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무라 칸이치로

吉村 貫一郎
(1840년 ~ 1868년 1월 27일)

난부(南部)의 모리오카(盛岡) 번(藩)의 하급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이 요시무라 켄타로(嘉村權太郎)라는 설도 전해져오고 있다.

학문과 검술로 모리오카 번 안에서 새로운 검술 류(流)를 열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분큐(文久) 3년(1863)에 모리오카 번에 있던 그는 교토행이 결정되자 치바(千葉)씨의 호쿠신잇켄류(북진일검류, 혹은 북진일도류라고도 함./北辰一劍流)를 잇는 겐무칸(현무관/玄武館)에 들어갔다. 도장에서 그의 지위는 면허까지 갔다. 면허개전의 준말로 그쯤되면 거의 초고수에 가까운 실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당시의 도장은 나랏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요시무라는 이 즈음 존왕양이(尊皇攘夷) 사상에 빠져들었다.

2년 뒤인 1865년에 마침내 모리오카 번에서 나와 당시 이름을 떨치던 신센구미(新選組)에 입대하여 문무 양쪽 면에서 뛰어난 그의 재주를 인정받아 대원 겸 감찰, 그리고 격검사범으로 발탁되기에 이르른다.

가정에 대한 애착이 깊었던 그는 남아있는 다섯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다. 일설에는 이 때 번을 떠나면서 마음이 약해질까봐 가족들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떠나려고도 했다고 전한다.

게이오 3년(1867), 바쿠후(幕府)의 신하로서 신센구미가 인정받자, 그도 정식 신센구미 대원의 예식을 갖추게 되었다. 고향에 있던 그의 가족들도 큰 성공이라며 감격해 마지 않았다고 전한다.

격검사범으로 있었지만 그가 참가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전해오지 않는다. 신센구미의 둔영지가 이전할 때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 교섭을 하러 가거나, 산죠 제찰사건(三條制禮事件)의 사죄를 목적으로 한 도사 번의 잔치에 요시무라가 참여하거나 하지만, 텐만야사건(天滿屋事件)때에 미우라 큐타로(三浦休太郎: 후의 미우라 야스시 三浦 安)의 호위를 맡았던 것 이외에 별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 그는 검객으로서의 신센구미 대원보다는 신센구미의 논객으로 활동했던 듯 하다.

게이오 4년 정월(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鳥羽 · 伏見戰鬪: 바쿠후군과 존황양이파, 천황군과의 전투로, 신센구미 최후의 전투)에 참가하지만 전사했는지 탈주했는지, 이후의 소식은 두절되었다. 소설가 시모자와 칸에 의하면, 패주하던 요시무라는 부대와도 떨어져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센구미가 오사카를 떠났음을 안 요시무라는, 길거리를 해메어, 모리오카 번의 영주 저택에 도착해 만신창이의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지막 부탁을 한다.

그러나, 무사로서 지고서도 살아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 하여, 옛 친구이자 전 조장이었던 난부 중신 오노 지로에몬(大野次郎衛門)에게 할복을 명령받았다. 이 때 할복하여 최후를 마쳤다고도 하고, 부상이 너무 심해 명령을 받고 얼마 있지 않아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고도 한다. 그가 죽고 난 후, 그가 있던 방에는 니분킨(二分金: 에도시대의 화폐) 12냥과 수표들이 놓여 있었고, 그와 함께 가족들에게 이 돈을 전해달라는 요시무라의 마지막 말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노 지로에몬이라는 인물은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 알려졌으며, 자손인 카무라 가의 과거장에는, 요시무라가 메이지 3년(1870년) 1월 15일 사망했다고 쓰여있다.

미부기시덴에 의해 많이 알려진 인물로. 사실 위에 나오는 설명들중 대부분은 이 작품에서 창작된 이야기다. 오노 지로에몬도 이 작품에 나온 캐릭터.


안녕 절망선생에 의하면 '오키타 소우지히지카타 토시조의 이름에 밀려 신센구미 최강의 검사인 요시무라 칸이치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