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권

(의권에서 넘어옴)

大成拳.
왕향재(王向齋 1886~1963)가 창시한 근대 중국무술.


1 유래

'반보붕권 타편천하'로 유명한 곽운심에게 형의권을 배운 뒤 스스로 창시했다.

왕향재가 살던 마을에 곽운심이 살고 있었는데 몸이 약한 왕향재가 무술을 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 그의 아버지가 곽운심에게 무술을 배우게 한 것이 왕향재가 무술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그 때 곽운심은 이미 너무 나이가 많아서 강한 수련은 하지 않은지 오래 된 상태였고 왕향재에게도 참장 중심의 수련을 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왕향재의 당시 나이가 열살이 채 안되었기 때문에 고련을 할 수도 없었겠지만 엘리트 교육을 받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스승이 그 유명한 곽운심이고 왕향재가 이후 달성한 업적을 보면 당연히 마냥 맹한 수련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향재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배웠던 것이 중국무술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이 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왕향재 자신은 의권(意拳)이란 이름을 썼는데, 훗날 실전에서 위력을 증명하면서 무술계 동료들이 중국의 무술을 집대성한 권법이란 의미로 대성권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왕향재는 '권법의 길엔 끝이 없는데 어찌 대성이 있을까'하며 그다지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2대 왕선걸 노사가 이걸 덜컥 채용해서 대성권으로 불리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도 의권과 혼용해서 쓴다.

다만 왕선걸 계열이 대성권이란 이름을 많이 쓰고 있고 왕향재의 다른 제자들인 요종훈 계열에서는 의권이란 이름을 주로 쓰고 있다.

2 창시자

흔히 넷상에서 중국무술은 실전에 약하네 아니네 입고수들의 키배가 끊이지 않는데, 대성권은 중국무술 가운데 실전지향으로 이름이 높다. 애당초 의권이 실전에서 이름을 날릴 것도 왕향재가 '무술로 친구를 사귄다'는 신문광고를 낸 뒤 찾아온 도전자를 모두 물리쳐서 그랬으니(...) 원래 왕향재가 배운 형의권이 당대 중국에서 숱한 무용담과 달인을 배출한 권법인데다 스승 곽운심에게 '내 진전을 모두 이어받았다'는 평을 들을만큼 고된 수련을 했다.

이후로도 20년 세월동안 천하를 떠돌며 자칭타칭 고수라는 인물을 찾아다녔다. 소림사를 방문해 형의권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심의파(心意把)의 전인 향림선사와 기예를 연구하였고, 호남성에서 해철부(解鐵夫)에게 심의육합권을, 복건성에서 방합중(方洽中)에게 백학권(白鶴拳)[1]을 배웠다.

훗날 왕향재는 '내가 만리를 다니며 만나본 명가가 천명이 넘는데, 그중 대가라 할 사람은 두 사람 반(1/2) 뿐이다.'라 회고했다 카더라.

1940년대에는 북경실보나 신민보 등의 신문지상에 여러 문장을 발표하여 중국권술에 대한 관점과 견해 및 의권의 단련방법 등을 상세하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1947년 북경 태묘(오늘날 노동인민문화궁)에서 권학연구회 창립하고 의권을 전파했다. 이후 연구회를 중단하고 중산공원에서 의권 지도에 몰두했는데, 이때부터 특유의 건신과 양생은 참장공(站桩功)이라고 불렸다. 1950년 중화체육총회기획위원회에서 무술 팀의 팀장을 맡았고, 1951년에는 보정시하북성중의연구원에서 참장공을 지도했다. 이 시기에 중국권술에 대한 의료보건방면의 효용 문제에 관한 일련의 연구 작업을 했다. 오늘날 의권 참장공은 널리 보급되었다. 1963년 7월 천진에서 별세했였으며, 유저로는 의권정궤(意拳正轨) 권도중추(拳道中枢)가 있다.

이후 대성권의 계보는 요종훈.왕선걸.왕옥방(왕향재 노사의 딸) 등으로 이어지는데,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크게 본다면 요종훈의 의권 계열과 왕선걸의 대성권 계열이 양대 주류이다.

3 특징

중국무술치고 투로(품새)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투로를 버리고 공법과 단조수만 전하고 있다. 기본공으로 참장공을 수련하는 체계인데 오늘날 여러 문파에서 강조하는 참장공 수련은 의권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다만 참장공 자체를 의권에서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다른 문파에도 궁보나 후보, 마보 등의 자세로 오랜 시간 단련하는 단련법이 예로부터 있었다. 의권에서 말하는 참장공은 양생장과 기격장으로 나뉘며 다른 문파의 자세들과는 다르게 좀 높은 자세들, 그리고 감각훈련이 들어간다. 의권에서 중시하는 참장의 효능이 하나둘 입증되면서 다른 문파에서도 참장 수련을 적극 장려.도입했다는 쪽이 옳겠다.

왕향재는 논리는 심플하면서도 요즘 관점에서 봐도 이치에 닿는데, 요약하자면 '핵심이 되는 이론을 붙들고 죽어라고 한 우물만 파면 고수가 된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쓸데없는 기술 하나 더 배우겠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니까 야메가 되는 거야'는 것.

앞서 언급했지만 왕향재는 신문지상에 글을 여럿 발표했는데, 중국무술 전반에 대해 무자비하게 디스를 했다.

'초식? 요즘 그거 갖고 약을 파는 놈들이 너무 많아 탈이다.'
'내게 배운 사람들 가운데 남을 패고 다니는 놈이 있고 남에게 맞고 다니는 놈이 있다. 그 차이가 뭔줄 아나? 꼭 보면 기본을 무시하고 신비로운 것만 쫓아다니는 놈이 처맞고 다닌다.'
'내가권? 유래도 모르겠고[2] 논할 가치도 없다. 그런 말장난에 혹하지 말고 내가권의 정수를 좀 제대로 배워라.'

창시자가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니 본인과 후예들이 실전에 강할 수 밖에.

4 타문파와 교류

왕향재가 상해에서 머물던 시기에 ‘서청(西青)이라는 서양인들의 청년회가 있었고, 헝가리 출신의 영격(英格)이라는 사람이 권투 교련을 맡고 있었다. 영격은 프로복서로서 라이트급 챔피온을 획득했던 인물이다. 영격은 왕향재와 시합에서 스트레이트로 선제 공격을 하였으나, 왕향재가 손을 한번 튀겨내니 순식간에 바닥에 튕겨 나가 떨어졌다...는 글이 2000년대 중반 인터넷에서 잠깐 떡밥으로 떠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대성권 제자들이 집필한 기록이라 받아들이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 중국 웹에 해당 복싱 선수의 이름과 사진은 공개 되어있다. 해당 사이트가 확실한지 확인이 안 되어서 직접 링크하진 않으나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은 한 번 바이두 등을 검색해보면 확인이 가능한데, 이에 따르면 무명의 실력 없는 선수는 아니다. 다만 최고수준이 아닌 선수조차 당시 중국 고수들이 이기지 못했기에 왕향재가 나서야 했을 정도로 중국무술의 상태가 심각했다는 얘기는 될 듯 하며, 최영의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아시아 무술은 따로 대회가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홍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래의 기록들 역시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그 외에 일본 유도 창시자인 가노 지고로의 제자인 유도6단 하타 이치로(八田一朗)(1906.6.3~1983.4.15. 일본레슬링협회를 만들었고 일본 최초의 체육인출신 국회의원. 프로레슬링계에서도 영향력이 대단했고 알리와 이노키의 이종격투기 시합이 열리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일본에 삼보를 소개하고 도입한 인물)이 왕향재를 찾아와 비무를 신청하였고, 손목을 거머쥐려는 찰라 몸이 공중으로 떠 올라 벽에 부딪치며 땅바닥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유도 5단 검도 3단 사와이 켄이치(泽井建一)가 찾아와 겨루었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그는 시합에 패한 후 의권을 배웠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귀국하여 태기권(太氣拳)이란 이름으로 배운 바를 일본에 전파했다. 1970년대 사와이 켄이치는 서림출판사에서도 나온 적이 있는 자신의 저서 <태기권-중국실전권법>에서 그가 배움을 청하게 된 경위와 의권에 대한 평가 등을 서술하였다.

5 태기권

사와이 켄이치가 배워 일본에서는 태기권이라는 이름으로 보급되고 있는데, 사와이 켄이치는 극진 공수도의 최영의 총재와도 친분이 있어 두 유파는 교류가 꽤 있었다고 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두 유파의 수련생들이 같이 연습을 하고, 대련하는 영상도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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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참고로, 영상에는 극진을 배웠다면 이름만 대도 알만한 마쓰이 쇼케이, 미도리 겐지 등 유명인이 많은데 태기권쪽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도리어 안면타격에는 약점을 보이기도 할 정도. 극진 공수도의 분파 중 하나인 극진관의 총재 로야마 관장의 경우는 사와이 켄이치에게도 사사해서 참장공이나 발력법을 채택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로야마 관장의 수련 모습을 보면 일본의 태기권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의권 특히 요승영 계열의 의권에 더 가까운 모양새를 보인다.

[4]

이 영상에선 극진 쪽이 훨씬 잘한다. 안면타격 여부를 떠나서 그냥 극진 쪽이 더 잘한다.
  1. 우리나라에선 듣보잡이지만 중국 남파 권법 가운데 유명한 권법이다. 영춘권에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오키나와 가라데의 원류가 백학권이다. 아예 품새까지 똑같은 게 있다.
  2. 왕향재는 형의권의 전인일 뿐만 아니라, 정파 팔괘장이나 양가 태극권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발언이다.