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올드리히 네예들리 (Oldřich Nejedlý) |
생년월일 | 1909년 12월 26일 |
사망년월일 | 1990년 6월 11일 |
국적 | 체코 |
출신지 | 제브라크[1]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신체조건 | 174cm / 74kg |
등번호 | -[2] |
소속팀 | 스파르타크 제브라크(1925~1926) SK 라코브니크(1926~1931) 슬라비아 프라하(1931~1941) SK 라코브니크(1942~1950) 스파르타크 제브라크(1950~1956) |
국가대표 | 44경기 / 29골 |
1934 FIFA 월드컵 득점왕 | ||
올드리히 네예들리 |
체코의 수정
1 1934년 월드컵
고향팀인 제브라크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네예들리는 SK 라코브니크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1931년에 체코의 대표적 명문 클럽 중 하나인 슬라비아 프라하로 옮겼다. 그 시즌에는 국가대표팀에도 데뷔했고 차근차근히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1934년 월드컵에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으로 출전한 네예들리는 대회 4경기에서 5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쳤고, 특히 독일과의 4강전에서는 해트트릭을 성공시키며 팀을 결승전까지 이끌었지만 배수진을 친 개최국 이탈리아에게 패배하였고 득점왕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2006년 11월에 FIFA에서 대대적인 기록의 재검토를 펼쳤고 그 결과 초기 월드컵의 득점 기록에 수정이 가해졌다. 초대 월드컵에서 파테노드가 최초의 해트트릭 기록자로 이름을 올렸고, 1934년 득점왕도 네예들리의 단독 득점왕으로 기록이 바뀌었다. 그 이전에는 이탈리아의 안젤로 스키아비오, 독일의 에드문트 코넨과 함께 4골로 공동 득점왕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즉, 네예들리가 1934년 월드컵에서 공동 득점왕으로 기록되어 있다면 기록이 작성된 시기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월드컵에는 함정이 있다. 바로 무솔리니 정권이 총칼로 네예들리 등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을 공갈협박했던 것. 결국 경기가 끝나자 네예들리는 결기장을 빠져나오면서 "비록 패했지만 살아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2 1938년 월드컵
지난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네예들리는 절치부심하여 프랑스에서의 월드컵을 준비하였다. 네덜란드를 맞아 첫 경기에서 연장에만 3골을 넣고 올라왔고 다음 상대는 남미의 강호 브라질이었다. 보르도에서 그들은 엄청난 혈전을 치렀고 출혈도 정말 컸다. 싸움 수준의 난동을 부려야만 퇴장을 주고 경기에서의 웬만한 파울에는 퇴장을 잘 주지도 않던 시기에 4명이나 퇴장을 당할 정도면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이 혈전을 펼치고도 승부가 나지 않았던터라 재경기를 치렀는데 이 재경기에서 브라질은 9명, 체코슬로바키아도 6명의 선수가 바뀌었고 어쨌거나 브라질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꺾고 4강에 갔다.
네예들리는 전반 14분에 브라질의 수비수 제제 프로코피우에게 팔꿈치로 가격을 당했고 프로코피우는 퇴장을 당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페널티킥으로 골을 성공시켜 동점을 만드는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이 경기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고 결국 6명의 교체 선수 중 하나가 되면서 자신의 월드컵을 마감하고 말았다.
3 은퇴 이후
1956년까지 고향팀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네예들리는 1990년에 향년 80세로 라코브니크에서 사망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분리 이전의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에서 네예들리는 안토닌 푸치(31골)의 뒤를 이어 29골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스트라이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꽤 잘생긴 외모로 별명이 수정이었다.
5 수상
5.1 클럽
체코 퍼스트 리그 우승 4회: 1931-32, 1935-36, 1937-38, 1938-39(이상 슬라비아 프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