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제국 사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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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國忠
(? ~ 756년)
1 개요
당조의 간신이자 무관이다. 본명은 양소(楊釗)이고, 산서성 예성(芮城) 사람이다. 당대 절세가였던 양옥환과 같은 증조부를 가진 6촌 당형이다. 양옥환을 등에 업어 당현종에게 중용되었다. 환관 고력사와 결탁해 환관 정치를 이루었다. 안사의 난때 난병들에게 처형당했다.
2 생애
측천무후의 충신 장역지의 사위로 학문에 자질이 없었고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데에 밝았다. 그는 젊어서 군인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검남절도사 장구겸경이 요좌로 입경하자 현종은 양소를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했다. 왕홍(王鉷)을 모함해 관직에서 몰아내고 그를 대신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고, 경조윤(京兆尹)을 겸했다. 750년, 양옥환이 귀비가 되자 현종은 양소에게 `국충`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양국충은 이림보와 연합하여 세족(世族)[1]을 정계에서 몰아내었다. 이에 양국충은 현종에게 신임을 얻게되고, 이후 이림보와 암묵적인 대립을 이루었다.
752년, 당나라의 실질적인 1인자로 군림했던 이림보가 사망하자 양국충은 뇌물로 인사를 문란시키고, 정계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또한 우상에 올라 문부상서를 겸하여 관직 40여개를 독점했다. 의기양양한 양국충은 선우중통(鮮于仲通)을 천거해 익주장사로 삼고 군사를 내어주어 남조를 공격했다. 그러나, 6만 여명의 당군이 괴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754년, 양국충은 또 다시 이복(李宓)에게 군사를 내주어 남조를 공격하게 하나 대패함으로써 천보전쟁에서 당군은 약 20만 명의 군사를 잃게되었다.[2] 그럼에도 양국충은 이 사실을 현종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관직을 독점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뇌물로 조정을 전횡하는데에 골몰하였다.
이후 양국충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모함을 하다가 755년, 안록산은 하북에서 난을 일으켰다. 안록산은 측간 양국충 제거를 명분으로 삼고 장안으로 진격했다. 이에 양국충은 안이하게 생각했다. 조정회의에서 그는 곧 안록산의 수급이 장안으로 도착할 것이라고 하며 낙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낙양에서의 방어작전 실패하고 동관마저 뚫리자 양국충은 위험을 느낀다. 그는 현종에게 촉으로 피난 갈 것을 요청해 이를 승낙받고 장안을 버려 현종과 함께 촉으로 피란을 갔다. 가는 도중 마외역에서 보급품 문제로 비난을 받다가 결국, 난병들이 들고 일어나 양국충을 죽여 사지를 가르고 그의 머리를 잘라 마외역 문 밖에 내다 걸었다. 이 사태의 여파로 어사대부 위방진, 양귀비와 양귀비의 한국 부인과 진국 부인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