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반적인 의미
- 讓渡
- 재산이나 물건을 남에게 넘겨줌. 또는 그런 일.
- 권리나 재산, 법률에서의 지위 따위를 남에게 넘겨줌. 또는 그런 일. ‘넘겨주기’로 순화.
2 삼국시대의 인물 양도
羊衜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오나라의 신하. 羊茞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는데, 양호의 아버지인 양신도 동일하게 혼용되었다.
남양 출신으로 229년에 손등이 황태자로 임명되었을 때 사경, 범신, 조현 등과 함께 손등의 빈객이 되었으며, 그가 중서자로 있었을 때 20의 나이였다. 당시 은번 이라는 자가 위나라에서 항복한 뒤에 전종, 주거, 학보, 반준의 아들 반저 등이 그의 집을 다닐 정도였지만 양도와 양적만이 그와 친하게 지내지 않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는데, 나중에 은번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살되자 그제서야 사람들이 양도의 뜻을 알았다고 한다.
한 번은 호종이 손등의 명으로 빈우목을 만들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재탁월(英才卓越), 초유필부(超踰倫匹)하는 자는 곧 제갈각이요, 정식시기(精識時機)하고 달유구미(達幽究微)하는 것은 곧 고담이며, 응변굉달(凝辨宏達)하고 언능석결(言能釋結)하는 자는 곧 사경이고, 구학견미(究學甄微)하고 유하동류(游夏同科)하는 자는 곧 범신이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이 안 들어가서 삐졌는지 양도는
원손은 재능도 없고, 자묵은 정이 사납고 비뚤어져 있고, 숙발은 말이 뜬구름을 잡고 효경은 깊이가 없다.
라며 손등을 같이 섬긴 자신의 친구들과 이 글을 쓴 호종을 향해 광역 도발을 시전해 비록 지취(指趣)가 있는 말이었다지만 이런 양도의 행위에 성격이 안하무인이었던 제갈각은 죽을 때까지 그와 다시는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하지만 나중에 이 네 사람이 모두 다 죽자 사람들은 과연 양도의 말대로 되었다고 여긴 것을 볼 때 양도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다. 본격 걸어다니는 사망 플래그.[1]
238년에 공손연이 구해달라고 원군을 요구하자 공손연이 예전에 했던 짓을 생각하며 죽이려는 손권에게 "구원하러 가서 성공하면 위상을 높이는 거고 이미 멸망했으면 가서 약탈만 해오면 되는 일."이란 논리로 말린다. 손권은 이에 구원군을 보냈으나 이미 멸망했기에 그대로 귀환.
239년에는 앞서말한 것과 같이 손이와 함께 요동으로 가서 위나라의 장지와 고려 등을 공격해 남녀를 포로로 잡는 약탈을 한다. 241년에 손등이 죽을 때 유서를 남겨 양도는 변설이 민첩해 독자적으로 응대할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다. 명호를 세우고 3년 후에는 손권이 손패파와 손화파와의 사람들에게 왕자들과의 왕래를 금지시키자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다시 왕래를 허락해줄 것을 요구해 이궁의 변을 막장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후에 계양태수까지 승진했다가 계양태수의 관직에 있을 때 사망한다.
3 함경북도의 섬 洋島
광복 당시 행정구역상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東海面) 앞바다에 있던 섬들이다. 하나의 섬이 아니라 길주양도, 명천양도, 강후이도(江厚耳島)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토에서 7km 가량 떨어져 있는데, 양도의 2개 섬의 면적은 1.2㎢, 강후이도의 면적은 0.175㎢이다.
길주양도는 길주군, 강후이도와 명천양도는 명천군에 속해있었다. 현재 북한의 행정상으로는 모두 화대군에 속한다.
6.25 전쟁시기인 1952~1953년 사이에 대한민국 해병대가 주둔했다. 38선 근방에 위치한 당시의 전선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적중 한가운데 있는 섬에 아군이 주둔한 이유는, 당시 UN군이 제해권을 완전히 쥐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지역의 섬중 상당수를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 해군은 개전 당시부터 약체인데다가 미국 해군과 몇 차례 교전한 끝에 상당수의 선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 약화된 상태였고, 중공군의 경우에는 아직 해군이 미약해서 본토 방위도 제대로 못할 수준이었으므로 해상에서 UN 해군과 싸우기보다는 연안에 기뢰를 부설하는 등 소극적인 대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군력이 없더라도 몇 km 정도의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둔 섬이라면 조각배라도 타고 가서 공격할 능력은 있기 때문에 6.25 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양도를 비롯한 섬 지역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섬에 주둔하던 아군의 손해도 누적결산해보면 상당했다.
이런 손해를 무릅쓰고 양도등의 섬을 지킨 이유는, 일단 전선에 북한군과 중국군이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각 섬의 대안에 방위목적으로 분산하도록 해서 병력의 낭비를 부르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으며, 휴전될 경우 협상과정에서 이득을 얻기 위한 측면이 컸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마무리되면서 전시라면 몰라도 평시상황에서 바다로만 수백km 항해해야 보급이 가능하고, 적중에 홀로 고립된 섬에 방위병력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기 힘든 문제점이 있어서 북방한계선을 설정하고 그 아래에 있는 서해 5도를 제외한 섬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양도도 휴전 이후에 북한령이 되고 만다.- ↑ 그런데 범신의 생몰년도는 206 ~ 274년으로 꽤나 장수한 편으로 주살당한 것도 아닌데 정사에 어째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