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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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전설이 된 손현주거지 연기.

1 소개

직업, 거취가 없이 남에게 구걸을 해서 그걸로 겨우 먹고사는 사람.
파워블로거지
받을 줄만 알고 줄 줄 모르는 사람[1]
한자어로는 乞人, 丐 등으로 쓴다. 영어로는 beggar, panhandler, pauper 등의 단어를 쓴다. Panhandler는 구걸 행위에, pauper는 가진 게 없음에 촛점이 맞춰진 단어이다.
시적 표현으로는 거리의 천사

2 상세

소련마냥 엄격한 공산주의체제가 아닌 이상, 인류의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는 직업. 엄밀하게 정의하기 위한 말이 이렇다 뿐이지 사실 일부 공산국가에도 있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직업을 갖게 되면 자동적으로 사회복지 시스템에 등록이 되는 방식이다. 다시말해, 직업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사회복지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고 의료, 보험, 주거등의 혜택에서 이탈하게 된다.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국가에서 사회복지 시스템에 등록이 되지 않은 사람들의 숫자도 엄연히 존재했다. 여담으로 웃기는 상황이긴 한데 중국의 록 가수 최건이 8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록 밴드를 구성하고 활동할 요량으로 베이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탈퇴했을때 록밴드가 제대로 된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무직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이러한 서비스에서 제외된 바 있다. 뜻하지 않게 거지취급을 받은 것(...)

3 근대화 이전

기실 이러한 거지라는 직업은 사회가 산업화 되기 전까지는 매우 자연스러운 직업군 중 하나였다. 단적으로 60에서 70년대생 세대만 해도 동네를 해마다 들르던 거지들을 기억하던 사람이 많다. 사회가 본격적으로 사람을 노동력으로 분류하기 시작한 산업시대 무렵부터 '노동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나갔고,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거지들이 원하지 않는 직업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거지들은 떠돌이였고, 많은 경우에 빌어먹기 위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판소리 명창들은 전국을 떠돌며 공연했고, 조선시대의 오락을 담당한 많은 이들이 이러한 떠돌이었다. 많은 수행승과 이름없는 선비들이 전국의 명산을 유람했고, 유람의 과정에서 이들도 마찬가지로 구걸[2]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거지의 정체성은 상당히 모호한 편이다.

보통 무리를 만들어 다니는 경우가 잦았는데, 크게는 100명 가까이 하는 거대 집단이어서 이들의 우두머리인 꼭지는 조직폭력배인 검계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위치였다. 일화 하나로 한 궁중에 초청까지 올 정도로 유명한 예인에게 꼭지의 생신에 와서 풍악을 연주하라는 요청에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자, 꼭지가 직접 와서 "니 집에 불을 지를 수 있다."고 협박을 하자 공연을 허락했을 정도.... 그리고 생신날 거지들이 즐겁게 놀면서 구걸해온 재료로 만든 음식을 예인들에게 대접했다 한다. 또한 영조가 거지들을 우대하는 령을 내리자 생신날 대궐 밖에 모여 다 함께 떼창함성으로 생신을 축하했다고. 그밖에도 일부 세력이 큰 집단들은 지네두꺼비를 잡아 한약방에 팔거나 잔치가 있을 때 다른 세력의 거지들이 물을 흐리지 않게 한다거나 이이제이 하면서 벌이를 하기도 했고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을 해먹을만큼 여유가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렇게 큰 규모의 거지들은 밥은 빌어도 반찬은 안 빌어먹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오십보 백보

예전에는 신기하게도 어느 동네에 가든 동네 바보나 거지가 꼭 한 명씩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복지시설이나 정신이상자들을 치료하는 기관에 바로 입원시키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이런 동네 거지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산업사회에 접어들어 이런 떠돌이 예능인, 직업군이 이상한 것으로 치부되고 사회체계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이 본격적으로 사회의 일부로 예속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그 정체성을 명확히 갖추고 정체성을 수호할 만한 집단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많은 직업 혹은 인종'들이 핍박받았는데 이러한 핍박과정에서 거의 모든 거지들은 소멸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유대인과 함께 '떠돌이 집시'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폭발한 홀로코스트 이후로, 이러한 현상에 대한 재조명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근대에 이들이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농업사회에서는 떠돌아 다니는 것만으로 상인도 통제와 억압의 대상이었다. 동아시아권에서는 특히 유교가 사회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기를 요구하면서 유랑민에 대한 회유와 통제에 나섰고, 중세 유럽에서도 떠돌아 다니는 이들은 통제된 장원 질서를 흐트릴 수 있는 유랑민으로서 경계의 대상이었다. 10 ~ 12세기 경에는 청빈하기를 강조한 수도사들의 탁발 운동이 성행하면서 걸인들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12세기 이후에는 청빈에 대한 인식이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하면서 검약을 통해 청빈해지는 것'으로 전환되면서 다시 걸인들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거지들과 이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던 예능인들이 전통적으로 천민으로 대접받았던 것만 봐도, 거지들이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까지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거지들이 농경사회에 더욱 많이 존재했던 것은 기본적으로는 토지 소유가 생존과 직결되었던 시대에 토지를 차지하지 못한 계층을 어쩔 수 없이 용인했던 것에 가깝고, 거지들에게 행해진 베풂도 근본적으로는 'ㅉㅉ 쟤네들 구제해줘야지'와 같은 시혜적 시각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모여사는 곳에는 유대인 거지가 꼭 한명씩 있는데, 유대인에게는 일상적인 기부가 의무이기 때문에 이들은 선행의 대상으로서 필수요소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심지어 어떤 거지들은 이런 점을 이용해서 내가 당신에게 착한짓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데 나한테 이렇게 대접하면 안되지 하며 큰소리를 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 비슷한 것이 바로 인도 힌두교로 지금도 여기 거지들은 적선하는 게 바로 좋은 업을 쌓는 것이니 고맙다고 생각할 것은 자신에게 돈을 주는 상대방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한편 이슬람교 또한 자선(자카르트)이 5개의 주요 율법[3]이기 때문에, 이슬람 주요 도시에는 거부들이 자선할 때를 노리는 거지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같은 성지에선 그런 경우가 하두 많아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고.

윤회 사상이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힌두교불교 문화권 또한 거지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다. 선행을 통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므로, 거지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행세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시혜는 걸인들을 유력자와 연결시켜, 결국 걸인들이 하나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이용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 대의 무뢰였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무뢰배'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폭력 조직으로서 신사층의 권력 유지 수단 중 하나로 이용되었다.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개방은 이런 무뢰집단이 자립하여 폭력단화한 경우.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대의 호족들도 유랑민들을 시혜를 통해 수용하여 자신들의 무력 기반으로 이용했다.

앞서 말한 판소리 명창이나 떠돌이 수행승, 선비과 우리에게 잘 알려진 거지의 경계는 여기서 갈라진다.[4] 미약하나마 사회에서 유용한 역할을 하던 이들과는 달리, 거지들의 상당수가 양민들에게 폭력적인 해를 입히거나 유력자들의 권력을 지탱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국가 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 통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국가 권력이 성장해가면서 이들은 배척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뚜렷한 자기 직업을 갖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중요시한 유교장 칼뱅 계열 프로테스탄트 등의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사회적인 생산력의 발전에 힘입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자립력을 갖추어 나가면서 전반적인 서민 사회가 구축되고, 천민층이 급감하는 동시에 예능인들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나가면서[5] 거지의 이미지는 서서히 '사회의 위험 세력'으로 축소되어 간다. 한편 유럽 지역에서는 합리주의의 부정적 영향으로 소수자에 대한 핍박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이 결과 거지의 이미지는 역시 '사회의 위험 세력'으로 축소되어 나갔다.

우리나라에선 조선시대만 해도 팔다리 멀쩡한 젊은 사람이 구걸하러 다녔다면 보통 집에서 곤장을 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돈 좀 주면서 다음에는 구걸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줬다고 한다.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의 영국에서는 부랑자와 빈민들이 증가하자, 구걸하는 사람들을 질병이나 장애 등으로 일할 수 없는 자와 일할 수 있으면서 구걸하는 자로 구분하여, 후자는 태형,강제노역, 심하면 사형으로 처벌했다. 간혹 구직활동중인 실업자들도 일하지 않는 자로 찍혀 끌려가기도 했다고. 헌데 어째서인지 요리사들도 이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한다 (...) 영국 요리가 그 모양인 게 어쩌면...

4 근대화 이후

그리고 앞서 말했듯 산업혁명으로 토지보다 노동력이 중요한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제 '토지를 확보하지 못한 불쌍한 떠돌이 농민'을 유력 세력들은 'ㅉㅉㅉ 불쌍하다 구제해 주마'가 아니라 공장 가서 니가 열심히 일하면 되는데 니들이 일 안 한 거잖어?라는 태도로 몰아가게 된다. 떠돌이 계층이 사회적으로 배척받지 않던 명분이 소멸하게 된 것이다. 결국 거지의 이미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물들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거지는 욕설로도 자주 쓰인다. 거지 그 자체뿐만 아니라 '거렁뱅이', '빌어먹을', '망할' 등의 표현도 욕설로 쓰인다. 또 질이 낮은 사람이나 물건을 지칭할 때 '거지같다'라는 말과 천박하거나 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지칭하는 '거지발싸개'라는 말도 있다. 변형된 '그지'라는 표현도 많이 쓰이며 사투리로는 끌베이'그르지'로까지 변형된다.

사실 한국에서는 6,7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마다 '각설이' 같은 거지들이 있어서 식사시간이 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구걸하는 일이 흔했다. 그러다가 산업화가 되면서 516 도로같은 위험한 토목공사 등에 끌려가 노동에 동원되었다가 사망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물론 취업률이 또다른 문제가 되고 인권 문제가 대두한 현대에는 거지의 이미지가 다시 '사회의 최하위, 위험 계층'이 아닌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소외 계층'으로 바뀌어 나가고 있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구제 정책도 많이 펼쳐지고 있는 편이다. 물론 지하철 앵벌이나 조직폭력배와의 연관성 등의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면서, 거지에 대해 마냥 돕자는 시각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차라리 전 사회적으로는 배척의 시선이 더 뚜렷한 편이다.

한편 맨 처음에 서술된 거지의 국어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일단 지하철 대다수 거지들은 거지가 아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찬송가를 틀며 바구니를 들이대는 장님이나 불구자들도 거지의 범주에 속할 지는 미묘하다. 대체로 이런 거지들은 조직폭력배의 비호를 받고 그들의 용돈벌이를 하는 경우가 상당수이기 때문. 게다가 종점의 기적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것만 보아도 알다시피 이런 거지들의 대부분은 전혀 장애가 없는 자들이다.

아르바이트같은 직업을 얻어서 받는 최저시급보다 거지들이 하는 구걸질이 더 돈을 많이 받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농담이라고 하기 뭐한 것이, 한 시간에 50명이 100원씩만 던져줘도 이미 최저시급보다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구걸로만 12억을 번 거지의 사례도 있다! 여기에 기초수급까지 받게 되면 당연히 기본적으로 최저시급을 월등히 뛰어넘게 된다.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거지의 구걸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비판의 소재 혹은 논란 소재가 되기도 한다. 앞서 서술한 12억 거지의 경우 직업으로 규정되는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었으며, 세금도 전혀 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가장 자주 있는 토론거리는 돈을 줘야 한다 vs 주지 말아야 한다. 전자의 경우 그래도 돈을 벌기 힘든 사람들이니 도움을 줘야 한다, 후자의 경우 위에 후술한 것과 같이 기본적인 일이라도 하라는 것. 어느쪽이든 무조건 옳다고 할 순 없으나 종점의 기적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구걸을 대하는 태도에는 비판적인 태도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가끔은 자신이 직접 구걸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을 시켜 일정액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럴때 그 구걸을 대신하는 자를 앵벌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거지왕 김춘삼'이 유명하다. 북한꽃제비도 거지로 볼 수 있을 듯. 그러나 북한의 경우 전인민의 거지화 라는 말처럼 주민들이 거지나 다름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한국에서는 자주 배가 고프다는 사람들에게 "배 속에 거지가 사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관용적인 표현. 또한 한국에서 관용적인(?)거지 표현법은 깡통을 차고 깡통을 치면서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왔네'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런 류의 노래를 장타령이라고 하며 장타령을 부르는 이들을 '장타령꾼'이라고 했다. "각설이"는 장타령꾼을 일컫는 속어였다.

온라인 게임에서도 많이 목격된다. 특히 "님들아 저 아템 좀."은 어지간한 게임에선 다 보이는 구걸. 그러나 진짜로 게임에 거지라는 직업을 구현한 경우도 있어 충격과 공포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는 울티마 온라인의 구걸(Begging) 스킬.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NPC에게 사용하는 스킬이다.(최대 10gp를 던져준다...) 배울 수 있는 스킬 숫자가 제한되는데 비해 돈을 버는 효율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므로 굳이 배우는 사람은 없었다. 올리기가 쉬운 편도 아니었고. 때문에 이 스킬을 만렙 100까지 찍어 Grand Master Begger 칭호를 딴 사람은 두고 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망조의 대명사 르네상스 패치가 나온 후에는 모든 컨텐츠를 소모해버린 플레이어들이 너도 나도 이 짓에 도전해서 색이 바랬지만...

5 거지 혹은 거지였던 실존 인물 및 캐릭터

6 관련 문서

  1. 충북 음성군에 있는 꽃동네연수원에 가면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는 드립과 함께 항상 이 드립을 써먹는다...
  2. 시주, 적선 등 완곡한 표현을 쓰긴 했지만.
  3. 신앙 고백, 예배, 자선, 금식월, 성지순례로, 이를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한다. 단 이는 순니파에만 해당하는 것이며 시아파는 이를 규정하지 않는다.
  4. 물론 앞서 말했듯 이러한 존재들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았다. 다만 예능인으로서의 거지와 사회의 불안 세력으로서의 거지의 성격은 양면적으로나마 완전히 융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것이 사회의 변화에 힘입어 서서히 분화되어 나갔음을 설명하기 위해 얼핏 보면 상호 모순되는 문장을 썼음을 주지해둔다.
  5. 판소리는 처음에는 서민 예술이었지만 서서히 양반층을 상연의 대상으로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흥선 대원군 때에는 경회루가 완공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신재효 등 명창을 초청하기까지 했다. 여기에는 흥선 대원군 본인의 취향도 반영되었다고 한다. 즉 이 시점에서 소리꾼들은 걸인과는 상당히 이미지가 분화된 상태였다.
  6. 근데 경매 이벤트 당시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놈이 이멘마하에 가진 집만 다섯채다.(...)
  7. 동인설정 한정...이긴 한데 왠지 원작에서의 묘사를 보면 진짜인 듯하다.
  8. 아예 거지신으로 불린다. 지못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