淵男産
(639 ~ 702)
고구려의 권신.
1 개요
고구려 말기의 권신으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이다. 형제로는 두 형인 연남생과 연남건이 있고, 아들로는 연광부(淵光富)가 있다.
형인 연남건과 더불어 연남생을 몰아내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후에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보장왕과 함께 항복하였고, 이후로 일생을 당나라에서 살다가 죽었다.
2 생애
639년(영류왕 22)에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18세의 나이에 대형(大兄)이 되어 국정을 주도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23세에는 위두대형(位頭大兄)이 되었다.[1]
665년, 아버지였던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이 죽고 맏형인 연남생이 뒤를 이어 대막리지가 되었는데, 이듬해인 666년에 연남생이 지방에 나가 여러 성을 순시하던 중에 동생들을 의심하여 수도에 밀정을 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에 왕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수도로 불렀으나, 연남생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맏형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함께 수도에 머물던 연남건과 더불어 정변을 일으켜서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을 살해하고 수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머물던 연남생은 수도에서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국내성에 들어가 두 동생과 권력 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에 666년,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터졌다.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은 당나라 군대의 앞잡이가 되어 고구려 원정의 인도자가 되었으며, 결국 668년에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에 연남산은 보장왕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당군에 투항하였다. 그러나 연남산의 형 연남건은 끝까지 당군에 맞서 항전하다가 심복인 신성의 배신으로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사로잡혀 유배를 갔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고구려가 망한 후에 당나라 조정은 연남산을 사재소경(司宰小卿)에 봉하였으며,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로 연남산의 작위는 요양군 개국공(遼陽郡 開國公)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잃은 충격 때문인지 연남산은 여생을 우울하게 살았다고 한다. 결국 연남산은 702년에 죽었다.
연남산이 죽은 후에 그의 시체는 맏형인 연남생처럼 낙양 북망산에 매장되었고, 또한 맏형과 마찬가지로 묘지명이 남겨졌다. 이 묘지명은 먼 훗날인 1940년대에야 발굴되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