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제국 የኢትዮጵያ ንጉሠ ነገሥት መንግሥተ | ||
국기 | 국장 | |
1137년 ~ 1974년 | ||
표어 | ኢትዮጵያ ታበፅዕ እደዊሃ ሃበ አግዚአብሐር (에티오피아 사람이 손을 들어 하느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 |
국가 | 에티오피아여 행복하라 | |
위치 | 동아프리카 | |
수도 | 아디스아바바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황제 | |
언어 | 게즈어(공용), 암하라어 등등 | |
종교 |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국교) | |
주요사건 | (1137년 성립) 1894-95년 이탈리아와 전쟁 1931년 헌법 제정 1936년 이탈리아에 정복당함 1941년 국가회복 1974년 쿠데타→멸망 | |
통화 | 비르 | |
성립 이전 | 자그웨 왕조 | |
멸망 이후 |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1] |
1 개요
동아프리카에 있던 제국. 나중에 공산주의 혁명으로 무너진다. 한국과는 6.25 전쟁으로 인연이 있었다.
2 자연
국토의 거의 전체가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아프리카답지 않게 춥고 서늘하다. 당장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도 해발고도가 2,300m 이상이라서 여름, 겨울 없고 1년 내내 봄, 가을같은 기후에 속하며, 최고 기온이 33도를 넘은 적이 없다. 의외로 폭염 걱정 안해도 될듯 온대기후 항목과 여기, 여기 참고. 적도 인근에 붙은나라에서도 겨울엔 심지어 눈도 내린다고... 게다가 날씨도 건조한 편이기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은 사시사철 긴팔옷을 입는다.
에티오피아 북부엔 아파르 족이 거주하는 다나킬 사막이 있는데 이 사막 지대의 달롤은 세계에서 가장 더운 곳이다. 이 지역의 해발고도는 아주 낮아 -130m 정도이고, 극도로 건조하며 화산성의 형형색색의 기괴한 호수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이 곳의 연평균기온은 34.4℃로 대구의 8월 평균기온 26.4℃와 비교해 보면 압도적으로 높다.
에티오피아에는 특이하게 오스트레일리아 재래종으로 유명한 유칼립투스 나무가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다. 오랫동안 행한 벌목으로 숲이 크게 줄어들어 황무지가 늘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칼립투스를 수입해서 심었는데, 예상보다 나무들이 잘 자라서 큰 숲을 이루었다. 정작 고향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기후 변화와 자연 파괴로 유칼립투스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3 역사
에티오피아 역사의 시작은 수많은 고대 제국이 세워졌던 기원전 1,0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000년대 초반의 에티오피아에는 초기 농업과 목축 기술을 익힌 부족 집단이 살았다. 이후 고대 이집트 문명이 번창했을 때,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는 금, 흑요석, 상아 등의 귀중품을 교환하는 교역로를 설립하였다. 당시의 에티오피아 주민은 푼트 지역에 살며 아직도 에티오피아 문화에 일부 남아 있는 다양한 초기 농업 기술을 개발하였다.
에티오피아의 초기 왕국 중 가장 강력했던 악숨 제국에 대해서는 역사에도 잘 기록되어 있으나 전설로만 전해지는 부분도 많다. 기원전 4세기경에 건국된 악숨 제국은 그 후로 500년 동안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에티오피아에 널리 퍼져 있는 나무에서 나는 귀중한 물자인 유향과 몰약은 악숨 사람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 주었다. 이러한 상품의 수출에 더해 상아나 귀금속 등의 수익성 좋은 물자를 교역함으로써 악숨은 이집트, 로마, 인도를 연결하는 교역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악숨은 이렇게 얻은 부를 바탕으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화폐를 주조하였다.
그러나 번영에 가득 찬 수세기가 지나간 후, 전설에 따르면 반란으로 구디트 여왕이 정권을 잡은 후 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악숨은 오래도록 기독교를 지지하는 지역이었는데 유대인인 구디트 여왕이 정권을 잡기 위해 농촌을 파괴하고 악숨 황족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구디트의 일생과 통치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논란의 대상이나 10세기에 그녀가 등장한 것과 악숨이 몰락하기 시작한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악숨이 무너지고 난 12세기 초반에 설립된 자그웨 왕조는 20세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에티오피아 제국의 시발점이다. 자그웨 왕조는 1세기 남짓 권력을 유지했을 뿐이지만 에티오피아 전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공헌했으며 이는 에티오피아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270년에 예쿠노 암라크 황제가 일으킨 솔로몬 왕조는 그 이후로도 수세기에 걸쳐 에티오피아를 지배했다. 솔로몬 왕조의 지도자들은 성경에 언급되는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과 그의 왕비 마케다가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에 마케다 여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시바 왕국(현대 에티오피아에 편입되었다고 여겨지는)을 떠나 이스라엘로 가서 존경받는 솔로몬 왕의 지혜를 배웠다고 한다. 솔로몬과 그녀의 관계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녀는 솔로몬의 아들 메넬리크 1세를 낳게 된다. 메넬리크 1세는 솔로몬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 전 솔로몬에게서 전설의 언약궤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950년경에 즉위한 메넬리크 1세는 성경에 언급되는 혈통의 시조로써 이후의 에티오피아 황제들에게 추앙받는다.
근대 에티오피아의 근대적 개혁은 지방 총독이던 테오드로스에 의해 본격화된다. 그는 군사 공장을 설치하고 지방 군벌들을 억눌렀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려 하자 교회의 반발을 겪게 되고 1868년에는 영국 원정군의 침략을 받게 되어 자살했다. 이후 권력은 티그라이의 요하네스 4세에게 넘어갔고, 요하네스 4세는 에티오피아의 통일을 위해 군사력과 외교력을 총동원하는 한편 셰와의 메넬리크와 혼인 동맹을 맺는 등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그는 수단의 무슬림 군대와 전투하는 와중에 전사하게 된다.
이후 1889년 즉위한 것이 바로 메넬리크 2세였다. 메넬리크 2세는 셰와의 관료제를 국가 통치에 도입하는 한편, 아디스아바바로 천도하면서 전선과 전화, 우방국 프랑스의 식민지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의 중심도시 지부티와 아디스아바바를 잇는 철도 등을 부설하고 에티오피아 최초의 현대식 병원과 학교를 개축하면서 본격적인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기관총을 비롯한 군사 무기의 도입과 군대의 육성에도 노력하여, 남쪽과 동쪽으로 식민지 정복활동을 했으며, 이는 에티오피아의 면적이 이전보다 두배나 확장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위험은 커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홍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지부티를 장악했고 영국은 수단 남부와 소말릴란드를 강탈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뒤늦게 들어와 에리트레아와 지금의 소말리아 동남부 지역 일부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마침내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기 위해 내란에 가담하는 형식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 등의 비호를 받던 에티오피아에 의해 1896년아드와전투에서 격퇴됨에 따라,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유일한 독립국으로 남게 된다.
1913년에 메넬리크 2세의 외손자인 이야수 5세가 에티오피아의 왕이 되었지만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가 국교인 나라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등 행동거지가 에티오피아인들 마음에 영 들지 않았다. 결국 1916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외세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 인들에 의해 권좌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메넬리크 2세의 딸인 자우디투가 에티오피아의 여왕으로 즉위했으며, 그녀와 6촌관계인 타파리의 도움을 받으며 1930년 죽기 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1930년 자우디투는 타파리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으며 하일레셀라시에 라는 칭호를 얻었다. 셀라시에는 메넬리크 2세의 현대화 정신을 계승하여 1931년 에티오피아 최초의 성문헌법을 채택했다. 그는 곧 입헌군주제를 실시하였으며, 여러 근대 문물을 들여온 근대화의 상징으로써 존경받았다. 이탈리아에 대한 항전에서도 크게 활약하였고,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창설을 제창하였으며 자메이카에선 살아있는 신으로 모셔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935년,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기어코 에티오피아를 합병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국제연맹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 무솔리니는 노력을 기해 독가스까지 동원하면서 1936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입성, 황제를 영국으로 쫒아내었으며 에티오피아를 병합했지만 1941년 치열했던 아프리카전이 끝나갈 때 즈음,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황제는 이탈리아군을 쫒아내었고 권좌에 복귀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1950년한국전쟁 당시 군대를 파견한 나라였으며, 1968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정도로 한국과 가까운 사이었다. 국가기록원 영상자료에 보면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방한 영상이 있다. 당시 황제의 방한 영상에티오피아의 영토였다가 1880년대에 이탈리아에게 빼앗겼던 홍해 연안의 에리트레아지역을 1952년 에티오피아가 다시 차지했다.
이후 황제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남았는데 전쟁의 여파와 경제개발 실패가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극심한 기근과 실업 또한 심각한 문제가 되었으며 1960년 에티오피아는 남동부에 있는 오가덴지역을 두고 소말리아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1961년 에리트레아가 독립을 주장했는데 정부가 소말리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다 라는 태도로 일관하며 콧방귀를 치고 무시하자 에티오피아 내전(...)이 발생했다.
한국과의 관계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급격히 냉각되어 현재는 뭐... 그 외에도 쿠바 역시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에 여러 지원을 해주었지만, 그건 바티스타 정권 때였고,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후 공산주의 국가가 되며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며 북한에게 친화적으로 변했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황제의 어정쩡한 태도는 곧 국내 통치에는 극히 무능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기근으로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손만 빨고 있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보통 에티오피아가 잘살다가 공산 체제 하에서 망가진 것으로 여겨지기 쉬운데 실제로는 이전부터 한국과 다를 게 없는 최빈국이었던 것이다. 즉 잘해봐야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전 국왕과 별 차이가 없었던 셈.
결국 민심이 황제를 떠났고 얼마 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중령을 중심으로 한 군의 소장파 장교들이 1974년 쿠데타를 일으켜 에티오피아 제정을 폐지했다.그 결과 에티오피아는 멩기스투에 의해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하였으며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 반동으로 미국은 소말리아의 독재정부에 지원을 퍼부어 친미 정권으로 만들었으며 에티오피아 반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4 왕사
- 메넬리크 2세 - 1889~1913년
- 이야수 5세 - 1913년~1916년. 메넬리크 2세의 외손자로 즉위했으나,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자칭한데다 1차대전에서 동맹국 편에 가담하려 하자 폐위되었다.
- 자우디투 - 1916년~1930년. 메넬리크 2세의 딸
- 하일레셀라시에 1세 - 1930년~1974년.
- ↑ 데르그 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