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태

宇文泰

507~556

우문태는 선비족으로 는 흑랄(黑獭)[1]이고 북주을 건국하는데 기틀을 사진 사람이다. 출신지는 무천진[2]으로 육진의 난에 참가하였다가 하발악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하발악이 암살당한 이후, 하발악이 가지고 있던 기반을 이어받아 관중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534년 북위의 대승상 고환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효무제 원수는 말을 타고 우문태의 근거지인 관중의 장안으로 도망쳐 당시 관서대도독이었던 우문태의 보호를 받게 되고 우문태는 승상이 되었다. 돌아오라는 고환의 말을 묵살한 효무제는 실권을 모두 우문태에게 넘겼고 고환은 따로 효정제 원선견을 세웠다. 이로 인해 북위는 우문태가 실권을 잡은 서위와 고환이 실권을 잡은 동위로 분열되었다. 우문태는 새롭게 24군제를 창시했는데 이 제도는 군의 조직을 주국 → 대장군 → 개부(開府)의 계열로 내려오게 한 뒤 그 정점에 우문태가 있게 한 것이다. 이 제도는 후에 부병제의 근간이 되었다.

서위는 우문태가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효무제는 우문태의 꼭두각시였다. 효무제는 자신의 사촌동생 만월공주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우문태가 만월공주를 죽여버렸다. 이에 화가 난 효무제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지도 않고 책상을 손으로 치고 화살이 없는 빈 활을 쏘며 불만을 표현했다. 이에 우문태는 효무제를 죽여버리고 효무제의 사촌 문제 원보거를 옹립했다. 서위는 비록 국력은 동위에 비해 떨어졌지만 우문태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 여러차례 동위를 압도하는 전과를 올릴 수가 있었다.

551년 문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폐제 원흠이 뒤를 이었다. 553년 남조 나라가 후경의 난에 의해 혼란해진 사이를 틈타 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강릉을 함락해 원제 소역을 살해한 뒤 소찰을 세워 후량을 건국하게 함으로써 남조에 타격을 주는 데도 성공한다. 554년 우문태의 권력 농단을 보다 못한 원흠이 우문태를 제거할려고 하자 우문태는 먼저 그를 제거하고 그의 아우 공제 원곽을 옹립했다. 556년 사망했으며 사후 승상을 물려받은 장남 우문각은 556년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북주를 건국했다. 우문각이 즉위하자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로 추존되었다.

우문태의 무덤인 성릉(成陵)은 하북성 부평현 궁리 궁리소학교 교정 내에 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관리가 되지 않아 봉분의 3분의 1은 깎아져 나갔으며 북송 때 만들어진 묘비는 조각 나 땅 속에 반쯤 파묻혀 있다. 이미 학교 내 아이들에 의해 놀이동산으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다고.
  1. 또는 흑태(黑泰)
  2. 현재의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던 북위의 군사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