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의 역대 황제 | ||||||
초대 효민황제 우문각 | ← | 2대 세종 명황제 우문육 | → | 3대 고조 무황제 우문옹 |
묘호 | 세종(世宗) |
시호 | 명황제(明皇帝) |
연호 | 무성(武成, 559 ~ 560년)[1] |
성 | 우문(宇文) |
휘 | 육(毓) |
생몰기간 | 534년 ~ 560년 |
재위기간 | 557년 ~ 560년 |
1 개요
명군의 자질이 차고 넘쳤으나 안타깝게도 천시를 못 타고난 비운의 군주.
우문육(宇文毓)은 남북조시대 북주의 2대 황제이다. 아명은 통만돌(統萬突)인데 이것은 534년에 우문태가 하주의 통만성에 머물렀을 때 출생 했던 것에 유래한다. 효민제를 살해한 우문호에 의해 즉위하지만 결국 우문호에게 독살당했다.
2 생애
534년 우문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이었지만 첩 요씨(姚氏)의 소생이였기 때문에 적장자인 우문각이 후계자가 되었다. 성장해가며 548년에는 영도군공(寧都郡公)으로 책봉되었고, 556년에는 대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북주의 유력 장군이던 독고신(獨孤信)의 딸과 결혼했다.[2]
이복 동생 우문각이 북주(北周)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했을 때 주국(柱國)으로 책봉되었고, 실권자였던 우문호가 우문각을 폐위한 후 그를 천왕(天王)[3]으로 세우려 했다. 우문육은 처음에는 거절하다 군신들의 거듭된 요청으로 받아들였다.
즉위 이후 사촌 형이었던 우문호를 태사(太師)로, 동생 우문옹(宇文邕)을 주국으로 임명해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독고씨(獨孤氏)[4]를 왕후로 세웠지만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다.[5]
그는 이미 성년의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559년, 섭정을 맡고 있던 우문호는 군사권을 제외한 공식적인 권한을 우문육에게 넘겨주었다.
우문육은 굉장히 총명해서 친정을 시작한 이후, 북위가 낙양에 천도한 이후부터 살던 하남의 백성과 북주가 관중에 도성을 건설한 이후에 관중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경조인(京兆人)으로 부르기로 하고 중원의 강력한 국가를 만들려고 태사 우문호를 옹주목으로 임명하였고 통치 체제의 강화를 도모했다. 그 해에는 에프탈과 돌궐의 사신이 내조하고 조공을 하였다.
진나라군이 침공해 왔을 때는 스스로 갑옷을 착용하여 태백산(太白山)의 동쪽에서 요격하였다. 이어서 토욕혼이 침공을 하자 이것은 대사마(大司馬) 하란상(賀蘭祥)이 군대를 이끌고 요격하는 등 용맹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북주는 후난성(호남성,湖南省) 일대의 영토를 차지했다.
또 주력(周暦)을 만들었고, 주국인 보성공(輔城公) 우문옹을 대사공으로 임명하였다. 서위 시대에 죄를 지었을 경우엔 처벌하지 않았고 이후 계속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는 법으로 처벌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하란상은 요양(洮陽)과 홍화(洪和)를 공격하였고 토욕혼은 병력의 열세로 도망을 갔다. 서역의 고창국(高昌國)에서 사신이 내조했고 조공하였다. 심하게 장마가 일어나자 공경, 경, 대부, 선비뿐 아니라 각지의 주목, 군수, 백성에 이르기까지 직접 상주문을 올렸고 이를 해결하도록 명하는 칙령을 내렸다. 재해가 일어난 곳에 관리를 각지에 파견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이렇게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자, 559년 우문육은 다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기로 하고 공식적으로 천왕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아버지 우문태는 문황제(文皇帝)로 추존하였고, 연호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문호는 우문육이 현명하고 능력있는 식견이 있는 군주인 것을 알고는 황실 요리사인 이안(李安)을 시켜 음식에 독을 타게 했다. 이를 먹고 병에 걸린 우문육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생사는 필연이다. 나는 부덕하였지만 독서를 했고 성인과 현인들과 논의를 하여 민심을 알려고 노력했으나 아직도 알지 못한 것도 있다. 군신들이 아버지인 태조 우문태를 모시고 일해 준 것을 감사하고 있다. 나는 재위한지 4년이 지났지만 아직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모두 협력하여 태조황제의 유지를 완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자식들은 아직 어려서 나라를 다스리는 소임에는 부족하다. 나의 동생인 우문옹은 너그럽고 인정이 많고 도량이 크다. 우문옹을 지지하여 천하를 차지하기를 바란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27세로 사망했다. 사후 동생 우문옹(宇文邕)이 뒤를 이었으며 우문육의 후계자 선택은 신의 한수가 되어 우문옹은 12년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 끝에 우문호를 죽이고 황권을 회복한 뒤 북제까지 멸하는 업적을 세운 명군이 되었다.
수문제 양견의 비범함을 미리 알아본 인물이기도 한데, 이건 그의 아버지인 우문태도 마찬가지였다. 몰래 관상가를 시켜 양견의 관상을 보고 오라고 했는데, 황제가 될 관상임을 알아본 관상가가 일부러 우문육에게 대장군 감 정도일 뿐이라고 속여서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우문육은 관대한 성격으로 인정 많고 도량이 컸고 친족을 아낀 동생이였던 우문옹과 특히 사이가 좋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많은 책을 읽었다. 글을 짓는 것을 장려하였고 시문에도 발휘하였다. 즉위한 이후에는 학자 80명 이상을 불러서 북주의 역사서를 간행하였다. 자신도 많은 책을 수집하였고 10권의 저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