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1 北緯

north latitude. 적도(0도)를 기준으로 북쪽 90도까지의 위도이며 범위가 북반구와 같다. 예컨데 삼팔선은 북위 38도 선이다.

2 北魏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기원전 206 ~ 220한(漢)
초한전쟁(楚漢戰爭)
전한(前漢)
신(新)
현한(玄漢)
후한(後漢)
220 ~ 265삼국(三國)위(魏)촉한(蜀漢)오(吳)
265 ~ 436진(晉)서진(西晉)
동진(東晉)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439 ~ 589남북조(南北朝)송(宋)북위(北魏)
제(齊)
양(梁)
한(漢)
후량(後梁)
서위(西魏)동위(東魏)
진(陳)북주(北周)북제(北齊)
581 ~ 619수(隋)
618 ~ 907당(唐)
무주(武周)
만주의 역사
고대중세근세근현대
연(燕)고조선동호예맥숙신 / 퉁구스
진(秦)
전한흉노
후한선비고구려부여읍루
조위
서진
전연
전진물길
후연
북연두막루
북위(북조)거란실위말갈
동위
북제
북주
수(隋)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시대
동진/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시대 북조동위, 서위/남북조시대 북조
 북위  

존속 기간386년~534년
수도성락→평성→낙양
지배 범위화북 전체, 화남의 북쪽 일부, 서역의 일부, 내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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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요

중국 중세사의 한 흐름을 만들며 오호십육국시대 호한체제[1] 또는 침투왕조[2]의 표본을 보여준 국가. 오호십육국 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화북을 통일, 남북조시대를 형성했고, 그리하여 뒤의 , 제국의 바탕을 이루었다. 수도는 지금의 다퉁.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대의 국호는 그냥 '위' 혹은 '대(大)위'였고, 북위라는 표현은 이전 시기 전국시대의 위나 삼국시대의 위와 같은 여타 '위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이 붙인 표기방식이다. 즉 당대를 바탕으로 한 소설, 사극에서 '북위'로 자칭하는 표현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병크라는 이야기다. 말이야

또는 황실의 씨성을 국호 앞에 붙여 '탁발위(拓跋魏)' 또는 '원위(元魏)'라 부르거나[3] 북방족의 위나라라서 호위(胡魏), 시기적으로 나중에 등장한 점을 감안하여 '후위(後魏)'라 부르기도 하는데, 막판에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북위 표기가 통용되고 있다. 애시당초 중국 25사 정사에 위사가 북위사로 들어가버렸으니 게임셋.

2.2 역사

2.2.1 건국

선비족의 일원인 탁발선비(拓跋鮮卑)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나라로,[4] 386년 서진 정권에게 하사받았던 기존의 국호인 '(代)'[5]를 탁발규가 '위'로 바꾸고 칭제건원했다.[6] 후연의 황제 모용수는 이러한 탁발선비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공격을 감행했지만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후연군은 대패했고, 북위는 이를 계기로 397년 후연의 수도 중산을 함락시키면서 본격적으로 화북에 진출하게 된다.

이 공격으로 후연은 상당한 내분을 겪게 되는데, 이러한 내분에다가 모용수-모용보 시대의 대 고구려 어그로의 부채를 하필이면 탁발규에게 얻어맞고 난 시기에 광개토대왕에게 제대로 얻어처맞으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요서의 북연과 산동의 남연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2.2.2 태무제의 화북통일

3대 태무제 시기에 이르러 북연과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때 한족계 관료로서 북위 조정에 몸담고 있던 최호의 '국사 필화(筆禍) 사건'이 터져 최씨 일가 및 그와 관련된 귀족 세력들이 대거 처형 및 숙청됨으로써 남조와는 달리 황제 권력이 귀족과 대등하거나 좀 더 우위에 있게 되는 경향이 자리잡았다.

2.2.3 효문제의 한화 정책

5세기 말 효문제[7] 시기에 적극적인 한(漢)화 정책을 추진했는데,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낙양(洛陽) 천도
2. 호한(胡漢)간 결혼 장려
3. 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개변[8]
4. 호속(胡俗), 호어(胡語) 금지
5. 성족분정(姓族分定)
6. 서교제천 금지
7. 관제개혁

효문제 이래 실시된 한화정책으로 인해 권력에서 소외된 비한화 선비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523년에 북위 멸망의 원인인 6진의 난이 발생하게 된다.

2.2.4 육진의 난(북진의 난)

6진이란 북방의 유연(柔然)을 방어하기 위해 낙양 천도 이전의 원래 수도인 평성(平成, 지금의 다퉁 시) 부근에 설치된 군사도시를 말한다.

본디 낙양 천도 이전의 6진은 전략적 지점이었던 만큼 귀족 중에서도 최상급의 귀족 및 엘리트 병들이 복무를 했으며, 이에 대한 보수도 두둑했다. 허나 낙양 천도 이후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화 선비족에게는 중앙 권력과 문벌귀족최상층으로의 진입 등 온갖 혜택이 다 베풀어졌지만 한화가 매우 늦었던 군대[9],특히 이들 6진에게는 대우가 형편없어진 것에 대한 불만이 터졌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제압한 것이 선비족의 이주영(爾朱榮)이다. 허나 이주영은 이 후 궁중 암투로 인해 암살당하고 그 휘하의 군벌들에 의해 북위의 운명이 결정된다.

2.2.5 북위의 동서분열

육진의 난 진압 결과 선비족의 이주영(爾朱榮) 집단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주영 집단에는 휘하에 고환(高歡)(...), 우문태(宇文泰), 후경(侯景) 등이 있다. 허나 이주영은 이후 530년 궁중 암투로 인해 효장제에게 암살당하였고,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복수를 내세워 군을 일으켜 효장제를 살해하고, 장광왕 원엽(元曄)을 옹립한다. 그러나 방계로 가치가 없었던 원엽은 531년 이주세륭(爾朱世隆)에 의해 폐위되었고, 절민제(節閔帝) 원공(元恭)을 옹립하였다.

이에 반발한 하북각지의 명족들이 이주씨에 대한 반항운동을 시작했고, 과거 휘하 장수였던 고환과 연계하여 원랑(元朗)을 추대하며 연합정권을 수립하였다. 532년 연합군은 업을 점령하였고, 이주조는 토벌군을 보냈으나 한릉산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낙양마저 연합군에게 함락당하였고, 이주씨는 소멸되었다. 낙양에 입성한 고환은 이주씨가 세웠던 절민제(전폐제)와 과거 옹립하였던 원랑을 함께 폐위시키고, 새로 효무제를 옹립시켰다.

고환은 진양에서 마음대로 북위 조정을 주물렀다. 효무제는 고환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낙양에서 탈출하여 장안으로 도망가서 우문태(宇文泰)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이에 고환은 황족 원선견(元善見)을 추대하게 되면서 화북 지역에는 효무제를 받아들인 우문태 세력과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한 고환 세력으로 동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북위는 고환 휘하의 동위(東魏)와 우문태 휘하의 서위(西魏)로 분열하게 되었다. 고환은 수도를 동쪽의 (鄴)으로 옮겼고, 옛 북위의 수도였던 낙양은 양국가의 최전선 지대로 바뀌며 잿더미가 되었다. 이는 북위의 몰락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동위와 서위는 여전히 원씨들이 황제였으나, 둘다 고환과 우문태의 꼭두각시 내지 허수아비 황제들이었다.뭐가 다른데? 결국 동위는 고환의 아들 고양이 효정제를 폐위되고 북제가 되고 서위는 우문태의 아들 효민제 우문각이 우문효에 의해 공제를 폐위하면서 북주가 되는데,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다. 북주와 남조의 진나라(陳)는 대립하다가 북주의 정제를 폐위한 양견수나라를 세우고 진나라를 병합하면서 서진 멸망 이래로 분열된 남북을 통일한다.

2.2.6 기타

르네 그루쎄의『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는 북위가 카롤루스 대제프랑크 왕국에 비견되는 '중국의 보호자'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이는 게르만 족의 민족 이동과 오호의 중국 침입을 유사한 선상에 놓고, 그러한 분열 양상을 통합하여 안정시킨 국가였던 프랑크 왕국과 북위로부터 일정한 알레고리를 포착해낸 듯하다.

도무제 때 후연을 멸망시키고 그 지방에 있던 36만에 이르는 백성들을 수도 근방으로 이동시키고 땅을 주고 농경에 종사하게 했다. 이때 고구려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북위는 고구려의 동방지배를 허용해 고구려왕에게 거기장군이란 최고관직을 하사하기도 한다. 또한 고구려 사신을 남조 사신 다음으로 대하였으며 489년(장수왕 77년, 북위 효문제 19년)엔 남조 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동급으로 대해 남조 사신이 크게 항의한 바 있다.

중국 역사상 유례없이 독실한 불교 국가였고 이 시대에 만들어진 윈강석굴이 유명하다.

2.2.7 추존 황제

역대 탁발부 지도자들과 나라 군주들이다.

  • 탁발모: 성황제
  • 탁발대: 절황제
  • 탁발관: 장황제
  • 탁발루: 명황제
  • 탁발월: 안황제
  • 탁발추인: 선황제
  • 탁발리: 경황제
  • 탁발사(俟): 원황제
  • 탁발사(肆): 화황제
  • 탁발기: 정황제
  • 탁발개: 희황제
  • 탁발쾌: 위황제
  • 탁발린: 헌황제
  • 탁발힐분: 무성황제
  • 탁발역미: 시조 신원황제
  • 탁발사막한: 문황제
  • 탁발실록: 장황제
  • 탁발작: 평황제
  • 탁발불: 사황제
  • 탁발녹관: 소황제
  • 탁발의이: 환황제
  • 탁발의로: 목황제(대나라 시조)
  • 탁발울률: 평문황제
  • 탁발하록: 혜황제
  • 탁발흘나: 양황제
  • 탁발예궤: 열황제
  • 탁발십익건: 소성황제(대나라 마지막 군주)
  • 탁발식: 현명황제

2.3 역대 황제

대수묘호시호성명연호재위기간능호
--헌명황제(獻明皇帝) [10]탁발식(拓跋寔)---
1대태조(太祖)
열조(烈祖)
도무황제(道武皇帝)
선무황제(宣武皇帝)
탁발규(拓跋珪)등국(登國) 386 ~ 396
황시(皇始) 396 ~ 398
천흥(天興) 398 ~ 404
천사(天賜) 404 ~ 409
386 ~ 409성락금릉(盛樂金陵)
2대태종(太宗)명원황제(明元皇帝)탁발사(拓跋嗣)영흥(永興) 409 ~ 413
신서(神瑞) 414 ~ 416
태상(泰常) 416 ~ 423
409 ~ 423운중금릉(雲中金陵)
3대세조(世祖)태무황제(太武皇帝)탁발도(拓跋燾)시광(始光) 424 ~ 428
신가(神䴥) 428 ~ 431
연화(延和) 432 ~ 435
태연(太延) 435 ~ 440
태평진군(太平眞君) 440 ~ 451
정평(正平) 451 ~ 452
423 ~ 452운중금릉(雲中金陵)
4대-남안은왕(南安隱王)탁발여(拓跋余)승평(承平) 452452-
-공종(恭宗) [11]경목황제(景穆皇帝)탁발황(拓跋晃)---
5대고종(高宗)문성황제(文成皇帝)탁발준(拓跋浚)흥안(興安) 452 ~ 454
흥광(興光) 454 ~ 455
태안(太安) 455 ~ 459
화평(和平) 460 ~ 465
452 ~ 465운중금릉(雲中金陵)
6대현조(顯祖)헌문황제(獻文皇帝)탁발홍(拓跋弘)천안(天安) 466 ~ 467
황흥(皇興) 467 ~ 471
465 ~ 471운중금릉(雲中金陵)
7대고조(高祖)효문황제(孝文皇帝)원굉(元宏)연흥(延興) 471 ~ 476
승명(承明) 476
태화(太和) 477 ~ 499
471 ~ 499장릉(長陵)
8대세종(世宗)선무황제(宣武皇帝)원각(元恪)경명(景明) 500 ~ 504
정시(正始) 504 ~ 508
영평(永平) 508 ~ 512
연창(延昌) 512 ~ 515
499 ~ 515경릉(景陵)
9대숙종(肅宗)효명황제(孝明皇帝)원후(元詡)희평(熙平) 516 ~ 518
신귀(神龜) 518 ~ 520
정광(正光) 520 ~ 525
효창(孝昌) 525 ~ 528
무태(武泰) 528
515 ~ 528정릉(定陵)
임시-여제(女帝)원씨(元氏)-528-
임시-소공황제(少恭皇帝)원쇠(元釗)-528-
-숙조(肅祖)[12]문목황제(文穆皇帝)원협(元勰)---
--효선황제(孝宣皇帝)[13]원소(元劭)---
10대경종(敬宗)효장황제(孝莊皇帝)
무회황제(武懷皇帝)
원자유(元子攸)건의(建義) 528
영안(永安) 528 ~ 530
528 ~ 530정릉(靜陵)
11대효종(孝宗)혜애황제(惠哀皇帝)
장광왕(長廣王)
동해왕(東海王)
원엽(元曄)건명(建明) 530 ~ 531530 ~ 531-
12대열종(烈宗)절민황제(節閔皇帝)
광릉왕(廣陵王)
원공(元恭)보태(普泰) 531 ~ 532531 ~ 532-
13대-폐황제(廢皇帝)
안정순문왕(安定順文王)
원랑(元朗)중흥(中興) 531 ~ 532531 ~ 532-
--무목황제(武穆皇帝)[14]원회(元懷)---
14대현종(顯宗)효무황제(孝武皇帝)
출황제(出皇帝)
원수(元脩)태창(太昌) 532
영흥(永興) 532
영희(永熙) 532 ~ 534
531 ~ 534운릉(雲陵)
  1. 한국사학계에서 탄생시킨 이론 중에 거의 몇 안되게 세계사적으로 인정받는 이론이 바로 호한체제(胡漢體制, Sino-Barbarian Synthesis)이다. 이는 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인 박한제 교수가 1988년 발간한 중국중세호한체제연구에서 구체화되고 있으며, 중국중세사의 바이블로 여겨지고 호한체제에 관해서도 국내에 10여명의 박사-교수급 학자들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2. 칼 비트 포겔의 이론으로써 사회학을 기반으로 하여 유목왕조와 중원왕조를 설명한 서구학계 이론. 오호십육국 시대의 여러 이민족 왕조들은 그보다 후대의 이민족 왕조들인 거란, 여진/만주, 몽골와 같은 '정복왕조' 국가들이 여러 제도적 노력(고유문자의 제정이나 이원적 통치조직의 형성 등)을 통해 지배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과는 달리 중원 문화에 대해 적극적인 자문화보존 및 유목문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침투왕조'라는 표현은 후대의 '정복왕조'와는 구별되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전체적인 양상을 반영하는 용어인 셈이다. 하지만 호한체제이론으로 한바탕 까이고 나서 1990년대 이후 북아시아사 및 유목사 연구가 진행되면서 완전히 한물간 이론 내지 유목민을 서구 정주문명식으로 바라봤다고 까이는 이론이다.
  3. 이 경우 앞의 위나라는 조위曹魏가 된다.
  4. 탁발선비는 종종 '타브가치(tabgachi)'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 둘은 물론 동일한 집단의 다른 표기이기는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타브가치와 탁발선비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즉 타브가치의 원 발상지는 대흥안령산맥 북쪽의 알선동이었는데, 이후 북중국과 인접한 내몽골 지역으로 집단이 이동하면서 서요하와 동몽골 지역에 본래 거주하던 선비족 집단과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 박한제 교수의『중국역사기행 3권 -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의 알선동 파트에서 이러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으니 참조해보자.
  5. 대는 본래 춘추전국시대 산서성 북쪽 지역에 위치해 있던 국가였다.
  6. 조위에게 조공을 바쳐서 위나라라고 하였다 한다.무슨 상관?
  7. 효문제는 엄청난 대인배였다. 권력욕이 커 어린 시절에 자신을 핍박, 학대하고 심지어 마구 때리기까지 했던 태후를 용서했을 정도였다.
  8. 북위 황실도 성을 탁발(拓跋)에서 원(元)으로 고쳤다.
  9. 군대 내에서는 선비족이 다수고 문화도 거의 변하지 않다 보니 군으로 편입된 한족도 오히려 선비족화하였다.
  10. 북위 도무제 추증
  11. 문성제 추증
  12. 북위 효장제 추증
  13. 북위 효장제 추증
  14. 북위 효무제 추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