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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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때 만들어진 낙양 여경문
"고금의 흥망성쇠를 알고 싶다면, 낙양성에 한 번 가보라."[1] - 사마광[2] |
한자 : 洛陽(낙양)
중국어 : 洛阳(Luòyáng)
일본어 : 洛陽(らくよう)[3]
중국 허난 성(河南省)의 도시. 한국에는 한자음을 그대로 읽은 낙양(洛陽)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도시다.
2 지명의 유래
황하의 지류인 낙수(洛水)가 남쪽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원래는 '낙(洛)'이라고만 불렸다. 수로를 이용한 교통이 편리하고, 사방이 평야라서 농업생산력도 뛰어나서 입지조건이 좋아서 고대부터 유명했다. 중원의 중심으로 예로부터 구주지복지(九州之腹地, 중화 9주 중에서도 배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불렸다.
이후 주나라(서주) 때 수도인 호경(鎬京)의 별칭인 '종주(宗周)'에 버금가는 도시가 되어 '성주(成周)'로 불리다가 동주 때 수도가 되면서 낙읍(洛邑)으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전국시대에 이르러 강의 북쪽 지역에 붙는 접미사인 양(陽)이 붙게 되면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심양이나 한양 등의 다른 도시들도 이와 같은 작명법으로 이름이 지어졌다.[4]
3 역사
중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특히 유서깊은 곳이다. 역사에 등장한 때가 전설적인 하나라 시기이며, 그 후로 장안과 함께 중국의 양대 도시로 성장했다. 그래서 역사가 4000년 정도 될 정도로 굉장히 오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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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과 주변부의 지형 |
일단 지형의 조건이 상당히 특이하다. 도시와 평원을 둘러싼 산악지대[5]가 원형의 성벽처럼 만들어져 있으며, 북쪽에는 황하, 남쪽에는 낙수와 이수가 흐른다. 게다가 서쪽 방면의 산악지대는 대규모라서 통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덕분에 주변지역에서 뤄양으로 오려면 황하를 타고 낙수로 진입하든지, 아니면 동쪽 산악지대에 있는 호로관(사수관과 같은 지역이다.)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서쪽은 함곡관으로, 여기서 중원과 관중이 구별된다.[6] 한마디로 말해서 방어하기 편리한 곳치고는 교통사정도 좋다는 이야기다.
3.1 화려한 전성시대
일단 워낙 입지조건이 좋아서, 무려 13개 왕조가 1586년간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오오 핫플레이스 오오 이걸 센게 더 신기하다 주요왕조로는 9개이기에 "9조고도(九朝古都 -9개 왕조의 도읍)"라고도 한다. 대충만 따져봐도 일단 (전설 속의)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동주), 후한, 위(삼국시대), 서진, 북위, 수나라[7] 등이 된다. 여기에 측천무후의 무주(주나라)와 오대십국시대의 후당도 낙양을 수도로 삼았다. 제2수도 격이 된것도 서주, 전한, 전진, 후진, 수나라(수문제), 당나라, 송나라 등, 무려 여덟 왕조가 있었다.
동주 멸망 후 한고제 유방도 처음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다 장안으로 정했다. 그러다 후한시절 광무제가 이곳에 도읍해 2백년을 지낸다.[8] 그러나 후한 말기 동탁이 반동탁연합군을 피해 낙양을 불태우고 화이어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낙양은 초토화가 된다. 거기다 조조가 도성을 허창으로 옮기면서 좀 안습이 되었지만 허창은 임시수도였을 뿐 곧 낙양 복구를 시작했다. 위나라가 세워지자 다시 낙양을 도읍으로 잡았으며 조비와 조예가 낙양에 화려한 전각들을 세우면서 낙양은 곧 수도의 위엄을 찾았다. 이때문에 아직까지도 이 곳 주민들은 동씨를 매우 싫어하는 반면에, 조씨는 대우해 준다고 한다.
뤄양의 '뤄'는 낙수에서 따온 말인데, 주공단이 낙읍을 경영하던 시기 때부터 낙수 락(洛)과 부엉이 락(雒)은 혼용되고 있었다. 지금 洛으로 고정되는 변천 과정은 오행설에 따른 것이다. 진나라는 오행 중 수덕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통일한 후에 낙수 락 洛陽을 정식 명칭으로 둔 반면, 화덕을 숭상한 한나라는 물수변이 들어간 洛을 떼고 낙양(雒陽)으로 개명해서 사용했다.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은 위나라는 토덕을 받들었기에 물이 흙을 살려준다는 오행상생설에 따라 도로 洛으로 되돌리고 이를 고정시켰다.
낙양은 위나라 멸망과 삼국통일 후 서진의 수도가 되었으나, 회제 때 침략을 받아 불태워졌다. 이 후 남북조를 거치며 다시 재건되었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부터 낙양은 '동도(東都)'로 불리며 수도 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된다.[9]이 때가 낙양의 전성기라고 할 만 하다. 이때까지는 거의 많은 왕조들이 '장안과 낙양을 오가면서' 통치를 했다.
3.2 쇠퇴기의 시작
그러나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송나라 이후부터는 역사상에서의 비중은 안습이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의 정치적 중심은 관중-중원의 내륙 지대에서 동부로 옮겨간다. 이렇게 된 이유는 기후환경의 변화가 주된 원인이지만, 기후환경이 심각하게 변해서 농사가 힘들어진 장안에 비해서는 기후환경의 변화가 크지 않아 별 타격을 안입은 낙양이 중심지에서 벗어난 가장 큰 이유는 내부 면적이 미묘하게 좁았기 때문이다.
일단 위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보호받는 경지면적이 의외로 좁다. 장안의 경우와 비교하면 1/5도 안된다. 이는 만일 국가급 전쟁에서 포위당했을 때 식량을 자체적으로 대량조달하기 어려우므로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형상 주변의 평야지역에 돌출된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이 주변 지역을 장악하기도 쉬운 편이다. 한마디로 말해 당장은 안전하지만 오래 버티기 힘든 곳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수도로서의 역사도 길어서 주변 지형이 널리 알려진 탓도 크다. 수도권에 속하는데다가 주요 관문이 평시에는 통행량이 많을 수 밖에 없으므로 지형에 빠삭한 사람을 굳이 현지 주민에서 찾지 않더라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세에는 낙양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략이나 전술을 반드시 1번 이상은 연구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대한 공격보다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공격이 가해지므로 수비군이 버티기가 더 힘들어진다.
세번째로, 지형중 남쪽에 큰 틈이 있다. 다른 방위선은 강이나 관문으로 차단되지만, 남쪽 통로는 제대로 된 관문을 설치할 수 없을 정도로 통로폭이 넓다. 이 때문에 남쪽에서의 공격에 취약하므로 남북조시대에는 유유나 진경지처럼 명장이 이끄는 남조의 병력이 종종 낙양을 탈환해서 한동안 유지한 적이 많다.
네번째로, 의외로 수비하는데 병력이 많이 들어간다. 낙양은 낙양성만 수비하면 땡이 아니며, 앞서 말한 관문을 수비하는 데 상당한 병력을 할당해야 하며, 흔히 알려진 관문이 호로관 정도고 추가적으로 함곡관 신관 정도지만, 낙양에는 이 관문들 말고도 관문이 상당히 많다. 오히려 황하쪽 출입구인 맹진도 장악해야 하고, 맹진등에 배치할 수군도 필요하다. 그리고 산맥 사이를 넘어올 군대등에 대비하기 위한 예비군도 갖추어야 한다. 이런 것을 소홀히 하면 관문과 거점이 몽땅 함락되면서 낙양성이 포위당하는데, 이렇게 전개되면 구원군이 낙양으로 올 통로가 한정되는데다가 적군이 점령한 관문등을 활용해서 구원군을 차단하기 때문에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기 딱 좋다. 서진의 멸망시에도 이런 약점이 작용했으며, 남조가 북조에게 낙양을 빼앗길 때에도 비슷한 과정이 전개되었다.
다섯번째로, 하북지방과 관중지방에 각자 독자적인 정권이 수립될 경우, 위치상 끼어버리는 형태가 되서 전장터가 되기 딱 좋다. 당장 관중지방의 입장에서는 경계선인 동관이나 함곡관에서 조금만 더 전진하면 낙양을 차지할 수 있으며, 낙양을 점령하면 하북지방이나 다른 곳으로 갈 교두보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하북지방의 입장에서는 낙양을 차지하면 관중지방의 입구인 동관이나 함곡관을 공격할 수 있으며, 대치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상당수의 적 병력을 해당 방면에 묶어두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전조와 후조가 격돌할 때나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나누어질 때 같은 사태시 낙양이 전장터로 변해서 폐허로 변하는 일이 많았다. 동주 시절만 하더라도, 걸어서도 지척인 거리에 정(鄭)나라가 있고 진(晋)나라가 이웃해 있어 정나라와 진나라가 강성할 시기에 낙양은 그 사이에 끼어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물론 춘추시대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존중해줬기 때문에 실제로 이 나라들이 낙양을 공격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서 송나라의 경우 수도를 대운하와 직결되며, 평야지형이지만 그물같은 수로로 보호받을 수 있는 개봉부를 선택한 것이다.
단, 수나라 말기에 봉기한 양현감과 이밀은 위의 단점을 과신해서 장안 공략의 중요함마저 내팽개치고 뤄양을 공격하는 데 집착하다 실패하고 천하를 건 쟁패에서의 기선잡기까지 놓쳐서 몰락한 바 있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고 해도, 역대 왕조의 수도 후보지로서의 입지는 괜히 얻어진 게 아니었단 소리다. 그래서인지 송나라 때는 서경(西京) 혹은 경락(京洛)이라고 부르며 우대하였다.
현대에는 중일전쟁 때 전투가 벌어져 중국군과 일본군은 뤄양에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낙양을 위시한 하남성 일대에 대기근이 들어 350만 명 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중국에서 만든 "1942" (영문명 Back to 1942)라는 영화다. 막장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이 일본군을 무찔러 승리하고 중국은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배상금을 받고 이곳 하남성 일대를 포함한 불쌍한 중국 국민들을 위해서 식량을 마구 퍼 주어 그나마 이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사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4 현황
현재 인구는 600만. 과거와 같은 정치적인 힘은 없어졌고 과거의 유산들이 많이 쇠잔해서 흔적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지만, 지금도 강을 이용한 경제적인 도시로써의 역할은 계속하고 있다.
5 특산품
두웨이[10] 당삼채[11]가 유명하다. 뤄양이 생산지라서 질 좋고 큰 당삼채도 싼 값에 살 수 있다. 문제는 운반이다.
6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낙양
후한 말과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언제나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다. 또한 아직 옥새가 미발견 상태인 경우 낙양을 수색하거나 탐색하다 보면 옥새를 얻을 가능성이 생긴다.
삼국지 4에서는 허창을 통해 들어오는 루트를 제외하고는 반격지가 모두 관문으로 막혀있어서 수비하기 매우 편리하며, 후반 시나리오에서는 인구 100만(!)도 손쉽게 초과할 수 있을 정도. 다만 동탁의 장안천도 직후 시나리오에서는 도시를 불태워버렸다는 것을 반영해서 규모가 쪼그라들거나 초토화되어 내정수치가 완전히 바닥인 공백지 상태로 나오기도 한다. 여러모로 헌제와 많이 엮이며 이벤트 발생조건으로 낙양 점유가 조건인 경우가 많다.
삼국지 5에서는 유일하게 상업치의 최대치가 990인 도시다. 낙양의 주변 도시인 업, 허창, 장안 등도 상업치가 900대 이상으로 높지만 990인 도시는 낙양이 유일하다. 상업 요충지답게 교통의 요지이기도 한데, 그 덕에 동서남북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 특히 후반에 삼국정립이 된 시나리오가 아닌 군웅할거 무렵의 시나리오라면...
삼국지 6에서는 상업치가 최대치인 200에 달하는 대도시이다. 제도를 건설할 수 있고 전투할 때의 지형이 방어가 쉽게 되어있다. 남쪽에 난 문과 북쪽의 문이 있는데 북쪽으로 나있는 문은 멀리 돌아가야하고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에 공격측에서는 보통 남쪽 문만 공격하다보니 방어 입장에서는 남문만 지키면 된다. 그리고 북쪽에는 오를 수 없는 높은 산과 절벽으로 막혀있는데 북망산을 나타내려고 만든 지형인듯. 두번째 시나리오인 189년 동탁의 야망를 선택해서 플레이하면 시작 후 얼마 안되어 동탁 세력의 천도 이벤트가 일어나 초토화되고 불타는 낙양을 매번 볼 수 있다.
삼국지 9에서는 지형조건을 고증해서인지 몰라도 대도시임에도 농업 최대치가 중소도시 수준으로 매우 낮다.[12] 다만 상업은 1000까지 올릴 수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 듯.
삼국지 10에서는 학술특화도시로 나오며 지력교습소와 태학이 동시에 있는 유일한 도시이기 때문에 일반 장수의 지력을 100까지 단련하는 것은 이곳만 가능하다.(다른 도시는 80까지만 가능하며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태학이 있다면 능력치단련의 효과가 올라간다.)단, 능력치 향상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시작부터 규모가 대인 것을 제외하면 딱히 좋을 건 없는 도시. 초기 시나리오에선 황제의 소재지라 낙양을 점령할 경우 황제가 손에 들어오지만 고정인 것이 아니고 황제를 옹립한 군주의 소재지따라 황제도 이동하기 때문에 도시 자체의 효용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다.낙양까지 가는길에 호로관, 함곡관, 동관등 관문이 많아 하내쪽만 조심하면 방어하는건 쉬운 도시라는 것은 장점.
삼국지 11에서는 대도시로 분류되어 있고 낙양 소속의 관문 1곳과 항구 2곳을 보유하고 있다.[13] 낙양 소속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육로로는 낙양으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쉽고, 내정 시설을 건설할 수 있는 빈터가 많은데다 배치도 괜찮아 매우 좋은 도시다. 다만 상대방이 수군을 운용할 경우 항구를 통한 공격으로 낙양을 위협할 수 있고, 수상에서의 원거리 공격이 낙양 본성까지 닿지는 않지만 내정 시설이 공격받아 피해를 입거나 파괴될 수 있다. 때문에 낙양을 완벽하게 방어해 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수군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 뭐 CPU 군주는 육로로만 낙양으로 공격해 오긴 하지만
삼국지 12에서도 대도시고 병력징발에 보너스가 있다. 다만 같은 대도시라도 전차를 생산할 수 있는 장안과 호표기를 생산할수 있는 허창, 연노를 생산하는 성도와 달리 달리 일반 중장만 생산할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사실 이건 업도 비슷하긴 하지만 또 초반부 시나리오 역사 이벤트를 켜두면 동탁이 바로 낙양을 불태우는데 부대시설이 하나도 안남고 싸그리 전멸하기 때문에 낙양을 이후 점거하면 재건에 살짝 애로사항이 있다. 거기에 역사 이벤트가 켜진 상태에서 잠시만 진행하면 조조가 날로 헌제와 낙양을 접수하기 때문에 조조는 순식간에 게임에서 대도시 두개를 보유한 유일한 군벌세력이 되어 질좋은 병력을 펑펑 양산한다.역시 13호 태풍 조건달
7 기타
코드기어스의 중화연방의 수도로 나온다. 황궁인 주금성이 위치해 있다고 한다.
신해철이 진행한 라디오 방송 고스트스테이션에서는 "낙양성의 복수"라는 전설의 허무 무협 비디오(…)에 대한 도시전설이 있었다. 주인공이 죽을 동 살 동 가족의 복수를 위해 낙양성으로 왔는데 흔한 무협 영화에서 주인공을 갈구는 놈들이 던진 기왓장에 주인공이 맞고 그대로 죽고 허무하게 Game over "끝" 자막이 떴다는 전설의 영화다.
- ↑ 사마광의 시 〈낙양 옛성을 지나며 (過故洛陽城)〉 의 구절. 원문은 "若問古今興廢事,請君只看洛陽城。" 이다.
- ↑ 사마광은 1천년 전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간격은, 그가 살던 시대와 장안의 전성기까지의 간격에 비해서 가깝다!!
- ↑ 일본어를 병기한 이유는 낙양의 낙 자가 일본어에서는 뜻이 변해 수도, 즉 교토를 상징하는 말이 되어 상당히 중요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교토 시내의 번화한 모습을 그린 병풍 라쿠츄라쿠가이즈(洛中洛外図)같은 문화재의 이름이나, 교토를 점령해 덴노와 조정을 손에 넣어 중앙 정치의 실권자로 올라서는 일을 일컫는 죠라쿠(上洛)같은 단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장안이 수도를 시사하는 단어인 점이 흥미롭다.
한국은 전한, 일본은 후한헤이안 시대에 중국을 모방하여 수도 교토(당시의 이름은 헤이안쿄)의 서부인 우쿄(右京)지역을 쵸안(長安), 동부인 사쿄(左京)지역을 라쿠요(洛陽)이라고 불렀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부지역은 쇠퇴하여 쵸안의 이름은 유명무실해지고 번성한 동부지역만 남아서 라쿠요가 교토의 대명사가 됐고 낙양의 낙자가 교토를 뜻하는 한자가 되었다. - ↑ 반대로 강의 남쪽 지역에 붙는 접미사는 음(陰)이다. 때문에 회수(淮水)의 이남은 회음(淮陰)이라는 지명이 붙는데, 유명한 한신의 작위 회음후는 이 지역을 분봉받은데서 온 것이다.
- ↑ 참고로, 북쪽의 산악 지역을 '망산', 또는 '북망산'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에 과거 공경이나 왕후의 무덤이 많이 만들어져 훗날 저승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 ↑ 여담으로 함곡관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흔히 알고 있는 함곡관으로 시안과 뤄양의 사이에 있으며(후한-삼국시대의 홍농에 있다. 지금 지명으로는 링바오 시의 북쪽.), 사실은 이게 관중과 중원을 구분하는 경계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후한시대 낙양이 수도가 되면서 수도 방위용으로 옛 함곡관과 낙양 사이에 함곡관을 새로 만든 것이다.
- ↑ 수양제 때, 동도라고 불렀다. 하지만 하나라의 경우 존재 여부가 아직 확실치 않기 때문에 존재가 확인된 상나라부터 셀 경우 도읍으로 삼은 기간에선 시안에게 밀린다.
- ↑ 다만 당시의 낙양은 지금의 뤄양과 위치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당시의 낙양도 지금의 뤄양의 일부지만 지금의 중심지보다는 약간 동북쪽에 있었으며(위의 지도상으로는 뤄양 시와 옌스 시(Yanshi) 사이), 지금의 뤄양 자리에는 하남현이 있었다고.
- ↑ 여담으로 이 시기에 낙양의 위치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수양제가 낙양을 동쪽의 수도로 만들면서 현 위치에 롸끈하게 토목 공사를 벌여 지은 것.
- ↑ 이 전설적인 축구선수도 뤄양 출신이다.
- ↑ 중국 당(唐)나라 전기(7세기 말~8세기 초)에 만들어진 백색 바탕에 녹색, 갈색, 남색 등의 유약으로 여러 무늬를 묘사한 도기를 말한다.
- ↑ 사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대대로 낙양의 농업 관련 수치가 그닥 높지 않은 편이었다.
- ↑ 함곡관은 그냥 보면 마치 낙양 소속 관문같지만 실제로는 장안소속의 관문이다.
그러니까 위에 함곡관에 대해서 서술한 것을 보면 알겠지만 후한-삼국시대 한정으로는 고증이 잘못된 거다즉, 낙양만 먹은 상태에서는 함곡관을 먹어도 함곡관에서는 금, 병량 수입이 들어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