淵男建
(? ~ ?)
고구려의 권신.
1 개요
고구려 말기, 보장왕 때의 권신으로,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이었다. 형으로는 연남생, 동생으로는 연남산이 있다.
연개소문의 세 아들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끝까지 당나라에 맞서 싸웠던 인물로, 나머지 두 형제는 훗날 당나라에 귀순하여 천수를 누렸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삼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생몰년이 미상이며,[1] 그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없다.[2]
2 생애
2.1 권력투쟁
665년,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자 맏형 연남생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 대막리지가 되었다. 이듬해인 666년, 연남생이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는 동안 연남건은 동생인 연남산과 함께 수도에 남아 뒷 일을 맡아 보았다.
그러던 중에 측근들로부터 맏형 연남생이 동생들을 믿지 못하니 장차 모두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연남생이 수도에 남기고 온 자신을 의심하여 밀정을 보내 염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왕명을 칭해 연남생을 수도로 불렀다.
그러나 연남생이 이에 응하지 않자 결국 형을 의심하고는 동생 연남산과 더불어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서 수도를 장악하였다. 이때 수도에 머물던 연남생의 아들인 연헌충을 살해하였으며, 남건 스스로 대막리지의 직위에 올라 대권을 장악하였다.
2.2 고구려 멸망
이후에 연남건은 군사를 보내 지방에 순시를 나가있던 연남생의 세력마저 토벌하려 하였으나 연남생은 국내성에 숨어 이를 방어하면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끝내 투항하고 말았다.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은 당나라 군대와 결탁하여 고구려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었다.
결국 수도인 평양성마저 당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에 보장왕과 연남산은 몇몇 귀족들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당군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연남건은 끝까지 당나라군에 맞서 싸울 것을 주정하였다. 그러나 연남건은 교전에서 당나라군과 수차례 맞붙었다가 패하여 전세는 점차 기울어갔다.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연남건이 항복하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은 남건의 심복 승려 신성이 다른 장수들을 선동하여 결국 당군과 내통하여 평양성의 성문을 열어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2.3 이후의 삶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하자 연남건은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당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후 연남건은 당나라로 끌려갔다가 쓰촨성 첸저우(黔州)에 유배되었는데, 이후의 삶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끝까지 저항하다가 붙잡혔으니 그리 곱게 죽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면에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과 연남산은 죽은 후에 그들의 행적과 삶에 대해 기록된 묘지명을 남겨 이후의 삶이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