여 서양 선교사들을 감격시켰고, 그 영향으로 서양에서 중국학이 널리 유행하게 되게 한 명군 중의 명군이었다. 또 옹정제는 가톨릭을 탄압하지만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서양의 주요 학자들에게 중국이야말로 유토피아라는 소문이 퍼지게 만든 명군.아버지가 너무 훌륭해서 아들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희제-옹정제 시기에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와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전 유럽이 단합해야 겨우 청나라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경악스러운 평가를 내려 전 유럽의 지식인과 왕족들을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다만 여기에는 가톨릭을 안 믿는데도 윤리의식이 뛰어난 동방의 대국이 있다더라는 신기함도 한 몫했다. 즉 가톨릭 따위 없어도 대국이 될 수 있다는 표본으로 동방의 대국인 청나라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가톨릭의 교리와 유교 철학을 어떻게든 엮으려고 바락바락 애를 썼다. 개신교 쪽에서도 노아의 후손이 임금이네 하는 개드립을 쳤고... 물론 실제로 강희-옹정 시기의 청나라가 세계 최강을 논하는 압도적인 국력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예카테리나 여제, 루이 14세 같은 절대왕권으로 유명한 왕들조차 중국 문화 애호가임을 자처하며 자신들을 중국 황제로, 주변 귀족들을 중국 문관에 비유하는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고평가가 이루어진 시기가 강희-옹정 연간의 청나라였다. 이때의 중국 문화 애호를 가리켜 쉬누아즈리(Chinoiserie)라고 부른다.

허나 건륭제 시기부터 청나라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꾸준히 이어지기 시작했고, 결정적인 것이 매카트니의 중국 방문으로 그 이후 중국에 대한 평가는 덩치는 커졌지만, 내부는 곪기 시작했다가 대세로 변하고 말았으며, 서양에서 일었던 중국에 대한 찬양과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애호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서양 선교사들이나 유럽 인문학자들의 평가가 강희-옹정 시대엔 가톨릭을 믿지 않거나 탄압했지만 뛰어난 무공, 검소함, 국가 체제 정비 등을 이유로 로마 제국 오현제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 등과 비견되는 명군이라는 찬양일색에서[22] 건륭 시대엔 당시 유럽에서 과시욕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막장으로 통하던 루이 14세로 절하된 점이야 말로 가장 적나라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23]

특히 매카트니는 "중국 제국은 늙고 미친 일급 군함인데, 유능하고 추호도 방심하지 않는 관리들이 과거 150년 동안 이 배(중국)을 용케 물에 떠 있게 하고 그 외관상의 덩치만으로 이웃들을 위압해왔지만, 능력이 부족한 사람[24]이 갑판에 올라 명령권을 갖기만 하면 배의 규율이나 안전과는 고별이다. 그 배는 아마도 철저히 파괴되어 가라앉지는 않고, 난파선으로 한참 떠돌다 산산조각 나서 해안으로 밀려들 것이다. 그러나 그 배는 이전의 기반 위에서 절대 다시 건설될 수 없을 것이다."[25]

라고 평가했는데, 즉 강희제 시절만 해도 젊고, 정력적이고, 무력적이고, 학술적이며, 윤리적이고, 과학적이며, 귀족 관리들과 달리 과거제도 선발된 전문적인 관리들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이미지였던 청나라는 건륭제 시절부터 침몰하는 배와 병자의 이미지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

건륭제 때 파견된 조선 사신들이 남긴 기록을 봐도 당시 "황제에 대한 비방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예전보다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진 것 같다."고 평한 걸로 봐서는 인심도 그다지 얻지 못한 모양이다. 뭐 그래봐야 최대 판도로 영토를 넓혔다는 점 때문인데 일단 그건 차치하고, 청나라 황제 중에서는 유명한 황제일 수밖에 없지만...연행사로 다녀왔던 실학자 홍대용강희제실로 영걸한 황제라면서 정조와 노론들 앞에서 칭송할 정도였지만, 원명원이 사치스러웠던 점을 들어 건륭제는 깠다.

사실 건륭제의 치세가 매우 중요한 시기였던 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당시 청나라의 국력이 가장 왕성하긴 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인구폭발이 그것이다. 실제로 강희-옹정 시대에 청나라의 치세가 안정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중국의 인구는 이 시기 이전까지는 주기적으로 증감을 되풀이 하면서 1억 5천만 정도에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 100년 남짓한 시기에 세 배로 늘어난다.[26] 이 때문에 이전 왕조에선 인구가 줄어들었거나 사람이 거주하지 않던 곳에까지도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당연히 인구가 증가하면 식량수요가 증가하는 건 당연한 이치고... 이 때문에자국의 인구문제를 이미 예측하고 있던 옹정제 때부터 이미 황무지 개간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물론 배후의 비리문제는 차지하고서라도...

이런 폭발적인 인구 증가라는 추세에도 청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은의 유입이었다. 건륭제 초기에 잠시 은의 유입량이 주춤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후 다시 회복세를 드러냈다. 즉 건륭제 시기는 세계의 은 대부분이 청으로 몰려들었을 정도로 청의 입장에선 엄청난 호황기였다. 이 때문에 인구증가에도 불구하고 청의 경제가 버티고 국가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건륭제가 이런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면 저런 사치를 부렸어야 하는 건지는 의문이다. 물론 은이 쏟아져 들어오니 무슨 상관이랴 싶었겠지만. 결국 식량생산량의 증가는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청에게 고도로 유리한 무역체제로 인한 대호황에 안주하다가 건륭제 이후로 청이 막장테크를 타게 된 걸 보면 건륭제가 적어도 할아버지 강희제나 아버지 옹정제 수준의 전망만 있었어도 이 중대한 시기를 그냥 넘기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강희제나 옹정제가 이런 시기를 다스렸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했으리라는 보장도 물론 없지만 말이다.

현대에 와서는 이렇게 까이고 있으나, 그전까지만 해도 풍류를 좋아하고 성격 좋은 친근한 이미지 때문에 각종 매체에서 인기가 많았다. 건륭제 당시부터 내려오는 민간 야사의 숫자도 엄청난 수준. 어쨌거나 강희-옹정의 치세를 거쳐 건륭제 당시의 청나라가 국력이 가장 왕성할 때이기도 하고 말이다.

확실히 일화들을 보면 성격이 재미있는 사람이긴 하다. 특히 밀복을 하고 사람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즐겼는데, 이렇게 백성들 속에서 놀다가 느닷없이 신하들 집으로 찾아가는 등의 행위도 자주했다. 거대한 청나라의 황제가 아니라 유쾌한 부자였으면 더 좋았을지도...여하튼 앞의 강희, 옹정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건륭은 까일 수밖에 없긴 하다.

전체적인 치세를 보면, 어린 시절부터 존경하고 선망하던 황제이자 할아버지였던 강희제를 본받기 위해 부단해 애썼으나, 그렇게 잘 되진 않았다. 이런 점은 아버지 카를 5세를 질투에 가까울 정도로 존경하여 따르려고 했던 펠리페 2세와도 비슷할까? 물론 건륭제는 전체적으로 펠리페 2세보단 여러 모로 활발한 편이긴 했다.

고서화 매니아이기도 해서 황제의 권력으로 저명한 고서화들을 많이 수집했는데 정작 자신은 고서화의 운치를 망쳐버린 인물로 악명이 자자하다.당시 자행되고 있던 문자의 옥의 소용돌이에서 고서화 문화가 어떻게 발전할 수가 있었겠느냐만은... 오죽했으면 미국의 중국화 학자로 유명한 마이크 설리번이 탐욕스런 미술 수집가이자 빈약하고 독단적인 감식안의 소유자라고 비꼬았을 정도. 왼쪽 작품은 건륭제가 망쳐놓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원대의 화가 방종희의 "고고정도(高高亭圖)"가 꼽히는데, 운치 있는 절벽을 그려놓은 작품에 눈에 확 띄는 최상단 중앙부에다가 떡하니 자기 인장을 찍어 놨다. 덕분에 고고정도를 감상하는 사람은 그림 자체보다 건륭제의 큼지막한 인장이 먼저 눈에 들어올 정도.


조맹부의 걸작인 위쪽의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에도 건륭제의 흔적이 많은데 여러 도장을 찍고 주제에 시를 적는 등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을 정도다.

중국 민족사학계에서는 '흠정만주원류고'를 쓴 황제라며 칭송한다.[27]

6 각종 매체에서의 건륭제

한국에서는 황제의 딸이라는 중국 드라마의 인기로 유명해진 황제. 용서의 아이콘 혹은 주인공 일행이 친 사고를 수습해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나온다. 그 때문에 건륭제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드라마에서 건륭제로 나온 배우인 장철림 성동일과 비슷하게 생겼다 은 쌍룡회나 철치동아 기효람 등에서도 건륭제를 맡았던 건륭제 전문배우로서 북경전영학원 출신의 연기파 배우이다. 워낙 장철림이 불같으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잘 연기했기 때문에 안식구에게 다소 박정한 면이 있었던 건륭제의 본래 모습이 많이 희석되기도 했다.(...)

고천락 주연의 건륭대제에 보면 강대위가 맡은 증정과 연적관계로 나온다.(...) 증정이 무림고수라는 설정.

후궁견환전(옹정황제의 연인)에서는 아버지인 옹정제가 메인이다 보니 본인은 4황자 홍력으로 나오며 마지막 화에는 아버지 사후 황제로 즉위하게 되며 실제 역사와 부합된다. 또한 후궁견환전의 후속 작이 될 예정인 후궁여의전의 주인공이 2번째 황후인 계황후 오라나랍씨이다 보니 아마 메인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김용서검은구록[28]에서도 건륭제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건륭제가 한족인데 아기 때 바꿔치기를 해서 황족이 되었다는 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나? 주인공인 진가락의 친형으로 그가 한족이라는 증거와 교환 및 히로인 객사려(향향공주)와의 결혼 등의 대가로 한족의 나라를 만들기로 계약하나 태후가 그 일에 대해 알아차리는 눈치이자 대뜸 배신을 때린다. 작중에 주인공 진가락이 이끄는 홍화회에 사로잡혀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당하는 장면도 있는데 김용은 이 부분에 덧붙여 쓰기를 이때 손모가지가 날아갔어야 명작에 도장 찍고 글자 끄적거리는 미친 짓을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까기도. 이외에 불륜까지 저질러 복강안이라는 사생아를 두는 등 전반적으로 찌질한 악당으로 묘사되고 있다.
  1. 만주식 군주 칭호
  2. 몽골식 군주 칭호
  3. 태상황의 재위기간까지 합치면 63.24년 정도로 역대 중국 황제 중 가장 오랫동안 다스린 황제가 된다.
  4. 그의 사후, 청제국이 어떠한 명운에 직면케 되었는지를 상기함, 사실상 제국으로서의 중화를 통치하며 패권국의 천자다운 위용을 보였던 마지막 황제라 볼 수 있다.
  5. 이 시기 중국의 GDP는 전세계 GDP의 30% 이상을 차지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의 GDP가 전세계 GDP 중에서 고작 8%에 불과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하지만 이건 오히려 근대화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보여준다. 당시 영국 인구는 1천만이 안되었는데 청의 인구는 4억이 넘었다. 그런데 GDP는 40배 이상은 커녕 고작 4배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참고로 GNP와 달리 GDP는 영국 본토 내에서의 생산량만 측정하므로 식민지의 GDP는 별개로 집계된다. 영국의 번영 원인에서 식민지의 착취 운운은 잘못된 것이다. 식민지를 포함한 대영제국 전체의 GDP는 거의 청나라 수준에 육박하고 1차 산업혁명 후반기에 실제로 청나라를 능가하게 된다. 또한 건륭제의 치세기간은 18세기 전-후반기에 걸쳐있고, 영국에서의 산업혁명 발흥시기는 종래에는 18세기 후반이 주류설이었으나, 최근 17세기 설도 등장하여, 두시기를 동일 시점으로 놓고 비견하는것도 다소간 무리라 할 수 있겠다. 실제 산업혁명으로 인해 서구권 세계 전반에 괄목할 생산혁신이 이뤄지는 시점은, 영국에서 1차 산업혁명이 끝나가던 시기에 해당하는 19세기 중반으로 보는것이 통설이다.
  6. 단 지나치게 18세기말에 역전되었다라고 말할수준은 아닌것이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란 책에 왕정농서가 소개되어되어있는데 거기에 수력방적기가 실려있다. 그것도 14세기에..... 18세기말까지 의외로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서양천문학을 받아드리기도 하고(열린연단 문중양참조) 서양의 자명종을 제작하기도 했다.아편전쟁 당시에는 산업화된 영국의 생산력을 인력으로 눌러버리고 영국조차 1860년에 가서야 그 생산량을 따라 잡았다. <방송통신 대학교 > 근대화와 동서양 참조.
  7. 옹정제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아들을 낳았으며 소생도 건륭제 하나밖에 없었다. 건륭제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성모황태후로 승격되었는데 이 여자가 숭경황태후 니오후루씨((崇庆皇太后 鈕祜祿氏) (사후 효성헌황후 니오후루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로 추존)이자 중국 사극 황제의 딸에 등장하는 황태후이자 후궁견환전의 주인공 견환의 모태가 되는 인물이 된다.
  8. 그런데 기록에 따라서는 건륭제의 생모는 효성현황후 니오후루씨가 아니라 전씨로 기록되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9. 조선 왕조 실록 경종시대에 사신이 가져온 강희제 전위조서에서도 실린다.
  10. 나라 전반을 감독 하라는 특별 직책, 섭정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11. 다만 강희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한 것은 준가르의 갈단 정벌 때뿐이다.
  12. 여담이지만 황제의 딸에 등장하는 이강과 이태가 복(福)씨로, 극중 영비의 사촌 친정(즉 영비가 이강과 이태의 이모뻘)으로 나온다.
  13. 이는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들어 황위쟁탈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14. 몽골 귀족들을 모아 놓고 사냥으로 군사훈련을 병행하며, 청나라의 부와 번영을 과시하고 몽골귀족들의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 시행했다. 강희제의 유조에 남아있는 사냥에서 어쩌구~는 이 사냥원정의 결과물들이다.
  15.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실 몇 개의 원정은 하나의 원정을 10이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쪼갠 것에 가깝다(...).
  16. 이 건륭제의 시들은 도굴범들에 의해 훼손되어 남아있는 게 많지 않다.
  17. 소실된 시가 많지만 원체 건륭제가 다작을 한 데다가 여기저기 뿌리기도 많이 해서 책 몇 권을 채울 정도는 남아있다.
  18. 서양에서는 이런 방식이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19. 일례로 성냥 자체가 없어서 메카트니와 영국 사절단이 성냥으로 불붙여 담배를 피는거 보고 '오랑캐가 요술 부리고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20. 출처: 옌 총니엔 저, 대청제국 12군주 열전
  21. 일반적으로 청나라에서 황제의 적녀는 고륜공주로 봉해졌고 서녀는 화석공주로 봉해졌다. 물론 모친의 지위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예외도 있었다.
  22. 참고로 옹정제는 유럽 현지에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다 처형한다는 악평까지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옹호론까지 등장했다. 비록 순교자들을 탄생시켰지만 검소하고 정력적이며 능력 있는 유능한 황제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것이 오현제들과의 비교...
  23. 그런데 이 비교들은 은근히 황제들의 성향과 잘 어울린다. 강희제 - 트라야누스, 옹정제 - 하드리아누스 그런데 갑자기 건륭제 - 루이 14세 크리.
  24. 누구를 뜻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당시 황제는 건륭제였다.
  25. 피터 C. 퍼듀작 중국의 서진에서 인용
  26. 그리고 이렇게 4억 정도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까지 유지되다가, 마오쩌둥이 "인구는 국력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마오시절에 이미 두 배가 늘어 9억을 돌파하고, 현재 13억을 넘는 인구를 자랑하고 있다.
  27.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다가 최근 '만주원류고'라는 제목으로 완역되었다....만 절판 상태
  28. 우리나라에서는 청향비로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