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역대 심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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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暠
(? ~ 1345)
고려의 왕족이자 제2대 심양왕. 왕자[1]의 차남. 몽골식 이름은 올제이투(完澤禿).
어릴 때 충선왕의 양자가 되어 궁중에서 길러지면서 연안군에 봉해졌고 1313년에 충선왕이 김문연을 원나라에 보낼 때 왕고는 원나라에 체류해 인질이 되었으며, 1315년 10월에는 통주에서 공주를 알현했고 1316년 3월에 충선왕으로부터 심왕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원나라 양왕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왕고는 고려의 왕이 될 뜻을 넘보고 충숙왕을 여러 차례 참소했는데, 1322년 3월에 왕고가 원나라의 영종에게 총애를 받자 많은 대신들이 그를 위해 충숙왕을 참소해서 원나라에 충숙왕이 입조해 형부에 가뒀다가 머리를 깎아 석불사에 가도록 만들기도 했다. 또한 1328년 7월에 그의 일파에서 인종의 허가를 받아 상왕(충선왕)이 왕도를 고려왕, 왕호를 세자로 임명했지만 영종 때에 이르러 왕도가 바얀투그스와 짜고 왕호의 세자인, 그의 전택, 그의 부하들의 전택 등을 빼앗았다고 했으며, 충숙왕이 귀가 멀고 말을 못한다고 참소했다.
심왕부인 신하인 백응구가 고려로 도망치자 영종에게 아두라를 보내 백응구를 연경으로 돌려보내는 지시를 내리게 했으며, 충숙왕이 이를 즉시 이행시키지 않자 왕호는 충숙왕이 그 칙서를 찢었다고 참소했으며, 이로 인해 충숙왕이 입조하자 영종이 크게 노해 그 일을 힐책해서 인장을 거두고 사신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또한 왕고는 박구에게 고려의 재상들에게 충숙왕이 왕위를 계승한 이래로 영종의 사신을 영접하지 않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놀기만 했다면서 샤데이가 도착하면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답해야 한다고 했으며, 왕호는 고려에서 충숙왕에게 돈과 재물을 많이 보내는 것을 싫어해 양성주를 보내 영종의 명이라면서 그 재물들을 가로챘다.
또한 그의 일당이 10여 명이 원나라로부터 와서 왕호가 이미 나라를 얻었는데도 충숙왕의 과거 악행을 적어서 원나라 조정에 올리지 않겠냐고 따져서 원나라의 중서성에 왕호를 왕으로 옹립할 것을 요청하는 글을 올리게 했으며, 충숙왕이 5년 동안 원나라에 머물면서 재정이 고갈되자 신하들을 시켜 영종의 명을 내세워 창고를 봉쇄하게 했다. 1323년에 혜종이 즉위해 1324년에 충숙왕이 고려로 돌아가게 되면서 충선왕이 사람들에게 충숙왕과 왕고가 서로 싸워 집안 싸움이 일어났다면서 혜종에게 지난 잘못을 생각하지 말고 모두 다 용서해달라고 올렸다고 한다.
1333년 여름 4월에 충숙왕이 임강의 난산채에 당도하자 왕호는 행궁을 찾아 알현했다가 충숙왕을 따라 귀국했으며, 1339년에는 그의 일파인 조적과 모의해 고려의 왕이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시도를 했다가 충혜왕에게 패하면서 실패했다. 그의 부하가 원나라에 가서 왕호가 국왕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충혜왕이 기병을 보내 왕호의 여행을 중지시키려 했지만 실패했으며, 1344년 12월에 원나라로부터 귀국했다가 1345년 가을 7월에 죽었다.- ↑ 충렬왕의 장남으로 작위는 강양공이며, 정화공주 소생으로 원나라 공주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자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