隱蕃
(209~?)
삼국시대 위나라의 신하.
청주 출신으로 평소 구변에 재능이 있었으므로 조예는 그에게 오나라로 항복해 직책을 얻어 대신들 간의 사이를 이간시킬 것을 명했으며, 이에 은번은 230년에 오나라로 가서 손권에게 항복할 것을 청한다. 이에 손권이 그를 불러 질문을 했는데, 은번이 그에 대해 대답을 하며 당시에 힘써야 할 일을 진술하니 식견이 뛰어나고 말솜씨나 겉보기가 아주 대단했다. 손권이 옆에 호종에게 어떠냐고 물어보자 호종은 그의 능력이 과장됐다고 말한다. 손권이 이에 어떤 직책을 맡겨야 하냐고 물어보자 호종은 백성은 다스리는 일을 맡겨서는 안되고 도연에 있는 작은 직책을 주라고 말했다.
손권은 은번이 형벌과 옥사 문제에 대해 왕성하게 논의했으므로 그를 정위감으로 임명하는데, 주거와 학보는 은번이 제왕을 보좌할 능력이 있다고 칭찬해 학보는 그와 친하게 지내며 그가 높은 직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은번의 집 앞에는 거마가 모여들고 빈객들이 집안에 가득 찼을 정도이며, 전종 같은 장군도 마음을 기울여 접대할 정도였으니 그와의 왕래를 거부한 사람은 양적과 양도 뿐이었다.
반준의 아들 반저도 그런 사람들 사이에 껴서 양곡으로 접대했는데, 반준은 이 말을 듣고 놀라 편지를 보내 질책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반준이나 양도, 양적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은번이 오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사건이 발각되어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게 되지만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불지 않으니 손권은 그를 불러들여 말한다.
어찌하여 육체의 고통을 직접 감당하시오?
은번은 이에 답하길
손군, 대장부가 일을 도모하면서 어찌 동반자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열사는 죽으면서 다른 사람을 연루시키지 않습니다.
라며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죽었다. 그가 주살되어 학보가 엄한 책망에 자살하고 주거는 오랜 기간 연금되었다가 풀려나게 되니 사람들은 그제서야 반준과 양도, 양적의 뜻을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