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생

淵男生

(634 ∼ 679)

고구려 보장왕 때의 권신. 남생아 놀아라 본격 고구려판 이완용

1 개요

고구려 말기의 권력자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의 맏아들이었다.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뒤를 이어 2대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두 아우인 연남건, 연남산 등과 불화가 생겨 권력 투쟁을 벌이던 끝에 당나라에 투항하였고,[1] 이후에 고구려의 멸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들로는 연헌충(淵獻忠) 연헌성(淵獻誠)이 있고, 손자로는 연현은(淵玄隱), 연현정(淵玄靜), 연현일(淵玄逸)이 있다.[2] 증손자로는 연현은의 아들인 연비(淵毖)가 있다.

죽은 후에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기록된 묘지명을 남겼다. 덕분에 고구려의 인물들 중에서도 드물게 전반적인 생애에 대한 기록이 잘 남아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일생

634년에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641년에 아버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자 곧바로 이듬해부터 벼슬을 지내게 되었다.

642년에는 선인(先人) 벼슬을 얻었는데, 그때 연남생의 나이는 9세였다(...).[3] 이후에 15세에는 중리소형(中裏小兄)에 봉해졌으며,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어 국정을 주도하였다.

23세에는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에 임명되었고, 24세에는 장군직을 겸하였다. 그리고 28세에는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莫離支兼三軍大將軍)이 되었다.

이후 661년 9월에는 연개소문의 명에 따라 수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수비하게 되었는데 당나라 장수 계필하력과 싸워서는 크게 패하여 3만 군사를 잃고 달아났다. 이후 당나라 군대는 몇개월동안 평양 근처에 주둔하였으나 이듬해인 662년 정월에 연개소문이 집적 사수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을 무찌르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리고 665년, 마침내 연개소문이 죽게 되자 32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군사와 나라의 업무를 총괄하는 등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2.2 권력 투쟁

대막리지가 된 연남생은 대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맡게 된 후, 지방으로 가서 여러 성을 순시하게 되었다. 이때 두 아우인 연남건연남산 등을 수도에 남겨두어 뒷일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이때 연남건과 연남산의 측근들이 두 사람에게 와서는 연남생이 필시 그들을 죽이려 할 것이므로 먼저 손을 써서 선빵을 날려야 한다고 고하였다. 그러나 연남건과 연남산은 이를 믿지 않았다.

한편 연남생 역시 두 동생들이 난을 일으켜 연남생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려 하려 한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연남생 역시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지속적인 이간질에 의해 결국 동생들에게 의심을 품게 된 연남생은 친한 사람을 밀정으로 보내서 동생들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그만 밀정이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형을 의심하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왕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불렀으나 연남생은 동생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해 돌아오지 않았다.

666년, 연남건과 연남산은 결국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였고, 급기야는 연남생의 아들인 연헌충마저 살해하고 말았다. 정변 직후에 스스로 대막리지가 된 연남건은 군사를 보내어 연남생의 세력을 토벌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연남생은 국내성에 숨어서 이를 방어하는 한편 아들 연헌성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2.3 고구려 멸망

연남생의 전갈을 받은 당고종은 사신으로 파견된 연헌성에게 벼슬과 재물을 하사하여 국내성으로 돌려보냈으며, 장군 계필하력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 연남생을 맞아들이도록 하였다.[4]

666년 6월에 연남생은 국내성을 비롯한 6개 성의 주민과 목저성(木底城)·남소성(南蘇城)·창암성(倉巖城) 등 3개 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그해 9월, 연남생은 그 공으로 당고종으로부터 특진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特進遼東都督 兼 平壤道 安撫大使)의 벼슬을 받고 현도군공(玄莬郡公)에 봉해졌다.[5] 이렇게 하여 한때 고구려 최고권력자였던 연남생은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의 향도가 되고 말았다.

668년, 당나라신라의 협공을 받은 고구려는 수도인 평양성마저 공격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연남생의 아우였던 연남건은 끝까지 평양성을 지키며 당군과 싸우려 했지만 연남건의 심복이었던 승려 신성이 당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주고 말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2.4 이후의 삶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연남생은 공을 인정받아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의 벼슬을 받았으며, 3000호에 달하는 식읍을 하사받았다. 이후로 연남생은 한동안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에 676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고구려 부흥 세력에게 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당나라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옛 땅에서 다시 부흥 운동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게 되었다.

당나라 조정은 고구려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677년, 연남생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연남생은 이후로 안동도호부에서 근무하다가 679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죽은 연남생의 유해를 중국 땅으로 옮겨와 낙양북망산에 매장하였다. 이때 연남생의 일생과 관직, 가계도 등에 대해 기록한 묘지명을 남겼는데, 이 묘지명은 1946년에 발굴되었다.

3 평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사론에서 연남생을 아버지인 연개소문이나, 아들인 연헌성 등과 더불어 반역자라고 무자비하게 까고 있다(...). 그나마 연개소문은 당나라와 싸우고 죽었지만 연남생과 연헌성은 그대로 당나라에 투항해 버린 것에 대해서는 '남생, 헌성은 당나라에는 공신일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반역자다.'라고 딱잘라 평가를 내리고 있다.[6]

이런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고구려가 멸망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하여 대개 매국노로 평가되어 왔다. 아주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때는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였던 사람이 결국 자기 나라에서 도망쳐나와 망하게 만들었으니 일생 자체는 꽤 기구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연남생이 두 동생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느라 고구려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7]

한편 연남생이 죽은 후에 남긴 묘지명에는 기존의 사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연개소문 가문의 가계도와 집안에 대한 내력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후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4 창작물에서의 연남생

왠지 열폭형 캐릭터인 경우가 많다.(...)

사극 연개소문에서는 안재모가 연기했다. 심하게 무능하거나 찌질하거나 인성이 개판인 인물로는 나오지 않지만[8] 아버지와 비교하면 영 떨어지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연개소문도 연남생이 자기 뒤를 이을 만큼 유능하지는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놈이 자리를 못 지킬 정도로 무능하면 그에 걸맞은 인물이 나타나 대막리지 자리를 차지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대막리지 자리를 넘겨줬는데, 그 직후 연남생의 동생들이 변란을 일으켜 형 가족을 몰살하고 고구려도 뒤엎으면서 망했어요. 이후 행적은 역사와 비슷하다. 그래도 이 쪽에서는 고구려 멸망의 책임을 연남생보다 그 동생들에게 훨씬 크게 묻고 있다.[9]

비슷한 사기에 방영한 사극 대조영에서도 등장. 왕 전문 배우임호가 연기했다. 여기선 아버지인 연개소문에게 본인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은 주인공인 대조영에게 열폭하는 캐릭터로 등장. 주인공이 대조영인 만큼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역할이 상당하다. 그리고 이 두 사극에서 연남생을 연기한 두 배우는 정도전에서는 정몽주이방원으로 만나게 되었다. 영혼이 둘로 쪼개져 환생한 것도 기가 막힌데 한 쪽이 한 쪽을 죽여야 하다니 오호 통재라.

KBS 2TV 드라마 칼과 꽃에선 노민우가 연기했다. 꽃미남인 배우 덕분에 역대 연남생 중에선 가장 외모가 뛰어나지만, 역시 주인공이자 연개소문의 서자인 이복형 연충에게 열폭하는 캐릭터로 등장. 상찌질이로 등장했다.

영화 평양성에선 윤제문이 연기하였다. 처음부터 당나라와의 협상을 주장하였으나 주전파인 연남건에게 투석기로 날려져 버린다. 근데 하필이면 떨어진곳이 당나라 이적 장군의 막사였고, 그대로 당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해버린다.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고구려와의 연계를 꾀하던 중 연개소문 아들이 왔다고 히히덕대며 들어온 김유신만 골아프게 된다.

고구려의 신무기와 보급품 테러로 사기가 오른 남건의 성격을 잘 알던 남생은 퇴각하는척 하며 동생의 기마부대를 유인하여 괴멸시키고 남건에겐 부상을 입힌다. 그리고 형제끼리 싸우는걸 싫어하던 연남산에게 접촉, 남건의 신변을 보장해 준단 조건으로 평양성 성문을 열어줄것을 약속받는다.

마지막 전투에서 평양성이 함락되고, 남건이 몸에 창이 박힌채로 죽어가자 '그러게 형 말 들으랬잖아 새끼야!'라고 울부짖는데 비록 생각은 정 반대였어도 그래도 동생을 아끼기는 했던 모양. 게다가 요동일대를 넘겨받기로 했는데 당나라가 직접 통치한단 선포에 이적에게 항의했다가 계필하력에게 얻어맞곤 이마가 깨져 피가 흐른다. 이후에는 등장은 없는데, 아마도 실제 역사대로 흘러갔을 소지가 크다.
  1. 비슷한 시기 연남생의 삼촌이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남쪽의 신라에 투항했다.
  2. 모두 연헌성의 아들들이다.
  3. 비록 선인은 조의와 더불어 고구려에서 상당히 낮은 직책이었지만 당시 연남생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관직 생활은 엄청나게 빨리 시작했다(...).
  4. 계필하력은 당태종 시절부터 수차례 고구려 공격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최대의 적이었던 연개소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출정했다니 참 기분이 묘했을 것이다(...).
  5. 구당서, 신당서 등을 비롯한 중국 측 사서에서는 사지절 요동대도독 상주국 현토군 개국공(使持節 遼東大都督 上柱國 玄菟郡 開國公) 식읍 3,000호에 봉하였다고 되어있다.
  6. 삼국사기가 쓰여진 시대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시대였던지라 더욱 평가가 박하다.
  7. 당시 당나라도 내부적(측천무후)으로든 외부적(토번)으로든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 시기만 잘 넘겼으면 망하지 않았을수도 있다지만 멸망당시 고구려 상황을 봐도 이러한 적국의 문제점을 이용했을 만한 인물(실권없던 보장왕이나 남건/남산 형제등만 봐도....)도 보이지 않았고...
  8. 전쟁에 참여해 승리한 적도, 패배한 적도 있다. 명장 급은 아니었지만 전쟁에 나서기만 하면 백전백패를 기록하던 신검같은 녀석과는 달랐다. 또 최소한 연남생쪽에서 먼저 동생들을 괴롭히거나 제거하려고 하는 면모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9. '물론 연남생도 잘 한 건 아니지만 동생놈들이 형 가족을 도륙내고 형도 쫓아내 갈 곳 없게 만들었으니 연남생이 어딜 가겠냐? 길에서 객사하거나 동생들 손에 죽을 수는 없으니 당에라도 투항해야지.' 딱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연남생의 투항도 본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당에라도 투항해서 가족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아들 연헌성의 강권에 하는 수 없이 가는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