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소

應劭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중원(仲遠). 응봉의 아들.

여남 남돈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학문을 열심히 하면서 박학다식하고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으며, 풍속통의 등 100여 편의 여러 저술 등을 했다. 또한 중한집서, 한관의, 예의고사 등 11종 136권을 저술해 조정의 제도, 백관의 의식 등을 없어지지 않게 했다.

영제 때 효렴에 오르고 173년에 낭중이 되었으며, 하묘의 부름으로 거기장군의 속관이 되었다가 소현의 현령을 지냈다. 185년에 한양의 한수와 함께 강족, 호족 등이 동쪽으로 삼보 지방을 공격하면서 조정에서는 황보숭을 보내 이를 토벌하게 했는데, 황보숭이 오환에서 병사 3천명을 징발하려고 하자 추정이 선비에서 새로 모병한다고 주장한 것에 응소는 선비는 신의가 없다면서 이를 반대하고 응소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189년에 5개월간 영릉현령을 지내다가 태산태수에 임명되었고 191년에 황건적 30만이 태산군을 공격하자 이를 물리쳐 수천 명의 수급, 약 1만의 포로, 2천량의 치중을 얻는 등의 성과를 올렸으며, 조조의 명으로 조조의 집안사람들을 연주로 보내려고 했다가 응소가 이끄는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도겸의 군사가 그들을 붙잡아 죽이는 바람에 이를 두려워해 관직을 버리고 원소에게 달아났다.

196년에 한관의를 완성시켜 헌제에게 바치고 197년에 헌제로부터 원소의 군모교위에 임명되었으며, 응봉이 거둔 선인의 초상화를 묶어서 상인기라 했다. 조조가 업을 점령하기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숭을 비롯한 조조의 집안사람들을 이끌고 데려가다가 도겸의 부하인 장개가 이끄는 군사들과 함께 호송하다가 밤 중에 장개가 이끄는 군사들의 기습을 받자 죽기로써 싸워 몸을 빼어 원소에게 갔다.

삼국지를 품다에서는 조조가 동군으로 조숭을 모시겠다고 하자 응소가 서주의 지리에 밝다면서 자신을 보내달라고 자원했는데, 도겸이 응소를 도와서 조숭을 호송하려고 보낸 군사 중에 장개가 조숭을 죽이고 응소의 병사들을 공격했다. 그런데 응소의 병사 중에 달아난 자가 응소는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