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의 역대 황제 | ||||||
서위 3대 공제 원곽 | ← | 초대 효민황제 우문각 | → | 2대 세종 명황제 우문육 |
묘호 | - |
시호 | 효민황제(孝閔皇帝) |
연호 | -[1] |
성 | 우문(宇文) |
휘 | 각(覺) |
생몰기간 | 542년 ~ 557년 |
재위기간 | 557년 |
1 개요
우문각(宇文覺)은 남북조시대 북주의 초대 황제이다.
2 생애
542년 서위의 실권자였던 우문태와 문황후 원씨[2]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3남이였지만 우문태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장남 우문육(宇文毓)은 첩 요씨(姚氏)의 소생이고 차남 우문진은 요절했기 때문에 정실 소생이였던 그가 후계자가 되었다. 주서(周書)에 따르면 우문각은 강하고, 과감한 성격이었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우문태의 조카이자 우문각의 사촌 형인 우문호(宇文護)에게 우문태는 실권을 맡겼다.
그 뒤 556년, 우문태가 죽고 557년 우문호는 공제를 시켜 우문각에게 선양하게 했다. 이로써 서위는 멸망하고 북주(北周)가 건국되었다.
우문각이 천왕(天王)에 올랐지만[3] 실권은 우문호가 가지고 있었다. 우문호는 초기에는 아들을 잘 보좌해달라는 우문태의 유언을 지켰지만, 날이 갈수록 우문각을 무시하고 전횡을 휘둘렀다. 고위 관료였던 조귀(趙貴)와 독고신(獨孤信)[4]은 이를 불편히 여겨 우문호를 죽이려 했으나 역관광당해 오히려 우문호에게 주살되었다. 우문각 자신도 우문호를 죽이고, 권력을 잡고 싶어했기 때문에 자기 심복들인 이식(李植), 손항(孫恆), 을불봉(乙弗鳳), 하발제(賀拔提) 등과 우문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광락(張光洛)이 이를 우문호에게 이야기했고 우문호는 곧 우문각을 폐위시켜 약양공(略陽公)으로 강등 후 살해하였다.
뒷날 동생 우문옹(宇文邕)이 우문호를 제거하자 복권되어 효민황제(孝閔皇帝)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