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과의 한해살이풀에 대해서는 양귀비(식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명
- 상위 항목 : 중국사의 여성
파일:Attachment/f0043889 4a8be4d286f58.jpg
楊貴妃 (719 ~ 756)
당나라 현종의 비(妃). 양귀비는 이름이 아니라 양(楊)씨 성에 귀비(貴妃)[1]란 직함이 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귀비 양씨. 양씨의 이름이 흔히 옥환(玉環)으로 알려져있는데, 이는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삼국지의 손부인이 후세에 손상향이란 이름을 얻은 것과 같다.
본관은 포주(蒲州) 영락(永樂)[2]이며 용주(容州)[3]에서 출생했다. 17세 때 현종의 제18왕자 수왕(壽王)의 비(妃)가 되었다. 그러나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의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한 기회에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왕의 저택을 나와 태진(太眞)이란 이름의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세인의 눈을 피하면서 차차 황제와 결합하였으며,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4]로 책립되었다. 이게 막장이라면 막장인데, 왜냐 하면 무혜비의 아들이 수왕이기 때문이다(…). 즉, 원래 총비였던 시어머니가 죽자 며느리가 그 자리를 계승한 꼴.
한 마디로 며느리로 왔다가 시아버지와 눈이 맞고 배가 맞은 막장녀. 현대 관점에서 보면 훌륭한 네토라레물이다. 다만 시대상 양귀비가 황제를 상대로 절조를 지키려면 죽는 수밖에 없었고 다른 가족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니 그녀를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또 전세대의 다른 여인들과 달리 양귀비는 정치에 개입하지도 않았기에 정적을 만들거나 국난을 조장하여 화를 자초한 것도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며느리에게 손을 댄 현종이라 봐야 한다.
다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 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친척 오빠인 양국충(楊國忠) 이하 많은 친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다. 그녀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荔枝[5])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지경이니 나라가 기울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다 755년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長安)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그녀에게도 죽음을 강요했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그녀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중국 4대 미인,[6] 또는 5대 미인의 한 명으로 정사(正史)에선 그녀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적었는데,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란 소리다. 요즘 같은 시대의 미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타입. (물론 요새라고 풍만한 걸 좋아하는 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매비가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 살찐 종년)라 욕했다는 일화도 있다.
일각에선 당시의 체격 기준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에는 허리가 가는 여자[7]가 미인으로 취급받았기에 상대적으로 살쪘다고 보았다는 이야기로, 그렇게 봤을 때 양귀비의 실제 체격은 현대 미인들의 체형과 비슷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당(唐)대 여성들의 미인 기준은 대체로 현대와 비교해서도 당당한 느낌이었고, 가느다란 여성을 선호한 건 한(漢)대였음[8]을 들어 재차 부정하는 의견도 보인다.
가무(歌舞)에도 뛰어나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양귀비의 별명인 해어화(解語花)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말을 알아듣는 꽃, 얼굴만 이쁜 꽃 같은 후궁이 아니라 지적인 여자였음을 알 수 있다. 동시대의 이백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曲)으로 하여 《장한가(長恨歌)》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여주인공의 하나가 되었다. 진홍(陳鴻)의 《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 이후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경국지색이 뭔지 잘 보여주는 여자. 달기가 권력을 잡고 휘두른 타고난 악녀였던 반면, 양귀비는 권력에 휘말린 여자였다. 그녀 자신은 정치나 권력투쟁에는 관심이 없이 현종과 음악을 즐기며 지내는 생활에 만족한 모양.
그 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양국충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안록산이 장안을 방문했을 때, 살이 쪄서 뱃살이 무릎에 닿을 정도(!)인 그의 외모를 재미 있게 여겨 홀딱 벗겨 목욕시켜 아기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돌아다녔다는 일화. 현종도 그걸 보고 웃으면서 아기 씻긴 값을 주었다고 한다. 결국 안록산이 간신(양국충)의 토벌을 명목으로 난을 일으킨 결과 이 두 사람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생각해보면 기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야사이지만 양귀비는 겨드랑이 냄새(암내)가 심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곁에 있던 시종이 솜으로 코를 막고 다닐 정도였으며, 이 때문에 양귀비는 항상 향이 나는 주머니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당 현종은 고질적인 축농증이 있어 양귀비의 암내를 몰랐다고(...).
중국에서는 이때 양귀비와 안록산이 사랑에 빠져(!!) 안록산이 양귀비와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희곡도 있지만… 비주얼이 워낙 그래서인지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워낙 인기인이라 양귀비, 양귀비비사, 대당부용원 등 양귀비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여러 편 만들어졌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고 절세미인이라는 특징이 있는지라 양귀비 역을 맡는 여배우는 작정하고 예뻐야 한다. 뭐, 미인으로 알려진 여성 캐릭터라면 안 그런 경우가 없겠지만.
영화 <양귀비: 왕조의 여인>에서 양귀비를 맡은 판빙빙. 문화적, 경제적으로 융성했던 당나라가 한 여인에 의해 파멸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담았다. 판빙빙은 이에 앞서 대당부용원에서도 양귀비를 맡았는데, 여기서의 양귀비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활발하며 당현종과는 서로의 예술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지음의 관계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덧붙이자면 2010년 방영되었던 양귀비비사의 양귀비役 은도라는 배우는 ost를 직접 부르는 등, 마치 한국의 장희빈처럼 영상화될 때마다 진정한 양귀비 재현에 힘쓴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근거는 크진 않지만 일본의 가수인 불세출의 가희 야마구치 모모에가 양귀비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야마구치 모모에 본인조차도 언론에서 이렇게 주장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자기 성은 원래 양씨라며 족보까지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계인 손정의가 자신의 성씨를 들어 조상 중에 중국계 혈통도 섞였다는 립서비스를 한 바 있었던 것처럼 조선시대 일부 양반들이 족보에서 성씨의 시조를 이름 있는 중국계 인사들로 하던 유행에 맞물려있는 것을 재일교포라 이런 역사에 무지해서 곧이곧대로 믿어서 썼다는 설이 약간 더 타당하다. 결국 근거 없는 얘기라는 것.
원래 불타 죽은 사람은 양귀비가 아닌 시녀였으며, 양귀비가 도주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 도망간 곳이 다름 아닌 일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양귀비는 돛 없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는데 일본 야마구치현의 주민들이 쓰러진 그녀를 발견했고 거기서 더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 그리고 그 사이에 후손을 남겼다고 하지만 이것은 신빙성이 아예 없다. 일본에서는 중세까지 변방의 듣보잡이었다 보니 고대사의 유명인들을 끌어들여 칭기즈 칸의 후예가 일본에 정착했다거나, 칭기즈 칸이 사실은 미나모토 요시츠네라거나, 심지어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일본에 정착했다는 주장까지 하는데[9] 그 연장선으로 보면 된다.
백거이의 유명한 시 장한가는 양귀비와 당현종의 사랑을 소재로 한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